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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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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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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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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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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DUMMY

내려다보면 산 아래가 모두 울창한 숲이었다. 빼곡히 자란 나무가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었다.


올라갈 때는 은신처를 찾느라, 도적 떼를 쫓느라 목표만 보았지만, 지나쳤던 경치가 눈과 머리를 씻어주었다.


왼쪽으로는 바다가 출렁이고, 오른쪽에는 푸른 숲이 잠잠히 그들을 맞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칠었지만, 바람에 걸음을 맡길 수 있어 내려가는 길이 가벼웠다.


모퉁이에 이르자 해무찬은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위쪽은 평상을 가져다 놓은 듯 반질거렸다.


“도적들의 장부를 봤어. 들어오고 나간 기록은 있는데, 물건이 나가는 걸 본 사람이 없어.”

“이쪽에는 장부는 없었지만, 역시 모르더라고. 망석이나 사음귀가 안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순치 역시 바위 위에 앉았다.


“두목이 백사귀파였으니, 그것도 요귀의 짓일까?”

다루영은 소곤거리면서도 아도대사가 한 말을 되새겼다.


‘사람이 요귀를 만들고 요귀가 사람을 바꾼다.’

요귀는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것이고, 사람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 힘을 이용할 것이다.

무릎에 얹어놓은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요귀가 문제네. 정귀는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거지?”

사로잔이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삼신성은 요귀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나? 이렇게 위험한 존재를 왜 없애지 않았을까?”

“바쁜가 보지.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거나.”

아순치가 유리구슬 목걸이를 매만지자 사로잔도 자연스레 회강석 목걸이로 손이 갔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누리예 대장과 늘참 부대장이 그렇게 서둘러 간 것도 이상해.”

해무찬은 누리예가 전해달라고 했던 말을 웅얼거렸다. 도적 떼의 장부만큼이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중요한 일일 겁니다.”

이곤이 검푸르게 출렁이는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솔개 한 마리가 산기슭에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곤이 휘이익 휘파람을 불자 솔개는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가 팔을 치켜들자 솔개는 천천히 팔뚝으로 내려앉더니 날개를 접었다.


이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솔개의 다리에 매달린 연통에서 종이를 꺼냈다.

“현무 간미후를 찾았답니다.”

“뭐라고?”


이곤은 품에서 작은 붓을 꺼냈다. 종이 뒷장에 뭐라고 써넣더니 연통에 넣고는 솔개를 날려 보냈다.

솔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야 돌아섰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네요. 그 시가 그런 뜻이었군요.”

“무슨 뜻? 빨리 말해 봐. 애태우지 말고.”

해무찬이 손을 흔들었다.


“노란새는 간미후입니다. 날개를 잃었다는 건 중상이나 사망이죠. 쉴 곳은 의원 또는 장례식이 되겠죠. 해가 자기 전이라는 말은 되도록 빨리하라는 뜻입니다.”


“그게 그런 뜻이었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광검국에서 가락국의 일까지?”

해무찬은 이곤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해오름이나 믈아치나 비슷하거든요.”

“설마 지금 쓴 글도 다른 사람은 모르는 싯구인가?”

“그렇죠.”


이곤의 미소를 보면서 사로잔은 비르삼 알찬을 생각했다.

용각국을 떠나기 전 알찬과 대화를 나눈 이채당이 떠올랐다.


‘으흠. 비르삼이 말씀하던 것이군. 가장 부러워한 건 익족이지만, 당신이 만들려고 했던 건 믈아치나 해오름 같은 부대였어. 말모이 부대보다 활동 범위가 넓고 다른 나라와도 협공이 가능한···.’

사로잔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래서 돌아오라는 말이 없었구나. 이상했어. 어머니가 아무리 잘 설득했다 해도 찬에게까지 귀환 명령이 안 내려오다니···. 뭐야? 지금 비르삼의 계획을 사전답사하는 거야? 쳇.’


뒷골이 당기며 지끈거렸다. 어쩐지 속은 것 같았다.

여행은 처음부터 자신이 계획하고 준비한 것인데, 다른 손이 이렇게나 많이 끼어있다니. 나침반을 움직이는 거대한 손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도 숨은 속셈이 있었다니.


긴 침묵 끝에 이곤이 입을 열었다.

“간미후는 어릴 때부터 삼신성, 특히 영진성에 대한 믿음이 뛰어났어요. 대현부 다한보다 사려 깊었다고 해요. 대현부와 가락국을 위해 영진성의 선도를 닦겠다고 떠났죠. 그 후로 수도원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그 수도원이 어딘지 아세요?”


“뭘 물어봐? 당연히 모르지.”

아순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광검국 가믄고원 근처의 서린원입니다.”

“뭐? 백사귀파가 나왔던 거기?”

아순치가 비스듬히 앉았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가믄고원의 서린원이라면 거대상단에서 물건을 대는 곳이다.


“순단대륙에서 백사귀파들이 무리 지어 나타난 건 그때뿐입니다. 백사귀파에 대해 조사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이죠.

그 당시 아미라는 수도사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행방불명된 겁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 혼자 움직였을 리 없어요. 하지만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었어요.”


“그게 가믄고원에 백사귀파가 나타난 그때라고?”

“사건을 조사할 때만 해도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녀가 간미후였다는군요.”


“아니, 그럼 아미, 아니지. 간미후는 어디로 갔어?”

해무찬의 목소리가 커졌다. 바로 옆에 앉은 아순치는 눈을 찡그리며 귀를 문질렀다.


“서린원에서는 무결의 고리에 들었을 거라고 했어요. 열심히 선도를 닦은 분이니 은혜를 입었다고. 그런데, 묘하게 시점이 일치하네요.”

“가락국에는 간미후를 따르는 세력이 있다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름을 빌린 것 같아요. 알아봐야죠.”


이곤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사로잔은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느낌이었다.


순단대륙에서 백사귀파가 나타난 그때, 자신과 뱔의대원들이 거기 있었다.

거대상단의 상인들을 도와주고, 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그 백사귀들이 이런 일을 꾸몄다고?


거기서 그녀는 두 번째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백사귀를 상대하던 그때 이미 다른 사건이 맞물리고 있었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어진 거대한 그물이 덮쳐오는 것 같았다. 왠지 속이 거북했다.


허리띠에 매단 주머니가 부르르 떨렸다.

‘나침반?’

사로잔이 서둘러 나침반을 꺼냈다.

웅웅 소리를 내며 바늘은 서쪽을 가리켰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침반으로 몰렸다.


“바늘이 움직였어?”

해무찬이 반갑게 소리쳤다. 나아갈 방향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서쪽? 여기서 산곡은 동쪽인데?”

“운화도가 가락국에서도 서쪽 끝이니 여기서 더 서쪽이라면···. 바다를 건너라는 뜻이야.”

아순치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가며 서쪽을 가리켰다.


“가락국에서 서늬 언니를 찾으려 했는데···.”

“나침반이 너무 잠잠하기에 어쩐지 예감이 그랬어.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 소망과는 반대로 움직이잖아. 사로, 다음에 기회가 오겠지.”

아순치가 사로잔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루영도 사로잔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고 했어.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잖아? 우리가 이곤을 다시 만난 것처럼 말이야.”

다루영이 팔을 토닥이자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침반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는 이곤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보통 나침반이 아니군요?”


“이걸 따라 여행하고 있어. 하늘의 물건이지. 가만. 운화도는 아직 뱃길이 열리지 않았잖아? 최대한 빨리 바다를 건너려면 어디로 가야지?”

아순치가 이곤을 바라보았다.


“루월상단의 배가 남가도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운화도와 과희국 사이에 있는 섬이지요.”

“해오름이 남가도까지 태워줄 수 있겠지?”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믈아치들이 후속 처리 때문에 늦게 출발할 테니, 남가도에 들렀다 가도 늦지 않습니다.”


나침반이 움직이니 악사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순치가 이곤의 소매를 잡았다.

“이상한데? 광검국 사람이 루월상단 배편까지 어떻게 알아?”

“가끔 왕래하거든요.”

“거대상단은 어쩌고? 순단대륙 사람이면 거대상단을 애용하셔야지.”

“거긴 거기대로요···. 물건이 다르니까요. 소식도 다르고.”

이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순치는 맑은소리로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여기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주련국이야. 루월상단이 주름 잡는 곳이지.”


아순치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유우대륙 루월상단이라면 그도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고 싶은 상대였다. 그의 눈동자에 반짝 빛이 스며들었다.


*


내리막길에 서자 사로잔은 다루영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나귀가 걱정되어 천천히 걸을 수 없었다.

“우리는 먼저 내려갈게. 빨리 어리를 봐야겠어.”


해무찬과 아순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로잔은 모얀을 꺼내 들었다.

“바람!”


손목으로 가볍게 검을 돌리자 허공에서 바람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은 가파른 벼랑 아래로 떨어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

이곤이 깜짝 놀라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까마득한 절벽 아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런 능력이 있는데 왜···.”

“도적과 싸우려면 도적에게 맞춰야지. 눈높이랄까?”


아순치는 선선한 날씨에도 부채를 꺼내 들었다. 해무찬은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갔다. 두 사람 모두 계로와 주공의 도움으로 산들바람을 타고 걸었다.


이곤은 순식간에 멀어진 그들을 따라가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오랜 수련으로 산행에 자신 있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해무찬과 아순치가 껄껄 웃으며 양쪽에서 이곤의 팔을 잡았다.

다음 순간 그들이 바람인 듯 가볍게 길을 따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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