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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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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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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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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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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중독

DUMMY

두 사람이 탄 나룻배가 삐그덕거리며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깊은 밤에도 암초를 볼 수 있는 다루영이 앞에 앉고 해무찬이 뒤에 앉아 노를 저었다.

그녀가 있으면 어둠도 문제 없었다. 용족의 눈, 용의 비늘, 모든 것이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오른쪽으로 한 폭.”

“알았어.”

“이대로 똑바로 가야 해.”

“똑바로.”

해무찬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대답했다.

밤과 하나 되어 윤곽만 알아볼 정도였지만 둘이 함께 있으니 노 젓는 일도 즐거웠다.


“어둠 속에서도 물길을 보다니. 다루가 있어서 다행이다. 길 잃을 걱정도 없고. 바다 한가운데서 미아가 되면 큰일이니까.”

“찬, 걱정하지 마. 물고기도 많고, 한 달은 끄떡없어. 별식만 찾지 않으면.”

“하하, 맞다. 나도 돌아가면 낚시를 배워야겠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어둠을 간간이 흔들었다.


암초를 지나 안전한 뱃길로 접어들자 다루영은 앞을 주시하며 허리띠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그사이에 들어있는 표창을 어루만졌다. 작은 보름떡 모양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은 성물들.


‘분명 전령석인데···.’

전령석인 것을 알면서도 쓰지 못하다니, 다루영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이곤이 누리예 대장에게 소식을 전한다고 했을 때 전령석 나망을 떠올렸다. 월영국 마른협곡에서 훌륭하게 전령의 역할을 해낸 돌이었다.


그러나 한울이 있을 때와는 달리 그녀가 부르면 표창으로 변해 손에 잡혔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전령석만 있으면 밤을 틈타 배를 타지도 않을 것이고, 반나절도 안 되어 이곤의 전언이 늘참 부대장에게 닿았을 것이다.

‘천인만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져야만 되는 걸까?’


다루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나지막하게 나망을 불렀다.

작고 동그란 돌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잠잠히 머물렀다. 그녀는 엄지로 나망을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안개가 밀려왔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눈앞의 뱃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잔잔하게 흔들렸다.


다루영은 눈을 감고 바닷물이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적들이 왜 이곳을 은둔지로 삼았는지 알겠어. 안개 때문에 길을 아는 사람만 다닐 수 있나 봐.”


해무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끼기긱 노가 지지대에 긁히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배는 하염없이 흔들릴 뿐 나아가지 않았다.


“찬?”

큰 소리로 불러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작은 나룻배라 다리를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안개가 짙어 검은 덩어리로만 보였다.


“해무찬?”

뒤편으로 돌아앉으니 비릿한 기운이 살결을 스쳤다.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야릇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설마 몽혼향?’

안개에 온통 몽혼향이 가득했다.


용족은 독에 대한 면역이 있으므로 아무리 강한 몽혼향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몸이 알아서 방어하니 어떤 독이 스며있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해무찬은 달랐다.


그녀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나룻배가 심하게 출렁였다. 조심스레 중심을 잡아가며 다가갔다.

해무찬은 앉은 채 앞으로 고꾸라져있었다.


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셨다면 이미 온몸에 퍼졌을 것이다. 다루영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해무찬의 주먹에서 노를 잡아뺐다.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몰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를 따라 뭍으로 배를 몰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무심한 물결 위로 거칠게 퍼져나갔다.


*


약초를 찾아 헤매는 다루영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날카로운 바위에 쓸리고 나뭇가지에 찔려 치맛자락은 찢어졌고, 팔과 종아리의 상처에서 피가 송글송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상처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몽혼향을 중화해줄 천능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약초 주머니를 가져오는 건데···.’


다행히 작은 침통을 소매에 넣어 다니기에 독이 퍼지지 않도록 혈을 막았지만, 바닷가에서 멀어질수록 심장이 죄어왔다.


해무찬을 뉘어놓은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거기 그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안개가 바다에만 머물고 뭍까지 올라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위틈에 배를 대고 해무찬의 거구를 내리는 데에도 진이 다 빠졌다. 용으로 변해 해무찬을 옮길 생각도 했지만, 그러면 반나절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물과 약초부터 찾아야 했다. 다루영은 죽은 듯 누워있는 해무찬을 돌아보았다.

‘찬, 꼭 깨어나야 해.’


바위투성이 해변이기는 하지만 샘물과 약초를 금방 찾으리라 믿었다. 어두워도 용족의 눈에는 보일 테니까.


그러나 운화도에는 알지 못하는 풀이 더 많았고, 그녀가 찾는 풀은 자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더 세게 쿵쾅거렸다.


하얗다 못해 파리해진 얼굴은 흙과 진이 묻어 거뭇해졌다.

손등과 손바닥까지 생채기로 덮일 즈음 그녀는 숨을 헉헉거리며 주저앉았다.


김이 서린 것처럼 눈동자가 희미해졌다.

까무룩 정신이 아득해졌다. 닫힌 눈꺼풀 안쪽으로 희미한 형상이 어른거렸다.


해무찬이 웃으며 들꽃다발을 내밀었다. 나슬항에 도착하기 전 청혼할 때의 모습이었다.


다루영은 눈을 뜰 수 없었다. 너무 지쳐서 손가락 끝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신이 몽롱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며 해무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슨 말인지 웅웅 울리며 알아듣지 못했다.


‘난 용각섬을 되찾아야 해. 수호용으로서 할 일을 마친 다음에 생각할게.’

그렇게 대답한 건 진심이 아니었어. 아주 많이 기뻤어.


그냥 이대로 계속 여행하면 좋겠어.

찬이 있고, 사로와 아치가 있으니 즐거워. 힘든 일도 많고 다투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함께라면 좋겠어.


요귀도, 용각섬도 모르던 때로 돌아가 친구들과 지내고 싶어. 그런 소망을 가지면 안 된다고 결심해도 잘 안 돼.


‘찬, 네가 없으면 용각섬도, 나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잃고 싶지 않아. 살려야 해. 살려야 한다고.


살포시 끄덕이던 고개가 세게 꺾이는 바람에 번쩍 눈을 떴다.

허리띠에 매달린 치유의 돌이 따뜻한 온기를 내며 다루영의 몸을 데워주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돌멩이 네 개가 허리띠에서 빠져나왔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방패가 되어주는 미노와 리안이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전령석 나망과 경고석 아론이 떠올라 네 개의 동그란 돌덩이가 마름모를 그렸다.


‘이번에는 왜 아론이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

아론은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흰색으로 빛이 바뀌었다.

‘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서?’


네 개의 돌이 만든 마름모 안에 희미한 형상이 나타났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너른벌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은 초록빛과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돌멩이 네 개가 까딱거렸다. 다루영은 그 신호를 알아들었다.

‘암흑성단의 천사들이라고?’

천사들은 치유의 돌로 쌓은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잔에는 작은 돌멩이를 넣었다.


‘독이 씻겨진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을 살릴 수 있어!


다루영이 손을 펼치자 치유의 돌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물, 물을 찾아야 해.’


전령석 나망이 앞장섰다.

바위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약수가 보였다. 용족의 눈으로도 찾을 수 없는 작은 샘물이었다. 아이가 두 손을 모은 것처럼 움푹 팬 바위 위에 맑은 물이 고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을 떠 갈 그릇이 필요했다. 미노와 리안이 주변을 돌다가 한곳에 멈추었다.

둥근 열매껍질이 반으로 갈라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산짐승이 속살을 파먹고 간 것이다. 적당한 껍질을 골라 그릇으로 삼았다.


치유의 돌이 담긴 그릇을 받쳐 든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다. 생기가 돌았고 발걸음에도 힘이 돋았다.


*


햇빛이 떠오르는지 하늘이 밝아졌다.

해무찬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루영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푸른빛이 새벽을 맞는 바다와 똑같았다.


그들이 누워있는 자갈밭은 좁고 거칠었다. 길도 없는 바위틈 사이 간신히 누울 만큼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참을만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루영의 푸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끄응 신음을 내며 다루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끌어안은 탓에 해무찬은 켁켁 기침을 쏟아냈다.


“찬, 살아났구나. 얼마나 걱정했다고.”

다루영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해무찬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웃음 지었다.

“널 두고 어딜 가겠어? 그런데 나 어떻게 된 거야?”


“안개에 독이 스며있었어. 식인어를 만든 요귀의 짓이 분명해.”

“요귀라···. 수없이 밑밥을 깔아놨구나. 정작 요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말이야.”


다루영이 새로 떠 놓은 물을 내밀었다. 열매껍질 그릇에는 리안이 들어있었다.

“이것부터 마셔. 남은 독까지 중화시켜 줄 거야.”


해무찬의 눈에 다루영의 팔과 다리에 새겨진 상처가 들어왔다. 치마는 찢어지고 흙과 풀물에 더러워졌다. 종아리에는 피딱지가 엉겨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다루영은 어떻게 설명할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치마를 끌어내려 종아리를 덮었다.


“나 때문이구나.”

해무찬은 그릇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랜 수련으로 뚝살이 배기고 거친 손이지만, 다루영은 그런 손이 좋았다.


가슴과 가슴이 닿자 서로의 체온이 심장까지 전달되며 온몸이 따뜻해졌다.


*


어제와 달리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새벽을 여는 햇빛이 깨끗하고 서늘했다. 나룻배는 묶어놓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해무찬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빨리 가농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두 사람 모두 마음이 조급했다.


다루영이 나룻배를 잡았다.

“출발할까?”


“잠깐만.”

해무찬이 다루영을 돌려세웠다.


“난 포기하지 않아. 기다릴 거야. 네가 결심할 때까지.”

해무찬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날 돌본 것처럼 나도 널 돌봐줄게. 용각섬을 되찾아 사마와 반나가 되자. 우리가 함께 지키는 거야.”

다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무찬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다찬호도 곧 가농에 도착할 거야.”


다루영은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볼이 뜨거워지면서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가슴이 뛰면 안 되는데.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룻배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 듯 바닷물도 경쾌하게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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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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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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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4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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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1 1 10쪽
»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3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3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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