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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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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2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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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3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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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공량원

DUMMY

공량원의 일꾼들은 쓰러진 여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인 듯 베롱관으로 온설지를 안내했다.


아랑누는 세 채의 건물 중에서 유난히 다른 기운을 내뿜는 베롱관에서 영안을 떼지 못했다.


쓰러진 여자에게서 두려움과 후회를 읽었다면 베롱관 전체에 쌓인 기운은 회한과 비탄 외에도 어떤 신호가 들어있었다. 도와달라는 신호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그네들이 환자를 데려왔다니 바론이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바론의 눈에는 정원 가운데 서 있는 깡마른 소년이 먼저 들어왔다.

지치고 오그라들어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몸에 밴 감각이 소년에게서서 위험신호를 읽었다.


이연을 보자마자 바론은 큰소리로 재바우를 불렀다.

“재바우! 빨리 치료실 하나 마련해요.”

“예? 아, 다솜관 이 층에 빈방이 있는데요. 원장님, 누가 옵니까?”

“이 아이, 당장 데려다 눕혀요!”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이연이 손사래를 쳤다.

“어,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바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소년의 이마를 왼손으로 짚었다. 이연은 풀잎처럼 쓰러지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재바우가 이연을 안고 들어가자 그는 아랑누에게 다가갔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마당 가운데 서서 바론은 다짜고짜 호통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겁니까? 탈진 직전입니다. 그것도 몰랐습니까?”


바론은 안타까움과 분노로 씩씩거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겁니다. 아무리 아이라고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니엘이 바론의 고함을 듣고 달려 나왔다.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웬일이지.


바론과 달리 니엘은 눈가리개를 하고 흰 지팡이를 잡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습은 너나족 사람인데, 그녀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지 신비롭고 강하면서도 아련한 기운이었다.


아랑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 이렇게 야단맞는 건 처음이었다. 낯선 상황에서 그녀의 영안은 더욱 또렷해졌다.


“제 잘못이에요. 숨은 넋에 가려 보지 못했으니 명백한 잘못이지요.”

아랑누는 이연이 들어간 다솜관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길잡이 구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인숙에 머무는 것보다는 여기서 치료받는 것이 낫겠구나. 그동안 연이가 고생 많았어.’


그녀의 시선이 다솜관에서 베롱관으로 옮겨갔다가 바론과 니엘에게로 돌아왔다.

‘한쪽 팔이 없는 의원과 인어족이라···. 정령의 안개와 맞닿은 경계에 세워진 의원. 여기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앞에 선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기운은 서로 잘 어울려 각자 떨어져 있을 때보다 훨씬 찬란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다정하고 애틋한 마음이 좋은 기운을 만들어냈다.


“연이가 며칠 쉬어야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 잘 아시는 것 같으니···.”

바론은 그제야 앞에 선 여인이 눈가리개를 한 것을 알아보았다. 작고 가냘픈 몸으로 흰 지팡이에 의지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호통친 것이 민망해졌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돌아서는 바론을 아랑누가 붙잡았다. 지팡이로 바위벽 위 약초밭을 가리켰다.

“저 약초밭이 원장님 것인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비조족이니 가능하군요. 역시···.”


바론이 한 걸음 물러섰다.

비조족을 한눈에 알아보는 너나족 사람은 처음이었다. 날개 없이 움직이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사람은 장님 아닌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는데, 이건 뭐지?’


비조족의 투시력으로 봐도 그녀의 눈동자는 잿빛 구슬이나 다름없었다. 안 보이는 것이 맞는데···.


니엘도 말없이 바론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의원으로서 그녀의 눈을 보고 싶다는 소망에 휩싸였다.


눈가리개를 하고도 앞을 본다면 어떤 비법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망을 갖고 눈가리개를 바라보니 아랑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영안으로 봐요. 색은 못 보지만 기운을 읽어요. 형체도 느낄 수 있고요.”

“아, 예. 그, 그렇군요.”

바론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들킨 것이 민망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새로운 치료 방법이 있나 싶었는데···.’


온설지가 베롱관에서 나와 그들에게 다가왔다.

“꼬맹이는?”


바론이 이연의 상태를 설명하자 온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른해 하면서 힘을 못 쓴 지 며칠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해. 아누, 너도 같은 방 빌리지 그래?”

“여긴 의원이지, 여관이 아니잖아. 그럴 수는 없지.”

“왜? 나한테 맡겨.”


온설지가 어깨를 떡 벌리고 서서 바론과 니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크고 하얀 사람을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스락성의 어떤 병사보다 컸고 힘은 몇 배나 세 보였다.


“우리도 꼬마랑 같은 방 좀 씁시다. 저기 베롱관에 들어가 보니까 비가 새던데, 꼬마가 나을 때까지 고쳐보겠소. 방값에, 치료비로 퉁칩시다.”

“예?”

바론과 니엘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너무나 당당한 자세였다. 이미 결정 난 일을 알려주듯이 자신감이 가득했다.

바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귀도 많이 지쳤으니 마구간 한편도 빌립시다. 괜찮죠?”

목덜미를 긁적이는 온설지를 바라보며 바론은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니엘의 시선은 어느새 아랑누의 눈가리개로 옮겨갔다. 그녀의 흰 지팡이에서 나오는 기운은 눈가리개보다 더 신비로웠다.


*


서쪽 하늘이 어둑해지자 온설지가 뛰어나갔다. 아랑누는 호설을 떠올리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아직 남아있을지도···.’


어떻게 될지는 내일 새벽 해 뜰 무렵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연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도조도 이연의 발치에 웅크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랑누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섰다. 바다가 어둠에 젖어 들며 조용히 꿈틀거렸다. 바다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니엘이 다솜관 앞 마당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로 니엘을 부르자 그녀는 들리지 않는 소리도 알아듣고 이 층 치료실을 올려다보았다.


아랑누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누르듯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 서 있는 니엘에게는 창가에서 돌아서는 아랑누의 상반신이 잘 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랑누가 손을 뻗자 흰 지팡이가 날아와 손에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어디 가시나요?”

어느새 아랑누가 앞에 와서 섰다.


“밤이 깊었으니 해설피탑으로 돌아가요. 인어족의 쉼터지요.”

니엘이 해설피탑에 대해 설명하는데 도조가 뛰어내리듯 창문에서 아랑누의 어깨 위로 내려와 앉았다.

“아랑누님, 배고파요. 뱃속에서 천둥이 쳐요. 꾸르륵.”


니엘이 까마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하는 까마귀였어요?”

“이 아이는 도조예요. 인어족에게는 들리나 보네요.”


“그럼, 잠시 점검하고 오겠습니다요.”

도조는 니엘의 감탄에는 아랑곳없이 낮에 봐둔 주방으로 날아갔다.


“연이는 언제쯤 깨어날까요?”

“내일이나 모레쯤요? 정도에 따라 다른데, 깨어나도 조금 더 쉬어야 해요.”

니엘이 이 층 이연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아랑누가 지팡이를 부르던 그 창가였다.


“바론이 화낸 건 대신 사과할게요. 착하고 조용한 사람인데, 병자를 돌볼 때는 엄격해져요. 병을 고치는 일에는 타협을 모르죠.”

“의원으로 바람직한 자세지요. 제가 잘못한 것도 맞고요.”


아랑누는 베롱관으로 몸을 돌렸다.

“혹시 베롱관에 있는 병자들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보통 때는 괜찮은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요. 위험할 거예요.”


“그런가요? 저기 가득 찬 기운은 후회와 한탄, 두려움 말고도 도와달라는 신호가 있어요.”

“도와달라고요?”

“누가 그런 신호를 보냈고, 사람들이 왜 두려워하는지 살펴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좋아요. 내일 저와 함께 보시죠.”

“그런데, 이 공량원은 녹디사원과 관련 있나요?”


그때, 바론이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니엘, 배웅해줄게. 기다려.”


그는 아랑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니엘이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아랑누님, 그 질문에는 바론이 답해줄 거예요.”

“무슨 일인데?”


“이름이 공량원이기에 녹디사원과 관계있나 하고요.”

“녹디사원을 아세요?”

바론이 반가워하며 눈을 빛냈다.


“잘은 몰라요. 제 스승인 세운랑 원로께서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어요. 공량사상으로 유명한 아도대사님에 대해 배웠거든요.”

“세상 참 좁군요. 예. 녹디사원에서 아도대사님께 배웠습니다. 평생을 바쳐도 다 갚지 못할 만큼 은혜를 입었죠. 스승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공량원이라고 지었답니다.”


“비조족은 투시력이 있으니 병을 잘 읽으시겠군요.”

“뭘요. 용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론은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까마귀 도조가 꺼억 트림을 하며 날아왔다.

도조는 아랑누의 어깨에 앉아 바론과 니엘을 바라보았다. 배가 부르니 이제야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론이 모여사원에서 함께 수련한 용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배 중에 용족이 있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용족은 독지린을 타고났으니 독과 약에 대해서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지금쯤 녹디사원에서 제자를 받고 있겠군요.”


“에? 녹디사원? 용각국에 있는 그거?”

도조가 날개를 펼치며 펄쩍 뛰어올랐다. 툴툴 불만 섞인 소리를 냈다.


바론은 눈을 껌뻑거리며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까마귀?


“비조족에게도 들리는군요. 이 아이는 도조랍니다.”

아랑누가 흥분한 도조를 어깨에 앉혔다.


도조는 여전히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푸르르 소리를 냈다.

“거긴 완전 폐허야. 아무도 없어. 쳇! 유명하다고 해서 기껏 약을 얻으러 갔는데 사람도 없고, 건물도 무너지고. 허탕 치고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도조는 킁킁 콧소리를 내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그럴 리가. 그럼 스승님은?”

“그건 모른다. 어, 그러고 보니 새로 만든 무덤이 있었는데···. 묘비에 이도인지 아도인지···. 나무판자에다 먹으로 쓴 거라 특이해서 이 몸이 기억하고 있지.”


바론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며 몸이 굳었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다니···.”


“몰라, 몰라. 어쨌든 아무도 없어.”

도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론은 한동안 넋을 놓고 허공만 바라보다가 간신히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실례했군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스승님이 언제까지나 거기 계시길 바라는 건 욕심이지요. 세상에 왔으면 가야하고, 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으니까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눈시울은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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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아랑누_모함 22.07.24 37 0 11쪽
153 아랑누_적응 기간 22.07.24 31 0 15쪽
» 아랑누_공량원 22.07.23 38 0 12쪽
151 아랑누_재회의 약속 22.07.23 32 0 11쪽
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5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7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4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4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3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3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3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4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7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5 1 12쪽
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8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7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7 1 10쪽
133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5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1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1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7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3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3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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