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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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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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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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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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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빛의 환상

DUMMY

눈을 깜빡일 틈도 없이 진유의 검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태까지 만난 어떤 무사와도 차원이 달랐다. 상대를 마비시키면서 날아든 빛의 검은 그 기운만으로도 상대의 목을 벨 수 있었다.


휼과 모얀이 스스로 움직여 검을 막지 않았다면 벌써 목이 잘렸을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만한 힘과 기운이 아니었다.

‘너무 빨라. 순간이동인가.’


곧바로 이어진 공격은 파장이 너무 컸다. 사로잔은 나뭇잎처럼 퉁겨졌다. 정신이 아찔했다.

‘사람이 아니었어. 요귀인가?’


땅바닥에 뒹굴면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진유가 천천히 다가왔다.

“당신에게는 원한이 없습니다. 저의 주군이 완전한 신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니 이만 내려놓으시지요.”


“난 당신 주인이 누군지 몰라. 들어본 적도 없어!”

주저앉은 사로잔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모를 수밖에요. 당신은 아랑누 만큼의 영력도 없으니까요. 어쨌든 상관없습니다.”

‘아랑누? 아랑누는 또 누구야?’


진유의 공격은 사로잔의 몸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검을 잡으려 했으나 경련이 일며 손이 그대로 굳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도 주술인가!’


진유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검을 높이 들었다.

‘나의 주군을 위해.’


그의 눈앞에 아유라의 모습이 그려졌다. 눈부신 날개, 타는 듯한 머릿결, 시원하고 맑은 눈동자.

검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칫거렸다.


‘왜, 왜 아유라님이···. 내가 섬기는 주군은 진백성, 율명님인데!’

진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떨리는 손으로 사로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강!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로잔은 까무룩 의식이 가라앉는 중에도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라보았다.

“나, 나루뫼?”


나루뫼는 힘겹게 진유의 검을 걷어냈다.

“감시할 대상이 죽어버리면 곤란하거든요.”


“날 배신하다니. 반인반천이 날 당해낼 거라 생각하나.”

“불가능한 건 알지만 말이죠. 이렇게나 저렇게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서요.”


진유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나루뫼의 검은 두 동강으로 잘려 나갔다. 손잡이만 남기고 부서진 검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진유의 검 끝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검을 돌리자 회오리가 일어났다. 나루뫼는 회오리에 튕겨 건너편 암벽으로 던져졌다.


부딪치기 직전 간신히 몸을 틀어 바닥에 내려앉았지만, 버틸 힘이 남지 않았다.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천계의 호위무사가 사람이나 상대하다니.”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나루뫼의 눈동자에서도 점점 빛이 사라져갔다.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어리석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덤비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구나. 기다려라. 잠시 후 내 보답을 받을 테니.”


진유는 사로잔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여전히 주술에 묶인 상태였다.


휼과 모얀이 방패가 되어 주인을 지켰다. 목에 걸린 회강석도 붉게 빛났지만, 천계 무사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용감하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거야. 전사답게.’

사로잔이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진유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소멸하셨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으셨을 텐데. 사람의 몸으로 살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 제가 도와드리지요.”

진유가 사로잔의 심장을 향해 검을 겨누자 검 끝에서 빛이 뿜어졌다.


‘이것이 내 마지막인가.’

숨을 삼키는데 눈앞에서 빛이 폭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리고 따가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꺼풀을 닫고 있어도 세상이 환히 빛났다.


손과 발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힘줄 마디마디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후들후들 떨렸다.

‘벌써 죽은 건가.’


간신히 실눈을 떠보니 빛의 덩어리가 허공에 머물렀다.


빛줄기가 몸에 닿자 그녀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그 안에 스며있던 다른 의식이 눈을 떴다. 미약하게 숨어있던 영의 기운이었다.


‘뭐야, 이건? 내 몸이 보이다니 죽은 게 맞구나.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로잔의 몸에서 회강석 목걸이가 붉게 빛났다. 그녀의 상처가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나루뫼는? 나루뫼는 어디 있지?’


그는 건너편 암벽까지 밀려나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루뫼는 부러진 검의 손잡이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진유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진유는 빛 덩어리 앞에서 검을 치켜든 채 굳어있었다. 그는 애끓는 소리로 진백성을 불렀다.

“율명님! 기회입니다. 미사랑님의 부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진유, 너도 거짓 예언을 믿었나.”

빛 덩어리가 울리며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누가 있는 것 같지만 너무 밝아 빛 외에는 볼 수 없었다.


진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매달렸다.

“율명님은 완전한 신의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순수한 선, 완전한 세계를 이룰 자격과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부디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애원하듯 소리치는 진유를 바라보자 율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슴이 따가웠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내 어리석음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거짓에 속은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다.”


“율명님의 손을 더럽힐 순 없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유가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진백성의 결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로 인해 네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그것도 나의 잘못이다. 진유, 잠시 사로잔 곁에 머물다 오너라. 이 아이 곁에 있으면 너도 진실을 보게 될 거다.”

“율명님···.”

울음을 터뜨릴 듯한 소리로 외쳤으나 진유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하얗고 둥근 보석에 진유의 영혼과 육체가 봉인되었다. 하얀 보석은 순식간에 단검 휼의 손잡이 끝에 박혔다.


사로잔은 진유를 지켜보았으나 그저 보고 듣는 것만이 전부였다. 쓰러진 자신의 몸에 붙어서 진짜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빛의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사로잔인가? 미사랑의 기운이 미약하구나. 그래서 표적이 되었겠지.”


율명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영력도 없고, 이토록 나약한 사람이라니. 미사,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내려고. 아니, 결국 내 잘못인가. 널 이렇게 만든 건···.’


그의 손이 사로잔의 이마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넌 이렇지 않았는데. 그토록 어리석은 소망을 품었다니.’


율명의 시선이 회강석 목걸이에 머물렀다. 다정한 미소가 스쳐 갔다.

‘겨루, 약속을 지켰구나. 미사랑의 혼 조각을 지키고 있었어. 영력이 없는 걸 알고 이 아이를 선택했구나.’


그는 손목에 찬 회강석 팔찌로 그녀의 회강석에 힘을 실었다. 내상이 치료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진백성이라면서, 나를 알아?’

사로잔의 의식이 빛 덩어리를 바라볼 때였다. 의식의 내면에서 다정한 울림이 느껴졌다.


‘율, 이제 알아냈구나. 고마워. 우린 곧 아름누리에서 만날 거야.’


사로잔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구역질을 느꼈다. 잘못 삼킨 열매가 목에 걸려 콱 막힌 기분이었다.


‘누가 말하는 거야? 이건 내가 아닌데?’

그녀는 깨어나려고 진저리쳤다.


율명은 일어나 나루뫼를 향해 돌아섰다. 그가 손을 뻗자 나루뫼의 몸이 둥둥 떠올랐다. 율명 앞에 섰을 때는 상처가 말끔히 나은 뒤였다.


사로잔에게는 빛 덩어리로만 보이지만, 나루뫼에게는 진백성 율명의 모습으로 보였다.


나루뫼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진백성님!”

“새로운 검을 내려주마.”


율명이 손바닥을 뒤집자 새로운 빛의 검이 나타났다. 진백성단의 천군이 사용하는 검이었다.

인간세의 검보다 가볍고 단단하면서 날렵한 선을 가졌다. 주인의 기운과 어울려 강력한 힘을 뿜어내는 성물이었다.


나루뫼는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았다. 그의 눈은 환희로 가득 찼다.

“고맙습니다. 진백성님을 직접 뵈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죽는 것은 반갑지 않아. 나를 도와라. 너에게 새로운 사명을 내리겠다. 이번 일을 마치면···.”

나루뫼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율명의 손짓을 따라 그는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라는 거야? 나루뫼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분명 나루뫼인데 어딘가 달랐다. 훨씬 밝고 생기있었다.


“미사.”

율명이 부르자 사로잔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독한 약을 마셨을 때처럼 아득한 곳에서 소리가 울렸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종잇조각 같았다.


“아랑누가 진짜 열쇠인 거군. 그 아이를 만나야겠어.”

율명은 정신을 잃은 사로잔을 촉촉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미사, 돌아올 거지? 기다릴게. 속죄는 그때 하지.”

빛 덩어리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사로잔이 눈을 뜨는 순간, 밖으로 나왔던 다른 의식은 사라졌고, 그 의식이 보고 들은 모든 기억도 지워졌다.


휼과 모얀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끙 신음을 내며 이마를 찌푸렸다.

“아구구, 안 아픈 데가 없네. 그래도 회강석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미 회복되고 있어.”


사로잔은 욱신거리는 허리와 다리로 힘겹게 일어섰다.

“빛이 번쩍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나루뫼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위해 놈의 칼을 막아주었는데.

“다 어디 갔어? 그자를 처리한 건가?”


휼을 잡으니 손잡이에 박힌 하얀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백진석? 이거 원래 있던 건가?”


보석을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제법 잘 어울렸다. 뜬금없이 생긴 보석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곤을 도와야 해.”

사로잔은 휼과 모얀을 쥐고 사슴처럼 숲을 건너갔다.


모얀이 그녀를 위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을 타고 바위 더미를 건너뛰었다. 어느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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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3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2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4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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