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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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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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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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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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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DUMMY

신입 훈련생 한울은 수애천이 완전히 어둠에 덮일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지른 실수를 생각하니 몹시 괴로웠다. 자칫하면 천인들이 소멸할 뻔했다.


수애천 입구에 쓰러져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 별의 무덤 속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소멸하는 건가.’

가슴이 미어졌다.


다른 혼보다 씻김이 빨라 선택받은 영혼이라고 불렸다. 인간세에서 쌓은 공을 인정받아 수애천으로 발탁된 것이라 들었는데 다 물거품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인가.


주먹으로 탕탕 바닥을 내리쳤다. 가슴에 쌓인 불안과 죄책감이 불덩어리가 되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미사랑님! 대체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한탄의 외침에 낭랑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날 불렀니?”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낮에 보았던 미사랑이 눈앞에 앉아있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다니. 아니, 그보다 왜 여기에?


훈련생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려고 왔지. 넌 이름이 뭐야?”

“한울입니다.”

“그래, 한울. 사과는 그만하면 됐고, 어서 나가자. 갈 곳이 있어.”


“예? 전 아직 통행증도 없는데요?”

“나와 같이 있는데 무슨 소리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사랑은 그의 팔을 잡아 올렸다. 한울이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이 그들은 이미 별의 무덤에 와있었다.


그곳은 공명의 들판에서 이어진 별의 무덤이 아니었다.

암흑성단의 뒤편, 아람바와 이어진 별의 무덤은 검은 허공에 가까웠다. 무한한 허공에서 불티를 품은 별 조각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한울은 갑작스러운 이동에 중심을 잃고 별 조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사랑은 공중에 떠서 까마득한 우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손목을 돌리자 무시궁이 나타났다.

“네가 썼던 무시궁이야. 한 번 쏴봐.”


“예? 지금요?”

한울은 망설였다. 대체 왜 이러시지? 뭘 하시려고?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사랑은 무시궁을 내민 채 침착하게 기다렸다.


미소가 어린 얼굴을 보자 한울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벌을 내리려고 온 것이 아니구나.’


한울은 미사랑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배운 대로 활을 쏘았다.

‘힘을 집중하고, 내면의 생각을 한 곳으로 모은다.’


배운 것을 기억하며 활을 쏘았으나 가느다란 빛의 화살은 날아가다 말고 바로 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이번에는 화살의 모양은 나왔으나 흔들리더니 곧 사라졌다. 수애천에서 실수로 쏘았던 화살처럼 폭발적인 힘은 나오지 않았다.


한울은 망연히 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미련이 남아서 그래. 인간세에 사랑하는 마음을 두고 왔나 보지?”

미사랑은 위로하듯 다정하게 물었다.


기억도 없는 미련이라니. 한울은 무시궁을 꽉 붙잡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빛이 흔들려. 상념이 많으면 천력을 닦을 수 없단다.”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울이 무시궁을 건네자 미사랑은 자세를 잡고 까마득한 허공을 마주 보았다.

“마음을 비우고 너 자신을 믿으면 돼.”


그녀는 보이지 않는 활시위를 당겼다. 무시궁이 둥그렇게 휘어졌다.

곧이어 탱 하고 맑은소리가 귀를 때렸다.


화살은 곧고 굵은 데다 환한 빛을 내며 날아갔다. 별똥이 떨어지듯 포물선을 그리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빛을 잃지 않았다.

암흑성단의 그 누구도 이렇게 무시궁을 잘 쓰지 못하리라.


한울은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이토록 강하고 아름답게 신력을 다루는 존재가 있다니.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가르쳐주십시오. 배우고 싶습니다.”

“무시궁을 쓰는 방법은 이미 배웠을 테니···”

미사랑이 손을 움직이자 무시궁은 사라졌다.


“네가 살아갈 천선계를 보여줄게.”

미사랑이 별 조각 위에 좌정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한울도 그대로 따라 앉았다.


감은 눈 안쪽으로 천선계의 모습이 펼쳐졌다.

처음 장엄관문을 넘으며 보았던 모습과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그때는 웅장하고 엄격한 공간이었다면 미사랑이 보여주는 천선계는 포근하고 다정했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가까이 봐야 아름다운 것이 있고 멀리 봐야 아름다운 것이 있어. 우리 차원에 있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이 있지. 여기 오는 영혼들도 모두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눈을 감고 앉아 한울은 천선계를 훨훨 날아다녔다.

광장의 천인과 선인들 사이, 숲속 나무와 풀 사이, 공명의 들판을 지나 별의 무덤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한울이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바로섬 꼭대기 회합의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선계의 끝과 끝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너는 이 천선계와 수많은 영혼을 지키게 될 거야. 네가 가진 영력이면 충분해. 너만의 무시궁을 만들 수 있어. 네 힘을 믿어봐.”

미사랑이 말하면 곧 진실이 되었다.


빛이 들기 시작했다. 멀리 선계를 비추는 별이 떠올랐다. 빛을 받은 천계와 선계는 각기 다른 색깔과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한울은 자신이 마치 호위무사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이 아름다운 천선계를 꼭 지켜내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를 드니 이번에는 수애천 수련장이었다. 무시궁이 한울에게로 건너왔다.

“저 과녁은 네게 남은 잡념이야. 네가 쏘는 화살은 천선계를 위한 너의 소망.”


한울의 가슴이 요동쳤다. 미사랑이 쏘았던 화살이 생각났다.

마지막까지 빛을 잃지 않고 당당히 날아가던 모습.


‘난 미사랑님의 호위무사가 되겠어!’

천선계에서의 간절한 소망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나 자신을 믿어라.’

한울은 끝까지 과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여린 빛이 한 줄기 쏘아졌지만, 과녁에 꽂히지 못하고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한울은 아쉬움에 입술을 깨무는데, 미사랑이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잘했어. 훨씬 좋아졌어.”

“화살도 아니었는데요.”


“처음이잖아. 처음부터 잘하려는 건 과욕이야. 자세도, 방향도 아주 좋았어. 지금처럼 영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면 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야. 하지만 다른 훈련생의 사기도 생각해야 하니 동점이 좋겠다.”

미사랑이 생글거리자 한울은 너털웃음이 나왔다.


화살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점수까지 맞추라니. 그래도 자신만만한 그녀의 눈빛을 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력이 폭발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 잊지 말고.”

미사랑이 한울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내일 기대할게.”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이자 이미 미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수련장에 혼자 남은 한울은 자신의 손에 들린 무시궁을 들어보았다.

‘꿈을 꾼 건가?’


바람이 휭하니 텅 빈 수련장에 머물다 갔다.

‘꿈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해낼 거야.’

마음을 가다듬고 화살을 쏘았다.


이번에는 화살이 되어 과녁에 꽂혔다. 중앙은 아니었지만 꽂혔다는 것이 중요했다.


빛과 힘이 뿜어져 나오는 화살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과녁을 노려보니 중앙의 작은 동그라미가 또렷하게 보였다.


한울은 다시 시위를 당겼다.


*


파소연랑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미사랑을 찾았다.

책을 읽고 있는 미사랑에게 곧장 걸어갔다. 이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햇살이 따사롭고 풀 향기도 아늑했지만 파소연랑의 마음은 그만큼 아늑하지 않았다.


“미사랑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왜요?”

“그 훈련생, 미사랑님이 가르치셨죠?”

“가르친 것은 없어요. 그냥 보여줬지.”


“훈령사와 동점이 된 것도 보여준 겁니까?”

“아, 그건 부탁이었고요. 어쨌든 잘 끝났잖아요?”

미사랑이 활짝 웃으며 스승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훈령사가 난처해하고 있어요. 훈련 방법이 잘못된 건가 반성한답니다.”

“그 생각은 못 했네요. 한울의 영력이 너무 특별해서 그만···.”


파소연랑은 머리를 긁적이는 미사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력이 특별하다고? 조만간 훈령사가 가르치기 벅찬 상대가 되겠군.’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설마 그 힘을 보여주신 건가요?”


“아효, 스승님. 너무 노여워 마세요.”

미사랑이 스승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파소연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미사랑은 보여주고 들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한 암흑성인걸.

“그 녀석 이름이 한울인가요?”


수애천에서 만난 한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시합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파소연랑이 암흑성단의 호위무사인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의는 잊지 않았다.

‘암흑성님의 호위무사가 되고 싶습니다.’


‘암흑성단이 아니라 암흑성이라. 이유는?’

‘미사랑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파소연랑은 한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맑고 진지한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런, 미사랑님을 마음에 품다니···.


‘훈련이 끝나면 삼신성 중의 한 분을 선택해야 합니다. 전 미사랑님을 지키겠습니다.’

‘알았네. 최종 시험에 합격하면 네 결심이 길이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성큼성큼 사라지는 한울의 뒷모습을 보자 코끝으로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 갔다.


*


파소연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쳐 앉았다.

미사랑을 목숨처럼 지켜줄 호위무사가 나타났으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전 태왁님이 무결의 고리에 들기 전에 떠날 겁니다.”

파소연랑이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좀 더 계시면 안 되나요?”

미사랑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촉촉해졌다.


“전 천인이 아니니까요. 오래 있으면 몸이 버티지 못하죠. 그래도 암흑성단의 호위무사여서 행복했습니다. 미사랑님이 암흑성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못 보는 건 아쉽네요.”


“스승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대명천으로 가려고요. 거기서 칼의 기억을 씻어야지요.”

“저에 대한 기억도 잊으시겠네요. 언젠가는 인간세에 환생하시겠죠?”


미사랑의 눈빛이 초롱초롱 바뀌었다.

인간세에 사는 슬픈 영혼이라면 천인으로 데려올 수 있다. 파소연랑이라면 분명 천인이 되고도 남았다.


파소연랑은 미사랑의 표정을 읽었지만 모른 척했다.

슬픈 영혼이 된다는 것은 수없이 고난을 겪는다는 뜻이었다. 그 시련 속에서도 맑고 깨끗한 혼을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대신 미사랑님의 호위무사를 제대로 훈련해 놓겠습니다. 그 녀석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마지막 제자가 될 훈련생을 생각하자 파소연랑의 가슴에 숨이 가득 들어찼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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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5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5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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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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