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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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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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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DUMMY

너른벌 정령의 땅에서도 계절은 바뀌고 바람도 달라졌다.

정령의 땅이기에 왕도 없고, 나라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소천국이라 불렀다.


바닷가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스락성이 되었다.

소천국의 다른 곳은 모두 짙은 안개로 덮여 사람을 반기지 않았다. 그곳에 너른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정령들이 살았다.


일 년 오백사십팔일, 계절이 여덟 번 바뀌는 내내 안개가 자욱해 그 안의 산과 들이 어떤 모습인지 본 사람도 없었다.


말리항의 바람은 서늘하고 맑았다. 항구에서 이스락성 중심부까지 이어진 거리는 상인과 여행자로 붐볐다.

거미줄처럼 펼쳐진 거리 중에서 약방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그 소란스러움을 뚫고 두 사람이 두리번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말하면 겉모습만 사람이었고, 사람이 아닌 존재였다.


한 명은 푸른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 묶은 근육질의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은빛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가냘픈 몸집의 남자였다. 챙이 넓은 모자 아래 살짝 드러난 머리카락도 온통 은빛이었다.


푸른빛의 남자는 물살을 헤치듯 걸음을 옮겼다. 매끈하고 촉촉한 피부에 물기가 서렸다.

“마로니 원로님, 여기가 맞습니까? 정귀의 기운이라고요?”


“분명해. 여기 어디 백사귀파도 있을 거네.”

정령 원로 마로니는 확신에 차서 약방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정령의 기운 때문에 요귀는 머물지 못할 텐데···. 지금껏 살아남았다면, 교묘하게 위장했을 겁니다.”

“어쩌면 자신이 백사귀인지도 잊었을 테지.”

마로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소천국은 반귀가 살기 어려운 정령의 땅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사음귀도 이 땅에서는 생겨나지 못했다.

그런 곳에 요귀, 그 중에서도 정귀의 기운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서둘러야 했다.


푸른 머리카락과 거무스름한 얼굴의 인어족장 에레혼도 굳은 얼굴로 약방 거리를 돌아보았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에레혼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령들이 지켜주는 걸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요?”

“사람에게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말게. 난 그저 지키는 것뿐이니. 너른벌에서 정령이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치명적인 독을 내뿜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람이 늘어나면 언젠가 인어족도 바다를 잃겠죠.”

“희망을 버리지 말게나, 에레혼. 우리가 아직 살아있지 않나?”


약방을 둘러보던 에레혼이 마로니의 팔을 잡았다.

“저기, 이스락성 대표입니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가 가리킨 곳은 크심약방이었다.

말리항에서 가장 큰 약방이었다. 화려한 현관 앞에 덩치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에레혼이 마로니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정령의 원로와 인어족장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스락성의 대표 중길은 뒷짐을 진 채 서성거렸다. 그의 뒤로 비서와 수비대원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약방문이 활짝 열리며 호리호리한 키에 짧은 머리를 가진 중년 남자가 뛰어나왔다.


중길은 키가 작고 두툼한 몸집에 나이도 많았지만, 둘 다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르고 있어 비슷한 인상이었다.


“오셨습니까? 나으리.”

남자가 중길의 팔을 받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비서와 수비대원들은 투덜대며 약방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겨우 이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우릴 깨운 거야?”

“말도 마. 난 오늘 쉬는 날이라고.”


에레혼과 마로니도 현관 앞의 대기용 의자에 앉았다.

비서가 흘끗 그들을 보았지만, 그에게는 초라한 봇짐을 둘러맨 여행자들로 보였다.


대원들이 투덜대는 사이 에레혼과 마로니는 약방 주인과 중길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벽 안쪽의 귓속말도 그들이 들으려 하면 공기와 바람이 실어다 주었다.


“구심. 내가 몹시 바쁘니, 용건만 이야기하지. 준비는 잘 돼 가나?”

“염려 마십쇼. 연합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크심약방의 주인 구심은 빈속을 보호하는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에서는 숲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중길이 흐뭇한 얼굴로 찻잔을 받았다.

“연합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게 많아. 땅도 좁지 않은가?”

“앞으로 넓혀야지요. 이렇게 바닷가에 붙어서는 이주민을 더 받을 수도 없고요.”

“맞네. 연합의 세력이 커지려면 사람이 많아야지.”

더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같은 생각이었다.


정령의 땅이라지만, 소천국을 소천국답게 만드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이스락성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이루어진 연합에서 정한 것이다.

정령의 결계 때문에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언제까지 바닷가에 모여 살 수는 없었다.


더 많은 이주민을 받고, 연합의 세력을 키우려면 영토를 넓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정령들을 몰아내고, 세력을 키워야 했다.


“정령이 사라지고 있으니. 조만간 소천국도 제대로 된 나라가 될 거네.”

중길은 자신이 진정한 통치자가 될 거라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그렇게만 되면, 자네는 소천국의 돈줄을 쥘 수 있어.”


구심은 두 손을 모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표님이 힘을 써주시면 일이 빨리 진행될 텐데요.”

“무슨 일인데 뜸을 들이나? 말해 보게.”


“녹디약방만 문을 닫으면 문제없습니다.”

“녹디?”

중길은 입을 다물었다.


녹디약방은 규모는 작아도 말리항에서 가장 유명한 약방이었다. 녹디가 유명한 이유는 효과 좋은 약 말고도 약방의 주인, 바론이 운영하는 의원에 있었다.


공량원은 으뜸초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유명하지만, 환자들의 사정에 맞춰 치료비를 나누어 받는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그만큼 일을 해주거나, 다음 해 수확한 것으로 갚는 방식이었다.


공량원이 유명해지고, 바론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만큼 중길도 그의 존재가 탐탁지만은 않았다.


“서로 도우면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소천국의 미래를 위해서일세. 필요하다면, 내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힘껏 따르겠습니다.”


구심은 두 손을 코앞까지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소매로 가린 입이 한쪽으로 비틀어지며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마로니와 에레혼은 어두운 얼굴로 약방 거리를 돌아보았다.


*


녹디약방은 약방 거리에서도 끝자락에 자리 잡았다. 크심약방이 넓고 큰 데 비해 아담하고 정갈했다.


바론이 약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평균적인 체격에 어디선가 본 듯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햇빛에 그은 얼굴이 까무잡잡했지만, 눈꼬리와 눈썹이 선한 인상을 주었다. 머리카락이 밝은 황톳빛이라 낯빛보다 머리가 밝아 보였다.


사고를 당했는지,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빈 소맷자락만 펄럭였다.


바론이 들어오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사무장 만치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작고 마른 몸집이라 웃음이 더욱 크게 보였다.

“원장님, 나오셨습니까? 이쪽이 새로 온 수련의입니다. 시나라고 하고요.”


시나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기운은 탁라국에서 돌과자를 팔던 선사 니무와 닮았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시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년만 일하겠다고요?”

“예. 고향에 돌아가 개업하려고요.”


“좋은 계획이군요. 열심히 배우십시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니 아무리 노력해도 모자랍니다. 저도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바론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바론은 시나를 데리고 뒤뜰로 나갔다.

넓은 뒤뜰에 약초를 말리고, 가공하는 작업장이 같이 있었다.


바론은 약방 일과 약초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시나는 바론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받아 적었다.


처음 온 수련의와 원장 사이의 의례적인 자리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만치나 다른 일꾼들이 해줄 것이다.

“웬만한 일은 만치 사무장이 알려줄 테니 잘 따르면 됩니다.”


“원장님, 그런데 여기는 으뜸초가 없습니까?”

“하하, 으뜸초가 궁금하시군요?”

“워낙 유명하니까요.”

“그건 여기 없습니다. 공량원에서 치료하는 데 쓰기도 모자라니 팔지는 않습니다.”


“예에? 그거 팔면 엄청난 돈을 벌 텐데요?”

시나의 말은 돈을 벌지 못해 아까운 것이 아니라, 해왕과의 약속을 지키는 바론에 대한 감탄이었다.


으뜸초는 소천국에서 멀지 않은 바닷속 바름들에서만 나는 약초였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해왕은 바론에게만 으뜸초를 허락했다. 인어족 중에서는 인어 니엘만 바름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사 시나는 그것이 궁금해 수련의로 꾸미고 이스락성을 선택했다.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바론은 희미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으뜸초가 효과는 좋지만, 쓰기가 까다롭죠. 자칫하면 독이 되니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공량원에 와서 보십시오. 좋은 공부가 될 겁니다.”

“예, 저도 꼭 보고 싶습니다.”

시나가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대답했다.


바론이 돌아가자 열심히 장부를 정리하던 만치는 붓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짜증이 가득 묻은 눈빛으로 장부를 덮었다.

“좀 쉬어야겠네.”


일꾼들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응접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폈다.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사무장님,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시나가 조용히 다가갔다.


만치는 실눈을 뜨고 시나를 훑은 다음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알려줬으면 알아서 해야지. 머리는 뒀다 뭐에 쓰려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발을 까딱거렸다.


시나가 두리번거리니 약초를 정리하던 일꾼들이 손짓했다. 한 사람이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건드리지 마세요. 사무실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고요. 얼마 전에도 쫓겨날 뻔했답니다.”

“원장님은 모르시나요?”

“겉으로는 별 문제없으니까요. 요즘 부쩍 이상해진 했어요. 혼자 실실 웃기도 하고, 크심약방에도 자주 가고.”


시나는 만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인간세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오갈 데 없는 부랑아를 먹이고 가르쳐서 사무장까지 맡겼다던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저러고 싶을까?’

혀를 쯧쯧 차며 약초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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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아랑누_재회의 약속 22.07.23 32 0 11쪽
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6 0 12쪽
»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8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5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5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5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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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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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4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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