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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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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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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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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DUMMY

새로 태어날 별을 위해 별의 무덤을 정리하는 일도 어린 삼신성의 몫이었다.


삼신성이 되기 전까지 가능한 많은 씨앗을 찾아내고, 심는 것이 중요했다.

별의 씨앗은 항구한 시간 동안 성숙하며 별이 된다. 그 별이 미리내를 거쳐 우주 저 멀리까지 날아갈 것이다.


공명의 들판 아름누리와 별의 무덤과의 경계는 늘 안개에 싸여 있는데 오늘은 맑은 공기로 가득했다.


미사랑은 율명과 여라함을 기다리며 허공에 떠서 별의 무덤을 훑었다. 춤추듯 손을 휘저으니 검은 별 가루가 이리저리 파헤쳐졌다.


여라함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별의 무덤 건너 끝없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미사랑을 만나니 그의 가슴이 뛰었다.

미사랑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앉았다. 그를 향해 손을 흔드는 미사랑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난꾸러기 어린 암흑성이었는데,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생김새는 똑같은데 어딘지 진백성 주다와 비슷하고, 암흑성 태왁의 느낌도 있었다.


‘뭐가 달라진 거지?’

여라함은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오래전 태왁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암흑성은 슬픈 영혼을 위로하면서 성장한단다.’


그날은 미사랑이 노각부줄을 시험하느라 처음 인간세로 나가는 날이었다. 율명과 여라함도 함께 그녀를 배웅했다.


‘슬픈 영혼을 찾아다니고, 위로하면서 암흑성은 진짜 모습을 찾아가지. 이전의 미사가 아니게 될 거다.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너희는 삼신성이니 끝까지 미사를 지켜주렴.’


그때는 달라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겉모습이 바뀌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더 따뜻하고, 더 깊어 보였다.


여라함은 여기 없는 태왁을 향해 속삭였다.

‘태왁님, 걱정 마세요. 전 마지막까지 미사를 지킬 거니까요.’


여라함이 말없이 서있자 미사랑이 다가와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어디 아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아니, 씨앗을 살릴까 하는 생각.”


“우리 막대기 써보자. 늘 하던 대로 하면 재미없잖아.”

미사랑의 손에 긴 막대기가 생겨났다. 여라함도 막대기를 만들었다.


곧이어 두 개의 막대기는 웃음소리와 함께 별의 무덤을 휘젓고, 두드리고, 파헤치며 붕붕 날아다녔다.


율명이 도착했을 때 미사랑과 여라함은 새까맣게 재를 뒤집어쓴 채였다. 얼굴이며 옷이며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눈만 초롱초롱 빛났다.


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 이게 뭐야?’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별의 무덤까지 오는 내내 그는 미사랑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이 깊었다.

금지된 벽에서 환영을 본 이후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환영일 뿐이라고 되새겨도 빛이 어둠에 삼켜지는 장면은 이미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미사를 대해야지.’

굳게 다짐해도 걸음은 느려지고 몸짓은 어기적거렸다.


그러나 두 개의 검은 형체를 보는 순간 고민은 날아가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율명은 배를 움켜잡고 소리 내어 웃었다.


“뭐야? 왜 몸을 쓰고 있어?”

“하하, 율명 이제 왔구나. 자, 받아!”

미사랑이 막대기 하나를 더 만들어 율명에게 던졌다.


“어, 어.”

긴 막대에 이끌려 그 역시 잿더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미사랑이 막대기를 쳐올리니 별 가루는 먼지를 풀풀 날리며 율명에게로 날아갔다. 율명의 얼굴과 가슴이 검게 물들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율명도 신나게 막대기를 내리쳤다.


가슴을 내리누르던 걱정과 긴장은 날아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느 때보다 열심히 별의 무덤을 뒤적거렸다.


별의 무덤 경계에서 어린 삼신성의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이놈들! 뭐 하는 짓이냐!”

암흑성 태왁의 고함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뒤이어 영진성 우지개와 진백성 주다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허, 제발 마음 편히 무결의 고리에 들게 해 달랐더니만···.”

우지개가 뒷짐을 지고 놀란 눈으로 어린 삼신성을 바라보았다.


삼신성의 뒤로 낯선 천신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날개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어린 삼신성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고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


어린 삼신성은 천계의 뒤편 광활한 별의 무덤 앞에 섰다. 새 무시궁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아유라는 안 나온대?”

율명이 물었다.


미사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본 적 없어. 아유라는 여하를 잘 따르잖아. 여하는 아는 거 있어?”


“염라성역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대.”

“그렇겠구나. 차원을 건너온 방문자는 처음이라 생각 못 했네.”

미사랑이 무시궁을 들고 별의 무덤을 향해 섰다.


천계의 뒤편에 떠 있는 별의 무덤은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둡고, 훨씬 넓었다.

누구든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깊고 어두운 끝이었다. 그렇기에 무시궁을 시험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율명과 여라함이 한 발씩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날렸다. 그들의 화살은 둥근 궤적을 그리며 시야의 끝으로 날아갔다.


미사랑 차례가 되었다.

“별의 무덤 너머로 날아갈 테니 잘 봐.”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손끝에서 빚어진 빛의 화살이 혜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별의 무덤을 지나갔다.


미사랑이 무시궁을 내던지더니 재빨리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누가 빨리 찾는지 내기하자!”


“미사!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율명도 자신의 화살을 찾아 몸을 감추었다.


여라함은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했네. 이래서 아이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별의 무덤 중간에서 율명과 여라함은 자신이 쏜 화살을 찾아냈다. 율명의 것은 붉은빛이 남아있었고, 여라함의 것은 하얀빛이 남아있어 쉽게 알아보았다.


그러나 미사랑의 푸른 화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어둠이 시작되는 바로 앞까지 가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 자리를 옮기는데 미사랑이 우뚝 멈춰 섰다.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 어둠뿐인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원의 틈? 내가 다른 존재를 깨웠나?’

미사랑은 그윽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치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여라함이 미사랑의 어깨를 잡았다.

“뭐가 있어?”


미사랑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가자. 이건 못 찾는 거야.”

“너무 멀리 갔나 보다. 여하튼, 미사의 힘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율명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여라함은 자꾸 뒤를 돌아보는 미사랑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차원의 정수에서 본 거 기억하는 거야?”

“응? 내가 차원의 정수에 들어갔었나?”

오히려 미사랑이 놀라며 되물었다.


‘차원의 정수’라는 말을 듣자 율명의 낯빛은 금방 어두워졌다. 쓸모없고 암울한 생각을 떨치려면 다른 생각으로 바꿔야 했다.


“참, 너희도 들었어? 궤네가 약해지고 있대. 주다님 말씀으로는 인간세가 한 번 더 무너지면 천선계에도 영향을 줄 거래.”

율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미사랑의 옆으로 다가왔다.


“태왁님도 걱정하셨어. 하지만, 천선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하셨어. 인간세에서도 궤네를 지킬 뭔가가 필요해.”

“그렇다고 성물을 인간세에 보낼 수도 없잖아?”


여라함의 말에 미사랑은 눈을 빛냈다.

“그거야! 천계의 성물을 인간세에 뿌리면 틈이 벌어진 궤네를 보완할 수 있어.”


율명이 걸음을 멈추었다.

“안 돼. 사람이 만지면 타버리거나, 그것 때문에 인간세가 뒤집힐 거야. 이전의 인간세를 생각해봐. 사람들 손에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다잖아. 성물을 가지려고 서로 싸우다 죽고 말걸?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


“그것도 일리가 있어. 천계의 무기를 만지면 사람은 타죽게 될 테니.”

여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사랑은 무시궁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 아껴주고 돌봐주면 다른 방향으로 갈 거야.”


“미사, 있는 것을 살리는 방법을 생각해야지. 다 태운 다음에 다시 세우려고?”

율명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파괴된 인간세를 상상하니 금지된 벽에서 본 환영이 떠올랐다.

빛이 어둠에 삼켜지던 모습. 그것은 어쩌면 인간세가 파괴되면서 천선계까지 무너진다는 예언일지도 몰랐다.


‘빛을 삼키는 것이 암흑성이 아니라 인간세의 어둠이라면···.’

율명이 눈을 부릅떴다.


“절대 안 돼! 그들이 파멸의 길을 선택했다면 내버려 둬. 인간세는 그들의 방식이 있어. 원칙을 지켜야지.”

율명의 의지는 확고했다.


미사랑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알았어. 궤네는 다시 생각해보자.”

그녀의 위로에도 율명의 거친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염라성 아유라를 위한 휴식공간이 골격을 갖추었다. 긴 회랑으로는 빛이 잘 들었고, 향기 좋은 나무와 아름다운 돌이 뼈대를 이루었다.


“이름은 뭐라고 할 거야?”

미사랑이 물어도 아유라는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안에 맴돌던 이름이 미사랑에게 전해졌다.

“은잠루? 좋은 이름이다.”


아유라가 펄쩍 날아올라 뒤로 물러섰다.

“너, 어디까지 아는 거야?”

“방금 말한 거 아니었어? 분명히 들렸는데?”

아유라는 입을 다물고 미사랑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으려고 했다.


지붕을 마무리하던 나무가 위치를 잘못 잡고 다른 기둥에 포개지며 우르릉 소리를 냈다.

“아니야, 그건 거기가 아니고···.”

미사랑은 재빨리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아유라는 미사랑의 움직임을 쫓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런데도 저 아이는 내 생각을 읽었어. 대체 뭐지?’

하얀 날개 끝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몸을 떠받치는 작은 안개구름도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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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4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3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4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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