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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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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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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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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작전회의

DUMMY

보름삭이 저녁 바다에 물비늘을 그려냈다.

초승달은 하늘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빛났지만, 선실에 갇힌 사람들은 보름삭도, 초승달도 볼 수 없었다.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도적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과 웅성거림으로 보아 족히 서른 명은 넘을 것이다.


사로잔은 발소리로 숫자를 가늠하며 처음 배에 탔던 인원을 계산했다.

‘여행자들은 백오십 정도이니···. 중간층 선실은 비어 있겠군.’


자신들이 도적과 상대하는 동안 누군가는 배를 지켜야 했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몸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승객 중에서 장정들이 몇이나 있었는지 가늠했다.

‘그 정도는 해낼 것 같군.’

그녀는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은 새벽까지만 해도 기침과 오한이 심했다. 아침까지 다루영이 돌본 덕에 지금은 낯빛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사로잔, 이곤, 나루뫼가 같이 있었으나, 아픈 아이들 때문에 다루영과 이곤이 자리를 바꾸었다.

‘누가 어디 들었는지 기억할 리 없어. 숫자만 대충 맞추자고.’


다루영이 사로잔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소맷자락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내며 속삭였다.

“수면제야.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술통에 넣느냐 이거지.”

“오, 선장이 자랑하던 술이 있었지? 식품저장고가 중간층 선창에 있었어.”


사로잔은 팔짱을 끼고 수면제 가루가 담긴 약봉지를 바라보았다.

“식품저장고까지 가는 방법이라···.”


배가 완전히 멈추고 도적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뭍에서도 몇 척의 나룻배가 다가왔다.

“이쪽, 이쪽으로!”

“빨리 움직여!”


나룻배가 내려지는 소리, 사람들이 옮겨타는 소리가 들렸다. 환기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손을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다.


“선장이랑 항해사, 노꾼들이잖아?”

“저들이 없으면 배는 무용지물이니까.”

두 사람이 창가에 매달려있을 때 복도를 따라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적들은 선실마다 자물쇠가 잘 잠겼는지 흔들었다.


“어차피 이놈들은 못 나가. 식인어가 드글거리는데, 뛰어들면 바로 저승길이야.”

“머릿수 맞춰서 제대로 받으려면 잘 지켜야지.”

“최고급 배를 끌고 왔으니 오늘 밤새 취할 수 있겠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패거리 중 하나가 느긋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 어디 악사들도 있지 않나?”

“악사? 그거 좋군. 오늘 같은 날 딱 어울리는데?”

“항구에서 연주하던 놈들이 탔더라고. 식당에서도 연주하던데?”

“아! 그 해태족과 용족! 더럽게 안 어울리대.”


“내가 두목에게 알리고 오겠어.”

뒤에 서 있던 패거리가 급히 뛰어나갔다.


“빌어먹을. 또 나서고 있네.”

“두목에게 잘 보이려고 환장했구먼.”

복도에 남은 두 사람은 자물쇠를 거칠게 흔들며 지나갔다.


사로잔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옆방에서 해무찬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


“나더러 도적을 위해 연주하라고? 미쳤어?”

해무찬은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식당에서 연주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잖아?”

사로잔과 다루영은 태연하게 벽에 기대앉았다.


자물쇠를 확인한 다음에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갑판에서 간혹 고함이 들렸지만, 감시자가 없으니 벽을 넘나드는 것도 자유로웠다.


어떻게 사람들을 구할지 논의하느라 다시 벽을 넘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방을 바꾸었다. 비밀의 문을 오락가락하며 한동안 키득거렸다.


이곤이 밧줄로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히려 잘 됐어요. 상황이 어떤지 볼 수 있는 기회죠.”

“상대를 파악하라. 이 말이군.”

아순치가 부채를 꺼내 들었다.


사로잔은 굳은 어깨를 펴며 팔을 돌렸다.

“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나침반이 어디 있는지 알아둬야지. 다루, 그것도 쓸 수 있겠는데?”

다루영이 씨익 웃으며 소맷자락을 톡톡 쳤다.


해무찬이 실눈을 뜨고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너희 둘 무슨 얘기야? 무슨 일을 꾸미려고?”

“음.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빨리 끝내자고. 가락국에서 찾을 사람이 있어.”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생각처럼 쉬울까?”

아순치가 부채를 살랑거렸다.

아주 천천히 손목을 움직이기에 머리카락 끝만 보일 듯 말 듯 흔들거렸다.


소리 나게 부채를 접고 이곤을 바라보았다.

“익족의 깃털까지 나타났어. 이유가 뭘까? 단순히 도적을 소탕하는 일이 아니란 거야. 그 전령새가 깃털까지 내어줄 만큼 중요한 일인 거지.”


사로잔은 순간 뒤통수가 당겨 손바닥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혜부거 대장군이 말하지 않았던가. 반은 이미 왔다고.

“나침반이 없으니 확인할 수가 없어. 북쪽이었는데, 더 북쪽인지, 여기가 거기인지.”


다루영도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씨를 썼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아까 들었지? 식인어라고. 그런 물고기는 너른벌 어디에도 없어. 요귀의 소행일 거야. 어떻게 알아보지?”

“도적들도 사음귀인가? 운화도에 성물이 있고? 하하,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한데? 어떻게 딱 맞춰 도적이 나타나지?”

해무찬이 헛웃음을 뱉었다.


“위험은 늘 거기 있는데, 우리가 뛰어든 거지. 이곤은 이번 일을 오래 준비했을 테니까.”

사로잔이 대답을 바라며 이곤을 바라보았다.


“뭔가 오해하셨군요. 오래 준비한 것은 맞지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대단하지 않은 사건도 몇 개가 한 번에 부딪치면 파장이 크지.”

아순치가 목에 걸린 유리구슬을 만지작거렸다.


해무찬이 팔을 뻗어 몸을 뒤로 기댔다.

“지금쯤 성물이 나타날 때가 되긴 했어. 월영국 엄안에서 보고 여태까지 못 봤잖아?”


그 소리를 듣는 귀가 다른 방에도 있었다. 선사 하날은 벽에 가까이 기대앉아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성물? 다른 걸 또 찾는다고?’

그들은 이미 성물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하늘의 성물이 인간세의 사람을 주인으로 삼는지는 모르나 만족하지 않고 더 찾으려 하다니.

하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구석에 앉아 딴청을 부리던 나루뫼의 눈빛이 빛났다. 벽 저편에서 누군가 듣고 있다.

‘역시 선사의 기운이군. 안타깝게도 능력을 쓰느라 경계를 풀었어.’


나루뫼가 휘파람을 불었다.

“쉿! 저쪽 벽에 귀가 붙어있소.”


그의 말에 방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벽을 사이에 둔 선사 하날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둘러 풀어진 결계를 다시 채웠다.

나루뫼는 선계의 기운이 스르르 정돈되는 것을 느끼며 실웃음을 지었다.


*


회의를 끝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들도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루뫼는 여전히 구석에 앉아 물끄러미 벽만 바라보았다.


사로잔이 나루뫼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도 운명이니 잘해봅시다.”

“운명 따위 믿지 않소.”

나루뫼는 한 뼘 더 떨어져 앉으며 흘끗 사로잔을 보았다.


그녀의 목걸이에서 불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천계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닌 회강석을 달고 있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다니.


“그건 어디서 났소?”

“아, 이거. 불사조 겨루에게 받았소. 마른 협곡에서 멀지 않은 산이었소. 그런 새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용각국에서 나오니 역시 다르더군. 가끔 신비체험을 한달까.”


“흥. 주인이 주인인 줄 모르니 어디 주인이라 하겠소?”

“무슨 말이오?”

“왜 떠돌아다니는 거요? 용각국에서는 소명장군이라면서?”


나루뫼가 말을 거는 것이 반가웠다.

엄안에서 마른 협곡으로, 다시 엄안으로 오는 동안 제대로 말을 붙인 적이 없었다.


그의 무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과연 혜부거 대장군이 일당백이라고 칭찬할만했다. 그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말을 걸어주니 좋은 기회였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소. 다른 곳에서는 신기한 일이 많은데 용각국은 조용하거든. 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소.”

“단지 그것뿐?”


사로잔은 대답하려다 말고 숨을 삼켰다. 어디선가 비슷한 질문을 들었는데···.

‘그래. 한울도 같은 걸 물어봤어.’


나침반의 바늘을 따라 황무지를 건널 때 한울이 물었다.

‘사로잔님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로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어야 하지?


나루뫼는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자 다니지 왜 몰려다니오?”

“아하하, 이런 말이 있지 않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사로잔이 벽에 기대고 있다가 나루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집은 어디요?”

“내가 왜 궁금하오?”

“동지가 되었으니 당연하지 않나? 일당백의 실력이니 내 편으로 만들려는 거지.”


“다음에 만나면 말해주겠소.”

“허, 참 깐깐하군. 우리에게 다음이 어디 있소?”

사로잔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토독 두드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


*


나룻배가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갑판 위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복도를 지나 선실 앞까지 이르렀다.


두 선실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열린 문짝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도적 패거리가 사로잔과 다루영을 가리켰다.


“너희들, 나와!”

악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다루영은 소맷자락의 종이 뭉치를 만져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사로잔도 같은 신호를 보냈다.


“두목을 위해 연주하는 걸 영광으로 알아!”

허리띠가 느슨해진 남자가 주먹으로 허공을 찔렀다. 기분 좋게 취했는지 입을 벌리고 싱글거렸다.


옆방에서도 해무찬이 씩씩거리며 따라나섰다. 아순치는 접은 부채 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올라간 입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요란하게 다가왔던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한쪽에서는 나루뫼가, 다른 방에서는 이곤이, 또 다른 방에서는 선사 하날이 멀어지는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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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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