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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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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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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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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DUMMY

무성산 남쪽 마루재를 흔들던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가 잠잠해졌다.


울창한 숲의 푸른 빛이 지친 대원들의 눈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도적들의 은신처는 그럴싸한 수감소가 되었다.


남쪽 은신처까지 평정한 늘참은 부하들에게 뒤처리를 지시하며 창고로 향했다.


땀과 피가 범벅인 몸에서 비린내가 올라왔지만, 그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복수심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시체를 옮기고, 생포한 자들을 가두는 일은 믈아치나 상단 수비대원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빠른 몸놀림으로 주변을 정리했다.


다루영은 이미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싸움은 피하지 않지만, 싸움이 끝난 뒤까지 앙금을 남겨두지 않았다.

아군이나 도적이나 가리지 않았다. 대원들은 할 일이 많기에 도적들의 상처를 살피는 일은 해무찬이 맡았다.


늘참은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이유 없이 두렵고 막막했다.


다루영이 표창을 던지는 실력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사지를 마비시키는 급소를 정확히 찾아 꽂는 데다, 네 개의 표창이 그녀의 부름에 응답해 돌아오는 건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해무찬의 검도 신묘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분명 날도 서지 않았는데 빠르고 예리했다. 크고 강한 검의 위력에 걸맞은 몸놀림과 판단력. 사자의 용맹함을 그대로 닮았다.


가농에서 처음 봤을 때, 이곤의 동료라며 돕겠다고 했을 때도 의심이 앞섰다. 서글서글한 눈에 장난기로 가득해 보이는 해태족과 용족이라니.


그러나 그들의 몸놀림을 보는 순간, 의심은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대체 누구지? 너른벌의 사람 맞아?’


‘저런 실력자라면 어떤 전투도 두렵지 않겠어.’

늘참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돌려 창고 문을 열었다.


부하 한 명이 장부를 내밀었다. 물건이 들어오고 나간 기록이 빼곡했다. 늘참은 장부를 펼쳐 날짜와 물건의 양을 계산해보았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옮겼을까? 여기에서 항구까지, 거기서 다시 배에 실었다면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들어오고 나간 물건은 적혀있지만, 어떻게 운화도 바깥으로 옮겼는지는 단서가 없었다.

그동안 믈아치들이 조사한 정보에도 도적 떼가 나타난 이후, 운화도에서 화물이 나간 기록이 없었다.


창고에서 물건이 나간 날짜는 이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는 적은 양이나마 꾸준히 들어왔다.


늘참은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가까이 서 있는 부하를 불렀다.

“도적 중에서 알만한 사람을 심문하게.”


창고에 쌓인 짐을 둘러보는데 바깥에서 누리예 대장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서둘러 창고 문을 나섰다.


누리예 역시 싸움과 행군으로 지친 모습이었다. 더러워진 옷과 삐쳐나온 머리카락, 거뭇한 얼굴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부대장님, 잘 해내셨군요. 이곤이 보낸 자가 있다고요?”

“예. 그것이···. 일단 보시죠.”

늘참은 앞장서서 도적들을 가두어놓은 움막으로 향했다.


상처 입은 도적들이 움막 벽에 기대 늘어져 있었다.

해무찬은 믈아치 대원의 감시에는 신경 쓰지 않고 약초와 붕대를 갖고 다니며 부상자들의 상처를 싸맸다.


한 사람이 신음을 쏟아내며 투덜거렸다.

“병 주고 약 주냐? 신선 흉내 내고 있네.”


“그러니까 도적질은 왜 하느냐고!”

붕대를 다 감은 해무찬이 불평하는 사람의 등짝을 후려쳤다. 찰싹 소리가 야무지게 등골로 파고들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희 두목이 백사귀파인 건 알고 있어? 요귀와 작당하고 도적질을 해?”

“백사귀파라고?”

도적들이 수런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망석이나 사음귀가 되지 않았으니. 그랬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지?”

“눈동자를 보면 알지. 목덜미와 정수리에도 문신이 있거든.”

“목덜미에 있는 그 문신? 아니···. 두목이 요귀와 한패였어?”

한꺼번에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도적들과 대화하면서도 해무찬의 손은 쉬지 않았다. 베이고 찢어진 상처를 싸매면서 차례대로 옮겨갔다.

“저 창고의 물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을걸? 어떻게 옮겼는지 모르지?”


뒤에 서서 그의 말을 듣던 늘참이 헉 숨을 뱉었다.

창고와 장부를 보지 않고도 물건이 없어진 것을 알다니. 운화도의 도적이 요귀와 한패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저 해태족, 정체가 뭐야?’


늘참의 어수선한 기운은 누리예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부대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그러니까···.”


그들의 목소리에 해무찬이 돌아보았다. 약초와 붕대를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누리예 대장님이십니까? 용각국에서 온 해무찬입니다.”

해무찬이 한 손을 내밀었다. 누리예의 손보다 두 배는 커다란 손이었다.


“누리예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각국이면 장공거 출신이십니까?”

“장공거를 아시다니 반갑습니다. 저는 아니지만, 같이 온 사로잔은 장공거 출신입니다. 지금쯤 산 아래 은둔지에서 싸우고 있겠네요.”


누리예의 표정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사로잔이라고? 그 사로잔?’


“은둔지에 남은 동료는 몇 안 될 텐데 괜찮을까요?”

늘참이 묻자 해무찬은 호탕하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사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사로와 싸우는 상대가 걱정이죠.”


“사로잔이라면 혹시 타내 대모님의 딸인가요?”

누리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무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시는군요! 예. 타내 대모님의 외동딸이죠. 그건 어떻게 아시나요?”

“소문을 들었습니다.”

누리예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고 다른 말로 둘러댔다.


사로잔을 안다는 이유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을 밝힐 수는 없었다. 더 믿기 어려운 이유는 갑자기 사로잔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용각국에 있어야 할 아이의 이름이 여기서, 도적 떼를 상대하는 바로 지금 튀어나오다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남편 금유 장군이 죽음을 맞이했던 처절한 작전이 떠올랐다. 실력이 모자라서도, 병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궁의 내부에 첩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생명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물건을 어떻게 옮겼는지 아십니까?”

늘참이 장부를 뒤로 감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해무찬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위풍당당하게 서서 늘참을 마주 보았다.

“도적들의 두목이 백사귀파인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물건은 귀사전을 통해 필요한 곳으로 퍼져나갔을 겁니다.”

“귀사전이라니?”


“우발수 너머에 있는 요귀의 터전입니다. 사람은 찾을 수도 없고, 안다 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죠. 너른벌에서 태어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귀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저도 상상 못 한 일입니다. 망석과 사음귀를 상대하지 않았다면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했겠지요. 대부분은 모르고 지냅니다.”

해무찬은 이곤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곤이 그러더군요. 요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했지만,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고요. 결이 다른 세상을 사는 데다, 그들의 목표가 있는 곳에만 나타나니 모르고 살 수밖에요. 게다가 그놈들이 기억을 조작하거든요.“


그때 대원들의 상처를 모두 둘러본 다루영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찬, 다 끝났어?“

해무찬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리예는 다루영을 보자 깊은 바닷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용족의 후예를 본 적은 있지만, 순수 용족은 처음이었다.

푸른 바다가 그대로 걸어 다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이 친구는 다루영입니다.“

해무찬이 다루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루영이 활짝 웃으며 누리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자 서늘하고 상쾌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


창고 바닥에 운화도의 지도가 펼쳐졌다. 누리예와 늘참, 해무찬과 다루영이 앉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도적의 은신처가 표시된 지도에서 누리예는 북동과 북서의 표식을 가리켰다.

”북쪽 아티재에서 이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이곳과 이곳을 점거하고 아티재로 갑니다.“


자세한 사항을 의논하려고 깃털로 이곤을 불렀으나 챙강거리는 소리와 고함이 섞여 닿지 않았다. 싸움터의 생생한 소리가 전해졌다.


깃털 저편의 소란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곳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날, 결계!’

‘예, 예. 벌써 쳐놓았습니다.’

‘선사가 있으니 좋네. 밧줄도 필요 없고, 감시자도 필요 없으니.’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도에 없는 은신처가 또 있어요.’

결계를 쳤다는 사람이 외치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거기서 끊어졌다.

깃털이 전하는 소리는 누리예에게만 들리므로 그녀는 자신이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다.


”은신처가 또 있었군.“

늘참이 중얼거렸다. 굳은 표정의 누리예와 늘참과 달리 해무찬과 다루영은 싱글거렸다.


‘보따리장수처럼 꾸민 허깨비 선사.’

나루뫼가 말하던 선사가 결계도 펼치는구나. 사로잔과 아순치라면 무리 없이 은신처를 찾아낼 것이다.


”우리는 처음 계획대로 아티재에서 기다릴 겁니다. 부대장님은 동쪽으로 가시죠. 저는 서쪽 길로 가겠습니다.“

누리예의 지시에 늘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무찬이 손을 들었다.

”제가 누리예 대장님을 따르지요. 다루는 부대장님과 움직이고요.“


두 사람은 이미 상의한 듯 다루영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부대장님은 맥족이라 가까운 적은 잘 대처하지만 원거리 공격에는 약하시니까요. 전력도 모자라니 돕겠습니다.”


“도와주신다면 기꺼이 승리하겠습니다.”

누리예는 힘껏 다루영의 손을 잡았다.


*


일찌감치 밤이 찾아왔다. 대원들은 내일의 행군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지만, 누리예와 늘참은 말없이 창고를 둘러보았다.


늘참의 날카로운 눈빛이 등불을 반사하며 주위를 더욱 환하게 만들었다.

“현무가 요귀와 관련 있을까요?”

“어쩌면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모습으로 때를 기다릴지도.”


늘참이 장부를 꺼내 누리예에게 건넸다. 물건이 마지막으로 나간 날짜를 손으로 가리켰다.

“무슨 일이 있을 겁니다. 현무와 관련 있을 지도···.”


누리예는 뚫어지게 장부를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해무찬과 다루영이 하던 말이 남아 웅웅거렸다.

‘귀사전을 통해 필요한 곳으로 퍼져나갔을 겁니다.’

‘참수리호에 타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가 선사였군요. 결계를 치다니···.’

‘지도에 없는 은신처를 찾아냈군요.’


이번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시작에 깃털이 있었다. 상직 갈청이 건네준 깃털.

‘익족의 깃털이다.’


아니, 신비한 일의 처음은 사로잔이었어.

누리예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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