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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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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0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2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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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DUMMY

어린 미사랑은 잠든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나를 볼 수 있다니 신기한걸. 저기 누워있는 나는 언제까지 잠들어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별의 무덤을 지나 여기까지 들어왔지만 천선계와는 다른 대기였다. 무언가 휙휙 지나다니는데, 실체가 아닌지 서로 겹치고 통과하며 멀어졌다.


내가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지? 입구가 없는 곳인가. 그럼 출구도 없겠구나.

어떻게 나가지? 음. 구태여 나갈 필요 있을까. 이렇게 편하고 아늑한데.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아.


‘그래! 여기가 무결의 고리인가 보다. 태왁님보다 내가 먼저 무결의 고리에 들다니! 그렇다면, 지금 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존재인가?’


커다란 날개가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산들바람이 느껴졌다. 날개는 미사랑의 몸을 통과해 멀어졌다. 다른 날개가 다가와 두 개의 날개는 하나가 되어 지나갔다.


어느새 인간세가 주변을 감쌌다.

그녀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인간세 한가운데 떠 있었다. 하늘의 성물을 다루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천선계의 성물이 왜 인간세에 있지? 사람이 성물에 손을 대면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저것들은 즐거워 보이네. 천선계의 기운과 인간세의 기운이 만나니 보기 좋구나. 후광까지 만들고. 세상이 이렇게 따뜻했나.

‘아, 좋다.’


공간 속의 세계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 차원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을 넘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무지갯빛이 점점 퍼지더니 공간을 뒤덮었다. 수천의 빛깔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점점 하얗게 바뀌다 빛으로 갈무리되더니 마침내 폭발했다.


빛이 지나가니 어둠이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깊은 어둠이 공간을 채웠다.


‘이건 미래인가? 아니면 과거? 혹시 다른 차원?’


미사랑이 생각을 멈춘 사이 어둠 속에서 또다시 빛이 폭발했다.

태초의 천선계가 태어나고 삼신성이 나타났다. 인간세가 생겨나고 별들이 작은 생물처럼 쉬지 않고 바뀌어 갔다.


미사랑과 율명, 여라함의 혼이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태어나 미타지산 담월곡에 드러났다.

‘저건 나잖아? 이쪽에 잠들어 있는 나는 뭐야?’


미사랑은 잠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몸을 돌리지 않아도 생각만으로도 시선을 바꿀 수 있었다.

잠들어 있던 미사랑이 산산이 가루가 되더니 반짝이며 공간에 스며들었다. 무지개가 떴고 점차 공간을 뒤덮었다.


그곳에 다른 모습의 미사랑이 나타났다. 모습이 달라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개가 지나고 칼날이 지나가고, 무지개가 하얗게 바뀌며 또다시 빛의 폭발로 이어졌다. 모든 사건이 순서 없이 반복되었다.


‘알았어. 여기는 차원의 정수구나! 차원은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순간에 보니까 뒤죽박죽일 수밖에. 내가 미래나 과거라고 아는 것을 한 번에 보는구나.’


차원의 정수는 처음과 끝의 모든 시간과 사건을 갖고 있었다.

차원조차도 태어나서 자라고 무너지고 다시 태어났다. 어디서부터가 과거이고, 어디까지가 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그곳의 기억은 실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암호처럼 형상이 엉켜 어렴풋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을 담았으므로, 미사랑은 읽을 수 없었다.


‘여기선 나도 그저 작은 조각이네. 살아있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조그맣게 살아가는 조각.’

우주가 별을 낳고, 별이 움직이는 존재를 품고, 그 존재 안에 생명을 가진 조직들이 꿈틀거리고, 그 안에 다시 작은 세포들이 태어나듯.


편안했다. 영원히 이 공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어디선가 애타게 미사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간절히 미사랑을 찾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여하?’

분명히 여라함의 목소리였다.


또 내 걱정을 하는구나. 여하라면 여기서 같이 지내도 좋겠는데. 이건···,

태왁님의 소리? 진백성님도, 영진성님도 함께 계시네. 삼신성님이 다 같이 부르시다니···.

어쩔 수 없지. 정말 깨어나야 하나 보다.


*


암흑성 태왁은 미리내와 별의 무덤 경계에 서 있던 모두를 노각부줄로 옮겼다. 그곳에 미사랑의 기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과연 미사랑은 노각부줄 입구에서 잠들어 있었다.


“미사!”

여라함이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정말 미사랑이 사라질까 봐, 그것이 환영이 아니라 사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다시 보니 더없이 고마웠다.


끝을 모르고 잠든 채 깨어나지 않는 미사랑을 보며 태왁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지우려 하자 진백성 주다가 그의 손을 막았다.


“그럴 필요 없어, 태왁. 차원의 정수에서 나오는 순간 그곳에서 본 것을 모두 잊는다고 들었어. 억지로 기억을 지우려다가 오히려 기억이 왜곡될 거야.”

“그렇군. 그렇다면 미사에게 맡기는 수밖에.”


미사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둘러싼 삼신성을 보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 근육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저, 또 야단맞나요?”

태왁이 짐짓 화가 난 듯 미사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찔끔 눈물이 나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의 자국을 쓰다듬었다.


“너희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구나. 무슨 삼신성 후계자가 이토록 말썽만 부리는가.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태왁의 말에 우지개가 입술을 안으로 오므리며 힘껏 웃음을 참았다.

“그렇고말고. 우린 얌전하게 수련만 열심히 했어.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지.”


“세상을 지키는 데 재미를 찾으면 안 되지.”

진백성 주다도 웃음을 참느라 목을 가다듬으며 소매를 휘휘 저었다.


율명은 그런 진백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의 전부인 진백성을 지키고 싶었다. 주다와 진백성단의 모든 것을.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율명의 영혼은 순수하고 맑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사랑을 보면서도 이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어둠에 삼켜진 빛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암흑성단은 온통 푸른 숲이어서 화사하고 향기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별의 무덤에서 밀려드는 엷은 안개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천인들에게 진백성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암흑성은 정신적 지주였다. 삼신성이 가진 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력보다 소중한 것은 암흑성의 존재 그 자체였다.


저절로 생겨난 천인도 있지만, 선대 암흑성의 배려로 천인이 된 영혼도 많았다. 그런 천인과 선인이 천선계에 두루 퍼져있기에 그들에게 암흑성은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암흑성의 역할을 이어가야 하므로 미사랑을 위한 태왁의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지금의 삼신성이 무결의 고리에 들면 암흑성단뿐만 아니라 천선계를 보살피는 역할도 해야 했다.


태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멩이 같으니, 이 일을 어쩐다?’


어린 미사랑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말썽을 일으키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대체 왜 저런 아이를 암흑성이라고 낳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암흑성 태왁 앞에 꿇어앉은 미사랑은 입술을 쫑긋거리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벌을 내리시려나. 빨리 끝내는 게 좋은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지만, 손가락과 발가락을 쉬지 않고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태왁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큰 목소리로 호통쳤다.


“금지된 벽에는 가지 말라 했거늘. 율과 여하까지 데려가다니. 잘못한 걸 아느냐?”

“예. 잘못했습니다.”

일단 미사랑은 다짐하듯 크게 외쳤다.


“주다님이 무결의 고리에 드는 걸 율이 너무 슬퍼해서요. 저도 태왁님이 떠나는 것이 싫거든요.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서···.”

미사랑이 고개도 들지 않고 우는 시늉을 했다. 눈물을 훔치는 것처럼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영원히 저랑 같이 사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누가 너랑 같이 살고 싶다더냐? 우리는 무결의 고리에 들기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너희가 그렇게 늦게 오지만 않았어도 벌써 떠났을 거다.”

“태왁님도 제가 없으면 무척 심심하실 텐데요. 무결의 고리라니 이름부터 재미없잖아요?”


“네가 없으니 발 뻗고 살 수 있겠구나.”

“맞다! 저도 나중에 무결의 고리에 들 테니 우리가 다시 만나겠군요.”

“허!”

태왁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암흑성 태왁은 눈자위를 문지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금지된 벽에 함부로 들어갔으니 벌을 받아야지. 율과 여하도 벌을 받고 있다.”


미사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 친구들은 잘못 없어요. 제가 가자고 한 거예요. 벌은 제가 받을게요.”

“그 녀석들은 행여나 네가 무거운 벌을 받을까 봐 직접 벌을 청했으니 그리 알아라. 이번에는 네 잘못이 크구나.”


미사랑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왕 벌 받는 거, 같이 하면 좋은데. 그럼 재미있을 텐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암흑성이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또 무슨 꿍꿍이냐. 당장 영천옥에 가서 슬픈 영혼을 찾아내도록 해라.”


“예? 영천옥이오? 제가 가도 되나요?”

“왜, 싫으냐?”

“아니오, 벌이라고 해서 엄청 긴장했거든요.”

미사랑이 어깨를 들썩였다.


영천옥에서 슬픈 영혼을 찾는 것은 암흑성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자 소명이었다. 지금까지 준비가 안 되었다는 이유로 영천옥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암흑성의 일을 맡다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벌을 주시는 줄 알았더니 이런 큰일을 맡기시고. 헤헤. 역시 태왁님은 인자하셔.’


미사랑이 저린 발을 꼼지락거리자 태왁은 어서 나가라고 손을 까딱였다. 미사랑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뒤뚱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어린 암흑성을 보며 태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참에 통과의례를 겪는 것도 괜찮겠지. 슬픈 영혼을 찾다 보면 미사도 많이 변할 거야.’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나 지금처럼 명랑한 모습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슬픈 영혼을 찾는 일은 암흑성을 성숙하게도 하지만, 끝없는 절망을 느끼게도 했다.


태왁은 다박수염을 쓰다듬으며 멀리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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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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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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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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