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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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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7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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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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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랑누_재회의 약속

DUMMY

세 명의 나그네와 나귀 한 마리는 오랜 여행으로 초췌해 보였다.

산등성이를 돌아가는 걸음은 느리고 무거웠으며 숨소리도 고르지 못했다. 나귀 등에 앉은 까마귀만은 여전히 쌩쌩했다.


상재믈국과 소천국의 경계가 되는 준령고원을 지나 갈래산을 넘어왔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심하게 몸살을 앓을 것이다.


온설지는 백호족인데다 호설이 나오는 시간 동안 오롯이 쉬기 때문에 강행군도 버틸 수 있었다.

아랑누는 신령석과 지팡이가 지켜주고, 그동안 흡수한 혼 조각으로 쉽게 지치지 않았다.


문제는 이연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힘들지만, 걱정을 끼치기 싫어 내색하지 않았다.


온설지와 아랑누가 짐을 나누어 메고, 이연이 나귀를 타고 다녔지만, 마음이 불편하니 몸도 따라 힘들었다.

나귀 보리의 등에서도 편히 쉬는 건 도조뿐이었다.


“꼬맹아, 정말 괜찮아? 오늘은 여기서 쉴까?”

온설지는 더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지 물었다.


이연은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저 멀쩡해요. 지금도 많이 늦었잖아요. 빨리 이스락성에 도착해야죠.”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무아의 넋이 힘을 잃어서 연이한테도 영향이 있는 걸까?’

아랑누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연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산에서 하루를 더 머무는 것보다 제대로 된 여인숙에서 충분히 쉬는 것이 절실했다. 빨리 이스락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잡이 구름은 서남쪽 하늘에서 무심히 흔들렸다.


준령고원에서 내려다보니 소천국의 대부분은 안개에 싸여 온통 하얗게 보였다. 이스락성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갈래산에서 내려와 해변에 들어서자 장벽처럼 서 있던 안개가 물러나고 좁은 길이 또렷하게 보였다.


바다에서는 다른 안개가 옅게 피어났다. 대기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안개가 아니었다. 바다의 다른 존재가 만들어 보내는 안개였다.

아랑누는 안개를 손으로 훑으며 알 수 없는 기운에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온설지가 안개로 덮인 땅을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그쪽이 아니라 저쪽.”

아랑누가 바닷가를 따라 난 오솔길을 가리켰다. 이스락성 동문으로 가는 길이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호설이 나올 시간이라 온설지는 걸음을 멈추고 바닷가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가는 쪽은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오솔길을 따라 자라났다. 다른 쪽은 해풍나무가 빼곡히 숲을 이루었다.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해변 끝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 앞으로 길이 이어졌다.


“좋아, 오늘은 저 숲에서 쉬자, 내일 아침 일찍 이스락성으로 들어가는 거야. 자리를 잡아놓을 테니 천천히 따라와.”

온설지는 밤을 보낼 곳을 찾아 해풍나무 숲으로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랑누는 해풍나무 숲에서 낯익은 기운을 느꼈다.

‘스승님?’

자세히 보기 위해 멈추어서서 영안을 집중했다.


신비한 기운이 어른거렸다. 형체 없는 기운이 흩어졌다 모이며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 기운이 어딘지 세운랑 원로와 비슷했다.

흔들리던 기운은 이내 사라지고 숲은 고요해졌다.


‘스승님이 여기 계실 리 없지. 모여사원이 그리워서 잘못 본 거야.’

아랑누는 온설지가 간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모여사원과 세운랑 원로가 가득 들어찼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숲으로 들어섰다.


*


서늘하고 잔잔한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환상이 다가왔다.

아랑누의 꿈속은 온통 연두와 초록빛으로 윤기가 흐르고 싱그러웠다.


초록으로 뒤덮인 숲에 황금색 열매가 주렁주렁 맺혔다. 황금 기둥을 지나 까마득히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였다.


아랑누는 그것이 바로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꿈으로 보지만, 이 꿈이 미사랑의 기억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았는데 웬일이지? 미사랑이 살던 곳인가? 아···, 아름다워.’

엷게 깨어난 의식은 다시 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혼자 서있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회빛과 잿빛이 섞인 머리카락이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내려왔다. 어깨는 다부지고, 허리는 날렵했다.

그녀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초록 숲을 내려다보았다.


‘이 아름다운 천계를 오랫동안 못 보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쓸쓸했고, 어딘지 슬퍼 보였다.


‘두려워. 다시 올 것을 알면서도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잃어버릴 시간이.’

그녀가 고개를 조금씩 이쪽으로 돌렸다.


‘지금의 나는 사라지겠지. 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다시 올 때는 이 모습이 아닐 테니까.’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작고 오뚝한 콧날과 맑은 눈망울이 보였다. 우아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돌아섰다.

‘암흑성은 영혼을 돌볼 의무가 있어. 두렵다고 도망치면 진정한 암흑성이 될 수 없어.’


이제 그녀는 똑바로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큰 눈과 짙은 눈썹이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지, 아랑누?’


숨이 턱 막혔다. 눈가리개 밑에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 아랑누?’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미사랑이야. 그럼 그곳이 암흑성단인가?’


손을 가슴에 얹고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비장하면서도 애처로웠다. 애틋하고 서글픈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람과 공기는 아직 한밤중이라고 알려주었다.

파도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바닷가 자갈밭에 호설이 있었다. 호설이 소리 없이 아랑누를 불렀다.


“호설, 오늘은 멀리 가지 않았구나?”

“작별 인사를 하려고 기다렸다.”

“작별이라니? 어디 가려고?”

“정령의 땅에 왔으니, 이제 시공간을 합칠 때가 되었다.”


아랑누는 호랑이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이 만져졌다.

“그럼 돌아가자. 방향을 바꾸면 길잡이 구름이 다른 길을 알려줄 거야.”

“이미 들어섰고, 여기 온 이유가 있으니 다른 선택은 없다.”

“호설···.”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거대한 호랑이가 없는 여행은 생각한 적 없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호설이 지켜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런 호설이 사라진다니.


“어디로 가려고? 함께 가자.”

“온설지에게 흡수되는 것이니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호설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았다. 앞다리를 세우고 등을 곧게 폈다. 흰 꼬리 끝이 바람을 지키며 까딱거렸다.


“때가 되었을 뿐이다. 온설지가 원할 때 호랑이가 될 수 있으니, 내 힘을 가질 것이다. 네게는 더 큰 힘이 될 거다.”


“호설,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

“이번 삶이 끝나면 다시 태어날 거다. 다른 모습으로. 그때 넌 미사랑이 되어 날 알아보겠지. 여하가 언제나 날 알아보듯이. 지금은 잠시 멀어질 뿐, 다시 만날 거다.”


호설은 아랑누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여기서 일을 끝내면 불라국 유리산을 찾아가라.”

“유리산? 시조새가 산다는?”

“네 질문에 답해 줄 존재가 거기 있다.”


아랑누는 호설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이 바닷바람에 살랑거렸다.

‘온설지와 시공간을 함께 쓰면서 여기까지 온 것도 미사랑과 이어진 일이겠지? 호설과 미사랑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마음 편하게 보내야지.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까.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호설, 널 꼭 찾아낼게.’


“호설은 참 좋아. 아저씨 같기도 하고 친구 같고, 때로는 오빠 같아.”

“너 같은 조카나 동생은 둔 적 없다.”

“그건 내 마음이지.”

아랑누는 소리 내어 웃었다.


호설도 아랑누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등을 구부렸다. 바닷바람이 차가워졌지만 춥지 않았다.

헤어짐이 정해진 순서라면 잠깐의 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밤은 깊어가고 별은 더 밝게 빛났다.


*


이스락성은 성벽이 따로 없었다. 그저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몇십 개의 마을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아랑누는 바닷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목적지가 보이니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힘이 나지 않았다.


온설지에게 겹쳐 보이던 호설의 기운도 보이지 않았다.

호설의 빈자리가 아쉬워 한숨만 내쉬었다. 정작 그는 모르지만 오늘 밤이면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호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몰라.’

서투른 기대에 젖어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조용하던 바닷가에 도조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눈사람! 여기 사람이 있다! 여자가 쓰러져있어!”

까마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설지가 바닷가로 뛰어갔다.


여자는 정신을 잃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팔다리에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비쩍 마른 몸에 맨발로 머리는 심하게 헝클어졌다.


‘이건 발작을 일으킨 거야. 자해한 상처인데?’

여자의 기운을 읽으며 영안에 힘을 모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망령이 깃들지는 않았다. 그 안에 회한과 비탄이 커서 다른 기운은 읽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이 병이 깊다면 그것은 귀령송환사의 능력 바깥의 일이었다. 서둘러 의원을 찾아야 했다.


이연이 나룻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뱃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아저씨! 여기 사람이 쓰러져있어요. 의원이 어디예요?”

“에고, 또 누가 도망쳤구만! 공량원으로 가보슈.”

“공양이요?”


“저기 바위언덕을 돌아가면 있을 거요. 공량원이라고. 거기 환자일 거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나이 많은 뱃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그물로 시선을 돌렸다.


이연과 온설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를 맞대고 솟은 바위벽이 보였다. 오층 높이의 바위벽 꼭대기는 푸른빛이 선명했다. 바위언덕은 정령의 안개와 경계이기도 했다.


온설지는 여자를 안고 앞장서 뛰어갔고, 이연은 나귀를 끌고 종종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도조도 이연을 따라갔지만, 아랑누는 뒤에 남아 지팡이를 잡고 서서 바위벽 위 풀밭을 바라보았다.


푸른 풀밭은 약초밭이었다. 오르내리는 길도 없는 절벽 위에 약초밭이라니.

아랑누의 영안에는 정성 들여 가꾼 주인의 손길이 또렷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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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아랑누_공량원 22.07.23 38 0 12쪽
» 아랑누_재회의 약속 22.07.23 33 0 11쪽
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6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8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5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5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5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5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6 1 12쪽
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9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8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8 1 10쪽
133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6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1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2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4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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