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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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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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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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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예기치 못한 모임

DUMMY

파도가 가라앉자 요동치던 참수리호도 균형을 찾았다.


아이들은 엄마의 무릎을 베고 쌕쌕 코를 골았다. 젊은 부부도 선실 벽에 등을 기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 맞아. 찬, 멀미는?”

다루영은 뒤늦게 생각난 것이 미안해 얼굴을 붉혔다.


해무찬이 입맛을 다셨다.

“그게 말이야. 놈들이 들이닥친 순간 쑥 들어가더라고. 바닷물이나 내 뱃속이나 똑같이 울렁거렸는데···.”


다루영은 안심하며 웃었지만 사로잔은 입을 비쭉거렸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지.”

“간단하잖아. 우리 넷에 이곤과 여기 나루뫼만 있으면 문제없어.”


나루뫼는 구석에 박혀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관심 없소.”


“곧 관심이 생길 거요.”

사로잔이 주머니를 뒤적여 수첩을 꺼냈다.


용각국을 떠나기 전부터 갖고 다닌 수첩에는 고치고 덧붙인 흔적이 가득했다. 손때도 많이 묻었고, 빈 곳마다 자잘한 글씨가 가득 찼다.


“가락국의 도적 두목에게 현상금이 걸려있거든.”

사로잔이 수첩을 뒤적이는데 선잠에서 깨어난 남자가 끼어들었다.


“두목 한 명에 황금 한 자루씩입니다.”

“한 자루? 자루 크기가 어떻게 되지?”

아순치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남자에게 몸을 기울였다.


“어른 머리만 하다고 했어요. 우두머리가 셋이니 세 자루라고요. 그런데, 우리 살 수 있는 거죠?”

울상이 되어 말하는 남자와는 달리 해무찬의 눈빛이 빛났다.


“현상금! 당연히 우리 거네.”

“바로 그거지!”

사로잔이 수첩을 탁 덮고는 해무찬과 손바닥을 마주쳤다.


소리가 너무 커서 아이들이 깜짝 놀라 깨어날 정도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지만, 다루영과 아순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또 시작되었어. 또.’


“어떻소? 같이 받읍시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월영국에서도 용병으로 나섰잖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오?”

나루뫼는 사로잔을 흘끗 보고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곤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흡 소리를 냈다.

“이분은 아무래도 사로잔님 때문에 오신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모두의 눈이 이곤에게 쏠렸다. 그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배에 타기 전부터 사로잔님을 지켜보더라고요. 그때는 닮은 사람이랑 착각해서 그러나 싶었죠. 몸짓이 예사롭지 않아 궁금했는데, 무사님들과 함께 일했단 말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아순치와 해무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를 감시한다면 보물 사냥꾼이거나 같은 사명을 가졌을 거야. 어느 쪽이지?’


나루뫼는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일자리를 찾던 중이었소. 당신을 감시하면 두둑히 챙겨준다기에.”

남의 말을 하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로잔은 그의 눈길이 머무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흘끗거린 것이 이것이었나? 이 무늬가 무엇인지 아는 자로군.’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얼마를 받는지 모르지만, 그 두 배를 주겠소.”

“어이, 사로.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아순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로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당당했다.

“현상금 받을 거잖아. 거기서 나누면 돼. 어때?”

“괜찮은 생각이네. 그런 자세 좋아.”

아순치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루뫼는 코웃음을 쳤다.

“돈에는 관심 없소. 하지만 함께 하겠소.”

“그건 또 무슨 논리야?”

해무찬이 턱 밑에 손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의뢰인에게 상대가 안 되거든. 상대가 누군지도, 이유도 모르지. 아무래도 당신이 지는 싸움이니까. 당신 편에 서겠소.”

나루뫼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그가 용병으로 나서는 이유였다.

약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패배하는 세상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힘없는 약자 편에 서면 목숨은 더 위험하고, 보수는 덜 받지만 이겼을 때의 쾌감은 그 이상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암흑성이나 진백성이나 똑같이 천계의 일이었다.

어차피 천계의 일에 관여해야 한다면, 당연히 아무것도 없이 쫓겨난 약자를 선택한다.


의뢰받은 여인은 자신이 암흑성의 혼 조각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진백성의 호위무사에게 위협받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일일이 설명해 줄 나루뫼가 아니었다. 흥, 콧소리에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


해무찬이 뛰쳐나온 벽과 반대편 역시 얇은 벽이 선실을 나누었다. 그곳에서 벽에 바짝 등을 기대고 그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선사 하날에게는 사로잔이 있는 선실의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리만 들어도 누가 말하는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인간세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지만, 그의 목적은 어느새 용족 여인으로 좁혀졌다.

다루영이라는 순수 용족의 여인. 사마와 반나를 너무나 닮은 모습에 치유의 돌이 네 개나 그녀의 허리띠에 머물렀다. 확실히 평범한 용족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밀려다녔지만,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방으로 들어왔다.


*


해무찬이 대금 불 듯 손가락을 차례로 움직이더니 소리쳤다.

“자장가를 연주하는 건 어떨까? 아치의 피리가 있잖아!”

다루영도 피리 혜윰을 생각해내고 손뼉을 쳤다.


한울에게서 받은 피리였다. 혜윰의 재주가 짐승을 길들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엄안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우리도 연주하다 말고 잠들었잖아? 하마터면 산짐승의 밥이 될 뻔했다고. 절대 자장가는 안 돼.”

사로잔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순치가 밤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겠다고 할 때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깨어났을 때 주변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것도 좋겠네. 우리는 귀를 막으면 되고.”

아순치가 피리를 감싼 천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의견을 내도 될까요?”

이곤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조용히 앉아만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여니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나루뫼조차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곤이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혹시 누리예 장군 아세요? 장공거에서 수련했다던데요.”

“누리예? 처음 듣는 이름이오. 그런 사람도 있었나?”


“그 사람이 누구인데?”

아순치의 질문에 이곤이 소리를 낮췄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거든요.”


이곤은 말없이 사로잔의 수첩에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위에 ‘운화도’라고 썼다.

운화도는 가락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었다. 섬이라고는 해도 과희국 영토의 절반과 맞먹을 만큼 넓은 곳이었다.


그는 동그라미의 왼쪽 아래에 작은 점을 찍고 ‘서내을’이라고 썼다. 운화도의 남서쪽에 있는 항구로 해안이 넓고 큰 배가 드나들기 편리해 대륙간 경유지로 유명했다.


이곤은 동그라미 중앙에 무성산이라 쓰고, 오른쪽에 점을 찍고 ‘가농’이라고 썼다.

지도를 완성하자 손가락으로 배의 항로를 그렸다.

“이 배는 분명 여기로 갈 거예요. 서내을 말고 도적소굴이 또 있다고 들었지만, 정확히 어딘지 못 찾았거든요.”


그가 수첩을 사로잔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회에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죠.”

“뭐야? 그런 거였어? 역시···.”

해무찬이 자신의 목덜미를 누르며 이리저리 목을 돌렸다.


“여행일 리 없다고 생각했어. 친위대가 이 정도 휴가를 주는 곳이 아니거든.”

아순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채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미리 알아보려 했는데, 마침 잘 걸린 거죠.”

“지금 이 상황을 마침 잘 이라고 하다니 대단하군.”

해무찬이 이곤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곤이 두 주먹을 모으고 악사들을 둘러보았다.

“무사님들 실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걸 압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로잔이 이곤의 손을 잡아 가운데로 옮기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당연하지. 바라던 바야.”

“사로가 한다면 무조건 따를 거야.”

다루영이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해무찬도 다루영의 손에 손을 얹었다. 다루영과 해무찬이 마주보고 미소 지었다.


아순치가 콧잔등에 힘을 주며 손을 얹었다.

“그럼 나는 현상금을 위해.”


“좋습니다. 이제 우리 사정을 알려야죠.”

이곤은 봇짐을 열었다. 도적들의 횡포에 엉망이 된 보따리 안에는 깃털이 하나 들어있었다.

흰색에 황금색이 섞인 것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깃털이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든 가족과 구석에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나루뫼를 제외한 네 명의 악사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는 깃털을 꺼내들고 현재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광검국의 존준과 가락국의 대현부가 서로 돕다니···, 바람직한데?”

사로잔이 반가워하자 이곤도 기뻐하며 말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고, 현무 간미후도 광검국의 경치를 마음에 들어 했대요.”


해무찬이 실웃음을 지었다.

“공동의 적이 없으면 적이 되겠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요귀를 상대해야 하니까.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을 막아야 하니, 존준과 대현부가 서로 도울 수밖에.”


“요귀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처단해야 할 대상임은 분명해.”

사로잔이 다루영을 대신해 힘찬 목소리로 강조했다. 다루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네 명의 악사는 사라진 용각섬부터 홍석산의 사음귀, 마른 협곡의 망석까지 그동안의 모험을 하나씩 떠올렸다.


배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이곤이 일어나 작은 환기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선두가 천천히 방향을 틀자 작은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살폈다.

“운화도 서쪽, 가농 근처일 겁니다.”


환기창을 열어 깃털을 날려 보냈다. 깃털은 잠시 허공에 머물더니 바람을 부르며 하늘 위로 날아갔다.


아순치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저, 저거 혹시 익족의 날개?”

“아시는군요!”


“이곤, 진짜 정체가 뭐요?”

아순치가 이곤의 손을 휙 낚아챘다.


“나도 못 만난 광검국의 익족을 보았단 거요? 응?”

“아하하, 어쩌다 보니···.”

이곤이 말끝을 흐렸다.


아순치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의 손이 목에 걸린 유리구슬로 향했다.


광검국 존준이 그토록 아끼는 익족까지 만났다면, 그저 그런 친위대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거대상단 소단주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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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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