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007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20 06:00
조회
35
추천
1
글자
12쪽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DUMMY

우주의 기둥 바로섬은 천선계를 지키며 우뚝 서 있었다.


바로섬 꼭대기는 어린 삼신성이 가장 좋아하는 쉼터였다. 회합의 바위 리우에 앉아 바라보는 세계는 언제나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공명의 들판 아름누리를 사이에 두고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 끝으로 암흑성단과 진백성단이 내려다보였다.

선계의 영진성단은 바로섬 바로 아래 아늑하면서도 장엄하게 펼쳐졌다.

시야의 가장자리에서는 별의 무덤이 보일 듯 말 듯 까마득히 천선계를 감싸주었다.


어린 삼신성은 리우에 모여 천선계를 내려다보았다.

별의 무덤을 바라보던 미사랑이 허공에 손을 뻗어 바구니를 꺼냈다. 암흑성단에서 나오기 전에 준비해 놓았다.


바구니에 가득 담긴 돌과자를 보자 여라함이 눈썹을 찌푸렸다.

“미사, 또 찬주방에서 훔쳐 왔어?”

“훔쳤다기보다는 가져온 거야. 어차피 먹으려고 만든 거잖아?”

미사랑은 박자에 맞춰 다리를 까딱거렸다.


“찬주방 천사가 엄청 놀라겠는걸. 이렇게나 많이 가져오다니.”

“그치만 돌과자가 너무 좋아.”

미사랑이 돌과자를 한 움큼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여라함도 하나를 집어 들고 공중으로 던져 입으로 받아먹었다.


율명에게도 건넸지만, 시무룩한 얼굴로 회강석 팔찌만 만지작거렸다. 미사랑이 그의 축져진 어깨를 툭 건드렸다.


“왜 그래? 주다님께 야단맞았어?”

“아니.”

“혹시 전에 수련 빼먹고 놀러 간 거 들켰나?”

“아니야.”

율명이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미사랑의 얼굴 앞에서 휘휘 저었다.


미사랑은 율명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럼, 노각부줄까지 나간 게 문제였나?”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그럼 뭐야? 왜 혼자 울상인데?”


어린 율명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어깨는 그대로였다.

“너 알아? 우리가 생겨났기 때문에 삼신성이 무결의 고리에 들어가는 거 말이야.”


“응? 내가 아는 거랑 다른데?”

여라함이 크고 맑은 눈으로 율명을 바라보았다.

“삼신성이 무결의 고리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 우리가 생겨난 건데?”


“음···. 그게 그건데 묘하게 다르긴 하다.”

미사랑이 중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율명은 며칠 동안 끙끙 앓던 문제를 털어놓았다.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삼신성님은 여기 계속 머무실 거라고.”

“그래서 율이 속상하구나. 주다님을 굉장히 좋아하니까. 진백성님이 계속 같이 계시면 좋겠지?”

미사랑이 율명에게 돌과자를 건넸다.


과자를 받아 만지작거리면서 율명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우리 세계가 불완전해서 그래. 만나고 헤어지고,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순리라는 거야. 하지만 난 주다님과 헤어지는 거 싫어.”


“응. 나도 태왁님과 헤어지는 건 싫어. 헤어지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미사랑이 율명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토닥거리며 여라함에게 눈짓했다.


여라함이 한참 끙끙거리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결의 고리를 막는 건 어때?”


미사랑이 환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나도 무결의 고리가 뭔지 알고 싶었어. 거기로 들어가면 어디로 이어질까? 나중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거 무척 궁금했어.”


“하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율명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사랑이 입을 쫑긋거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나 알 것 같아. 금지된 벽! 그래서 금지된 거 아닐까?”

“뭐? 너, 너는···.”

여라함이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아 다시 앉혔다.


‘거긴 안 돼. 율을 달래기만 하면 되잖아. 진짜 가려고?’

‘응.’

천진난만하게 웃는 미사랑을 보며 여라함은 바위가 무너진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미사랑의 엉뚱함을 막을 존재가 있기는 할까. 고개를 푹 숙였다.


“우주에도 끝이 있을 거 아냐. 세상의 끝. 무결의 고리가 있을 곳은 거기밖에 없어.”

“거긴 가면 안 돼.”

율명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라함은 율명의 대답이 기뻐서 미사랑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없이 환호를 질렀다.


“주다님이 가지 말라고 했어. 이유가 있을 테니 가면 안 돼.”

“오, 율. 정말 착한 아이구나.”

미사랑이 율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나만 살짝 가볼게. 뭐가 있는지 갔다 와서 알려줄게.”

미사랑은 호기심에 가득 차 싱글생글 웃으며 돌과자 바구니를 여라함에게 건넸다. 이미 몸이 사라지고 있었다.


여라함은 부리나케 미사랑의 손을 잡았다. 뒤늦게 그의 손을 잡아끌던 율명마저 모습을 감추었다.


바구니가 구르면서 남아있던 돌과자가 산산이 흩어졌다. 바구니는 회합의 바위 아래 떨어져서야 멈추었다.


*


삼신성이 아이들을 찾아 바로섬 꼭대기에 나타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영진성 우지개가 바위 아래에서 바구니를 찾아들었다.

“여기서 사라졌어.”


“이번에도 분명 미사가 주동했겠지. 허참.”

암흑성 태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동쳤다.

항상 힘이 넘치는 미사랑 때문에 태왁은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걱정하지 마. 미사는 노각부줄과 바로섬이 선택한 아이니까 별일 없을 거야. 빨리 찾아보자고.”

진백성 주다는 아이들이 걱정되면서도 이번에도 깨달음을 얻어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장난만 치는 것 같으나 실수하고, 다치면서 점점 삼신성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말썽에 곤혹스러우면서도 안심하는 이유는 세 아이의 사이가 좋다는 것이다. 말썽을 부릴 때도 항상 셋이 함께였다.

삼신성의 사이가 좋아야 우주가 평안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것 같았다.


“이래서 어디 마음 놓고 무결의 고리에 들겠어?”

태왁이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은 무결의 고리에 들어가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하긴. 선대 삼신성은 미리내가 우주를 일곱 번 바꾸기 전에 무결의 고리에 들었는데, 아홉 번이나 별갈이를 하고도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 지루한 시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우지개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빨리 물려줘야지. 일단 아이들부터 찾자고.”

그들의 모습도 회합의 바위에서 사라졌다.


빈 바구니만 바람에 끄떡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


어린 삼신성은 별의 무덤을 돌아 금지된 벽 앞에 섰다. 미사랑이 손을 대니 벽은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르 열렸다.

“뭐야? 금지된 벽이라면서 주문도 결계도 없어.”


“그게 더 수상해.”

율명은 미사랑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 걸음 물러섰다.


‘주다님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율명은 약속을 깨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동안 진백성을 난처하게 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신 때문에 무결의 고리에 든다고 알아낸 지금도 그녀의 뜻을 거역하는 것 같아 가슴이 죄어왔다.


어린 삼신성이 들어서자 벽은 소리 없이 닫혔다.


짙은 안개와 연기로 가득한 공간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분명 같이 들어섰지만 셋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있었다.


바닥도 천장도 없었다. 허공에 뜬 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몸이 둥둥 떠서 어딘가로 흘러갔다.


미사랑은 여라함을 불렀다. 불렀다고 생각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여긴 소리가 살지 못하는구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향기도 없고, 피부에 닿는 감각도 없었다. 그저 평화로웠다.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몸에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몸이 둥둥 떠다니니 무게도 없었다.


‘기분 좋은데?’

미사랑은 이내 허공에 물들어 편안하게 젖어 들었다.


몸이 녹아든 것 같아. 나른하고 평온해. 눈 뜨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도 다 보이는걸. 따뜻하고 다정한 힘이 느껴져. 율과 여하도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겠지.


미사랑이 기분 좋은 느낌에 한껏 젖어둘 때 율명과 여라함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


규칙적인 숨소리가 생명의 기운을 실어 대기를 타고 날아왔다. 아이들의 영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알아냈다.


태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별의 무덤이야.”

주다와 우지개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별의 무덤에 나타났을 때 율명과 여라함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미리내의 경계까지 밀려와 있었다.


우지개와 주다가 아이들을 일으켰다.

“율!”

“여하!”

아이들은 여러 번 흔들어 깨우자 겨우 눈을 떴다.


율명은 정신이 들자마자 자세를 바꾸어 무릎을 꿇었다.

“주다님, 잘못했습니다.”

“됐다. 다친 곳이 없으니 다행이구나. 어디 있었느냐?”

“금지된···.”

율명은 대답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여라함도 일어나 우지개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지개가 어깨를 다독이자 여라함은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사는요?”


여라함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미사랑을 찾았다.

우지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 여라함은 망연히 별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금지된 벽으로 다시 가야 해. 미사를 데려와야지.’


여라함이 달려가려 하자 우지개가 팔을 잡았다.

“무엇을 보았느냐?”

“예?”

“금지된 벽 안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말이다.”


여라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율명을 바라보니 그 역시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있었다.


태왁이 다가왔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너희가 본 것은 환영이다. 금지된 벽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몇십 배 증폭시켜 보여준단다. 거기서 본 것은 허상이니 마음에 담지 말아라.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라.”


“태왁님도 가보셨습니까?”

여라함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선대 삼신성의 기록에 적혀있다. 부디 미혹되지 말거라.”

여라함은 금지된 벽 안에서 본 것이 환영이라고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미사가 가루가 되어 흩어질 리 없어. 미사가 사라진 세상은 있을 수 없다고.’

여라함은 별의 무덤을 돌아보았다.

암흑성 태왁의 말을 되새기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난 미사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건가.’


영진성 우지개의 신력으로도 미사랑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린 암흑성이 정말 사라졌다면 미타지산 담월곡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우리 힘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차원의 정수에 있는 거다. 곧 돌아올 거야.”

우지개의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여라함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설마 차원의 정수에서 영영 못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빨리 뛰었다.


진백성 주다는 침묵을 지키는 율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율명도 무언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금지된 벽이 율명과 여라함은 뱉어내고 미사랑만 삼키다니.


주다가 태왁을 돌아보았다. 태왁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선택받은 자의 운명···.”


율명은 그늘진 눈으로 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빛이 어둠에 완전히 파묻히고 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존경하고 사모하는 진백성 주다조차 그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환영일 뿐이라는 태왁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야. 금지된 벽이 이유 없이 그런 걸 보여줬을 리 없어. 이건 예견이야.’

율명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막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되면 안 돼.


주다가 율명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혹되지 마라. 네가 무엇을 보았건 그건 환상이다.”


율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4 아랑누_모함 22.07.24 38 0 11쪽
153 아랑누_적응 기간 22.07.24 31 0 15쪽
152 아랑누_공량원 22.07.23 38 0 12쪽
151 아랑누_재회의 약속 22.07.23 32 0 11쪽
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5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7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5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4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5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6 1 12쪽
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8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8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8 1 10쪽
133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5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2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3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