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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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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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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8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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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소환 명령

DUMMY

어느새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창고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기다 보니 밤을 새운 것이다.

누리예의 눈빛이 등불을 향해 고정되었다.


‘깃털, 백사귀파, 귀사전, 선사, 그리고 사로잔···.’

운화도에서 만난 징조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십육 년 전, 사로잔이 네 살 때 겪었던 사건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용각국의 비르삼이 친위대를 뽑기 위해 직접 장공거에 왔을 때였다.


수련생들의 시범을 준비하는 일 외에도 타내 대모는 비르삼과 수행원을 위한 접대에도 신경 썼다. 시범이 끝나면 비르삼이 타내와 대련을 부탁한 상황이라 대모는 정신없이 종종거렸다.


누리예는 처음부터 고향인 가락국을 위해 일할 생각이었으므로 시범에도 나가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진 것을 깨달은 건 시범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인이 타내에게 귓속말을 했고, 그녀는 조용히 누리예를 불렀다.


타내의 태도는 누가 찻잔을 깼다는 소식을 들은 것 마냥 담대했다. 누리예는 무심히 다가갔다.

‘사로잔이 없어졌다는구나.’

‘예?’

어린 누리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놀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찾아봐 주렴.’

타내는 한창 시범에 열중한 수련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르삼을 향해서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누리예는 미친 듯 장공거를 뒤지고 다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줄곧 자신을 따르던 아이였으니,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누리예는 뒷문으로 나가 숲길에 들어섰다. 길가에 아이의 머리띠가 떨어져 있었다. 곧이어 발자국을 찾아냈다.


나뭇잎과 풀잎에 남은 흔적을 따라 오솔길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장공거의 숲에 사는 새는 아니었다.

은은한 연둣빛에 황금 날개를 가진 새는 누리예가 다가갈 때마다 조금씩 물러서며 그녀를 기다렸다.


새소리를 따라 오솔길에서 벗어나 풀밭으로 들어섰다. 낯선 넝쿨이 봉긋하게 자라있었다. 처음 보는 잎과 줄기였다.


그때까지 그녀를 안내하던 여러 마리 새들이 한꺼번에 후드득 날아올랐다.


넝쿨 아래 사로잔이 잠들어있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도 사랑스러웠다.

누리예가 아이를 안아 올리자 넝쿨이 스르륵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풀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섬뜩하면서도 찌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보고 있으니 아이의 왼쪽 손등에 서서히 무늬가 생겨났다.

두 손으로 눈물을 받아드는 것 같기도 하고, 봉오리를 받쳐 든 꽃받침 같기도 했다.


비르삼이 돌아가고 나서야 타내는 다급하게 누리예를 찾았다.


새와 넝쿨에 대해 이야기하자 타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에게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면 안 된다. 미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미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두려운 것이니.’

스승의 부탁이 아니어도 그 경이로움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일 년 뒤, 광검국 빛의 축제에서 신비한 소리를 들었다.

타내와 함께 들었던 휘파람 소리.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가 그들을 다섯 살의 사로잔에게 안내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로잔은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누리예는 창고의 문틈으로 새어드는 여린 햇살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입술을 꼭 다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자랐을까. 보고 싶구나.’


스승인 타내 대모와 어린 사로잔의 얼굴이 구름 위로 스쳐 갔다. 전투가 끝나면 반가운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반나절이면 아티재에 도착한다.


누리예는 북서 은신처를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늘참도 문제없이 아티재로 올 것이다. 빨리 사로잔을 만나고 싶었다.


북서의 은신처에는 비상식량과 야영을 위한 장비가 놓여있었다. 군대와 비슷한 임시 초소였다. 백여 명 정도는 거뜬히 지원할 분량이라 누리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물건은 무엇을 위한 거지? 도적들을 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움막을 지키던 도적 패거리도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지키라고 해서 지킨다는 대답뿐이었다.


몇 개의 움막 중 하나에 앉아 누리예는 이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처 찾아내지 못한 은신처까지 처리하고 아티재로 간다고 했다.


이곤의 목소리 저편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곤! 드디어 두목을 잡았어!’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 사로잔일 것이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서성거렸다.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미조와 해무찬이 어깨동무를 하고 그녀가 있는 움막으로 다가왔다. 믈아치의 부장 미조 역시 작은 체격은 아니었지만 해무찬과 함께 있으니 어린 동생처럼 보였다.


누리예가 익족의 깃털을 탁자에 올려놓고 그들을 맞았다.

“이곤이 두목을 생포했다는군.”

“두목이 세 명이라고 했으니 둘만 더 찾으면 되겠네요.”

미조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해오름 부대도 합세하니 금방 찾아낼 겁니다.”

“빨리 끝내야지. 여기 오래 있을수록 우리가 불리해.”

미조와 누리예의 대화에 해무찬이 질문을 던졌다.


“두목이 세 명인 건 확실합니까?”

해무찬이 누리예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난꾸러기 같던 표정은 사라지고 용각국 소태장군의 눈빛이 돌았다.


미조가 눈을 껌뻑거렸다.

“확실합니다. 도적들조차 자신들의 두목이 세 명이라고 하니까요.”

“그렇습니까···.”

해무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누리예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무슨 단서가 있습니까?”

“여기 오기 전, 두목을 보았습니다. 저희가 거리의 악사이니 연주하러 끌려갔는데···.”


해무찬의 눈빛이 과거의 어느 시점을 찾아 고정되었다.

“그자가 백사귀파였습니다. 백사귀파는 조직에 우두머리를 하나만 둡니다. 그래야 내부의 다툼을 막을 수 있고, 정귀가 조종하기 쉬우니까요.”

그는 월영국 마른 협곡에서 들었던 서관 자홍의 설명을 그대로 옮겼다.


“그 말은, 세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는 겁니까?”

미조가 물었다.


“참수리호에서 나오기 전, 우리가 상의한 결론이 그겁니다. 두목이 셋이라고 하면 규모가 커 보이고 패거리를 이끌기도 쉬우니까요. 정귀에게 귀력을 받았으므로 최면과 주술도 가능할 겁니다.”


누리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걸 이 사람은 어떻게 알지?’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무찬이 주먹 쥔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다루와 제가 따로 가농으로 온 것도 그런 추측 때문이죠.”


누리예가 팔짱을 끼고 등을 한껏 구부려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놈은 알아내지 못한 은신처에 있었어. 우리가 찾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압니까?”

미조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용각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망석과 사음귀를 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딪친 것이라, 아마 여러분은 만난 적이 없을 겁니다.”


누리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번 작전은 상직 갈청이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고, 믈아치 부대도 차근차근 준비한 일이다. 대현부마저도 아끼는 동생 간미후를 찾기 위해 어렵게 강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백사귀파에 요귀까지 나오다니···.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완전한 희망이었다.

‘이 싸움은 무조건 우리의 승리야. 사로잔이 때맞춰 나타난 건, 바로 그런 뜻이지.’


해무찬은 누리예의 표정을 보며 잠시 기다렸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자 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의심은 익족의 깃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익족은 까다로운 새라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내주지 않는다는데, 그 말은 이번 일이 익족에게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누리예와 미조의 등골을 따라 얼음이 지나가는 듯 찌릿거렸다.


“사로, 아니 사로잔의 결론은 이겁니다. 우연은 없다는 것. 거대한 무대가 우리를 불렀으니 연극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해무찬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이 왜 은신처를 통해 물건을 옮겼는지 모르지만, 지금 할 일은 운화도를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죠.”


누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할 일을 해야지. 지금 바로 아티재로 출발하자고. 두목이란 자와 얘기해야겠어.”

그녀가 일어서자 미조도 따라 일어섰다.


해무찬은 싱글거리며 일어섰다. 용각국 소태장군의 얼굴은 어느새 벗겨졌다.


“그런데 혹시 서늬라는 분을 아시나요? 대장님도 장공거에서 수련하셨다니 아실 것 같은데, 사로가 가락국에 가면 찾겠다고 벼르고 있거든요. 어찌나 안달하는지···.”

“서늬라면···.”


누리예가 대답하려는데 바깥에서 고함이 들렸다. 감탄에 이어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움막 네 개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새가 내려앉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날개의 끝부분은 황금빛으로 물들어있었다. 황금빛 부리와 진갈색의 눈동자로 누군가를 찾았다.


“전령새?”

누군가 소리쳤다.


해무찬도 뛰어나갔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새는 본 적 없었다. 하늘빛이 반사되어 구름이 지날 때마다 은은하게 빛나며 시시각각 다르게 보였다.


‘뭐야? 소문으로는 머리는 용이고, 몸통은 사자라더니?’

그가 놀라는 사이 전령새라 불리는 익족이 누리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표정이 하얗게 바뀌었다.

누리예의 손짓에 부장 미조가 다가갔다. 해무찬의 발도 저절로 움직였다.


움막 안에 있던 깃털이 날아왔다. 깃털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누리예의 소맷자락으로 파고들었다.

“늘참에게 전해라. 노란 새가 둥지를 떠나 날개를 잃었네. 해가 지기 전에 쉴 곳을 찾아줘야 한다네.”


미조는 허걱 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출발하시죠.”


거대한 새가 한쪽 어깨를 내렸다. 누리예가 전령새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아쉬운 얼굴로 해무찬을 바라보았다.

“나도 장공거에서 수련했기에 사로잔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이름만으로 반가웠다고 전해주십시오.”

하얀 날개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해무찬이 까마득히 멀어지는 새를 바라보는 사이 미조는 부대원들과 함께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늘참을 만나야 했다. 누리예의 말을 알아들은 믈아치 부대원들의 손이 빨라졌다.


오직 해무찬만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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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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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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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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