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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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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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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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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전환 : 4일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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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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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가자 북으로

DUMMY

나라의 부는 보유한 금의 양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생산성 있는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국가의 부의 원천이다.


아담 스미스가 쓴 국부론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경식이 알고 있는 경제학의 전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조선의 북방에서 벌어지는 대중국 무역 VPN 작업장의 실태를 경식이 보면 순전히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난 돈 벌면 생산성 있는 곳에 투자를 하라고 제도를 만들고 있는데 왜 약탈을 하고 있냐고!' 라고 황당해 할 것이다. 사실 알았어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경식이 원인이다.


경식이 3년 동안 많은 것을 한 것 같아보여도, 사실 조용조 체제로 인해 시장경제로 전환을 억제 당하고 있던 조선의 경제력 봉인 상태를 풀고 조선을 전면적으로 시장경제 체제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잉여 자본을 투자해서 생산성 있는 공장 같은 것을 설립하고 돈을 번다...같은 자본주의적 개념은 기술적으로도, 사회 분위기적으로도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투자가 아예 안 발생하는 것은 아닌데, 아직은 토지를 매입해서 농사를 짓거나 기존 공납 때 바쳤던 물품들의 생산을 늘여 팔려고 하는 것 정도가 대부분이다.


한양 돗자리파 두목 한충순은 왕에게 직접 공장(工場) 개념을 배워서 실천한 것이고, 대부분의 조선인은 공장이라고 하면 장인이라는 뜻(工匠)인줄 안다.


물론 의미가 없는 변화는 아니다. 시장경제화는 조선 전국에서 수면 밑에 잠들어 있던 구매력들을 깨워서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경매 제도와 가격 공시 제도는 그것을 더 가속 시켰다. 전국의 가격이 보여서 어디로 뭘 나르면 얼마나 돈이 될지 확 보이게 됐는데, 상인들이 안 나설 수가 없다. 상인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뛰어들고 싶을 수 밖에 없다.


그로 인해 성종 시대 이래로 점점 퍼지고 있던 사치 풍조는 급격히 가속되었다.


그 결과 급격하게 해외의 물산, 특히 사치품들의 수요와 가격이 뛰어 올랐고, 상인들에게는 그런 물품을 약탈이나 밀무역을 해서라도 가져올 동인이 급증했다.


사실 원래 역사에서도 연산군 시절에 일어나던 일이긴 하다.


번리위무사가 야인들에게 초피를 약취하는 것도 사실 선례가 있다. 세종 시절부터 6진 지역으로 파견된 수령들은 항상 야인들에게서 초피를 과도하게 받아내서 자주 민심이반이 일어났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밀무역 역시, 성종 시대에 점차 확대된다.


해랑도를 통한 대중국 밀무역만 해도 이미 상습적으로 있었는데 조선 조정이 좀 더 일찍 인식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경식이 확대 시킨 사행무역도, 경식이 간섭하기도 전부터 명나라에서 '조선 놈들은 사신을 외교하려고 보내는거냐, 장사하려고 보내는 거냐?' 하고 욕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경식이 일으킨 변화들은 아직도 전부 원래 역사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약간 가속 시키고, 공식화하여 제도로 편입한 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 약간의 변화로도 충분했다.


이 시기 조선의 사치 풍조가 원래 역사에서는 왕실과 서울의 일부 사대부들만이 주도했던 일이라면, 경식의 조선에서는 서울 사람들 거의 전체와, 지방 도시의 부호들이 함께 일으키는 풍조라는 점에서 스케일이 급격하게 커졌다.


게다가 해동제국사와 번리위무사에게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50, 60년은 앞선 강력한 무기인 총과 대포를 마구 쥐어주었다.


지금 그들의 상대는 분열해 있는 여진족, 전란으로 피폐해진 일본의 작은 영주들, 중국에서도 보호 받지 못하는 중국 해적들이 전부다.


해동제국사와 번리위무사 입장에서 제일 쉽고 간단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 아이템은 약탈일 수 밖에 없다.


생산성 없는 약탈 따위나 하는 조선인이 경식 입장에서는 맘에 안 들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게 다 조선인들이 현대인들만큼이나 멍청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도 생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비트코인이나 부동산에는 빚까지 끌어당겨서 꼴아박지만,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템을 개발해서 사업을 하려는 창업가는 별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게 안 좋다고 알고 있는 건 미래인인 박경식 정도고, 지금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그러니까 총과 대포를 대충 쏴주면 삥을 뜯을 수 있는 호구들을 찾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도 조선인들과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지능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


게다가 본격적인 무역도 제대로 못했던 현재 시점의 조선에서는 아주 나쁜 일도 아니다.




평안도 관찰사였던 이극균은, 이번에는 번리 순변사로 임명되어 4진을 시찰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제 4진에 살던 야인들은 거의 복속하거나 쫓아냈는데, 사민을 하여 우리 백성들이 살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 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극균을 번리순변사로 임명하여, 두만강 너머 4진을 둘러보고 오게 하여 사민의 절목을 준비하게 하여라."


변경의 무비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노인들을 자꾸 한겨울에 두만강 너머로 보낸다니 정말 노인공경 하나는 끝내주는 왕이었다.


물론 겨울 동안에 보고 오지 않으면 내년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릴 시기를 놓칠테니 어쩔 수 없긴 하다.


두만강변에 도착한 이극균은 혹시 자기가 동쪽이랑 서쪽을 헛갈려서 압록강 변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만강 남쪽의 구 5진 지역도, 두만강 북쪽의 신 4진 지역도, 중국식 가옥이 가득했다.


게다가 백성들도 죄다 누비 목면옷에 초피를 두르고 있으니...아니, 초피 원산지니까 후자는 별로 안 이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장에서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등속을 거래하거나, 가구 등지도 중국의 것을 쓰는 것은 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원래 함경도는 조선에서도 제일 찢어지게 가난하던 곳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개가죽 같은 것으로 만든 조잡한 옷을 입어서 거의 여진족 수준의 비주얼이었다.


특히 오진 지역은 주민들이 피폐해져서 여진족을 막거나 다스리기는 커녕 소를 전부 팔아서 초피를 나오느라 농사조차 못 짓는 지경이었는데 1년 하고도 몇 개월 정도 만에 천지가 개벽된 수준이라 할만 했다.


놀라고 있는 이극균을, 초피를 잔뜩 쓴 옷을 두른 번리도원수 윤필상이 나와서 환대했다.


윤필상의 표정은 고민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만한게, 윤필상을 1년 내내 고민하게 만들었던 번리위무사의 적자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번리위무사가 작년에 쟁여놓았던 막대한 모피 재고를, 평양과 개성과 서울 등의 지점에 뒀다가 겨울이 시작되어 값이 오를 때 쯤에 파니 한 방에 해결되었다.


거기에 황형이 중국에서 얻어온 비단 등속도 계속해서 팔고, 인근 여진족들을 철저하게 갈취했더니, 적자를 해결하고도 이윤이 남아 결국 주주들에게 배당을 해내었다.


"기체후 만복하셨습니까, 대감. 도원수 대감의 위무로 야인들이 진심을 다해 신종하여 왔다고 그 공로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제가 두 눈으로 살피니 과연 그것이 사실인듯 합니다."


"늙은이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얻어 무슨 대단한 공로를 이뤘겠습니까."


"겸손하십니다. 육진은 항상 주민들이 피폐하여 야인들을 막을 여력이 없었는데, 야인들을 복속 시키면서도 주민들을 피폐하지 않게 했으니 어찌 큰 공로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윤필상이 실제로 한 건 야인들 삥뜯기랑 초피 재고 매점매석 뿐이긴 하다.


노인공경 잘하는 지금 왕도 늙은이에게 군대 직접 끌고 다니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번리위무사 도원수는 사실 직함만 도원수고 휘하에 직접 통솔하는 부대는 거의 없고, 통솔하는 부대규모는 병마사들이 더 많다.


도원수는 병마사들에 대한 감시랑 4진 지역에 대한 경영과 안정이 주 역할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윤필상이 주변 여진들에게 세금을 마구 올린 것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세금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두만강 유역 주민들은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윤필상이 매긴 세금들은, 전부 하층민에게 부담이 전가되며 하층민에게 부담이 커지는 구조다.


병작반수 같은 토지세는 소작농에게 부담이 전가되며, 공물은 인두세적인 구조로 책정되기 때문에 상류층에게는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번리여진들도 그냥 조선에게 호구 잡히기만 하는 바보들이 아니다.


원래 친조선파이던 알타리, 오랑캐(올량합), 골간 등 성저야인들은 조선에 딱 붙어서 주변 우디캐 여진들을 노비나 소작농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부담을 죄다 전가했다.


알타리나 오랑캐에게 공납으로 모피를 바치라고 해도, 실제로 사냥을 다녀야 하는 것은 다 근처에서 잡혀온 우디캐 여진족들이나 대마도에서 잡혀 들어온 일본인 노비들이었다.


번리여진들은 이미 갑사들이나, 갑사들에게 보인으로 고용된 함경도민들과 결혼해서 조선인들과 혈맹을 맺기 시작했다.


조선이 중국에 건주좌위와 해랑도 VPN 으로 거래를 하듯, 이들도 사위 VPN 으로 초피 등지를 빼돌려서 면세를 받고 팔아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이전부터 두만강 유역에서는 발생하던 일이긴 하나, 4진 개척으로 더 빠르고 적극적으로 번리여진들이 조선과 동화되려 하는 징조가 보였다.


일부는 벌써 성을 조선식으로 바꾸고 변발도 자르고 상투를 틀기 시작했다. 옷은 여전히 여진족 옷이고, 집은 중국식이지만.


또, 우디캐 여진을 약탈하고 다니면서 우디캐의 기술도 두만강 유역으로 전파되었다.


신 4진과 구 5진 지역에 지어진 중국식 가옥이나 중국식 가구 등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래 한국인들의 편견과 달리, 이 무렵이면 이미 중국 변경의 여진족들은 중국에서 약탈해온 포로 등을 통해서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였고, 농경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무역을 통해 얻은 경제력으로 이미 조선의 6진 지역의 역량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알타리 부족 등은 조선인들이 보기에도 작고 추레한 집에서 살아갔으나, 우디캐 여진이나 건주 여진은 중국인 포로에게서 배운 건축 기술로 중국식 가옥을 크게 지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밀리는 알타리는 툭하면 약탈하러 오는 우디캐에게 일방적으로 지고는 했다.


하지만 이젠 알타리가 조선을 등에 업고 우디캐와 건주 여진을 약탈한다.


이 과정에서 우디캐와 건주 여진이 포로로 잡고 있던 중국인들 중, 기술이 뛰어난 이들은 중국에 송환하지 않고 은근슬쩍 빼돌려서 부려먹었다.


우디캐가 이뤄낸 기술과 부는 두만강 인근의 조선인들과 성저여진들에게 옮겨져갔다.


거기에, 무엇보다 무역의 활성화가 신 4진과 구 5진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


1년에 300만 전에 달하는 돈을 번리위무사가 소비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300만전에 달하는 돈이 4진 지역 사회에 풀렸다는 것이다.


갑사들이 받는 월급은 대부분 보급을 사기 위해 원천징수 된 뒤 쓰이니, 4진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돈을 좇는 상인들 덕에 외부에서도 막대한 물자가 들어왔다.


갑사들이 보인으로 구 5진 지역 주민을 고용해야 했으니 지역사회에도 돈이 돌았다.


여기에 황형이 굴리는 대중국밀무역 다중계정인 동아망개가 4진 지역으로 공급해주는 중국산 사치품 역시 두만강 유역의 경제를 더욱 활성화 시켰다.


"내 강릉에서 배타고 온 유 첨지라고 하는데, 염포진에서도 중국의 능라비단을 판다고 들어서 왔소. 그런데 돌아다녀도 통 비단 가게가 안 보이는구만. 혹시 어디서 중국 비단을 다루는지 알고 있소?"


"능라비단을 찾아서 오셨다고?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소?"


"얼마까지냐니...의주나 평양에서처럼 한 60전 정도를 생각하고 왔는데."


"의주나 평양에서 값은 의주나 평양 가서 찾으시고. 여긴 염포진이오. 한 필 당 100전부터 시작이오."


"아니, 이런 막되먹은 장사치가 다 있나!"


"싫으면 저기 철령 넘어서 평양 가서 사던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는 백두대간 산맥이 동서를 가르고 있다. 동서 양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조선 본토에 화매소가 설치된 동해안의 도시는 길주, 함흥, 강릉, 경주, 울산. 이 대도시들은 서울이나 평양 등 서쪽 도시들과 접근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백두대간을 넘든지, 남해랑 서해를 빙 돌아서 가든지 해야하니.


자연스레 이들은 중국 물건을 사기 위해 4진 지역에 의존했고, 위무사는 그들의 돈을 쓸어 모았다.




윤필상은 자기가 왔을 때 당시에만 해도 더 없이 거지 같았던 구 5진이 살아나고, 신 4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이 모습을 보고 새삼 느꼈다.


조선에서는 상업을 천시하여 말업이라 하고 농업을 본업이라고 하지만, 상업을 잘 활용한다면 백성을 먹여살리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자신도 상업에 상당히 발을 담그고 있어서 장사가 이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금상은 즉위 첫 년부터 강조하던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성과를 내자 정말로 와닿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 우디캐족을 착취하고 건주위를 약탈했던 부분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꼬우면 지들이 먼저 덤비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주상 전하의 심모원려의 덕입니다.

앞으로도 번리들의 땅에 새로운 진을 세우고, 경시와 화매소를 세워가면 백성들은 부유하게 하면서도 두만강 너머를 조선의 땅으로 굳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윤필상이 자기 돈 걱정만 한 것 같아도 일단은 유능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위무사 경영이 안정되자 벌써 개척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아, 그렇습니다. 제가 파견되어 온 것 역시 그것과 관련된 일입니다. 4진 지역에 사민을 시작하려 하니 상세를 살피라 명을 받았습니다."


"과연, 내년이 적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4진 인근을 살피니, 이미 번리들이 전부 전답으로 갈고 있는데, 과연 사민 될 백성들에게 줄 토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 사민 될 백성들에게 땅을 얼마나 줄 지를 이미 정하였습니까?"


"4진 각 진마다 장정 일 천을 보내 도합 8,000인을 보내신다고 했는데, 장정 한 명 마다 4결을 주도록 한다고 하시니, 16,000결은 필요합니다."


세종 시기 6진 개척 때 매년 3,000~12,000명 정도를 사민했으니 선례와 딱 비슷한 정도의 수였다.


"두만 인근은 사람은 적고 빈 땅은 넓으니 그 정도는 충분합니다."


"그런데 매년 수를 늘여서 진행하신다고 하십니다."


"흠..."


윤필상은 지금 4진에서 번리들이 갈고 있는 전답이 몇 결 정도 될지 대강 가늠해봤다. 훈춘진의 평지가 1만 결 정도 될 것이고, 연변진이 3만 결, 염포진도 1만 결 쯤 될 것 같았다.


사실 절반 정도는 인력이 없어서 놀리고 있는 거고, 절반은 이미 번리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즉, 3년 정도면 사민할 백성들에게 줄 빈 토지가 사라진다.


그 이후로도 계속 사민을 하려한다면, 백성들에게 주는 땅을 줄이던가, 번리의 땅을 뺏을 수 밖에 없다.


왕이 백성들에게 토지를 너무 많이 나눠주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왕이 주겠다고 하는 토지는 세종조의 예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작은 편이었다. 그 때는 호 마다 장정 수를 세어서 10결부터 30결까지 줬으니까.


다만 그때는 조선 토지가 개간이 덜 되고 인구가 적어서 그 정도 유인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수백만 백성이 땅이 한 뼘도 없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만큼 줄 필요가 없다. 2결만 준다고 해도 가난한 이들은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번리의 땅을 뺏어서 백성들에게 준다는 것은 곧 위무사가 '둔전'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땅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위무사의 수익도 떨어지고, 자기 앞으로 돌아갈 배당금도 줄어든다. 어쩌면 원금을 까먹을지도 모른다.


윤필상은 이런 사항을 이극규에게 이야기하며 우려를 표했다. 자기 배당금이 까인다는 이야기만 빼고.


"번리위무사가 갑사들의 녹을 지급하느라 적자인 것에 대해서는 주상께서도 우려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민이 시작되면 위무사에게 이득이 되게 하겠다더군요."


윤필상은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는 일은 돈을 쓰면 썼지, 어떻게 이득이 나게 한다는 말인가.


자기도 번리위무사를 경영하면서 별에 별 이상한 짓-중국직구용 VPN 계정이라던가-을 하고서야 흑자로 전환해낸 것이었다.


금상이 아무리 경세에 밝다고 하나, 대체 어떻게?




앞에서도 말했지만, 경식의 식민지는 영국이 미국을 개척한 것을 본뜨고 싶어했다.


똑같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개척한 곳은 21세기에 가난하기 짝이 없고, 영국이 개척한 곳은 왜 하나 같이 부유할까?


경제사학에서는 이 차이를 초기 개척 시기의 토지 소유권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상업적인 경영을 하는 자영농 위주로 구성된 영국 식민지는 소유권과 재산권 등 자본주의적인 제도를 발전시켰고, 나중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민주적인 제도를 발전시키기까지 한다.


그에 비해 중남미는 군사적 정복자들이 주를 이뤘고, 기존 원주민을 지배하고 동원하거나 노예를 사들여 플렌테이션 농업을 발전시켰고, 이들은 반민주적이고 봉건적인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경식은 4진을 개척하고 사민하면서 상업적인 자영농들을 육성 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미국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보낸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바로 빚에 쪼들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배삯, 초기정착비용 등을 또 빚으로 달아둔 다음 '계약 하인'이라는 자격으로 식민지로 보내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무급으로 노동 시킨다.


빚을 다 갚으면 계약 하인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니, 그 다음에는 새로 땅을 개간해서 자기 땅을 얻을 수도 있다.


조선도 이 제도를 그대로 본 뜬다.


경식이 즉위 1년부터 했던 화매소를 통해서 돈을 백성들에게 빌려준 정책은, 백성들은 살려냈지만, 조선 정부에 막대한 부실채권을 안겨주었다.


특히 충청도가 심했는데, 즉위 첫 년부터 흉년으로 굶주리느라 빚을 지고서, 풍년으로 소득이 떨어졌다가 또 흉년을 만나니 빈민들 상당 수가 파산 상태였다.


사실 경식이 1년부터 세를 거의 다 걷는데 성공한 것은 회계의 마술 덕분도 있다. 실제로는 못 받았는데 채권으로 간주하고 자산으로 장부에만 올린 것이다.


원래의 조선에서는 이럴 때 신하들이 보통 '백성들 빚 탕감해주죠' 라고 건의한다. 경식의 조선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경식은 '다 쓸 곳이 있으니까 계속 회계처리 하여라' 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자산을 쓸 때가 왔다.


나라가 빌려준 돈을 못 갚은 백성은 대부분 토지가 없는 빈농이다. 즉, 경식이 북방에 방출하려고 하는 인구와 일치한다.


이들을 사민 대상으로 골라 북방에 보내고, 그들 부채는 번리위무사 앞으로 돌린다. 그들의 부채에 대한 집행 권한은 번리위무사에게 준다.


번리위무사는 그들을 동원해서 토지를 개간하거나 도시를 건설하는 등 사업을 하고, 그들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일을 한다면 토지를 4결 씩 불하 받는다.


이렇게 하면 조선 정부는 부실 채권을 처리할 수 있어서 좋고, 번리위무사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토지 불하 수익도 얻을 수 있고, 토지도 없이 빚에 쪼들리던 백성들은 일자리와 토지를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신료들에게 설명하자 신료들은 특별히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을 개척할 때에도 비슷하지 않았는가. 그때도 범죄자를 위주로 보냈는데, 이번에는 나라에게 빚을 안 갚은 범죄자 위주로 보낸다는 점에서 거의 똑같아 보였다.


'아닌데...그때랑 진짜 다른데...'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중산층을 양성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나름 설명한다고 한 것인데, 신하들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니 경식도 참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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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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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 (2011). 16세기 조선과 野人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한국사연구,(152), 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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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봉 잡았다 2 +80 24.06.18 10,716 501 22쪽
40 봉 잡았다 +91 24.06.17 11,332 537 23쪽
39 탈상 +89 24.06.15 11,720 511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1,686 523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11,335 497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5 24.06.12 11,533 509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60 24.06.11 11,385 501 21쪽
34 돈과 전쟁 +55 24.06.10 12,184 529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3,220 54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9 24.06.06 13,384 583 25쪽
31 서울의 여름 +38 24.06.05 12,797 525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2,514 532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3,236 564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6 24.06.02 13,588 614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8 24.06.01 13,620 603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3 24.05.31 13,678 607 20쪽
25 대초피시대 +63 24.05.30 14,029 589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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