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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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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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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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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DUMMY

박경식은 미래 대한민국에 있을 때, 웹소설 플랫폼의 대체역사소설을 꽤 읽은 편이다.


조선이 배경이면 주식회사나 '만따먹'은 거의 필수 요소였던 것 같다.


집권 만 1년을 조금 넘겨서 벌써 필수요소 두개를 시도한다고 생각하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직 주식회사 관련 법이나 정관도 준비해야하고, 군사 조직을 재정비하고 병력들을 조련하기도 해야한다.


무엇보다 질 좋은 초피가 나는 것은 겨울이다. 그 전에 여름털 난 상태의 담비 잡아봤자 붓이나 만든다. 그리고 여름에 담비모피 옷 입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실제 출정 혹은 진출 혹은 출범...아무튼 무엇으로 부르건, 만주로 나아가는 시작은 최소 가을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1년만에 조선에서 화폐 도입도 성공했네...? 내가 대체역사소설 주인공이라고 쳐도 꽤 대단한 편 아냐...?'


하고 엄청난 수준의 메타인지 능력을 발휘하며 동시에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무렵, 박경식이 날림으로 진행한 조선 개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제 보리 수확이 가까워지는군. 춘궁기일테니 백성들에게 돈을 풀고 화매소는 미곡을 백성들에게 팔아 구제하시오."


"저...전하. 그에 관해서 아뢸 말이 있습니다."


평준도감 제조 이극규였다.


"무엇이오, 도제조?"


"춘궁기인데, 지폐로 사는 쌀의 값이 갑절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


경식의 충만했던 자신감이 공포와 불안으로 뒤바뀌며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가 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류가 갑자기 개쩔게 발전해서 전국 식량 유통이 원활해져서? 아니면 식량 생산량이 폭증해서...일리가 없지!


역시 디플레이션인가?! 뭐지?! 윤은로 같은 놈이 어디에 또 나타났나?! 아니, 전국에 지폐가 수천만 전 어치는 퍼졌는데 몇몇 놈이 그렇게 챙긴다고 될 리가...


아니면 세율이 너무 높았나!? 지폐가 다 국고에 있어서?! 지출을 늘여야 하나?


이자율이 너무 높은가? 하지만 조선에서는 10% 도 구휼할 때 이자 수준인데...'


정책에 관해서는 항상 자신감이 무한하던 왕이 이렇게 동요하는 건 평준도감 관헌들도 처음 봤다.


이세계 용사가 못하면 자기들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같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동요가 신료들에게 전염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경식이 냉정을 되찾았다.


"이에 대해서는 비책을 내가 생각 할 테니 물러나시오."




경식의 디플레이션 원인을 찾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전하, 정사에 매진하시는 것은 좋은 일이나 수라를 드실 때는..."


상궁이 밥을 먹으면서도 계본인지 책인지를 보는 임금의 기행을 보며 한마디 했다.


"음. 오늘 수라는 이걸로 충분할 거 같구나."


하지만 왕은 되려 상을 물려버렸다.


임금은 매화틀을 들이고서도 아까 그 계본 같은 걸 계속 보고 있었다.


'세종대왕도 잘 때도 아플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지만 저건 좀...'


'애초에 전하 세자 때도 지금도 평소에 별로 학문은 안 좋아하시지 않았나?'


하지만 왕은 궁녀들이 쑥덕이는 건 전혀 듣지 않은 채 제 일만 봤다.


사실 경식이 열심히 뒤지고 있는 자료도, 사실 그 양이 안타까울 정도로 적다.


평양이랑 서울만 경매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곡물 외 잡물 수백 개 품목의 시세만 집계되어 있고, 나머지 지역은 화매소에서 집계한 곡물가 시세만 집계되어 있다.


그나마도 춘천 같은 시골의 화매소면 거래가 없는 날이 흔해서 시세 집계가 며칠에 한번 씩 띄엄띄엄 있다.


'아직도 면포가 준화폐로 쓰여서 다행이군. 계절에 따라 등락이 심한 곡물에 비해서는 지폐 가치를 가늠하기 좋으니...'


추포는 시장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오승포는 값이 떨어지긴 했어도 보조적인 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오승포보다 질이 좋아 실물 가치가 있는 면포는 여전히 가치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충 자료들의 내용을 정리하니 서울은 비교적 물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시골에는 디플레이션이 뚜렷했다. 그래서 서울로 시골의 곡물 재고가 또 유입된 모양이다.


그래서 춘궁기인데도 서울의 곡가가 그다지 오르지 않았고. 시장의 반응이 경식이 '쌀을 풀어서 물가 조절해라' 라고 명을 내리기보다 빨랐던 셈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분명 시골에도 돈이 돌라고 뉴딜 같은 걸 했는데.

원천징수를 포함해도 시골 지역에 거의 돈을 퍼주는 정책이었는데도 시골에서 돈이 모자라다니?


서울도 약간이나마 물가가 줄었다. 이렇게까지 물자 교류가 늘었는데 물가가 줄었다는 건 돈의 흐름이 어디서 막혔다는 것이다.


경식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신료들이 이번에는 정말로 왕에게 경연에서 경서를 가르쳐보겠다고 벼르고 나왔다.


"전하! 임금의 덕이 성취 되는 것은 경연에 달렸습니다! 이번에는 치민방략(* 治民方略,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재략)에 대해서만 논하지 말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좀..."


"말 잘했소. 이번에 춘궁기인데 미곡가가 오르지 않는 이치에 좀 논해봅시다."


"예? 춘궁기에도 쌀 값이 안 오르면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오. 아직도 이해 못하는가...평준도감 빼고 다 모으시오. 내가 직접 강하리다."


경식은 아직도 디플레이션의 부작용을 잘 이해 못하는 신료들을 불러 또 구박하듯 가르쳤다.


"...그러니까 지금 제도에서는 시간이 지날 수록 나라가 지는 채가 늘 수 밖에 없다는 것이오.

각사가 평준도감에 지는 채가 많다고 무조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 ?? ???"


신하들을 가르치다가 답답해진 경식이 잠시 숨을 돌렸다.


지금 조선인들에게는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500년이나 앞선 지식을 가르치는 꼴이니 사실 왕이 가르친다고 '아~완전히 이해했어!' 하고 알아들으면 그게 더 신기하다.


사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수준을 알려주는 걸음마도 없이 갑자기 신용화폐 정책 펼친 게 너무 진도가 빠른 게 맞다.


'그래도 내가 경제학 책 쓰고 재정 관련 실무도 홍문관에서 가르치면 미래 세대는 좀 낫겠지?'


그런 기대를 하며 500년 뒤 미래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려봤다.




'어휴! 정치인들은 정치를 어떻게 하길래 나라 빚이 1000조가 넘어! 나라를 이렇게 굴리다가 IMF 같은 게 터지는거야!'


'아빠, 원래 국가 채무는 시간이 지날 수록 항상 늘어요.'


'무슨 소리야! 나라 빚 다 니들이 나중에 세금 내서 갚아야 하는거야! 우리야 늙었으니까 상관없지. 너 일해서 1000조 갚을 수 있어?!'


'아니, 이 신용화폐 체제에서는 나라 빚이 줄면 큰일 나요. 신용화폐라는게 뭐냐면...'


'아이고! 이놈이 대학 간 뒤로 맨날 어려운 말만 해. 세상이 니가 대학에서 배운대로 돌아가는 줄 알아!'


'아니 이건 진짜 대학에서 배운대로 돌려야 나라 안 망하거든요.'


'어휴, 이놈이 좀 좋은 대학 갔다고 못 배운 애비 괄시하네! 아들 낳아도 소용 하나도 없어!'


'아니 아빠 그게 아니라...'




...잘 생각해보니 500년 정도 지나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새삼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적 아버지 쪽 친가는 이상하게 금융이나 경제에 대해서 약했던 거 같다.




'경식아, 대학 좋은데 붙었다면서? 아이고, 할미가 손주 축하하게 용돈이라도 주어야지.'


'감사합니다, 할머니...아니, 돈을 장롱에 보관하고 계세요?'


'어머님! 돈을 은행에 넣으셔야죠. 어머, 보관했던 돈도 완전 낡은 옛날 지폐네.'


'아유, 은행에 넣었다가 은행 망하면 어떡해.'


'은행은 안 망해요, 어머님!'


'안 망하긴 뭘 안 망해. IMF 때도 그렇고, 저번에도 은행이 이자 많이 준다길래 넣었다가 망해서 떼먹힌 사람들 많다고 뉴스에도 나오더라.'


'그건 저축은행이에요, 할머니. 은행이랑 다른.'


'저축은행이 은행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할머니의 일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더 아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괜히 생각했다.


신료들은 그나마 경식이 이것저것 설명해줘서 아버지랑 비슷한 수준이고, 백성들 대다수는 장롱에 돈 박아놓은 할머니 수준 아니겠는가.


언제 화폐 제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꼴을 볼 수 있을까. 역시 전근대에는 21세기 베네수엘라보다만 잘 돌아가면 선녀인걸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번쩍 눈이 띄였다.


'잠깐, 장롱에 돈을 보관해?!'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돈이 사라진 원인.


조선에서는 조선스러운 이유로 찐빠가 나는게 당연한데 너무 현대적으로 생각했네.




조선, 특히 시골 지역에서 돈이 사라진 원인은 미래 한국에서의 경식이 아버지 수준 사람들과 할머니 수준 사람들 둘 다의 활약이었다.


충청도 당진현 서면.


마을 사람들을 속이려고 했던 호로새끼 장사치 김기특이는 살아남았다.


깡촌인 마을을 드나들어주는 보부상이 그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대신 개똥이 아범 강두쇠의 발언력이 조금 더 세졌다.


이제 서면 마을 사람들은 기특이에게 듣는 소식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앞으론 자주 기특이를 의심할 것이고, 개똥이 아범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슈' 하는 것은 조금 더 귀 기울여 볼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가을의 사건으로 두쇠도 글을 애매하게 아는 게 한이 되어서, 글을 제대로 배우겠다며 현의 학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제가 문자는 몰라도 나름 숫자나, 돈 전(錢)자는 알아 봅니다. 방에서 본 모양새가 분명..."


"어허!!! 글을 돈 벌려고 배우는가!!!! 천지현황(* 天地玄黃, 천자문의 첫 구절.)도,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면서 어찌 돈이라는 글자를 먼저 쓰려해!!!"


동네 진사이긴 해도 나름 선비인 훈도가 두쇠의 초실전 상놈용 한자 지식을 보고 격노했다.


하여간, 이 당진도 작년 흉년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곳 중 하나다.


이들은 시골 사람 치고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배울 기회를 꽤 겪었다.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인제현 사람들보다는 나은 셈이다.


요역으로 번 얼마 안 되는 돈도 광 은밀한 곳에, 장롱 은밀한 곳에, 마루바닥 아래에 잘 숨겨놨다.


모처럼 풍년이어서 남는 쌀도, 최대한 아껴먹으며 화매소에 팔아서 돈으로 바꿨다. 그리고 작년 년초에 나라에서 빚내어 준 것도 싹 다 갚았다.


이제 춘궁기지만, 곡가도 그닥 안 오르고 빚도 없고 지폐는 적게나마 있다.


서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주 현명하게 살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 가끔 칭얼거리기는 했다.


"아부지, 우린 쌀농사를 짓는데 왜 만날 조밥만 먹습니까?"


"야 이놈아, 우리처럼 가난한 집이면 안 굶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하는 것이여."


"마루 밑에 넣어둔 지폐는 둬서 뭣에 씁니까. 매일 잘 있나 들여다보기만 하고. 그걸로 젓갈이라도 좀 사 먹읍시다."


"그걸 함부로 쓰면 흉년 들면 어쩔 거냐? 난 지폐를 그냥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더라."


"피이. 그러면 아예 줄로 천장에 매달고 밥 먹을 때마다 처다보지 그러시오."


이런 마을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라에 빚 진 걸 성실하게 갚는 것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사실 국가 경제적으로는 문제다.


지금 조선에서는 민간은행이 없이 중앙은행 유사한 역할을 하는 평준도감 휘하 화매소에서 백성에게 돈을 빌려주는 형태로 돈을 발행한다.(*1)


그래서 백성들이 화매소에 돈을 갚으면 통화(通貨)가 사라진다.


뉴딜로 농촌에 뿌린 돈이 그렇게 장롱 속이나, 화매소에 빚 갚기로 사라져버리니 통화량이 줄어버려 다시 디플레가 발생한 것이다.




또 한가지 디플레이션의 원인은, 상인들의 반응이 정부보다 빨랐다는 것이다.


지폐는 발행 첫 해에는 무슨 코인 수준의 위험 자산이었다.


그 값의 등락은 가치가 안정되어 있는 돈이라기보다는, 투기 대상에 가까운 형태로 심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전세를 지폐로 걷는 정책이 성공했으며, 농민들에게조차 안전 자산으로 인식되어 자산 축적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인들이라고 그러지 않으라는 법 있는가. 상인들도 지폐를 장롱에 쌓아뒀다.


상인들이 지폐를 그냥 쌓아두기만 하게 된 이유는, 조선의 경제 구조에도 있다.


조선 내에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


물론 농업 국가이니 제일 고전적인 투자처는 당연히 농지다.


지금 공식적으로 시장화되어서 거래되고 있는 것 역시 곡물이니, 땅 사서 농사 짓는게 제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상당 수는 농지를 사들이는 걸로 투자를 했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전국 미곡가를 공지해버리고, 너도나도 곡물 무역에 꼴박하니 수익성이 너무 빠르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조선의 토지 소유권이 엄격한 것도 아니다.

땅 놀리고 있으면 어느새 유랑민이 와서 멋대로 농사 짓고 안 나가거나, 노비들에게 경작 시키면 몰래 땅 팔고 튀는 일이 흔하다.(*2)


이런 점이 또 더해지니 조선은 농업 국가인 주제에 농지에 투자하는 것도 생각보다 수익성이 낮은 편이다.


결국 상인들은 딱히 투자할 데가 생각이 안 나서 그냥 돈을 쌓아두게 된 것이다.




경식이 당진현 주민들의 사정까지는 몰라도, 시골에 돈이 붙잡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한번 하자마자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일단 민간 은행이 필요해! 돈을 장롱에 썩히지 말고, 돈이 계속 돌아다니도록 하려면!'


은행의 기능하면 사람들은 돈 맡기고, 돈 대출하는 곳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돈 맡길 때 이자보다, 대출할 때 이자를 높게 해서 그 차액으로 돈을 버는 기관...정도가 사람들이 아는 은행의 기능이다.


사실 그게 대부분이 맞긴 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작용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


은행에 돈을 누군가가 1000전 맡겼다. 그리고 그는 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수표 등으로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은행은 맡은 1000전 중 10%인 100전을 제외하고 900전을 상인에게 대출했다. 상인은 900전으로 물건을 사고 임금도 준다.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100전을 받았다. 노동자는 100전을 은행에 보관했다. 위와 마찬가지로 수표나 예금증서 등으로 거래할 수 있다.


은행은 노동자가 맡긴 100전 중 10% 인 10전을 제외하고 90전은 또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준다.


처음에 있던 돈은 1000전인데,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은 1990전이 되었다.


이것을 은행의 신용창조라고 한다.


이렇게 돈을 만들어내니 물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만, 지금 조선은 나라가 딱히 잘못을 안해도 디플레가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어서 되려 인플레이션을 발생 시켜야 한다.


경식이 신하들을 강제 소집해서 여기까지 가르쳤더니 또 신하들이 '아~완벽하게 이해했어(이해 못함)' 하는 표정이 되었다.


혹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나 확인 차 물어봤다.


"이 작용이 무한히 계속되었을 때 처음 발행된 지폐보다 액수가 몇 배 늘어나는지 계산할 수 있겠소?"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도 이해 못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경제 이론들은 일부 경제학에 재능 있는 관헌들이 직관적으로나마 이해해서 평준도감으로 차출됐는데, 이번엔 평준도감도 뭔소린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신료들이 '무한이 뭔데 이과놈아'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때야 경식은 수학사적으로 아직 나오지도 않은 개념인 극한이나 무한 등을 자기가 내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에이, 모르겠다. 나도 문과거든?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외워!


"이런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시중에서 사용되는 지폐는 처음 발행한 것의 10배까지 늘어날 수 있소."


이 순간 신료들은 미래 한국의 의무교육 과정을 거치는 학생들의 태도를 체득했다.


이해가 안 가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외우는 것이다.


질문을 했다간 더 어려운 원리를 선생님이 수업 시간을 넘겨 쉬는 시간까지도 계속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이면 더욱 이렇게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문과의 나라 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은행에 이어 필요한 것은 농민들을 시장경제에 더 강력하게 통합할 기구였다.


농민들이 왜 지폐를 장롱에 숨기겠는가. 맡길 곳이 마땅찮아서도 있지만, 일단 뭘 사고 파는 행위 자체가 도시에서나 있지 농촌에서는 아주 드물어서 그렇다.


농촌은 평소에도 도시와 거래하며 도시 생산물을 받고, 반대로 농촌도 도시에 다른 생산물들을 시시때때로 공급하며 돈을 받는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


작년처럼 추수 직후에만 우르르 몰려와서 쌀 팔고 그 지폐는 장롱에 박아놓으면 추수 직후에는 농민이 거지가 되어서 난리가 나고, 시간이 지나면 디플레이션이 생겨서 난리인 이런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농민들의 소득을 향상 시키는 것이다.


지금 조선은 토지를 1결도 못 가진 빈농이나, 아예 토지가 없는 소작농과 극빈층이 잔뜩 있다.


벌써부터 수익성이 조금 씩 떨어지고 있는 곡물 농사로는, 이들은 농사를 지어봤자 1결에 10전이라는 돈도 못 벌어서 결국 파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의 결과는 굳이 사학과인 박경식이 아니어도,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역사 수준에서도 들어봤을 이야기다.


소위 말하는 '지주 전호제의 확대' 다. 토지를 잃고 몰락한 농민들이 지주 양반계층의 소작농이 되거나, 심지어 노비가 되기도 한다는 그것이다.


작년에는 그걸 고려해서 뉴딜로 시골에 돈을 마구 뿌렸지만, 근본적으로는 물고기를 주는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게 더 유용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일어난 것처럼 농촌은 서울에서 나오는 돈만을 바라보고, 없는 쌀을 아껴서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태가 계속된다.


이것 역시 교과 과정으로만 역사를 배웠어도 들어봤을 이야기다.


'조선 후기의 상품작물 재배의 활성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조선에 필요한 것을 세줄 요약하면 이렇다.


1. 은행에 준하는 역할을 하는 민간 금융기관.

2. 농촌이랑 도시가 서로 물건을 자주 사고 팔게하는 기구.

3. 상품작물 재배 활성화.


한국인이라면 이 셋을 동시에 하는 기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농협이다.


---


<이하 미주>


*0 : 제목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는 농협의 사가 '농협의 노래'의 마지막 소절입니다.


*1 : 작 중 조선의 지폐 제도가 이렇게 운용되고 있다는 것은 7화 <이세계 용사 박경식>에서 설명했습니다. 현대의 중앙은행이 돈을 시중에 공급하는 방법 중 '여수신제도' 라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여수신제도는 아주 간단히 말해서 중앙은행이 일반 은행에 대출을 해주는 제도입니다. 작 중 조선에서는 민간 은행이 없는 상태에서 중앙은행과 비슷한 것을 만들다보니 백성들을 상대로 직접 대출을 해준 것이지요.


*2 : 이에 대한 이야기는 8화 <아 장사하자> 와 21화 <백성 1>에서 언급되었습니다. 8화의 미주에서 특히 설명하였지요. 경국대전 상의 규정으로는 불과 3년만 경작하지 않은 토지는 남이 멋대로 경작하고 제 땅으로 삼아도 되었습니다. 이 규정은 원래는 농지를 놀리지 않으려는 의도였겠으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증가하여 농산물의 가치가 상승하자 농지의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고, 양반 사족들이 남의 토지 중 무주지로 간주되는 것을 선점하기 위해 악용되었습니다.

<임상혁. (2015). 조선시대 무주지 개간을 통한 소유권 취득. 토지법학, 31(1), 207-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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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6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9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5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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