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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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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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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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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DUMMY

경기도 파주의 이임 백길동은 화매소에 쌀 값을 보러왔다가 한숨을 쉬었다.


올해도 풍년이라 화매소에는 쌀을 팔러온 배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쌀 값도 주욱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먹을 것도 줄여가며 쌀을 다 팔아야 겨우 전세를 내고 빚을 갚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세상에 이렇게 쌀이 많은데, 풍년인데 왜 자기들이 되려 굶주리게 되었는가?


공납이 폐지되고 이임과 면임들에게 특산물을 화매소에 팔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다른 많은 지역들이랑 달리 파주에는 별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주의 토산물이라고 해봤자 게랑 숭어가 전부요, 공납으로 바치던 수공예품을 더해봤자 돗자리랑 빗자루랑 종이가 전부다.


이상할 정도로 죄다 전국 어디서나 흔하게 나는 것이라서 팔아봤자 이렇다 할만한 수익이 안 났다.


종이가 그나마 수익이 나는데, 종이 장인들은 벌써 지들끼리 똘똘 뭉쳐서 이임과 면임을 뽑고 지들끼리 해처먹기 시작해서 그냥 농사만 짓던 길동이네 앞에 떨어질 떡고물은 없었다.


길동이는 방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혹시 나라가 뭔가 역사를 부리려고 하는 것은 없냐고 물어봤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불과 작년 초만 해도 산릉을 짓는다고 나라가 역을 부릴 때 질색을 했는데, 이젠 되려 나라가 역을 내리는 것을 가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그런 방이나 소식은 전혀 없는데?' 라는 말 뿐.


길동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낙네들이 모여 술을 빚고 있었다.


"아니, 이 여편네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소리치는 길동을 보고 아내 서언년이가 남편이 장 보러 갔다온다더니 귀신이 들려서 왔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풍년이니까 술을 빚지 왜 갑자기 지랄이오? 평소에는 맨날 술을 처먹고서 지랄하더니 이젠 술을 빚는다고 지랄하네."


"지금 쌀 값이 떨어져서 쌀을 죄다 팔아도 세금 내기 빠듯한 판이란 말이야! 여편네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원."


"그러면서 왜 아직 술 담그지도 않은 누룩을 보며 군침을 흘리시오?"


과연 아낙네들 말이 맞았다. 진짜로 술 담그는 걸 파토 내려면 진작에 뒤집었어야지, 길동의 몸은 어느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에라이...적당히만 담그시오. 올해는 정말 쫄쫄 굶게 됐으니."


투덜거리는 길동이가 아니꼬왔는지 옆 집 아낙네들이 한 마디 거든다.


"아니, 풍년이면 좋지 뭘 굶어. 정 안되면 술을 팔고 조라도 사서 먹던가."


그 말을 듣고서야 길동이 뭔가를 퍼특 떠올렸다.


"뭔 소리여? 술을 팔아?"


"뭔 소리냐니, 말 그대로지. 자네는 안사람이 집에서 남는 술 팔아서 보탬하는 것도 몰랐나?"


먼저 말했던 아낙이 집안 일에 무심했던 길동을 타박하듯 말했다.


"아이고, 형님! 그걸 우리 남편에게 말하시면 어쩌시오. 말하면 있는 술을 다 처먹어서 숨기고 있던건데."


언년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누라가 자길 계속 술꾼이라고 타박하지만 지금 길동에게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여보, 여보! 술을 팔아서 돈을 얼마나 받았소?"


"으음? 잔치하는 양반댁에 팔아서, 떡이나 고기로 받아왔는데."


"그런 거 말고, 장에 내놓으면 돈으로는 얼마인지 아시오?"


"모르겠는데...난 여태 그냥 술 팔러 간 대감 댁에서 주는 대로 받았지."


"이번에 담그는 술은 모조리 서울에 팔아야겠어! 그 돈이면 분명 세를 낼 수 있으니!"


길동이 술을 앞에 두고 자기가 처먹는 거 말고 팔아먹는 걸 생각하다니, 역시 귀신이 들렸나 하고 언년이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아니, 서울까지 이 무거운 술독을 다 지고 가시려고? 자네는 다리 힘도 장사일세. 그래서 언년이가 도망을 안 쳤나?"


"깔깔깔깔!"


"어어..."


옆집 아낙네가 딴지를 걸자, 그 농이 우습다고 술 빚으러 모인 온 아낙네들이 깔깔 거렸고, 길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듣고보니, 이 무겁고 커다란 술독은 지게에 지고 가서 서울에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입이 워낙 많이 모인 자리라서, 금방 또 답이 나왔다. 옆에서 누룩을 부수던 아낙이 말했다.


"뭘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 소주로 내려서 양반 댁에 팔면 되는 것을.

우리 집에 소줏고리가 있으니 술이 익으면 소주로 내리게."


21세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답을 얻으려면 어그로를 끌어야 한다는 법칙은, 15세기 말 조선 아낙네 커뮤니티에서도 유효했다.




서울에서는 희한한 일도 벌어졌다.


"아니, 이 짐은 다 뭐야? 뭔 놈의 왕골풀을 이렇게 산더미처럼 들여?"


서울 남대문의 관세소에 희한한 짐이 들어와 관세사 관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딘가의 가노들이 왕골풀을 수레 여러 대에 한 가득 실어서 들여오려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왕골풀은 세가 따로 없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딱 보니 왕골풀 더미 안에 뭔가 숨겨서 몰래 들이려는 것이야!

어이! 짐수레 안을 조사해봐라!"


더 당황스럽게도 수레의 내용물은 정말로 왕골풀 뿐이었다.


"아니, 돗자리를 몇천 장이라도 짜려는 것인가? 뭔 왕골을 저렇게 들이는 건데!"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로 그랬다.


군기시정 한충순(韓忠順)은, 금년 초여름 마포행궁에서 왕의 군기시 경장에 부려먹혀지며 분업의 묘리를 익혀냈다.


이 분업이 있다면 어떤 물건이건 마구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한충순은 노비들이 삼는 짚신조차도 분업으로 만들게 시켰다.(*1)


노비들은 짚신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대체 뭘하려는 건가, 주인이 돌았나 하는 눈치를 나눴다.


과연, 짚신은 많이 만들어 봤자 별 소용도 이득도 없었다.


'아아! 이것이 전하께서 내리신 수요와 공급...인가 하는 그 이치로구나!'


사실 조선 사람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짚신이 비싸게 팔리지 않는 것은 수요와 공급보다는 희소성의 법칙을 떠올리는게 맞겠지만, 일단 그것도 수요와 공급과 관련 있으니 꼭 틀린 것도 아니겠다.


하여간, 그렇게 경제학을 실전으로 익혀가는 한충순에게 짚신보단 더 돈이 되는 게 보였다. 왕이 만들어낸 가마니틀이었다.


그 가마니틀이란 걸 보아하니, 조금 크게 만들면 돗자리 짜기에도 써먹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래서 노비들을 부려서, 개조된 가마니틀로 돗자리를 짜게 시켰다. 조선사 두 번째의 고도 분업화 된 공장이 이렇게 탄생했다.


노비들로도 부족해서, 일자리 찾던 사람들도 데려와서 삯을 주고 돗자리를 짜게 시켰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가득 쌓여 있던 왕골풀들은 한충순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순식간에 돗자리가 되어 나왔다.


그 광경을 왕이 봤다면 '아니, 이 세계에서는 돗자리 짜는 걸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2)




충주의 남쪽, 산골에서 조용히 철을 불리면서 옛날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던 말흘금 사람들도, 곧 충주에서 장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작년 추수 쯤 부터 충주에도 장시가 생길 징조가 보이더니, 올해 추수가 끝나니 나주에서 장시 여는 법을 배워 온 상인들이 아예 주민들이랑 작정하고 장시를 기획하고 열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살다가 깡촌으로 와서 심심했던 김납은 고향 친구들을 꾀어서 장시로 가기로 했다.


"자네들도 돈도 받았는데 쓸 줄도 몰라서 오는 장사꾼들에게 고분고분 값을 내며 쌀 등지나 사고 있지 않은가.

경차관 나리께서 우리가 바가지 쓰지 않도록 막아주신다고 하나, 그렇게 돈을 집에 쌓아두기만 해선 무슨 소용이겠나.

이참에 장시로 내려가서 좀 한 번 놀아나 보게."


과연 말흘금 사람들이 오랜만에 충주로 내려가보니, 그곳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세상에 사람이 이리 많았나? 온 조선 팔도에서 사람이 다 모인 것 같구만."


"아이고, 저기서 하고 있는 저게 뭐야? 웬 놈이 줄을 타고 막 걸어다녀!"


"어휴, 이 촌놈들. 이것도 서울에 비하면 별 것 아닌데 말이야."


장시가 열리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으레 불려오는 광대에,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꾼들에, 주사위로 도박판을 벌이는 사기꾼까지. 장시의 모든 것이 철장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특히 광대들이 벌이는 놀이판이 철장들의 흥미를 끌었다.


한창 구경하고 있을 때, 광대패 중 화랑이 노릇을 하는 놈이 나와 부적을 팔았다.


"광대놀음을 보고 시주하지 않으면 온갖 귀신이 노하여 동티가 나오!

우리가 불사를 돕고 있으니, 놀음을 잘 본 사람은 다들 시주하시라!

이 부적은 무학대사가 세운 절에서 쓴 것인데..."(*3)


아무 이름 난 승려를 대며 팔아먹는게,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으면 싸구려 사기 부적인 것을 알겠지만, 조선 시대에 그런 걸 알아볼 사람이 흔한가.


다들 쌀이네 뭐네 잡물을 주며 너도나도 부적을 샀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말흘금 철장들도 바가지에 지폐를 몇 장 던져넣으며 부적을 받아갔다.


"좋소, 좋소! 시주를 크게 할 수록 부처님께서도 베풀어주시니...헉!"


갑작스레 지폐가 몇 전이나 들어오니 화랑이도 놀랐다. 이 광대패는 장시를 따라 다니는 패거리라서 산골에 박혀 사는 철장들보다 더 지폐의 가치를 잘 알았다.


고향 친구들이 별 생각 없이 거금을 던져 넣는 것을 본 김납이 되려 놀라서 바가지에 손을 넣어서 지폐를 다시 빼려고 했다.


"아이고! 이 친구들이 뭘 몰라서 잘못 주었네. 이보게들! 빨리 다시 받지 않고 뭐하나!"


그 때 광대패랑 같이 다니는 왈짜들이 나와서 김납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잡았다.


"어허, 방금 화랑이가 한 말 못 들었소? 이따위로 했다간 온 산천 잡신이 다 노할 것이야."


"이...이놈들이..."


그러고서는 다른 패거리들이 실실 웃으면서 김납의 친구들을 어디로 꾀어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어디 귀하신 분들 같은데 장시는 와본 적이 없는 모양이구려. 여기서 주사위 놀음이라도 한 번 해보지 않겠소?"


방금 산에서 나온 철장들이 귀하신 분 같아 보인다니 입에 침이라도 좀 발라야 할 소리였지만 이런 류의 인간들이 다 그렇듯 뻔뻔하게 말했다.


서울에서 코를 좀 베여본 김납은 친구들이 어디로 꾀어져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야! 어딜 데려가려는거야! 안돼!"


하지만 김납은 부질없이 주먹패들에게 끌려가서 남한강에 던져졌다.


과연 말흘금 철장들이 꾀여 간 곳은 바람잡이까지 잘 배치되어 있는 야바위판이었다.


말흘금 철장들이 돈의 가치는 몰라도 도박의 재미는 안다.


딱 이런 자리에서의 전형적인 패턴대로, 바람잡이가 적당히 몇 판 져주고, 짐짓 화난 척 바람잡이가 큰 돈(이조차도 위조 지폐였다)을 올리면 야바위꾼의 수작이 시작된다.


곧 철장들은 자기들이 돈을 죄다 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장들이 돈의 가치를 정확히 체감하지는 못했어도, 가진 걸 이따위로 죄다 뺏긴다는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뭔진 몰라도 이거 수작을 부렸구만. 개짓거리 말고 우리 돈 돌려주게."


"수작은 무슨 놈의 수작! 댁들이 와서 돈 걸어 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요?"


당연히 이 주변의 구경꾼 같아 보이던 놈들도 다 한패거리 왈짜들이었다.


하지만 철장들이 그런 눈치를 보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철장들은 막무가내로 손을 뻗어 돈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아니, 이 돈 한 전이 쌀 한 섬인가 한 말인가 한다는데, 주사위 좀 굴린 걸로 어딜 그렇게 벌려고 하시나. 우리 돈 돌려주시오."


여기서부터 폭력이 시작된다. 왈짜가 철장의 손목을 짓밟았다.


"어허, 누가 댁들 보고 여기서 놀음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소? 제 발로 와서 해놓고 잃었으면 얌전히 돌아가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돈의 가치를 한 섬인지 한 말인지도 구분 못하는 멍청이들보다는 분명 자기들이 더 유용하게 쓸 것이다.


하지만 왈짜들이 지금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로 그들이 지금 삥 뜯고 있는 이들의 정체가 철장이라는 것.


둘째로 나라에서도 철장들은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것이었다.


깡!


"그아아악!!!"


철장의 손을 밟고 있던 왈짜의 정강이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세겨졌다.


"이 시발 놈들이 어디서 사람 손을 밟아?"


철장들은 조선에서 제일 철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항상 쇠연장을 들고 있으며, 그들의 성정도 철 같다.


철장은 국가전략자원인 장인들이라 후대해서 관직도 내리려고 했던 조선이, 철장들은 무식한 깡패라며 관직을 철폐한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근래 말흘금 철장들은 나라에서 가르쳐 준 강철 양산 기술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이 말흘금 철장들이 아직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인간들이라, 물건을 팔려고 만들기보다는 자기들 쓰는 걸 우선하고 남는 걸 팔고 있었다.


그래서 말흘금 마을에서는 별에 별 물건들이 다 강철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숯을 구울 나무를 베기 위한 도끼, 철광을 캐기 위한 곡괭이는 물론이요, 지금 왈짜의 다리를 때린 망치를 포함해서, 왈짜들을 뜯어낼 거 같은 집게까지.


왈짜들은 원래 싸움을 잘하는 이들이 아니라 싸움 잘하는 척을 하는 이들이다.


다짜고짜 어디서 철 연장을 빼어 들고서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힘으로 치는 미친 놈들을 보자 사기가 한 방에 꺾였다.


지금 맞은 왈짜도 정강이를 맞은 거라서 안 죽었지 급소를 쳤으면 즉사였다.


갑자기 피범벅이 된 야바위판에 겁을 먹은 야바위꾼도 어버버거리고나 있지, 철장들이 돈을 다시 가져가는 걸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사극으로 포졸에 익숙할 미래 한국인들은 이 상황이면 포졸이 개입해야하지 않나 생각하겠지만, 사실 포졸은 서울에나 있는 보직이다.


지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 때 임시관청으로 잠시 만들어질 뿐이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전근대 군인들은 치안을 지키는 존재보다는 치안을 망가트리는 존재들에 가깝다.


더군다나 지방의 진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은 대부분 병적이 정리되어서 해방되었고, 남은 병사들도 지금 서울에서 훈련 중이다.


쫄아서 한 발 물러나 있던 왈짜들이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는데 철장들이 망치를 붕붕 휘두르며 "뭘 봐, 개새끼들아." 하니 다들 도망쳤다.


마침 남한강에서 겨우 건져져서 살아 돌아온 김납은 왈짜패들을 가르며 유유히 나오는 고향 친구들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점점 시장 경제를 향해 발을 딛어가는 사람들도 있는 한편, 조선의 변화에 아무 상관도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공납이 폐지된다는 말이 있지 않았어?"


"그러게. 그 소문 참말 맞아? 그런데 왜 우린 이렇게 일을 하고 있나?"


"어허, 어딜 참람한 소리를 듣고서 난언을 하느냐! 그럴 시간에 물질을 한 번이라도 더 다녀와!"


조선에서 가장 공납에 시달렸던 땅 제주도의 풍경은 아직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아보였다.


제주도 역시 공납이 폐지되고, 목(牧)으로써 화매소가 설치된 곳이기는 하다. 민회가 특산물을 팔 수 있게 되기도 했고.


하지만 제주도의 특산품인 귤은 조선에서 대체가 아예 불가능하며, 말, 전복, 흑우 역시 조선에서의 생산량에서 상당 부분을 점유해서 대체 불가에 가깝다.


사슴, 표고버섯, 당근 같은 것도 있으나 이것들부터는 경쟁할 지역들이 좀 있는 편이다.


아무튼 전국 화매소에서의 경매와 가격 집계의 시작은 조선 전국의 구매력을 드러냈고, 공납 해방은 몇몇 대체 불가 물품들의 생산량 감소를 가져왔다.


제주도의 특산품들의 가격은 수직 상승해버렸다.


제주도의 토산물을 판매하는 권리는, 함경도의 초피 판매권 만큼이나 거대한 이권이 달린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제주도는 토호 세력이 매우 강력한 땅. 제주도의 민회들은 토호들에게 전부 점령 당했다.


공납으로 인해 중앙 정부 혹은 사주인들에게 갈취 당해왔던 이득은 이제 그들의 뱃 속으로 들어간다.


수령 역시 향리들의 협조가 없으면 지방을 다스릴 수가 없으니 묵인해줬다.


사실 향리직 자체가 모두가 기피하는 역이라, 이 정도 떡고물이 없으면 또 다들 도망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타협이다.


그리고 향리들이 공납으로 팔고 온 돈을 적당히 지방 재정(수령의 보너스 급여 포함)에 보탤 수 있기도 하다.


향리들이랑 공성전을 벌여서 이것저것 쟁취해낸 함양군민들이 좀 많이 특이한 거고, 삼남에서는 이런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아예 백성에게 혜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주도의 생산력을 무시하고 분정되던 공물이 폐지되니, 그래도 제주도의 생산력 한계 내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범위 내로 생산량이 조절되었다.


백성을 너무 갈취하면 도망치기 마련이다보니, 토호들도 백성들의 노동력을 무작정 짜내기보다는, 노동력은 덜 드는데 값이 높은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토산물들 중 육지에서 최고로 값이 비싸게 쳐지는 것은 무엇일까 토호들은 빠르게 판단해냈다.


귤이랑 말이다.


전복은, 솔직히 물질을 가르치기도 어렵고 물질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아서 장기적으로 계속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조선에서 전복이 없어지면 어떡하냐고? 어차피 공납을 강제로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닌데, 전복이 조선에서 나든 안 나든 알게 무언가.


흑우의 경우는, 제주도 말은 정말 전국에 비할 것이 없는데에 비하면 흑우는 좀 경쟁자가 많은 편이다.


작정하고 이득을 보려는 토호들은 벌써 귤나무 밭을 점점 늘이고, 놀리고 있던 땅에 말을 풀고, 화매소에서 계약하여 장사할 상인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혹시 말이 너무 늘어서 말 먹이가 부족하지 않겠냐고? 말 먹이는 귤을 판 값으로 외지에서 사오면 된다.


안 그래도 척박한데 밭을 줄이면 뭘 먹고 사냐고? 조나 겨우 기르던 밭에서 계속 아등바등 농사를 짓느니, 귤 농사를 지어 팔면 쌀을 육지에서 사와서 먹는다.


이제 귤을 꼭 서울에만 보내야하는 것도 아니고, 비교적 가까워서 귤이 상하기 전에 보낼 수 있는 육지 주민들도 귤은 먹어보고 싶을 것 아닌가.(*4)


제주도 토호들의 정신에 자라나는 이것은, 아직은 자본주의라기에는 미약하지만, 이전 제주도에서는, 원래 역사의 제주도에서는 없었던 무언가임은 분명했다.


---


<이하 미주>


*1 : 29화 <아니 내 10만 철기가!!!>에서 개그성 대사로만 지나갔던 군기시관헌이 재등장했습니다. 한충순(韓忠順)은 연산군 일기에서 군기시정으로 언급되며, 성종 실록 시기에도 대단히 잘못은 없지만 딱히 유능한 인물로도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되려 성정이 급하다고 탄핵 받은 일이 있습니다. 생몰년도 등의 상세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는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2 : '겨우 돗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돗자리는 조선의 매우 중요한 경공업 물품 중 하나였습니다. 계속 소모되지만 좌식 생활을 하던 시대 상 생활 필수품이기도 하고, 강화도의 화문석이나 보성의 용문석 같이 문양이 수놓아진 물건은 중국, 일본에도 수출되었고 중국에게는 조공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송, 원, 일본, 거란 등에 수출되기도 했지요. 다만 무늬가 없는 그냥 돗자리는 별다른 부가가치가 없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물건이기는 합니다.


*3 : 미래의 한국인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지만, 광대, 사당패, 사물놀이패 등 조선의 예인들은 그 유래를 무당 집단에 두고 있습니다. 무당과 광대는 부부인 일이 많았습니다. 군대의 나팔수들도 무당 집안에서 주로 배출되었지요. 또 불교와 무속의 습합으로 인해 예인들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요. 작 중에서 귀신 타령을 자주 하거나, 부적을 팔거나, 승려나 부처의 이름을 팔아대는 것은 이런 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4 : 조선 시대에 제주도가 공납을 바치기 위해 희생했던 역사는 그 연원이 깊습니다. 세종 시절에 제주목을 지낸 기건(奇虔)은 전복을 따기 위해 고생하는 제주 백성을 보고 다시는 전복을 먹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지요. 심지어 대동법이 도입된 이후에도 제주도는 대동법 예외 지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대신 전세는 거의 면제 되어서, 제주도에서 내는 대동미는 불과 수십 결 치에 해당하는 값으로 줄어들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주도민들의 고초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공납 자체가 실제 생산력에 기반하는 세금이 아니라, 조정의 필요에 따라 분정되는 세금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경식의 조선에서는 상업과 자본주의를 자극하는 구조로 세제가 대개편 되어서, 제주도의 운명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작가의말

토맡.O님 후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4

  • 작성자
    Lv.56 al*****
    작성일
    24.06.12 19:56
    No. 31

    그래서 무당들 굿하는게 약간 춤같기도 하고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고 위험한거 위를 막 타고 다닌거군요.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61 shadowx
    작성일
    24.06.12 20:09
    No. 32

    제주감귤학당이라도 차릴 기세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5 熱血男兒
    작성일
    24.06.12 20:29
    No. 33

    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찬성: 13 | 반대: 0

  • 작성자
    Lv.79 D.M.K
    작성일
    24.06.12 22:34
    No. 34

    제주도...
    혹시 한중일 삼각무역의 허브가 되나요? 제주산 귤과 말이 그렇게 좋습니다하고 진상된게 소문나서?ㅋㅋ아님 제주조가 삼남지역의 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려나

    찬성: 3 | 반대: 1

  • 작성자
    Lv.6 n9913h
    작성일
    24.06.12 22:34
    No. 35

    전국민 쌀농사에서 비교우위의 시대로 들어서서 쌀농사가 줄어드는 것 같다가도 인프라개선과 농법 발달로 쌀농사가 더 발달하고, 생산성이 높아진 농가가 쏘-주를 더 많이 만들게 되고 누구는 주정 생산해서 의료용으로 납품하고 누구는 오대산에서 이탄 퍼내서 피트위스키 숙성하고 그거 수출하다가 조선놈들이 술에 약을 탔다! 하면서 싸우다가 결국엔 그 향에 빨려들고 하는 알중적 스토리도 나오면 재밌겠네요(위스키를 마시며 작성된 댓글입니다

    찬성: 16 | 반대: 0

  • 작성자
    Lv.46 녹색자쿠
    작성일
    24.06.12 23:52
    No. 36

    작은 금속노조를 건드리면 ㅈ되는거에요. 이제 아셨죠 왈패놈들아.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4.06.13 00:42
    No. 37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마라짜글이
    작성일
    24.06.13 01:42
    No. 38

    아니 근데 이게 정말 1년만에 전국민이 적응한거라고?
    암만 생각해도 불가능한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뻔쏘
    작성일
    24.06.13 05:11
    No. 39

    빨리빨리 민족 아니랄까봐. 10년이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하겠네. 성질 급한 민족이라 20년 지나면 주변국 뚝빼기 박살내고 다니는거 아녀?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86 한편만Tn
    작성일
    24.06.13 13:47
    No. 40

    대략 2년 3년차에 이정도면 10년이면 명나라 한번 붙을만 하겠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ly******..
    작성일
    24.06.13 17:06
    No. 41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황금의변경
    작성일
    24.06.13 17:15
    No. 42

    과거 사람은 멍청하게 표현하는 소설들이 너무 많던데

    작가님 작품은 그 예를 벗어나서 너무 좋아용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은색의왕
    작성일
    24.06.14 08:05
    No. 43

    별에 별→별의별
    별의별이 한 단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4.06.23 23:26
    No.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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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3 452 23쪽
»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6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3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2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1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5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9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9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33 518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8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8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3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5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1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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