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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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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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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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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51,495

작성
24.06.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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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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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글자
21쪽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DUMMY

"서울에서는 지금 철장들이 한 달에 100전을 받는데, 그 정도면 역을 지는데에 충분하겠나?"


"100전이 얼마 정도지? 쌀 값이나 포로 쳐 주셔야 알겠는데."


관헌에게 반말을 찍찍 쓰는 것은 둘째치고 이렇게 나오니 골치가 아팠다.


"아이고, 이 친구들아. 100전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야. 쌀은 다섯 석을 사고 포는 20필은 사네."


서울 생활을 해봐서 좀 물가를 아는 김납이 대신 대답했다.


한 달 산료를 이렇게 비싸게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흘금 사람들도 꽤 놀라기는 했다.


"그런데 그래서? 철장이 무슨 비단 옷을 입어서 무슨 소용이고, 옥식은 아니래도 쌀 값이 쌀 때는 쌀밥도 먹는데."


사실 사방팔방이 물 샐틈 없는 시장경제, 소비사회로 완비된 현대인들에게는 와닿지 않아도, 전근대에는 이런 반응은 흔한 현상이다.


산업 혁명 초기 때,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높은 임금을 불러서 노동자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현상은 웬걸, 농한기에 잠깐 도시로 올라와서 일하고 농번기에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는 노동자들만 모였다.


돈이 절실한 사람들은 쉬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겠지만, 돈은 절실하지 않고 놀고 싶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일을 줄인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사람들의 관념에서는, 후자를 고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에는 몰락한 빈농들이 몰려서 대립을 서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가 충분했다. 작년 말의 뉴딜 역시 세금을 내지 못한 빈농을 집중 공략해서 가능했다.


반면 농민 중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이들 중에는 후자의 사람이 많았으며, 특히 이 철장들은 웬만한 농민들보다 소득이 높다.


사실,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진행하던 나라들이 농민들에게 높은 과세를 하여 농촌 사회를 붕괴시키거나,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의무교육을 시키는 등의 조치를 한 것 자체가 전자에 가까운 '근대적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박경식의 조선에서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돈도 행정력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대신 비슷한 역할을 농민 공동체가 자치적으로 할 수 있도록 농협을 조직 중인 것이고.


박희손이 이들을 어떻게 부려야할지 고민할 때, 이덕숭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하민들이란 모름지기 엄하게 징치하여 다스리는 것이 맞네. 충주 목사에게 알려 병사를 부리는 것이 이들을 다스리는 상책이야."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랫것들은 빠따 좀 치면 다 말을 듣게 되어 있어.' 라는 얘기였다.


뭔가 좀 무식해보이는데, 사실 이덕숭은 세조 시절에도 호조에서 일할 때 사옹원 관헌이 자기들 재촉한다는 이유로 두들겨패서 의금부 콩밥을 먹은 적도 있다.


박희손은 이덕숭식 해결법을 듣자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철장들이 도망치면 철은 누가 불린단 말입니까?"


박희손은, 임금 말마따나 이들이 '돈 쓰는 맛' 을 알게 해줄 아이템을 생각하기로 했다.


골몰하던 박희손은 자기가 서울에서 데려온 기와장들을 보고서 떠올렸다. 원래는 벽돌을 구워서 로를 만들라고 임금이 같이 보내준 인원들이다.


그리고 이곳은 산골이라서 아직도 움집이 태반인 곳.(*1) 불을 많이 다루는데 움집이다보니 분명 불에 약할 것이다.


누구라도 옷, 밥, 집은 필요로 하지 않는가.

밥이랑 옷은 지금 것에 만족하는 모양이지만, 불 때문에라도 집을 개선하는 것은 분명 필요할 것이다.

이들도 기와집에 한 번 살아보고 싶지 않겠는가.




박희손은 충주 화매소에서 예산을 받아 요역부를 모집하여, 말흘금에 기와랑 벽돌을 구울 가마를 만들었다.(*2)


원래 역사에서는 조선 망할 때까지 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예산 받아서 일하기'가 이뤄졌다.


화매소에서 이게 예산이 이렇게 드는게 맞냐, 깎아도 되는 것 아니냐 계속 따져대서 처음 대충 계산한 것보다는 깎였지만 어떻게든 사람이 모여 가마는 잘 만들어졌고, 기와도 곧 생산되었다.


하지만 말흘금 사람들의 반응은 미적지근 했다.


"여기 집에 기와를 올리고 벽을 돌로 올리라고?"


"듣고보니 그리하면 불이 덜 날테니 괜찮은거 같기도 한데."


"아니, 그냥 불 나면 새로 지으면 되지 뭐하러 기와 씩이나 올리나? 철장 주제에 사치한다고 또 시비 걸 것이 뻔한데."


"관에서 나와서 지으라고 하는건데 설마 그러겠어?"


"아니, 다 좋은데, 기와 값이 얼마인지는 알아보고 말하나? 한 우리(*기와를 세는 단위. 한 우리는 기와 2천장을 말함.)에 20전이나 부르고 있는데."


"읍에서보다는 싼데 역시 좀..."


어처구니 없게도, 저렴해진 기와를 사가는 건 철장들이 아니라 인근 충주 고을 사람들 중 부유한 집들이었다.


그 꼴을 본 이덕숭이 또 거들었다.


"역시 철장들이라는 것이 무식하고 난폭한게 문제가 아닌가. 병사를 부려 징치하고..."


"나라가 충주 철장들을 후대하는 이유를 모르십니까? 충주 철장이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십니까?"


박희손도 답답했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도 안 나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말흘금에 철장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들어왔다.


상인들은 전에 왔을 때는 본 적이 없는 가마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저 가마도 자네들이 쇠를 불리는데 쓰는 가마인가?"


"아니, 무슨 관헌이 와서는 멋대로 지어놓고는 저기서 기와나 벽돌을 굽고 있네."


그제야 상인들의 눈에 도포를 입은 사내 몇이 눈에 들어왔다.


사대부가 아니고서야 도포를 입을 리가 없는데, 이런 곳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사대부로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저게 관헌이 맞나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이쪽을 보더니 노비를 부려서 "이리오너라" 하는 것 아닌가.


엥? 저게 진짜 관헌이었다고?


여전히 긴가민가했지만 장사치가 양반에게 개겨봤자 좋을 것이 없으니 시키는대로 가서 엎드렸다.


"네가 이 철소를 드나들며 철을 무역하는 상인이냐?"


"예이, 청주에 적을 두고 있는 최말동이라고 합지요."


"열흘에 한 번 철소를 드나든다고 들었는데, 그 철은 근래 서울에 팔고 있는 것이냐?"


"서울만이 아니라 한강 쪽 고을에는 다 팔고 있었는데, 서울 철 값이 요새 부쩍 올라서 서울에 거의 다 팔고 있지요."


"그렇다면 철장들에게서 철을 더 많이 사고 있느냐? 그들을 어떻게 구슬려 철을 얻고 있는 것이냐?"


"구스리다니요, 철장들은 자존심이 강하여 저희가 시킨다고 한들 철을 더 많이 만들거나 팔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물었을 때, 슬슬 박희손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철장들에게 물었을 때도 똑같았다. 값을 더 불러도 더 만들지는 않겠다고 하였지."


"나리께서 아뢰시는 그대로입니다."


"그럼 너는 철장들에게서는 철을 값을 그대로 쳐주고 철을 사면서, 서울에는 평소의 갑절로 철을 팔았던 것이냐?"


이 부분에서 최말동은 간담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흐름은 장사치가 모리를 하여 갈취했다며 두들겨 패고 갈취할 때의 전형적인 도입부다.


조선에서 상인의 삶이라는게 이랬다.


농민들이나 공인들에게는 자기들을 부당하게 삥 뜯는다고 원망을 받고, 위의 사대부들에게는 물가를 올리고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모리배들이라고 경멸 받았다.


그러면서 사대부들은 또 상인의 딸을 첩으로 취해서 뒷배를 봐주고 모리를 취한다.


그러다가 부정하게 재물을 모았다고 탄핵을 받으면 죽는 것은 사대부가 아니라 상인 집안이었다.


아무리 부상대고라고 하여도, 항상 그랬다.


지금 이것도 트집을 잡아서 자기들을 쳐죽이겠다 이 소리 아닌가.


이제 곧 죽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자 최말동 삶 마지막의 용기가 타올랐다. 엎드렸던 몸을 곧게 펴고 이름도 모르는 나리의 눈을 곧게 보았다.


"그 또한 나리께서 아뢰시는 그대로입니다."


"네 이놈! 어찌 관헌에게 아뢰는데 감히 고개를 꼿꼿하게 올리느냐!"


박희손이 말하기도 전에 관노가 최말동에게 호통쳤다.


"허나 그게 저희의 잘못입니까? 철의 값이 오른 것은 필시 서울에서 철이 급한 일이 있어서 일 것이요, 철장들은 값이 오르건 말건 생산을 바꾸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철장들에게 어떻게 보채어 철을 늘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서울에 철을 쓰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천하가 장사치를 모리배라며 미워하지만, 장사치 또한 사민(四民)이 아닙니까?

선안(船案)에 등록할 때 관이 함부로 갈취하지 않는다고 첩을 받았으나, 그게 다 무엇입니까.

여전히 관이 하고자 한다면 장사치들 따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치를 모르면서 장사치로 살고 있겠습니까? 나리께서 원하는대로 처결하십시오."


"그만! 그만해라!!!"


선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즈음부터 박희손은 원래 자기가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대신 박희손의 머리를 채운 것은 임금이 언제이던가 경연을 직접 주도하며 신료들을 가르쳤던 그 말.


'상인이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그저 물산을 나르는 것이라는 그대들의 말이 어떻게 그른 것인지 이치를 내 직접 가르치리다.'


'천하지대본은 농이라고 하나, 모든 사민은 천하의 그 본이요.'


'경들은 내 뜻을 깊게 세기어 백성을 단 한 명도 버리지 말고 이끄시오.'


진짜 성리학적이고 유교적인 세계관은, 사실 유교적 기풍을 이어받은 미래 한국인들에게도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임금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는 그것이 서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의 인류학자들조차, 유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세계관에서의 효를 기독교 세계관에서 원죄와 비견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이 인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졌듯, 유교 세계관에서는 부모가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며, 군주는 백성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군주의 명령은 온 사대부들에게, 기독교 세계에서의 신의 명령과도 같은 무게를 가진다.


설령 그것이 성리학을 내심 극도로 경멸하고 있는 왕이라 하여도, 기존 성리학의 원칙과 다를 바 없이 위민을 명분으로 한다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종교적 계시를 받아 울부짖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러했듯, 박희손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이 경연에서 자신들을 직접 가르쳤던 그 명을 떠올렸다.


"내가 어찌 나라의 법을 거슬러 너희들을 갈취하겠는가? 상민 최말동은 고개를 들으라. 내가 왕명을 받들어 너희의 억울함을 헤아려 공정히 처결하겠다."




박희손의 처결로 인해 상민 최말동은 같은 상민인 말흘금민들에게 엎드리며 죄를 빌어야 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서울 철 값이 갑절이 오르는데 아무 말 안 했었다고!"


"장사치 놈들은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더니, 믿고 맡겼더니 이럴 수가 있나!"


사실 직접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서울이 철이 급한 모양이니 좀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냐고는 했다.

그때 말흘금 사람들은 '서울이 급하지 우리가 급하나?' 라며 코웃음치며 무시했고.


지금 말흘금 사람들의 분노는, 근대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으로서의 분노가 아니었다. 이들은 근대인이 아니다.


애초에 말흘금 사람들은 다들 글도 서울 물가도 몰라서 그냥 살던데로 살았고, 돈에도 그닥 큰 관심이 없었다.


말흘금 사람들은 자기네가 어떤 손해를 봤는지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분노한 척하는 것은, 조선에선 상대방 약점을 잡으면 무조건 잡고 흔드는게 최고의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서 뭘 얻고 싶은건지 자기들도 모르지만, 일단 건수 잡히면 이렇게 난리를 쳐야 뭐라도 뜯어낸다.


사방팔방이 법보다는 야만에 둘러쌓인 전근대 국가의 사람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지만,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이곳 조선은 실제로 법치주의보다는 전근대적 관습에 둘러쌓인 전근대 국가니까.


아무튼 이 상황을 정리해야하는 것은 사대부의 역할 아닌가. 박희손은 관노에게 손짓했다.


"어허!!! 관헌이 소관하는 곳에서 어찌 이렇게 어지러이 군다는 말인가!!!"


박희손에게 딸려 온 관노 쇠똥이가 그 짬에 맞는 호통을 치자 말흘금 사람들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사대부가 백성에게 직접 소리치는건 원래 체통 상하는 일이다. 미래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수 있지만, 이게 조선의 표준 관념이다.


좀 조용해지자, 박희손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신의 결론을 고했다.


"너희 최말동 외 시민들은 들으라. 너희는 말흘금 사람들을 속여, 서울에서 철의 값이 배로 뛰었음에도 그것을 알리지 않고 모리를 취하였다.

너희는 이제 말흘금 사람들에게, 철을 팔아 넘기는 곳의 철 값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파는 곳의 철값이 오른다면 이들에게 쳐주는 값도 마땅히 올려야 할 것이다."


상인들을 어떻게든 더 벗겨먹으려고 했던 말흘금 사람들은 지나치게 합리적인 처결에 약간은 실망했다.


"또한 말흘금의 철장들은 들으라. 너희가 이렇게 장사치들에게 속은 것은, 너희를 보살펴 줄 관헌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제 나라에서 감야관을 두어, 너희가 이렇게 속지 않도록 보살필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다."


어어? 말흘금 사람들은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은데 합리적이어서 반발할 수는 없는 결론이 나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어...나리. 생각해보니 이 장사치들이 우릴 속이긴 했어도 큰 손해는 아니었던 것 같소이다."


"그럼 방금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느냐? 연장까지 들고 나와서 장사치들을 찢을 기세던데."


"우리는 사람과 이야기 할 때 항상 연장을 손에 쥐는 버릇이 있어서."


"참 살벌한 버릇이 다 있구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감야관을 따로 두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잘 할 수 있고, 이 장사치들이랑 일도 우리가 해결할 것인데 꼭 관리를 여기 두셔야겠소?"


"너희가 말과 표정을 바꾸는 것이 교활하구나. 너희가 장사치에게 속은 것을 봐서 그것을 구제하려는 것이고, 너희가 장사치들을 함부로 죽이려고 하니 막은 것인데 무얼 알아서 한다는 말이냐?"


팩트로 자꾸 때리니, 철장들도 핑계 댈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솔직히 관리를 두어봤자 우리를 토색질이나 하며 일에 간섭이나 하지, 우리에게 득 될 것이 뭐 있단 말이오?"


박희손은 속으로 탄식했다. 백성들이 이렇게나 관을 믿지 못하다니, 나라의 기강이 이리도 흐트러져 있었단 말인가.


"내가 처음 왔을 때도 일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너희를 갈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철을 물처럼 만들어 내는 비법을 전수하고, 그 철을 나라에서 값을 쳐 사주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따른다면 어찌 나라가 보답하지 않겠느냐?"


철장들은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준다는 지폐라는 것에 그닥 관심은 없었지만, 관헌이 행패를 안 부리고 이렇게 백성들에게 간곡하게 말하는걸 보니 뭔가 있는거 같기도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신뢰였던 것이다.


"알겠소. 어차피 나라 시책인데, 버팅겨봤자 우리만 난민이 되는 셈이지."


겨우 성과를 얻은 박희손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민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일 줄이야.


"그런데 그 철을 물처럼 뽑는다는 방도는 대체 무엇이오? 그걸 선비 나리께서 어찌 아시나? 요새는 사대부도 철장 일을 하오?"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 아무튼, 그 방도는 여기 철장감역 김납이 알고 있는 것이니 너희는 그에게서 배우면 된다."


철장감역이라고 관직 이름을 불린 김납이 은근히 목에 힘을 줬다.


"납아, 철장감역이 뭐냐?"


"아니, 이 자식들이 촌구석에만 박혀있어서 그것도 못 알아듣네. 뭐긴 뭐야, 내가 받은 관직 이름이지!"


"관직? 네가 왜 관직이 있어?"


"주상 전하께서 친히 살펴 내게 내리신 관직이다! 내가 철장으로 재주가 뛰어나니 크게 쓰시려는거지."


"네가 무슨 대단히 재주가 있다고..."


"혹시 우리를 돌보게 한다는 관헌이 너냐? 젠장, 역시 끝까지 뻗대야 했는데."


"이런 망할 놈들! 마을 사람이 금의환향 했는데 축하는 못해줄 망정!"


"아니, 이놈이 감투 좀 썼다고 벌써 문자를 쓰네."


"촌놈이라고 괄시하니 서럽다, 서러워!"




박희손이 총괄, 김납이 현장을 감독하여 철장, 와장, 요역부들을 동원해서 왕이 마포에서 만들었던 그 로들과 같은 것을 건설하였다.


"김납이, 도면대로라면 로의 바닥은 이보다 커야하네. 자네가 감역이지 않은가. 잘 살펴야 할 것이야."


"아, 제가 까막눈이라 도면을 봐도 수치가 어떻게 되는지를 도통 알아야지요. 대충 서울에서 만든거랑 비슷한 크기로 만들려는 거였는데."


"...나도 감독하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군."


건설이 완료되고, 철광과 목탄과 석회석이 충분히 준비되고 나서 조업을 시작하니 어느새 가을이 다 되어 있었다.


새로 지은 로에서 쇳물이 쏟아져나오자 시큰둥하던 말흘금 사람들도 꽤 반응이 좋았다.


"쇠부리가마는 진흙으로 쌓느라 걸핏하면 무너졌는데, 이렇게 벽돌로 만드니 튼튼하군."


"뚝배기에 넣어서 쇠를 불리는 건 또 처음보는 방법인데, 이렇게 정철이 쉽게 만들어지는 거였나?"


"납이가 서울에서 웬일로 신통한 것을 배워왔구만."


"앞으론 가마는 다 벽돌로 지을까?"


"아니, 집도 벽돌로 짓는거 어떤가? 불이 툭하면 나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일이 마무리가 되어가자, 박희손도 이덕숭에게 철장의 경영에 관련된 부분들을 인계하기 시작했다.


이덕숭이 호조좌랑도 해본 인물이라, 일에 관해서는 그다지 막힘 없이 인계되었다.


"그런데, 저것이 참으로 전하께서 고안하신 방법인가?"


"그렇습니다만."


"금상께서 대간들을 미워하시어 내치셨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철을 불리는 이치에는 관심이 많으시니, 과연 성품이 무를 좋아하시는 분이 틀림없나보군."


좋게좋게 말하고 있으나 지금 왕 성질 더러워보이는데 전쟁하려고 저러는거지? 하는 소리였다.


"과연 그렇습니다. 야인이 근래 동북에서 난동을 부려, 그것을 징치하시려 군무를 경장하고 계십니다."


박희손도 왕이 성질 드럽고 전쟁하려고 한다는 말에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야인은 엄하게 징치해야 할 놈들이지. 그러나 선왕 시절에도 실패한 일인데, 과연 가할 것인지 모르겠네.

또 전쟁을 하면 분명 무관들이 높은 자리에 오를 것 아닌가.

이미 문관이나 간언은 그렇게 물리치시는데, 장인바치를 관리로 앉히고 계시지.

이것이 어찌 선비를 후대하는 뜻이겠는가. 이 나라가 과연 유자의 나라로 남을 수 있겠는가?"


"..."


맞는 말이다. 서울 성균관에서도 매일 같이 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있다.


유능하고 신하들을 휘어잡는 성질 더러운 왕 자체는 이미 이전에도 많았다. 태종도 그랬고, 세조도 그런 왕이었다.


세조도 잡학을 문관들에게 장려하기도 했고, 성종 역시 문관들만이 조정을 덮고 있다며 무관을 더 많이 쓰겠다고 채용을 늘리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왕도 선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금상은 그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금상이 그걸 직접 말한 적은 없다. 또 금상의 제위도 아직 길지 않았기에, 지금 조정의 백관들은 대부분 문관이기는 하다.


하지만 왕이 이 흐름을 계속 밀고 간다면 나중엔 선비가 조정에 과연 남을까?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요. 저는 경차관으로써 군무를 위해 온 것이니,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닙니다."


박희손은 그 두려운 의문을 넘겨버리기로 했다.


어찌됐건 금상은 더 없이 유능하신 분임을 스스로 계속 증명하고 계신다.


선비들을 대하는 것은 어쨌든, 백성을 항상 생각하는 왕임도 분명하다.


지금 자신의 임무는 왕명에 따라 철의 생산을 감독하는 것이다.


"그래, 조정에서 물러나 외방에서 미관말직이나 하는 늙은이가 괜한 소리를 해 마음을 어지럽혔구만. 신경쓰지 말게."


이덕숭도 이야기를 길게 늘이지 않고 다시 직무를 인계받는데 열중했다.


---


*1 : 움집, 즉 수혈주거는 교고서에서는 선사시대 파트에서 주로 나오기 때문에 후대에는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고려 시대에도 서민들 대부분의 집은 움집이었습니다. 심지어 수도인 개경조차도 그랬다고 하지요. 조선 역시 조선 전기까지도 산촌에는 수혈주거지가 흔히 나타나지요. 이번 에피소드의 배경 충주 역시 16세기 초의 수혈주거지 유적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임영호, 정여선. (2007).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 대한 연구. 야외고고학, 3, 122-174.>


*2 : 작 중에서 화매소가 계속 등장하며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현재 시점에서는 전세 수납, 대출, 국고금 수납과 지급, 물가 조사 등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중앙은행의 기능과 거의 일치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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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2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1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1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8 480 23쪽
»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7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9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5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6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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