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공모전참가작 새글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631,001
추천수 :
25,487
글자수 :
451,495

작성
24.06.05 18:00
조회
11,337
추천
480
글자
23쪽

서울의 여름

DUMMY

박희손이 충주에서 철장들이랑 드잡이질을 하던 때, 서울에선 분업의 강력한 생산력으로 결국 철 재고가 홀랑 사라지고 말았다.


더 철을 사들였다간 서울 철값이 미쳐돌아갈 지경인지라, 추가적 매입은 중지했다.


'뭐, 경차관들이 성과를 내서 철을 보내려면 못해도 가을은 되어야 할테니, 이제 좀 쉬엄쉬엄하면 되겠지.

나 살아 있는 동안에 조선에서 산업혁명 일으킬 것도 아니고.'


어차피 진짜 중요한 무기인 소총은 지금 양산이 잘 안되고 있다.


총 부품을 규격화해서 분업화하고 대량 생산하려면 선반이나 드릴 같은 공구도 필요한데 그게 없어서 그렇다.


공정을 최대한 나눠서 생산하니 그래도 세 달 간 몇 백정 정도는 나왔는데, 다른 것에서의 성과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 대신 다른 부분들에선 분업 외에 여러 성과가 있었다.


"오오오! 돌아간다!"


"풀무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드디어!! 성종대왕 시절에 사행에서 배워 온 것이 금상의 치세에서야 이뤄지는구나!!"


자기가 수차 잘 만드니 시간과 예산만 주시면 수차를 잔뜩 만들고 싶다던 최부의 소원(*1)이 이루어져서, 용광로에 연결할 수력 풀무도 완성되었다.


열심히 풀무질을 하며 강철을 불렸던 철장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원재료인 철이 거의 다 떨어졌을 무렵에야 완성됐지만.


어차피 철도 떨어졌고, 한여름에 불 옆에서 일해야 했던 철장들이 안타까워서 경식은 철장들을 쉬게 했다.


수력 풀무는 용광로에 연결하는 대신, 석빙고에서 꺼내온 얼음을 넣은 상자에 연결해서 냉풍기를 만들었다.


휴게실에서 냉풍기의 바람을 쐬는 장인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아이고오오!!! 살 것 같다!!!"


"이곳에 있으면 정승이고 뭐고 하나도 안 부럽네!!"


"바람은 너희들만 쐬냐!! 막지 말고 비켜!"


정승이 안 부러운게 당연하다. 정승들은 지금 냉풍기 같은 거 없는 곳에서 뻘뻘 땀 흘리며 일하고 있으니까.


정승과 판서들은 진심으로 공인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냉풍기가 공인들에게 아주 반응이 좋은데, 경들에게도 그것을 누리게 하고 싶소.

냉풍기를 쓰려면 얼음이 많이 필요할 것인데 올해는 가을에 석빙고를 증설하는 것이 어떻소?"


"전하께서 이르신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냉풍기를 돌리는데에는 최부가 만들어 올린 수차가 유용할 것이니, 이곳 마포행궁도 증축하고 수차와 연결한 냉풍기를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신료들이 먼저 궁궐을 더 크게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군기시 경장이 끝나가자 문제가 되는 것은 또 난민촌 사람들의 일자리 문제였다.


막노동 일거리가 생기면 제일 먼저 동원하는게 이 난민촌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면 또 백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지금 난민촌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작년까지는 병사라는 명목으로 밥이라도 줬지만, 이젠 그조차도 아니다.


마포로 오기 직전에 '보병들은 어차피 전투력 없고, 요역은 돈 주는걸로 하고 있으니 보병 병적은 날리자' 하고 병적을 정리해버려서 그들은 이젠 그냥 백수다.


그들을 살리려면 대형 프로젝트 때 요역부로 부리는거 말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줘야 한다.


맹자도 사람은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도덕을 찾는다고 했다(有恒産者有恒心). 그걸 거론하며 대신들에게 대책을 논하게 했다.


"전하께서 이르신 군기시를 분업시키는 묘리가 지극하여 물산을 늘이고 있는데, 이들 역시 군기시에 넣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해서 해결되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군기시의 생산력이 너무 좋다는 것에 있다.


"군기시의 지금 장인들 수백으로도 한양의 철 값이 갑절로 뛸 정도로 물산을 만들어 내서 되려 군기시를 놀리고 있는데, 그게 가하겠소?"


사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하던 내용이 이것이다. 분업을 하면 생산성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물건이 마구 복사가 되어서 모두가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게 국부론의 나머지 내용이다.


실제로는 수요가 감당하지 못하는 과잉생산으로 물건의 가격이 폭락해서 되려 적자가 나는 일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사실 영국의 경우 과잉공급은 차라리 해결하기 쉬웠다. 그냥 해외무역(강매)으로 해결해냈다.


영국인들에게 대포알도 받고 상품도 싸게 받은 인도인들은 영국의 저렴한 상품 가격에 (자기들이 백수가 되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조선은 과잉공급을 해결할 수출로도 없는데, 원재료를 공급할 인프라도 없다. 사실 있는 게 없다.


분업으로 인한 생산성 개선을 유지할 사회 체제가 안되는 셈이다.


하여간, 신료들이랑 머리를 맞대며 생각한 결과 그들이 배속된 자리는 취토군(取土軍)이었다.


"전하께서 만드신 소총이 지극히 맹렬하나, 충분히 사용하기엔 나라의 화약이 모자랍니다.

유민들은 취토군으로 배정하여 염초를 굽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그걸 잊고 있었구만. 내가 염초를 굽는 법에 대해서도 옛 책을 상고하여 더 유용한 방식을 궁구하였으니 그대로 하면 될 것이오."


오오, 과연! 그런 책을 보고 다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상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솔직히 신하들도 임금이 책을 펼치는 걸 도무지 본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젠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왕이 취토군에게 시킨 것은 공중화장실 건설이었다.


조선의 화약 제조법을 모른다면, 군이라는 이름 붙이고서 화장실이나 만드는게 웃길 수 있겠지만 아주 합리적인 정책이었다.


"과연, 취토군이 염초를 굽기 위해 함토(짠 흙)와 엄토(아린 맛의 흙)를 캐느라 백성의 집에 들어가 뒷간 근처를 파헤쳐 민폐가 심했는데, 이렇게 하면 민폐를 덜 수 있겠습니다."


조선의 화약은, 화장실 근처의 흙에 똥오줌의 질산 성분이 용출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런 흙을 달여 질산칼륨을 추출하여 만든다.


그래서 화약이 급할 때는 민가에 취토군이 침입하여 화장실 주변 흙을 강제징발해 퍼가서 바닥을 개판으로 만드는지라 민폐가 컸다.


공중화장실이 있으면 그럴 필요가 줄어든다. 이런 맥락 덕분에, 미래인이 보기엔 희한하게도 공중화장실 관리는 병조의 업무로 지정되었다.


또 왕은 뒷간 인근의 흙이나 처마 아래의 흙 대신, 뒷간에서 오줌을 퍼오거나, 닭장 바닥의 흙을 퍼오게 했다.

그걸 짚의 재와 흙과 섞어서 삭힌 후에 그것을 달이면 염초가 많이 나올 것이라나.


"이것은 염초라기보다는 초회비(* 草灰肥, 풀 재를 이용한 비료)를 만드는 법인데 어찌 이게 염초가 되는지요?"


그야 실제로 비료랑 화약은 주성분이 똑같으니까. 경식이 도입한 건 18세기 스위스식 염초 제작법이다.


질산칼륨을 만들기 위한 질산염 성분은, 자연에는 다른 그 무엇보다 오줌에 많다. 그리고 새들의 똥 역시 오줌 못지 않게 질산 성분이 많다.

그리고 식물의 재는 칼륨 성분이 많아서, 둘이 섞이고 반응하면 질산칼륨으로 용출되는 것이다.


화장실 흙을 퍼가는 조선 취토군이 우스워보여도, 사실 동시대 유럽, 아니, 18세기까지도 유럽도 똑같았다. 화장실은 징발 대상이었다.


공중화장실 역시 경식의 창의적인 발상이 아닌, 그 무렵 유럽의 정책이다.

나폴레옹 전쟁기 유럽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게 애국이라는 포스터를 배포하며 공중화장실 사용을 장려했다.


질산칼륨이라던가 같은 화학 얘기는 어차피 경식 본인도 잘 모르고, 최대한 조선스럽게 이치를 나름 설명해보려고 아무 소리로 땜빵했다.


"사실 염초를 굽는데 쓰는 함토와 엄토가 뒷간 근처에 많이 있는 것은, 흙은 변의 기운을 받아 함토와 엄토로 변하기 때문이오.

기존의 방식은 함토와 엄토로 변한 것을 캐서 쓰나, 내 새 방식은 변과 흙을 바로 맞닿게 하여 함토로 만들고..."


"그리하면 대변은 쓰지 않고 소변만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처마 밑의 흙도 엄토와 함토가 많은데 그건 어떤 이치입니까?"


"계분을 쓰는 것은 어떤 이유이며 재를 섞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경식은 괜한 시도를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설명은 포기하고 대충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공인들이 한여름의 파라다이스를 누리고 있을 때 제일 고통 받은 것은 군기시 등 병조 관헌들이었다.


10만 철기는 어디가고 겨우 갑사 3천에게 철갑을 입히고 군기시가 멈춰버린 것을 본 병조 관헌들은 강력한 허탈감에 젖어버렸다.


"이미 이전에 오위에 있던 철갑보다 더 많은 철갑을 만들어 갑사들에게 입혔는데 무얼 그리 실망하시오?

어디 철갑만 갑옷인가. 우리나라는 철이 귀하니 이전부터 종이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종이 갑옷 역시 이 분업으로 만들면 그 양이 넉넉해질 수 있을 것이오."


과연 왕의 말 그대로였다. 찰을 만드는 과정만 철이 아니라 종이로 대체하니 과연 종이 갑옷도 쑥쑥 뽑혀 나왔다.


하지만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10만 철기에 비하면 '어흑 역시 조선은 가난하구나' 하는 생각만 들며 가슴이 옹졸해졌다.


계속 찡찡거리는 병조 관헌들을 보니 경식도 좀 짜증이 났다.


"아니, 왜 이리 실망하는가. 군사란 무릇 정예함에 달렸지 수에 달린 것이 아니오.

날랜 갑사 2천에게는 철갑을 입히고, 정병들에게 지갑을 입혀 두만강 너머에 성을 쌓는다면 어찌 야인 수십을 징치하지 못하겠는가.

총과 갑옷은 철장에서 새 로에서 철을 더 많이 생산하게 한 후에 만들어도 늦지 않소."


호조도 왕을 거들었다.


"이미 군기시에서 철을 사들이고, 지방의 철장들에 새로운 로를 짓게 하기 위해서 쓴 돈이 이미 200만 전입니다. 또한 돈을 더 쓴다고 한들 캐지 않은 철로 갑옷을 만들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경차관들을 철장에 파견했으니, 철장에서 새로운 로를 다 짓고 철을 시장에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다 여깁니다."


"그러고보니 이미 많은 국용을 쏟았소. 또한 철 값이 갑절이 올라 백성들에게 얼마나 민폐가 컸는가.

군기시는 철을 적당히 사들여 백성들이 쓸 물건들을 만들어 재용에 보태시오.

두정못을 만드는 이치를 바꾸면 바늘과 못을 만들 수 있고, 큰 칼을 만드는 이치를 바꾸면 부엌칼을 만들 수 있고, 창을 만드는 이치를 바꾸면 쟁기를 만들 수 있는 법이오.

분업하여 물건의 값을 낮출 수 있다면 어찌 백성에게 이롭지 않겠소?

군기시는 분업의 과정을 바꿀 수 있도록 궁구하시오."


무기 만들다가 돈 없다고 생활용품을 만들라는 왕명이 황당해보이지만 이게 조선 표준이다.


사실 원래 역사의 조선에서는 군영들이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을 가지거나, 인쇄소를 운영하거나, 야채 장사를 했던 것에 비하면 종합 철물 공장 군기시는 상당히 생산적인 편이다.


게다가 원래 역사에서 군기시는 이 무렵에 제 기능을 전혀 못하는 수준으로 쇠락하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선녀 같은 상황이다.


왕은 허탈감에 젖어있는 병조 관헌들을 뒤로 하고 마포 행궁을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예조에서 따지는대로 중국행 사신 등 할 일도 있었고, 회임한 중전이 점점 배가 불러오는지라 걱정도 됐다.




서울의 육조를 돌아보자 경식의 조선에서는 거의 항상 초췌했던 호조 관헌들이 보였다. 그걸 보니 경식은 자기가 서울로 돌아왔다는 체감이 들었다.


궁궐이라기에는 너무 작았던 마포 행궁에서는 야매로 했던 조회도 정궁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했고, 마포에 있는 동안에는 상선들 보내서 했던 문안도 오랜만에 직접 다니었다.


그런 왕실 예법 속으로 돌아오자, 경식은 마포행궁에서의 예법이 느슨했던 삶이 오히려 그리워졌다.


문득 자신이 즉위 첫 년에 목표로 했던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에 대한 구상을 떠올렸다.


'그것 때문에 의회제를 만들겠다고 이조를 작년에 괴롭혔지. 결국 못하고 웬 농협 만드는 조직으로 활용하게 됐지만 말이야.'


그래도, 면리제 정도는 완비가 대충 된 것 같으니 이게 좀 더 자리 잡으면 의회 도입에 다시 도전해 볼만 한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이조에서는 내가 내린 추거의 제도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이조판서 이극돈이 답했다.


"급하게 면임과 이임을 고르느라 백성 중에서 권점하여 뽑아놓았으나, 재주가 용렬하여 글을 모르는 상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향회를 맡긴다 한들 어찌 사족과 화합하겠습니까."


상놈들 중에서 아무나 대충 뽑았는데 기존의 향족들이랑 어떻게 섞여서 제도가 굴러가겠냐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중앙이 지금 쯤 함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나는 공성전을 모르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27화 참조)


좀 많이 이상한 과정을 거치고 있기는 한데 어쨌든 대충 굴러가고는 있었다.


'흠...그냥 이미 향회가 조직된 고을에서라도 추거를...아니지, 그럼 그냥 과거제랑 비슷하게 삼남의 사림들이나 올라올텐데.'


경식이 그런 구상을 하고 있을 때 예조에서는 왕이 친 사고에 대해서 아룄다.


"작년에 있었어야 할 식년시의 복시와 전시가 미뤄져 올 봄에 있었는데, 과거 입격자들이 홍문관에서 수학(修學)을 마치지 못해 실직에 임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전하께서 이르신 경세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노대신들이랑 다르게 젊은 놈들이라 대충 알아먹을 줄 알았는데.


경식의 제위 후 처음으로 본 식년시의 합격자들은 경식의 관료 양성 제도 개조의 첫 실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배우는 필수 과목 중에는, 경식이 경연에서 가르친 경제학 내용들을 그냥 시간 순서대로 엮은 경세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지구에선 세계 최초의 경제학 책이 된 셈인데,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에 대한 배려는 끔찍할 정도로 부족했다.


특히 순서가 엉망인 것과 조선인들에게는 낯선 그래프를 마구 넣은게 문제였다.


구성 순서가 쉬운 개념부터 차근차근 배워서 쌓아가는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설명한 이론들을 날짜 순대로 늘어놓은 것이라 맥락을 모르는 신입들에겐 이해가 어렵다.


"아니, 백성이 서로 돈을 빌려주면 조정이 돈을 찍지 않아도 돈이 늘어난다니 이것은 이권재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나라가 빚을 많이 지면 세를 많이 걷게 되는 것이 이치가 맞다고 하였는데 나라가 빚을 항상 져야 한다니요?"


덤으로 번역도 개판이었다.


"물건의 값이 바뀌는 정도를 어찌하여 총알의 힘과 성정(彈力性)(*2)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우리도 모르네! 주상 전하께서 그리 지으신 것을 어찌 알겠나?"


그런 현장 사정을 듣고서 경식은 생각했다.


'으음...역시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 이걸 어쩌지?'


그대로 좀 더 굴리면 대충 알아먹지 않을까? 경제학 교재도 대충 멘큐의 경제학 수준으로 다듬고 다시 가르치면...


"호조에서는 과거 입격자가 호조의 실직으로 등용되는 것이 급한가?"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아, 그래. 미안해. 당연한 걸 물었네.


"내가 이른 경세론은 점수가 부족해도 그냥 실직에 등용 시키시오.

다만 앞으로도 경들은 내가 이르는 경세론을 익숙히 하여야 할 것이오."


인사 관련 문제는 그렇게 정리되었다.


'지방 의회는, 뭐, 나중에 차차하면 되겠지.'




왕이 예조의 업무를 유난히 내팽개치고 있었던지라, 아직도 예조 관련해서 일이 많았다.


다음 건은 중국에 다녀온 사신의 보고였다.


"야인의 토벌에 대해 아뢰기 위해 중국에 사절로 다녀오며 궁각(* 弓角, 활 만드는 뿔)을 들이려 했는데, 천조에서 신들에게 말하기를, '작년에 너희 정조사가 와서 궁각을 무역하다가 발각된 일이 있다. 너희 조정은 금령을 범한 자를 추국하고 다시는 그런 사람을 보내지 말라' 고 하였나이다."


"이런, 철 없어서 갑옷만 못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제 활도 못 만들겠군."


대신들 역시 심각하게 반응했다.


"궁각의 무역을 비록 중국이 금지하나, 우리나라에는 매우 긴요한 물건인데 궁각을 들여오는 자를 어찌 죄 줄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서 칙서나 공문을 보내며 중대히 책망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흔히 조선이 폐쇄적이라고 하고 상당 부분은 사실이기는 한데, 활 만들기용 뿔 같은 전략자원은 관료들조차 밀수를 해서라도 들여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지금 같이 전쟁 준비 중인 상태에서는 명의 이런 조치는 더 치명적이다.


"야인들의 토벌에 대해 중국의 답은 어떠했소?"


정조사 정숭조(鄭崇祖)가 대답했다.


"천조에서 비답하기를, '속방이 스스로 나서 천조의 변경을 범하는 여진을 토벌한다니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근래 달단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도울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동문서답인가 경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야인을 정벌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자기들을 위해서 무급 봉사 해주는 걸로 해석해놓은 다음에, 우리가 야인을 흡수하면 나중에 시비를 걸 속셈이군.'


왕의 해석에 노사신, 이세좌 등 대신들도 동의하였다.


중국의 의도에 대해 해석이 그렇게 결론나자 야인 정벌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두만강을 넘어 성을 쌓으면 필시 후일 중국에서 문책할 것인데 과연 이번 서정(西征)이 가하겠습니까?"


사실 이 부분은 경식이 아는 얄팍한 동아시아사 지식을 동원했을 때는 '대충 괜찮지 않나?' 싶었다. 명나라 어차피 좀 있으면 '북로남왜(*3)' 당하면서 퇴물 되잖아?


"궁각이 없으면 활도 만들 수 없는데, 어찌 기계를 갖춰 효용한 야인들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병조는 내가 만든 소총이 있는데 궁각이 반드시 시급하다고 생각하는가?"


"전하께서 만드신 소총은 총통의 일종으로 사용해야지, 궁시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병조 관헌들이 소총을 보고 뽕에 취해 난리를 치길래 사리분별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조에서는 이미 소총을 어떻게 운용할지,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대강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아직은 소총이 활의 역할을 대신할 수준은 아니다.


"실은 내가 궁각에 대해서는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대신 차후에 명이 이번 서정으로 시비할 경우 어찌할지 논하도록 하시오."


이에 대해서 먼저 나서서 대답한 건 명에 다녀온 정조사 정숭조였다.


"신이 중국을 다녀오며 살피기를, 근래 중국 서울에서도 초피로 사치하는 풍조가 크게 불어 야인들이 드나들 때는 항상 야인 한 명 마다 초피를 10장 씩 챙겨야만 들어올 수 있게 합니다.

명에서 초피를 이렇게 가치 있게 여긴다면 우리 또한 입조할 때 초피를 지니고 간다면, 중국도 우리가 야인에게서 초피를 받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또한 초피를 주고 궁각을 사온다면 그들도 쉽게 무역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 명나라도 초피에 환장하니 정벌한 야인한테서 초피 뺏어서 주면 명도 야인 정벌을 묵인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사실 정숭조 이 영감 관리보다 상인이 더 적성에 맞는 거 아냐?'


과연 그렇다. 정숭조를 사행길 정조사로 보내니까 대간 출신이었던 관헌 몇몇이 '정숭조 그 새끼 돈만 밝혀서 사행길에 상인들 왕창 대동해서 가는데 정조사 시키는게 맞나요?' 라고 딴지를 걸기도 했다.


탐관오리의 냄새가 풀풀 풍겨서 경식도 찜찜해서 바꾸려다가, 대신들이 정숭조가 무역을 잘해서 궁각을 들여오는 재주가 좋다면서 밀어붙여서 그대로 보낸 것이다.


대신들의 말대로였다. 돈 밝히는 놈도 이렇게 보니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하남부원군의 말이 좋아보이오. 서정은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시오."


---


<이하 미주>


*1 : 19화 <돈이 복사가...안된다고?>에서 예산 가지고 대신들이 이 요청 저 요청 다 하고 있을 때 잠깐 끼어든 최부(崔溥)가 재등장했습니다. 실존인물로 '조선판 로빈손 크루소' 인 <표해록>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요. 본문에서 언급되었듯 중국의 수차를 보고서 그 구조를 기억하고 성종 때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두고두고 자신의 수차를 보급하기 위해 조정에 상언하지요. 다만 원래 역사에서는 정부의 관심이 일시적이었다보니 전국 보급에는 실패하지요.

조선에서 수차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며, 그 중에는 조선은 토양이 푸석푸석하여 수차를 만들어도 무너지기 쉽다던가, 계절에 따라서 물이 얼어붙거나 수량이 줄어들어 사용할 수 있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조선시대 당시의 비판을 그대로 인용한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설치한 수차들이 많이 활용되는 것이나, 삼국시대에 수차를 사용했다는 기록들을 보면, 해당 문제들은 기술적으로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토양이 푸석푸석한 문제는 단순히 석회 등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굳히면 되는 것이고(희한하게 조선은 수리 시설을 만들 때 석회를 잘 쓰지 않아 자주 무너졌습니다), 봄에 수량이 줄어드는 것은 보 등의 수리 시설을 확충하는 것으로 극복 가능하지요.


*2 : 홍문관에서 배우고 있는 신입 관헌들이 번역 때문에 곤혹해하고 있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뤄지는 탄력성(彈力性, elasticity) 개념입니다. 독립변수가 변했을 때 종속변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인데요, 비교적 설명하기 간단한 종류는 가격탄력성이 있습니다. 가격탄력성은 가격이 변했을 때 수요와 공급이 변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가격탄력성이 높다면 조금만 가격이 변해도 사람들이 사고자 하는 정도가 많이 변하고, 가격탄력성이 낮다면 가격이 변해도 사람들이 사고자 하는 정도가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작 중 조선이라면 미곡이 가격탄력성이 낮은 물품이 되겠지요.


*3 : 북로남왜(北虜南倭)는 명나라 시대 중기에 명을 침공해온 북쪽의 몽골과 남쪽의 왜구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이 중 몽골은 25화 <대초피시대>에서 언급한대로 만두카이와 다얀 칸의 출현으로 작 중 시점에서 이미 강력해져 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편 왜구는 1520~60년대에 제일 심각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좀 더 미래의 일이 되겠습니다. 그 시기에 재위한 가정제는 도교에 심취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지요. 경식은 벌써부터 명을 우습게 보고 있지만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6

  • 작성자
    Lv.21 흑사자룡
    작성일
    24.06.06 20:41
    No. 31

    페이커가 '아이템 조합은 요로케 요로케 하고 무빙하고 궁은 조로케, 자 따라해 보세요' 이렇게 가르친 셈인데...마우스 클릭으로 캐릭터 움직인다는 거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들한테 그러면 알아듣겠냐 ㅋㅋㅋ
    얘는 진짜 ㅋㅋㅋ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1 흑사자룡
    작성일
    24.06.06 20:41
    No. 32

    탄성력은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물물방울
    작성일
    24.06.06 20:46
    No. 33

    흥미진진한 상황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양마루
    작성일
    24.06.18 22:10
    No. 34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4.06.22 22:55
    No. 35
  • 작성자
    Lv.17 g4******..
    작성일
    24.06.27 15:12
    No. 36

    인터넷 역사 밈으로 많이 퍼져있는 전열보병 썰,
    인도 초석 가진 영국만 사격훈련하고 타 유럽국은 제식만 했다는 낭설이 있는데, 실제론 초석생산 방법을 꾸준히 연구해서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사격훈련을 했다하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제왕 연산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외부 팬아트 모음 +12 24.06.10 2,182 0 -
공지 <경제왕 연산군>은 월~금 18시에 연재됩니다. 24.05.08 10,685 0 -
48 신항로 2 NEW +72 9시간 전 3,726 332 25쪽
47 신항로 +47 24.06.26 6,352 391 25쪽
46 수완가 +58 24.06.25 7,368 380 22쪽
45 아이신기오로 +98 24.06.24 8,198 465 24쪽
44 자본과 기술 +72 24.06.21 9,139 480 21쪽
43 인클로저 +79 24.06.20 8,641 459 23쪽
42 봉 잡았다 3 +67 24.06.19 9,116 485 24쪽
41 봉 잡았다 2 +79 24.06.18 9,250 455 22쪽
40 봉 잡았다 +90 24.06.17 9,848 493 23쪽
39 탈상 +87 24.06.15 10,261 474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2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2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2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2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1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1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8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9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5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6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