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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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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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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856
추천수 :
26,509
글자수 :
461,568

작성
24.06.27 18:00
조회
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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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글자
25쪽

신항로 2

DUMMY

"저기 보이는 것이 일본 구주인가?"


"아니, 저건 구주는 아니고 구주에 붙어 있는 섬인 오도(* 五島, 현 일본 고토 시)일세. 구주는 훨씬 커. 거의 경상도만할 걸.

원래 박다를 갈 때는 저걸 오른쪽에 끼고 쭉 올라가면 되는데...이봐! 사부로! 여기서 바로 유구로 가는 길은 아나?"


"바로는 좀 어렵고, 더 남동으로 내려간 후에 섬들을 따라서 남서로 내려가야 합니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지금 시점의 항해술은 비슷하다. 연안에서 약간 떨어진 외양 정도를 다니며, 육안에 의존하여 주변 섬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시로와 사부로가 아는 바닷길도 그 수준. 여전히 섬들이 살짝 보이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려가야 했다.


섬이 보일듯 말듯한 거리가 되자, 슬슬 다른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왜구인가?!"


30~40년 정도 미래라면 맞을 것이다.


닝보의 난으로 인해 일본과 중국의 무역이 금지되고 후기 왜구가 발생했을 때 그 근거지가 고토 열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닝보의 난 전이고, 후기 왜구가 나타나기도 전이다. 저들은 그냥 어부다.


"그냥 어부들 아닌가?"


"왜놈들 중에 그냥 어부가 어딨어? 저 놈들은 물고기 잡으러 왔다고 하면서 삼척 짜리 칼을 들고 와서 휘둘러 대서 관헌들도 못 건드린다고!"


그런데 이것도 사실이다. 전국시대 일본인들은 다 그렇다.


게다가 지금 말한 일은 조선 왜관 근처에서는 밥 먹듯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지금 선단의 선원들은 왜관이랑 무역을 해본 놈들이 과반이다보니 다들 그런 실태를 아주 잘 알았다.


"아니, 잠깐. 말이 이상한데. 이젠 우리가 관헌 아닌가."


"듣고 보니 그렇네."


생각해보니 자기들은 해동제국사 소속의 군관들. 왜구를 단속할 권한이 있다.


물론 권한이 있는 건 있는 거고, 5개월 날림으로 한 훈련 가지고 갑자기 자신감과 전투력이 치솟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배에는 30% 정도는 수적 출신이 섞여 있다.


"이렇게 된 참에 저 왜구 놈들 좀 때려 잡지. 우리가 바로 왜구를 단속하는 해동제국사 아닌가!"


"맞네! 어차피 배도 우리가 몇 배는 큰데, 제깟 놈들이 뭘 어쩌겠어?"


딱히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수적 출신들이 남의 배를 보자마자 공격하고 싶어했다.


남을 약탈하기보다는 (주로 관군에게) 약탈 당한 일이 많았던 상인 출신 선원들이 반대하여, 민주적인 배 충무함은 또 마라톤 회의가 벌어지려고 했다.


선단을 이끄는 최말동 통령의 말은 딱히 아무도 듣지 않았다.





충무를 본 고토섬 어부들은 생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배에 신기하다는 듯 다가갔다.


고토섬은 제주도에서 하카타로 가는 조선인들 말고도 많은 배가 다니는 곳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닝보에서 하카타로 가는 감합무역을 하는 배이다.


그리고 그런 배들은, 이 충무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크다. 고토에서는 새 배가 좀 다가왔다고 두려워하면 뱃일 못한다.


하지만 우리 조선의 용맹한 해동제국사 선원들은 진행 중이던 마라톤 회의를 중단할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왜구가 다가온다!"


"망할, 빨리 결정을 못하니까 이 꼴이 되는 거 아냐!"


지금 다가오는 것은 왜구도 아니고 딱히 약탈하러 오는 것도 아니지만, 처음 그들을 관측하는 순간부터 왜구로 확정한 이상 그런 걸 검토할 때가 아니었다.


바로 수적 출신들이 배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한다!"


"좋아! 화포 장전 됐어!"


"이미 심지에 불 붙여 놨어!"


포신에 포탄을 넣기도 전에 심지에 불을 붙인 사소한 찐빠에 대해 신경 써서는 안된다. 아무튼 장전하던 놈 머리가 날아가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해동제국사의 외장형 양심이요, 항해능력 0점의 기수열외자인 유표가 혼자 '아니, 쟤들이랑 대화할 수 있는 일본인들도 있는데 좀 얘기를 해보라고!' 라고 따지고 있었지만, 돛줄도 제대로 못 잡는 더벅머리의 말 따위 들리지 않았다.


펑! 퍼벙! 펑!


충무의 24개의 포문들이 서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며 중구난방으로 발사되었다.


화포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고토섬 어부들은 불합리하게 덮쳐오는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아이고, 부처님!"


"사람 살려! 요괴 배다!!"


대선 초호기가 발산하는 왜구를 거부하는 AT 필드에 어부들은 순조롭게 격퇴 되었다.


경식이 대선 초호기의 이름을 충무로 한 것은 갑자기 김밥이 땡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존 조선의 정규 군함인 맹선은 커봐야 80명이 타는 갤리선이지만, 이미 성종 시대에 민간은 맹선보다 더 크고 강한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성종 시기 무렵부터 왜구에 대한 대비를 위해 함선을 크게 해야한다는 주장과 작고 날렵한 배를 써야한다는 주장이 대립했었다.


왕은 답을 알고 있다.


왕이 민간 조선공들을 불러 최대한 큰 배를 만들어 보라고 하자, 노꾼이 120명 정도는 필요한 체급의 배가 만들어졌다.


기존 대맹선보다 50% 큰 배요, 우연하게도 원래 역사의 판옥선과 거의 같은 체급이었다.


하지만 경식은 외양항해를 상정한 범선을 만들기로 했고, 노꾼이 들어갈 자리에는 대포를 채워넣었다.


그 결과, 원역사 판옥선과 비슷한 화력인 24문의 포가 장착된 현재 시점 동아시아에서는 최강의 배가 만들어져버렸다.


물론 동시대 유럽의 배들보다는 훨씬 작고,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 후기만 되어도 대포를 70문 씩 단 전선을 만들 정도니 딱 이 시대 동아시아에서나 최강이긴 하다.


충무와 함께 선단을 꾸린 배들도 마찬가지다. 대맹선급의 배를 범선으로 개조한 것이라 대선에는 못 미쳐도, 10문, 12문 정도는 포를 달고 있다.


경식은 '서양은 한 50년만 지나도 80문이 넘는 대형함이 나오지만 조선은 구리도 없으니 소박하게 3분의 1 정도로 하자' 는 생각으로 만든거지만, 신하들은 왕이 미친 줄 알았다.


아니, 군비 증강에 미친 왕인건 이미 다들 알고 있긴 했다.


하여간 그런 배가 대포를 쏴대며 들어오니 평범한 (3척 장검을 상시 소지하는) 일본 어부들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미래용사 '더 재패니즈 슬레이어' 이순신의 시호를 딴 이름의 배는 그 이름 값을 해냈다.


그리고 해동제국사 선원들에게 있어선 소중한 첫 승리의 경험이 되었다.


상대방이 싸울 의지가 애초에 없었단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선원들이 자기들은 이제 싸워서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원들은 첫 해전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일지에 기록하도록 기열 유표에게 명령했다.




그 뒤로도 해동제국사 선단은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뭔가 수상해보이는 배가 나타나도 대포를 몇 대 쏴주면 곧 도망쳐서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유표는 동쪽으로 오자고 주장한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5일 정도 더 내려간 곳, 아마미 군도.


시로와 사부로가 말하길, 이 섬부터는 일본이 아니라 유구에 속하는 섬이라길래, 선단은 배를 좀 대서 좀 뭘 받아먹으려 했다.


유구에 속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뭘 받아먹을 생각부터 하는게 무슨 뻔뻔함인가 싶겠지만 원래 이 시대 외교 사절들은 다 이렇다.


일본 사신도 아니고 그냥 부산포 온 상인이 사신인척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갑질을 하고 갈취를 해대던 것도 불과 재작년 일이다.(* 원래 역사 연산 1년 10월)


조선에게 내조하겠다면서 동북에서 내려오는 여진족들이 오는 길에 산적질을 하고 겸사겸사 다음에 약탈하러 올 길을 봐둔다고 논란이 된 것도 작년 일이었다.(* 원래 역사 2년 4월)


대한민국 사람들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 올 때 갑질해서 민폐를 끼쳤다 정도만 배우고 말지만, 조선도 명나라로 사신 갈 때도 그랬고, 일본으로 통신사로 갈 때도 그랬다.


그런데 같이 타서 송환 시킬 예정인 유구 표류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결사 반대를 하는 것 아닌가.


시로가 말을 옮겨줬다.


"이 섬은 유구에 속하긴 하는데, 가로들이 항상 난을 일으키고, 유구를 원수로 여기며 유구에 속한 자신들도 미워하니 자기들을 보면 분명 죽이려 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시점에 유구 왕국이 통일 되었다고는 하는데, 아마미오 섬은 유구에 복속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유구 조정의 갈취가 심각하여 제대로 통제되고 있지 않다. 훨씬 미래인 1571년까지도 반란이 일어날 정도다.


선원들의 답은 명쾌했다.


"그런 불의하고 무도한 놈들이 있나!"


유교적으로 봤을 때 그런 놈들은 역적에 속한다. 정의롭고 충과 예를 아는 조선인들이 '교화' 시켜줘야 한다.




아마미오 섬 주민들은, 멀리서 기이한 모양새의 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마자 위협을 느꼈다.


이 무렵에 저렇게 큰 배를 가지고 오는 놈들은 유구 조정에서 온 관리들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마미오 주민들은 불과 4년 전(1493년)에 왜구들을 불러서 유구 조정과 싸웠던 경력이 있다. 유구 조정이 군대를 끌고 오면 다리가 저릴 수 밖에 없다.


사실 아마미오 주민들도 따지자면 억울하다.


유구 조정에서는 유구 본 섬 외의 주민들은 착취할 대상으로만 봤지 백성으로 보고 돌본 적이 없다.


그리고 '유구 왕국의 중앙집권을 달성한 명군' 인 쇼신 왕이 보내는 관리들은, 이 시대 관리들이 다 그렇듯, 지나가는 자리는 다 쓸어가 남기는 것이 없는 지경이었다.


토지사유제도를 부정하고, 주민공동체에 인두세적으로 공물을 요구하는, 경식이 오기 직전 조선과 닮은 수취 체제는 아마미 주민들에게 극도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더군다나 불과 4년 전의 전란으로 저항할 무기도 남김없이 다 뺏긴 상태.


자기 네가 뭘 잘못했다고 조정이 이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조정에서 멋대로 가져다 붙일 이유 따위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들은 바로 산 속으로 피신했다.




텅 빈 마을을 본 해동제국사 선원들은 마을에 '교화' 를 실시했다.


여태까지 수상한 배들에는 일단 대포를 쏘고 본 것처럼 마을 근처 해안가에서 대포를 갈겼다.


훈련을 야매로 받은 놈들이 쏜 것이 답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수면 말고는 아무 것도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도 반응도 없어서 상륙해보니, 이미 마을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극심한 착취에 시달린 마을이 다 그렇듯 별로 얻을 것은 없었지만, 해동사 선원들은 주민들이 놓고 간 소와 닭 등을 배로 위치이동하기 시작했다.


훈련원에서 배우기로 유구 사람들은 소랑 닭을 고기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죽으면 묻는다고 하였다.


되려 그것을 알려준 조선인을 비웃고 침까지 뱉었다지.(*1)


이런 아까운 것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 광경을 본 선단의 외부 탈착형 양심인 유표가 소리쳤다.


"아니, 필시 방금까지 사람이 있다가 우리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인데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하지만 소용 없었다. 이미 최말동까지 같이 가서 먹고 있었다. 밥에 환장하는 민족 조선인에게 외양항해하면서 5일이나 미숫가루 따위로 버티라고 한 왕이 나쁘다.




유구 본섬에 도착한 해동제국사 선단은, 조선인에서 상놈으로 살아오며 익힌 고유 기술 '전투력 측정'을 발동했다.


죄다 상인 아니면 수적 출신이다보니, 이들의 스킬 레벨은 조선 상놈들 중에서도 특별히 높은 편이었다.


또 일반적인 상놈들이 상대방 하나하나의 전투력을 측정한다면, 이들은 지금까지 합을 맞춘 경험(10일)을 통해서 서로의 능력을 더욱 증폭 시켰다.


그들은 유구의 수도 슈리 전체의 전투력을 측정하여, 자신들의 스탠드(뒷배)가 조선이어도, 지금까지의 모험처럼 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의 우애 깊은 해적단이 섬에서 깽판을 치다가 얻어터져서 2년 뒤에야 다시 모일 수 있게 된 것과 달리, 그들은 선비의 나라에서 온 예의 바른 사절단이다.


벼슬도 받은 관헌답게, 궤짝에 고이 모셔뒀던 초록색 비단 단령도 꺼내 차려 입었다.


이 광경을 본 유표는 인의예지라는 것이 이렇게 주입되는 것이었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 경전에서는 단 한 번도 배운 바 없는 것이었다.


유구왕 쇼신은 동아시아의 표준 예법대로 해동제국사 선단을 맞이했다.


일본 상인이 사신을 사칭하는 걸로 파악하고 대충 접대한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게, 하는 짓이 절대로 사절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하하! 세상에 후추가 이렇게 싸다니! 지금까지 왜놈들 때문에 얼마나 바가지 쓴 거야!? 이제 이걸 중국에 가서 팔면!"


"이 사탕수수라는게 맛이 참 달달한게 신기하구만! 한 개 더 줄 수 있나?"


"소목 말이야, 소목! 그래! 이거! 한 자루! 소 한 마리에 어떤가? 두 마리 달라고? 어허, 안돼!"


"이야, 이게 그 천축술인가 하는 것인가? 어디 한 번...푸핫!"


"에헤이! 그 아까운 것을 왜 뱉어!"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다니며 사무역 좀 해본 이들이 평소 버릇을 버리지 못해 관복을 입고도 장사에 빠져 있는 꼴은 누가 봐도 사기꾼으로 보일만 하다.


물론 이 부분도 동아시아 표준이다. 특히 그들은 한가락 하는 상인들이랑 같이 다닌 사공들이거나, 아예 선상 출신이다.


어느새 존재감이 없어졌지만 의외로 제일 높은 지위고, 쇄환정사 직위도 맡은 최말동과, 유일하게 한자를 아는 유표, 그리고 통역인 시로랑 사부로만이 유구 조정으로 나아갔다.


유구말을 벌써 익혀서 좀 말 할 줄 아는 놈은 아마미오 섬에서 훔친 소나 닭 등지를 시장에서 파느라 바빠서 도움이 안됐다.


유구 조정에서는 최말동이 유구인들을 열 명이나 데리고 온 것과, 조선 국왕의 인이 찍힌 서계를 보고서야 그들이 일본 상인들이 아니라 조선인임을 깨달았다.


일본인들은 유구인을 훔쳐가는 편이지 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딱 '표류민 송환하고, 물길만 알아오고, 다른 건 할 필요 없어' 정도 입장으로 보낸 거라 별 임무를 안 맡겼는데, 사실 이렇게 직접 배를 보내서 송환해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예를 갖춘 행동이다.


덕분에 해동제국사는 실제 직무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게다가 유구는 바로 옆에 왜구들을 끼고 있는지라, 말이 통하는 유교 국가(로 보이는) 조선에 대해 막연한 호감 도 있었다.


가지고 온 비단과, 오는 길에 아마미오 섬에서 주운 소와 닭을 탈탈 털어서 후추, 설탕, 소목, 유황, 물소뿔 등으로 바꾼 상인 출신 선원들은 싱글벙글 했다.


특히 평안도에서 중국이랑 밀무역 해본 상인 출신들이 입이 귀에 걸린 수준이었다. 이 후추를 중국에 팔면 대체 얼마나 돈이 될지 계산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역시 이 시대 동아시아 외교 사절들이 다 그렇듯 민폐를 끼쳤다.


이번에는 해류도 남쪽으로 흐르고, 바람도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역풍인지라 배의 속도는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해동사의 민폐 밀도는 두 배로 늘었다.


그리고 이를 벅벅 갈면서도 무기를 유구 조정에 다 뺏겨서 저항을 하지 못한 아마미 군도 사람들과 달리, 일본 쪽에 다가가자 저항이 시작되었다.


가장 처음 해동사의 대포에 당했던 고토 열도였다.


"저, 저 배입니다! 지난 달에 나타났던 요괴 배입니다!"


"확실히 크지만, 요괴 배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지금 고토 열도를 지배하는 우쿠 사토루(宇久覚)가 어부의 보고를 받고 해안으로 나왔다.


이 시대가 비록 왜구가 잦아드는 시대라고 하나, 근래 오우치와 쇼니의 싸움 때문에 늘어난 병사들이 왜구로 돌변해서 약탈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무사인 사토루도, 근래에 나타났다는 배에 대해서, 요괴 배보다는 그런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해동사 선단은 물과 식량이 또 떨어져서...정확히는 식사를 미숫가루나 인절미, 황태포로 때우는 것이 지겨워져서 오도에 배를 댈까 생각하고 있었다.


"오도는 유구에 속한 섬이 아닌데, 뭘 받아 먹을 수 있으려나?"


"그래도 아직 비단이 남아 있잖아. 비단 좀 주면 우리 먹을 것 정도는 챙겨주겠지."


처음에 왜구(아님)를 보고 패닉에 빠졌던 선원들은 어디가고, 대포 몇 대 쏘고 비단을 주면 공정한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체득한 정예한 수군들만이 남았다.


"여기의 거추(다이묘)가 누구의 편인지도 모르는데 배를 댔다가 낭패를 보면 어쩝니까?"


아직 제정신 비슷한 걸 유지하고 있는 유표가 딴지를 걸었다. 어째 요새는 통령인 최말동보다 유표가 더 열심히 의견을 내는 것 같다.


"거참, 그것도 일단 배를 대야 알던지 말던지 할 거 아니야."


"이 오도에서 서쪽으로 돌아서 제주도로 가려면 또 사흘은 걸릴텐데, 그 동안 인절미랑 냄새나는 물이나 마시고 싶어?"


유표도 역시 그건 싫었다. 아마미오에서 마지막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그 뒤론 미숫가루 따위로 끼니를 열흘이나 떼워야 했다.


결국 해동사의 마라톤 회의는 오도섬에 배를 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오도섬 주민들은 딱히 그들을 환영해주려 하지 않았다.


"요괴 배가 이리로 다가온다!"


"병사들은 화살을 활에 재어라!"


그리고 그 모습은 충무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당황한 유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우리가 지나다닐 때마다 화포를 쏘니 다들 수적인줄 알고 저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수적이야! 수적질은 왜놈들이 매일 같이 하지!"


"맞아! 내가 보기에는 저놈들이야 말로 왜구라고!"


사실 이 시점 고토 열도도 이미 무사들은 해적질을 종종 하니 꼭 틀린 것도 아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데 모두가 팩트만을 말하는 기묘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유표의 의견이 반영될 일은 없었다. 이미 다른 선원들은 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포 준비 완료!"


"그래, 당장 쏴! 왜구들은 봐줄 것 하나도 없다!"


"그만하라고, 이 미친 물개 자식들아!"


워낙 가깝기도 하고, 표적이 될만한 사람들...그러니까 우쿠 씨의 병사들이 진을 짠 채 서 있었던 관계로 해동사 선원들이 쏘는 포는 처음으로 표적을 맞췄다.


"우와아악!"


"배가, 배가 천둥을 쏜다!"


"사람 살려!"


"아이고, 신님! 부처님!"


우쿠 사토루는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낙마했다. 이름이 똑같은 누구랑 다르게 몸이 상하분리가 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 할 만 하다.


물론 낙마도 최소 중상이요, 사망에 이르는 일도 흔한 중대한 사고지만, 모래사장이었던 탓에 다행히 기절로 끝났다.


해동사 선원들은 왜놈들이 죄다 도망치던지, 죽던지, 아니면 적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포를 갈겼다.


"이러면 이제 슬슬 다들 도망쳤겠지?"


"남아 있는 것이 뭐가 있나 좀 볼까?"


유표는 이런 것을 해적질이라고 부른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선원들이 다들 마을로 내려가는 바람에 미처 말할 수 없었다.


통역으로 온 시로랑 사부로는 이 상황에서 전국시대의 평범한 일본인의 표준적인 행동 양식에 따라 움직였다.


패잔병의 목을 딸 수 있는 칼과 연장을 들고 시체(진)으로 다가간 것이다.


원래 전국시대에는 전투가 벌어진 후 인근 마을 주민들이 병사들 시체에서 물건을 챙기면서 전장 정리를 하고, 설령 살아 있는 패잔병이어도 시체로 만들고 주워가는게 기본이다.


해동제국사 선원들의 명중률이 워낙 개판이었던 관계로 죽은 놈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방금 말을 타고 있던 놈이 좀 높아보이니, 그 놈 시체를 뒤지면 뭔가 많이 나오리라.


그래서 유심히 봐뒀던 그 놈에게 다가갔더니,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이 요괴 놈들! 고토 섬을 노략질하러 온 거냐!"


놈...그러니까 우쿠 사토루는 낙마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해도 칼을 빼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죽일까?"


그 광경을 본 유일한 문명인이요 선단의 탈부착 양심(주로 탈착되어 있음)인 유표가 달려가서 말렸다.


"이놈들아! 지금 너희 나라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략질을 하는데 말리지는 못할 망정 같이 노략질을 하느냐!"


사실 시로와 사부로는 일본인이 조선을 노략질 할 때도 딱히 말리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표는 항해 중에 배운 짧은 일본어로나마 그 사내에게 의사를 전달하려고 해보았다.


조선에서 그들이 왔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은 사토루는, 공포에 휩싸였다.


'분에이의 역?!'


일본이 유일하게 외적에게 본토까지 침공 당해본 사건. 미래 한국에서는 주로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라고 부르는 전쟁이다.


조선이 대마도를 터는 것은 여러 번 있던 일이라 신경도 안 썼는데, 자기들에게 이런 일이 닥치니 사토루는 그 사건을 떠올리며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뭐, 뭘 하러 온 것이냐! 하카타도 아니고 고작 이런 섬에!"


사실 하카타도 지금 조선군이 가 있긴 하다. 이렇게 노략질은 안 하지만.


슬슬 일본어가 부족해진 유표는 시로와 사부로에게 통역을 맡겼다.


"사, 사실 그냥 배를 대어서 식량과 물을 받으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오해가 커져서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해서 유표는 사토루와 한동안 말싸움을 해야했지만, 결국 오해(?)는 풀렸고, 유표 역시 사토루가 이 섬의 거추임을 알게되었다.


낙마하느라 엉망이 된 사토루의 머릿 속도, 점점 정신이 깨어나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원들이 마라톤 회의로 민주적으로 선단의 향방을 정하게 된 이후로 존재감이 없었던 선단의 통령 최말동도 사토루와 대화하여 제대로 교섭다운 교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작은 섬이긴 해도 나름 다이묘인 사토루가 직접 나와 살피기 까지 한 것은 근래 고토 섬의 정세 때문이다.


지금 일본은 하극상이 만연한 전란의 시대다. 지금 사토루의 후계는 올해 막 태어난 카코무 하나 뿐. 그러나 사토루는 이미 많이 늙어간다.


우쿠 씨의 가신들 중에서도, 우쿠 씨보다도 앞서 무역에 나서서 점점 힘을 기르는 이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그들은 우쿠 씨의 방계. 사토루가 영지를 지키는 모습을 계속 보여서 단속을 하지 않으면 곧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렇게 와서 류큐를 드나들 때 배를 대고 가겠다니, 그에게 있어선 기회나 다름 없다.


배를 잠시 대어 보급하는 것 뿐이라고는 하나, 그 과정에서 조선과 류큐의 물자가 고토로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개항에 동의하는 사토루와 달리, 되려 최말동이 캥겨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해동제국사의 규정에서, 우리는 사사로이 왜인과 통교해서는 안되는데 이래도 되나? 왜구를 때려잡는거야 괜찮다고 써 있지만..."


옆에서 그걸 들은 선원들이


"그럼 역시 이놈들은 왜구인 것으로 처리하면 되겠군!"


하고 소총의 화승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 미친 해적들에게 질린 유표가 급하게 말동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분명 왜인과 사사로이 통교하는 것은 안되나, 우리는 본디 물길을 찾기 위해 파견된 것이라, 왜의 섬에 배를 대었을 때 포목 등속을 주고 음식을 얻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대내전의 눈을 피해 물길을 찾기 위해 온 것으로, 일본 조정을 따라 조선이 배를 대어도 상관하지 않는 구주의 거추들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이 오도 거추와 약조를 맺어 배를 댈 수 있게 확약한다면 어찌 주상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다들 글자를 몰라서 지금까지 교지(명령서)를 대충 어디 박아두고 잊고 있었다. 역시 글을 아는 놈이 하나는 있어야한다.


"좋아! 오도 거추는 서명하시오! 조선인들이 오도를 드나들 때 막지 않고 배를 대게 허락하겠으며, 값을 치르는대로 물과 식량을 보급하겠다!"


그렇게 고토는 해동제국사의 첫 개항장인, 오도특별자치항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오도 거추는 평화를 얻고, 조선은 유구로 나아갈 항구를 얻었으니, 이 어찌 조선 좋고 오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이하 미주>


*1 : 해당 기록은 성종 10년(1479) 6월 유구로 표류했다가 돌아온 제주 주민 김비의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그 외에 본문에서 나온 유구 관련 묘사들은 아래 논문 등을 참조했습니다.

<김강식. (2021). 15∼16세기 朝鮮과 琉球의 해역 이동.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4, 1-34.>

<하우봉(2018), "조선 전기 유구,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p.203~206.>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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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60 24.06.11 10,342 471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1,141 500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2,142 513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2,242 544 25쪽
31 서울의 여름 +37 24.06.05 11,693 488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436 500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2,101 526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458 573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8 24.06.01 12,498 562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538 562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840 551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449 499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939 55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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