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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7.05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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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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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13,290
유료 전환 : 1일 남음

작성
24.07.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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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6
추천
467
글자
24쪽

오라 남으로

DUMMY

1498년 봄. 서울은 왕자의 탄생으로 들떠 있었다.


신료들은 원자가 태어났으니 마땅히 종묘에 제를 올리고, 연회를 베풀고, 죄수들을 사면하며, 별시를 열어야 한다고 아룄다.


경식도 당연히 축하하고 기뻐할 일인건 알고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상한 찜찜함이 밀려왔다.


'연산군이랑 몸을 공유하고 있어선지 내 자식이 아닌 거 같다' 식의 자아 갈등 이야기가 아니었다.


뭔가 후계자 가챠를 잘못 돌린 것 같은...더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교적으로 아주 성군감이어서, 경식이 이룰 자본주의적 사회를 개박살 내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조선왕들이 후계자가 맘에 안 들 땐 어떻게 했더라? 뒤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교육 잘 시키면 괜찮을텐데 무슨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한담...'


이 아이가 어떤 걸 보고 듣고 배워서 어떤 품성을 가지게 될지, 미래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게다가 유교적 성군이 될까봐 불안해하다니 우스운 일 아닌가.


경식이 빙의한 연산군 이융은 조선사 최악의 폭군인데, 그보단 유교적 성군이라도 하는게 낫지.


경식은 대체 왜 자기가 이런 피해망상적인 불안을 느끼는건지 이해가 안됐다.


순간 연산군의 영향인가 하는 가설도 생각해봤는데, 연산군이 자기 첫 아들한테 이런 감정을 가질만한 이유는 없어보였다.


경식은 불안감을 대충 털어내고 연회를 즐기며 축하하기로 했다.


아무튼 연산군과 중전 신씨에게는 첫 아들이요, 조선에는 차기 군주, 경식에게는 일 인수인계할 후임이 온 것 아니겠는가.




한양의 들뜬 분위기는 원자의 탄생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과연 흉년이었으나, 올 봄은 모든 곡식이 잘 익어 풍년이라 할만 합니다. 신이 살피건데 북방의 4진의 정세가 이제 안정되었으니, 북방으로 사민은 준비한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번리위무사의 축성사로 선발된 이극균이 보고했다. 원래는 이름 그대로 성을 쌓는 걸 감독하는 자리인데, 사민을 하면서 새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거라서 이름이 저렇게 되었다.


이극균의 말대로, 다행히 올해는 보릿고개를 지나자 풍년이었다.


덕분에 초기 정착 때 들어가는 식량 비용이 많이 줄어들 것으로 계산되었다.


지금 조선의 생산기술은 대부분 인력을 투입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생산비용의 대부분은 임금이 차지한다.


그런데 이 임금은 최저하한선이 최저생계비용보다 아래로 내려가기가 어렵다. 밥 먹기도 힘들 정도로 낮은 돈을 받고 누가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생산비용 자체가 식량가(食糧價)랑 연관성이 깊다.


게다가 나주에서 흉년이 들면서 곡식만이 아니라 목화도 흉작이 들어 목화 값이 뛰었듯, 산업 원자재 중 상당수도 농업과 관련이 있다.


특히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 중 제일 중요한 의, 식이 이렇게 농업과 연관이 있으니 농사의 풍흉은 단순히 식량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생활 물가와도 연관이 깊다.


그렇다보니 풍년이 들면 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호조에서 결산 결과, 세입도 2천만전을 돌파했다. 주로 사치품들을 위주로 관세랑 소비세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세입 증대였다.


이러니 백성들 사이에서도, 조정에서도 안심해도 되겠다는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추수 이후부터 겨울까지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모집된, 빚을 갚지 못한 빈민들을 모아서 준비도 마쳤다.


일을 시키고 가르치며 먹여 살리면서, 그 사이 진을 짜는 법이나 총이나 석궁 쏘는 법이나 수성전을 하는 법도 좀 가르쳤고, 조를 짜서 인솔 책임이나 도착 후 행정 책임을 맡을 이들도 선발해놨다.


현지에서도 빈 땅이나, 도착한 이주민들의 생계를 보조할 현지민들도 조사하고 선발해놨다.


이 정도면 미래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처음 개척할 때 주먹구구로 진행했던 것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변수가 없다면, 우르르 굶어죽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남방의 일도 잘 진행되었다.


일단 오우치랑은 이야기가 원활하게 잘 진행되었다.


약조는 경식이 구상한 역 강화도조약이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모두가 교과서에서 본 강화도 조약의 첫 줄인 '조선은 자주독립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어서, 오우치와 조선 예조가 서로 동등한 서열로 교섭을 하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서로 드나드는 배의 양에 제한을 두지 않는 대신, 기존의 공무역과 동평관에서 후대해주던 예는 확 줄였다.


식량을 조선에서 왜인 상인들에게 무료로 공급하지는 않되 식량 교역을 막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등록장이라는 것이 뭐요? 선하증권은 또 뭐고?"


"등록장은 지금 조선에서 쓰는 선적(船籍)과 관련된 것으로 선주가 휴대하고 다니는 것인데..."


설명을 들은 오우치 쪽은 과연 조선과 교역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다들 교역이라고 하면 태반은 해적질인데, 배에 대한 정보나 실은 화물에 대한 정보를 속속히 밝혀서 공개한다니 세상에 이런 정직한 상인들이 어딨단 말인가. 아니면 호구던가.


게다가 전쟁통이라 이런 걸 챙길 겨를이 없는데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법까지 알려준다니 역시 조선은 오우치를 좋아하는게 분명했다. 백제의 이름을 팔길 잘 했다.


이에 오우치 역시 자기들도 조선에게 잘해주는 척 생색을 냈다.


"그럼 우리도 일전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조선에서 쓰시마를 토벌할 수 있도록 수군들이 머물 수 있게 잠시 항구를 빌려드려 지원하겠습니다."


사실 쓰시마는 오우치랑 적대 관계인 쇼니 씨의 봉신이다.


조선이 쓰시마를 토벌하는건 되려 오우치에게 있어서는 뒤통수를 위협하던 놈들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꼴이요, 조선과의 수교를 방해하던 놈들이 사라진 것이니 완벽하게 이득이지, 자기들이 뭘 내주는 입장이 아니다.


오우치와 교섭하는 일을 맡은 박다치전관(博多致奠官) 김율은 그런 사정 정도는 알고 있으나 흔쾌히 대답했다.


"좋소. 약조한대로 군량 등 물자를 박다에서 살 때는 지폐로 지불하겠소."


조선도 대마도에 이제 별 관심이 없다. 기존에는 항해를 더럽게 못하던 조선의 경유지 역할로 의미가 있었지만, 몇 번 해보니 박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일본 외교 관련 사무를 일본 66주 각 주랑 개별적으로 하는 걸 왕이 목표로 잡으니 대마도주의 중계 따위 필요 없다.


사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상선들도 다 박다 출신이고, 대마도주는 그들에게 세견선 인장이나 팔면서 받아먹을 뿐이었다.


대마도 자체는 딱히 물산도 없어서 조선에 쓸모 있는 걸 파는 놈들도 아니었다.


대마도가 했다는 중계 무역이라는게 대체로 이랬다. 그냥 세관 역할을 하며 돈만 받아먹는 개꿀 자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관으로 역할을 잘 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되려 조선에 와서 불법조업하며 해적질이나 해댔다.


해적질이나 하던 산투성이 가난한 섬 따위 필요 없다.


왕은 대마도가 다시는 해적질을 못하도록 해동제국사에게 대마도 해안을 초토화하도록 명령했다.


사실 해동제국사가 좀 날림으로 훈련된 일반인들에 더 가깝다보니 내륙에서 싸우면 질 거 같아서 해안만 털라고 한 것에 가깝긴 하다.


세종 시절의 대마도 토벌 때도 내륙으로 둘어갔다가 백병전에서 괜히 진 일이 있으니, 그냥 조선이 잘하는 원딜만 계속하는게 나았다.


물론 해동제국사 소속들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뭔가 조금이라도 돈이 될 거 같은게(인간 포함) 있으면 잠시 상륙해서 챙겨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습 당해서 죽은 경우도 있고.


아무튼 그 덕에 대마도는 해안에 배도 마을도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안 그래도 밭이 없는 섬이었는데 주민들은 물고기도 못 잡고 숲에 박혀서 졸쫄 굶고 있었다.


아무튼 조선과 오우치의 회담은 여느 외교 현장이 그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봉잡았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끝났다.




유구 탐험 쪽도 잘 진행되었다.


처음으로 탐사를 보낸 최말동 선단의 기강이 왜 그랬나 의견이 오간 결과, 선단장인 최말동이랑 별 안면이 없는데 최말동보다도 경력이 길고 항해술이 뛰어난 선원들을 잔뜩 배치한게 문제의 원인 아니었나 하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서 선단의 인적 구성을 바꾸어서, 대부분의 선원들은 최말동과 안면이 있는 이들로 배치하고, 일부 사공 몇 명 정도만 경력 있는 이들을 배치해서 선내 부관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항해일지 쓰라고 같이 태웠던 유생 유표가 의외로 선원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도 참작되어서, 유표는 두 자급 승진 시켜줬다.


물론 해동제국사에서 풀어주진 않았고 다시 탐사선에 태웠다.


그리고 최말동이 최소한의 통제를 할 수 있게 처벌권을 돌려주되, 유생을 한 명 더 율관 역할로 태워서, 항해일지를 쓰는 유생이랑 율관을 하는 유생 둘의 동의 하에 처벌이 가능하게 했다.


율관은 또 성균관에서 까불던 유생을 데려와서 채웠다. 성균관은 정말 좋은 수군 예비 장교 수급처였다.


이 조직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2차 최말동 선단은 대만까지의 항로를 개척했고, 오는 길에 사쓰마의 개항도 이뤄냈다. 다행스럽게도 대포를 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사쓰마의 개항이 특이했다.


"조선에서 왔다고? 내가 젊을 적부터 당의 주자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조선에서는 지금 주자학이 크게 성하고 있다고 들었다. 혹여 조선에서 우리에게 경서를 보내줄 수 있는가?"


사쓰마의 영주가 주자학에 꽤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며 조선과 적극적으로 수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1)


일본인들이 유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에도 시대고, 아직은 다들 불교에 빠져있는 줄로만 알았던 경식도 꽤 놀랐다.


그 소식을 듣자 조정 신료들과 성균관 유생들은 기뻐서 날뛰며 교린의 예를 다해야 한다며 빨리 경서를 보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경식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선교사를 먼저 보내서 현지 사정을 조사하고 차차 진출하는 것처럼 좋은 방법이 어딨는가.


유교는 선교 같은 거 안 하는 종교라 안될 줄 알았는데 이게 되네.


경식은 일본을 개항 시키면서 일본인 다이묘들에게 '일본의 미래 지식' 인 고쿠다카(石高)와 검지(* 検地, 토지조사)를 알려주고 시행을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사쓰마가 이렇게 나온다면 계획 변경이다.


고쿠다카는 간단히 말해서 일본판 대동법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입한 거라 조선의 대동법보다 이르고, 서로 참고한 제도도 아니긴 한데, 아무튼 쌀을 기준으로 통일해서 세금을 걷는다는 점에서는 통한다.


조선이 대동법 이후에나 겨우 상업이 발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역시 일본 통일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태합검지 및 고쿠다카 도입으로 중앙집권이 된 이후에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고쿠다카 제도에서는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사무라이들은 쌀로 급여를 받고, 그 쌀을 팔아서 돈으로 바꾸고 도시 생활을 한다.


그렇게 쌀이 공급되어 발전한 상업도시로 인해 일본은 18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도시화율을 달성했다.


이 구조 때문에 일본은 에도 시대에 쌀 선물거래 시장 같은 첨단 시스템까지도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일본에게 해주냐고?


왜냐하면 돈을 공급해주는게 조선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조선은 쌀을 사간다.


게다가 저 고쿠다카는 세금을 내기 위해서라도 쌀농사를 농민들에게 일정 이상 강요할 수 밖에 없고, 농민들은 부가가치가 낮건 높건 쌀농사를 계속 해야한다.


사실 상공업이 발전할수록 농업의 비중은 작아지기 때문에, 같은 수확량의 같은 쌀이어도 상대적 가치가 점점 낮아진다.


그렇다고 쌀농사를 더 많이 짓는다고 나아지지도 않는다. 쌀의 수요는 결국 인구가 식량으로 먹을만큼이기 때문에 쌀을 더 경작한다해도 과잉공급 상태가 되어서 가격이 낮아진다.


이 문제로 에도 시대 후기부터 사무라이들과 막부는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렸다.


쌀농사는 나날히 발전하는데 자기들이 가난해지는 미스테리는 경제학을 모르는 막부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의 지세 제도를 참조한 지조 개정 이후에나 해결된다. 경식은 첫 해에 이미 해놓은 일이기도 하다.


대동법이나 고쿠다카가 당대인들에게는 무척 혁신적이면서도 납득이 가는 제도였듯, 지금 조선인과 일본인들에게도 그랬다.


저 제도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오직 경식과, '그 제도 좋은데 우리도 지폐 말고 쌀로 세금 걷죠?' 라고 했다가 왕에게 일장연설을 듣게 된 평준도감 및 호조 관헌 일부 뿐이었다.


하여간 이걸 오우치에게 알려주고 도입하는걸 도와준다고 했더니 너무 고맙다며 공작새를 보내기까지 했다. 공작은 필요 없다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지금 유교가 좋다는 사쓰마에게는...유교적이고 그 근본이 주나라 시대까지 올라가는 세금 제도인 '공납' 도입을 도와주기로 했다.


조선을 극도의 비효율적 경제 구조로 만든 족쇄와 같은 그 현물세 말이다.


일본에게는 경제학은 유교 경제학이면 충분하다.


"어찌 한 나라의 법이 모든 나라의 풍토와 맞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도입한 지폐법이 맞아 잘 시행되었으나, 일본의 살마주가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허나 살마주 거추인 도진원감(*島津源鑑, 사쓰마의 현 영주 시마즈 타다마사.)이 주자학에 밝다하니, 당률(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조용조(租庸調)를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


대동법의 부작용은 몰라도 공납의 부작용은 잘 아는 평준도감 관헌들은 왕의 혐성에 경악했다.


"허나 전란이 계속되는 일본에서 조용조가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또한 우리나라의 조(調)는 공물(貢物)로 받는데 본래의 당률과는 다른 것으로, 평화로운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폐단이 많아 친히 혁파하셨는데, 어찌 살마주에게 그런 법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2)


우리나라는 쌀을 퍼와야하니 일본에는 석고제를 가르쳐주는게 서로에게 좋다는 왕의 말은, 바로 작년에 흉년을 겪어서 신하들도 공감했다.


그런데 사쓰마에게는 석고제도 아니고, 조선에서도 망한 공납을 가르친다니, 살마주를 호구 잡으려는 왕의 심보가 눈에 뻔히 보이니 신료들도 말렸다. 자기가 공납은 못난 제도라면서 밀어버렸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실 북방에서 여진족들에게 병작반수랑 현물공납을 동시에 받고 있는 윤필상이 꼭 들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걸로 고통받는 우디캐 여진과 일본인 노비들의 울부짖음은 조선 조정까지 닿지 않았지만.


결국 사쓰마를 향한 경식의 수작질은 조선의 양심인 사대부들에게 가로막혀 취소되었다.


사쓰마에서 나올 유황이나 구리를 싸게 사올 찬스였는데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


"그럼 살마주에는 대내전과 같이 약조를 맺는 것으로 하고, 살마주의 청에 따라 경서를 보내고 강독해줄 교수 또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이조와 예조에서는 경학에 밝은 이를 추천하시오."



선단의 유구 방문엔 또 다른 성과도 있었다.


유구는 지금 동남아시아 상인, 일본 상인, 중국 상인이 모두 집결된 동아시아 남방의 무역 허브로 기능하고 있었다.


덕분에 최말동 선단이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와중에, 동남아시아 상인들과도 접촉했고 그들 중 일부가 조선에 대해서 아는 체를 했다.


조선에게 있어서는 100여 년만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신이 유구의 수리(首里)를 둘러보니, 현 왕 상진(尚真)은 성군이라 백성들이 편안하였고 부유하기가 이를데가 없었으며, 남만에서 만국의 배가 몰려 들어 입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남만의 배의 모양을 보아하니, 우리의 대선보다도 갑절 이상 거대하며 돛을 다섯 씩 다는 배가 무수하여 돛으로 하늘을 가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제가 물었더니, 그들은 발니(渤泥)국에서 온 사신으로 명에도 입조하는 이들이며, 조선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으며 우리에게 입조하고 싶다 합니다.

또한 섬라(暹羅)국 사람들도 있었는데, 제가 옛 태조묘 때 섬라의 사신이 우리에게 입조한 일이 있었음을 그들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자신들은 들은 바 없으나, 자신들의 왕에게 아뢰어 확인한 후 우리에게 입조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섬라랑 발니가 어디지?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경식이 한자식으로 음차해서 쓴 동남아시아 국가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경식도 아는 나라들이다.


섬라국은 시암을 음차한 것으로 후대에 태국으로 이어지고, 발니국은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브루나이 술탄국이다.


최말동 선단이 중국인과 유구인과 일본인을 거쳐 3중 통역으로 말을 들은지라 원어 발음은 사라지고 중국식 음차가 되어버려서 경식이 못 알아듣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경식도 나라 이름만 알아들었으면 바로 교역하자고 했을 것이다. 경식도 나름 세계사를 알아서, 한국인 평균을 훨씬 넘는 수준의 동남아시아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 인도와 중국을 중계하는 거대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고, 수많은 국가들이 해상에서 쟁패를 겨루고 있다.


그들의 항해술은, 곧 도착할 서양인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발전해 있기도 하다.


지금 그들이 쓰는 배인 종(Djong)도 지금 조선의 대선보다도 훨씬 클 것이고, 이제야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조선의 항해술과 비할 수가 없는 항해술을 발전 시킨 상태이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해양기술을 발전 시키려면 그들에게서 한창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곧 포르투갈이 와서 깽판을 친다는 것도 안다. 1511년이면 포르투갈이 말라카 술탄국의 수도인 말라카를 공격해서 점령한다.


정말 몇년 안 남았다. 그 전에 동남아와 교류를 해서 미리 발을 딛고 항해술을 발전 시켜야 포르투갈을 상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갑자기 나타난 동남아시아인들을 무작정 넙죽 환대해줄 호구는 아니다.


특히 조선은 바로 이전 왕, 그러니까 성종 시절에 외국인들에게 삥을 좀 많이 뜯겨봐서 더욱 그렇다.


"섬라국과 우리나라는 백여 년 간 통교가 없었는데, 겨우 유구에서 잠시 마주한 것으로 입조를 하겠다니 수상합니다.

성종조 동안에 왜인들이 유구의 사신으로 위장하여 입조하고 많은 것을 받아갔는데, 그들 역시 위사(僞使)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짭 사신 아니겠냐는 말이다. 오우치에게 상선을 무제한으로 드나들게 해주는 대신 식량을 안주겠다고 한 것이나, 사신 취급해서 대접해주는 것도 줄이겠다고 한 이유도 이거다.


경식도 동의했다. 분명 최말동 선단이 뿌리고 다닌 비단을 보고서 조선에 뭐 좀 있는 줄 알고 오려는 상인일 걸.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상인들이 왕조 국가들이랑 거래할 때 하는 말이 항상 '공물을 바치러 왔습니다.' 였다. 사실 이건 현대로 치환하면 그냥 전근대의 흔한 비즈니스 회화 중 하나라고 보는게 맞을 정도다.


보통 제일 큰 손이 그 나라 왕이나 토후 등 군주인데, 그런 놈들이랑 거래하려면 이 정도 비즈니스 회화 정도는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외국 가서도 군주들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우리는 너희랑 대등한 관계로 장사하러 왔다'고 표현하는 유럽 놈들이 특이한 사례에 가깝다.


듣자하니 최말동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으나 해당 사항은 저희가 처리할 권한이 없어 상부에 보고하여...' 로 어물쩡 넘겼다고 한다.


과연, 공무원 다 됐다.


하여간 동남아와 교류와 진출은 필요하다. 단, 조선 쪽에서 정보를 적당히 안 뒤에.


"우리가 아직 남방의 제국(諸國)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위사여도 능히 구분할 수 없소.

다음에는 유구에도 지금 대내전에 하는 것과 같이 방을 설치하여 관헌을 머무르게 하고, 그곳에서 남만과의 교린을 처리하는게 좋겠소.

이번에 내조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 관헌이 머물며 알아본 후 받아들여야겠소."



이렇게, 일본을 향한 흉참한 계획 일부가 좌초된 것을 빼면 경식이 파악하고 있는 범위에서는 전반적으로 잘 굴러가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해랑도로 들어가는 해동사 소속 배들이 해적질 외주라는 신비한 경영의 마법을 부리고 있으니 찐빠가 없는 상태는 결코 아니긴 하다.


그래도 경식도 조선도 명나라도 아직은 모르고, 전근대에는 무인도가 저런 꼴이 나는 건 숨쉬듯 흔한 일이라 대단히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따지고보면 해랑도의 상태는 중국 해적들이 갑이던 기존 구조에서 조선 해적들이 갑이 된 것으로 아주 살짝 바뀐 정도 밖에 안되지 않는가.


하여간 이제 재정적으로 조금이나마 운신의 폭이 생겼으니, 국내 산업에 투자해서 정말로 생산 자체를 늘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남도에 목화를 키우는 것을 장려할 제도나, 북도와 강원도 지역에 목장을 만들 방법, 아마를 전국으로 보급할 방법에, 왕정농서에 나와 있는 새 직기까지. 많은 것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5개월 정도 대단한 사건 없이 잘 굴러가니 경식은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사건이 슬슬 터질 때가 된 거 같은데...'


하도 조선인들이 정책 의도대로 안 움직이고 이상하게 일을 만드니, 이젠 사건이 안 터지면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은 경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경식이 생각한 종류의 사건은 아니다. 이번에는 조선인들이 사고를 친 게 아니라, 경식이 동아시아를 무시해댄 대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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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미주>


*1 : 작 중 시점에서 사쓰마의 영주인 시마즈 타다마사(島津忠昌, 1463년 5월 21일~1508년 3월 16일)은 실제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후대 에도 시대까지 이어지는 유교 일파인 사쓰난 학파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유구랑도 교역을 시도했고, 조선과의 교역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조선 쪽에서는 별다른 인지를 못한 모양입니다.


*2 : 조선의 공납제가 말이 당나라 법을 따른거지, 원래 당나라의 조용조 체제에서 조(調)는 현지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이 아니라 직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역시 고대에는 당나라의 율령을 받아들이고 중앙집권을 이룩하면서 조용조 체제로 세를 받았는데, 당과 마찬가지로 조(調)는 직물을 받는 것으로 했지요. 조선 이전 왕조들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의 법을 따랐다면 통일 신라 등도 아마 직물을 바치는 것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 둘 다, 당나라 시대의 조용조 체제가 붕괴되자 화폐로 세금을 내는 제도로 전환됩니다. 중국의 양세법(兩稅法)이 그것이고, 일본은 관고제(貫高制)가 그것이지요.

한국 또한 여말선초의 기록을 보면 고려 역시 현물을 수송하기 어려운 지방의 경우 대부분의 세금을 포로 거두기 시작했는데, 태종이 세제를 철저히 정비하는 과정에서 저화 정책은 대실패하고 공납을 위한 공안 작성은 성공하면서 현물 특산물 수취에 기반한 조용조 체제로 정비되고 맙니다. 이후 세조 시대만 되어도 대납이 성행하며 세조는 대납을 공식화 하는 방향을 생각했지만, 예종 때 대납을 강력하게 금지하고, 성종은 예종의 정책을 유지하되 공납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성으로 나아갔지요. 물론 성종 대의 세입은 연산군 대에 현실적으로 정부 유지가 불가능한 세율이라고 판단되어 공납의 부담을 늘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또 대납의 확대도 결국 막지 못해서 지하경제로 계속 남았지요.

한국은 특이할 정도로 화폐 도입이 늦었기 때문에 화폐 도입이 굉장히 어려운 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자세히 보면 현물세를 거둘 수 있던 강력한 행정력을 잠시나마 유지했고, 행정력에 빈틈이 생겨 지하경제가 나타났어도 그냥 우악스럽게 현물 세제를 유지한 조선의 경우가 매우 특이한 사례였던 것이지요.


작가의말

ihd3125님, 부산김아재님, DongDongIM님, hannul70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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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자본과 기술 +76 24.06.21 11,582 563 21쪽
43 인클로저 +81 24.06.20 10,918 528 23쪽
42 봉 잡았다 3 +70 24.06.19 11,394 551 24쪽
41 봉 잡았다 2 +80 24.06.18 11,516 522 22쪽
40 봉 잡았다 +91 24.06.17 12,167 561 23쪽
39 탈상 +90 24.06.15 12,553 529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2,556 550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12,154 515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5 24.06.12 12,344 53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61 24.06.11 12,183 522 21쪽
34 돈과 전쟁 +55 24.06.10 13,003 560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8 24.06.07 14,052 568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9 24.06.06 14,260 603 25쪽
31 서울의 여름 +38 24.06.05 13,636 543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4 24.06.04 13,371 552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4,099 585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6 24.06.02 14,464 63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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