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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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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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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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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글자
25쪽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DUMMY

함양 군민들이 남강의 위대한 항로를 주파하고 있을 무렵, 북방은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번리도원수로 차출되어 끌려온 윤필상은 자기가 주상에게 밉보여서 이 꼴이 된 건가, 아니면 동료 공훈 대신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은로 덕에 짤린 후 집에서 얌전히 재테크나 하던 윤필상이 끌려온 이유는 조선 기준으로 합리적이었다.


"파평부원군이 공훈이 있고 오래동안 나라를 위해 일해왔는데 실직에 쓰지 않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서용하소서."


왕의 첫 대답은 '에엥? 하지만 윤필상 탐관오리잖아.' 였다.


대놓고 금융범죄 저지르다가 처죽은 윤은로에게 묻혀서 그렇지 윤필상도 돈 밝히는 걸로 따지면 지금 조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인간이다.


윤은로는 죽고 윤필상은 잘려서 그렇지 원래 역사에선 대간들에게 '이딴걸로 경쟁좀 하지마 쉽색기들아' 하고 욕 먹으면서 살았다.


윤필상은 지금도 쌀 매입, 방출 같은 조선식 재테크를 지금도 계속했고, 국채나 주식 등 경식이 내놓은 새 상품들에도 매번 끼어들었다.


하여간 대신들이 다시 한 번,


"파평군은 이번 번리위무사(藩籬慰撫司)의 고본을 기꺼이 납하였고,

이전에 서정도원수로 나아가 건주위를 토벌한 공로가 있으니 이번 서정에서도 쓸만합니다."


라고 아뢰자 임금이 받아들였다.


난데없는 어명에 윤필상은 대답했다. 자길 추천한 동료 대신들에게도 따졌다.


'네? 제가 다녀와본 건 함경도가 아니라 평안도 쪽 여진인데요?'


임금의 비답은 이랬다.


'가라면 가지 말이 많다.'


원래 역사에서 윤필상은 연산군의 야인 정벌을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런데 경식의 조선에선, 경식이 만든 번리위무사 고본첩(주식)을 보고서 득달 같이 달려가 매입해버렸다.


관아를 새로 만드는데 고본을 모집한다니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금상이 하는 정책은 매번 그랬으니 그러려니 했다.


게다가 이 번리위무사가 번리 야인들과 인삼과 초피 무역을 독점적으로 한다니, 누가 봐도 돈이 복사가 되는 건이었다.


그래서 풀로 주식을 꼴아박은 뒤인지라, 이제와서 반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실무, 특히 군정을 자기보고 직접 맡으랜다.


조선에서는 벼슬도 사실 역이다. 까라면 까야한다. 경력 있는 신입 윤필상은 늘그막에 동북에서 죽는건가 각오하고 올라갔다.



조선의 기준에서는 '대충 비슷한 거 해봤으니 할 수 있지?' 는 매우 합리적인 인사 기준이다. 사실 미래 한국도 군대에서는 똑같다.


경식이 이걸 받아들인 이유도 매우 경식스러웠다. 윤필상이 연금 받아먹는 것이 눈꼴 시렸기 때문이다.


조선에 연금 제도가 어딨냐고? 경식이 전세를 개혁하며 공신전을 개조해서 생겼다.


전세를 결 당 10전으로 바꿀 때 공신전에도 관수관급제를 적용하겠다는 명분으로, 받은 공신전 1결 당 10전의 지폐를 주는 걸로 바꿔버렸다.


때문에 윤필상은 벼슬에서 물러나고도 매년 1천전이 좀 넘는 연금을 받고 있었다(매년이라고 해봤자 사실 올해가 두번째다). 그런데 경식에게는 그게 아니꼬왔다.


그래서 북방 가서 고생 좀 하라고 신하들 제안을 받아들여서 번리도원수로 차출해버렸다.


번리도원수는 녹을 따로 안 만들고 번리위무사 성과에 따라 지급하는 걸로 만들었다.


경식이 생각하기에는 원래 CEO 는 회사 성과 따라서 월급 받아야 한다. 무능한 CEO 에겐 돈 주기 아깝다.


공신에게 이게 무슨 막돼먹은 취급인가 싶겠지만 불과 작년에도 월급도 제대로 안 주던게 조선 표준이라 반발은 없었다.




윤필상은 조선식 재테크의 왕답게, 번리위무사의 예산 지급명령서를 받자 욕심부터 올라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돈 중 상당 수는 원래 자기 돈이 아닌가. 번리위무사 예산은 다 여름부터 모집한 고본에서 나온 거니까.

계산해보니 적어도 10% 살짝 안되게 자기 돈이었다.


해처먹는 지능만큼은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조선인답게 윤필상은 이 예산을 삥땅 칠 방법을 벌써 생각해냈다.


물자를 살 때 자기가 뒷배를 봐주는 상인들과 계약해서 '적절한' 가격으로 구매한 다음 영수증 처리를 한다던가.


하지만 세상은 윤필상을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윤필상 그 탐관오리가 번리도원수가 되어 여기로 온다고!?"


"분명 갑사들의 녹이나 빼돌리겠군!"


"그뿐인가! 번리위무사의 횡간이 이렇게나 넉넉하게 지급됐어! 분명 이걸 해처먹겠지!"


번리위무사의 예산을 실제로 입출금해줄, 길주목 화매소 관헌들이 어째서인지 윤필상을 탄핵하던 대간 출신들로 가득했다.


사실 우연이 아니다. 왕이 자기한테 대드는 대간들 자르면서 거의 다 지방 화매소, 특히 양계 지방 저 멀리에 처박았으니까.


화매소 중에서도 제일 북동쪽인 길주 화매소는 제일 지랄이 심하던 대간 출신들로 채워졌다.


처음의 대간 출신들은 실무능력은 빵점인 잉여들이었으나, 대간들에게 빡친 왕이 서리로 처넣었다가 신료들 반발이 심해서 정직으로 올려준 바, 그들은 실무 능력도 뛰어난 인재들로 단련되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는 말은 함경도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조선의 실전 부정부패 테크닉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단 것을 말한다.


"요역부를 모을 돈? 아, 우리가 길주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해서 싼 값에 모을테니 걱정 마시오. 값은 위무사 횡간에서 빼겠소."


"철? 우리가 울산에서 싸게 들여오고 있는데 왜 도원수께서 사사로히 시민(* 조선시대에는 상인이라는 뜻)에게서 사려고 하는 것이오?"


"도끼 하나조차 근래 군기시에서 만든 것이 날이 상하지 않고 날카로운데 도원수는 누구에게서 공구를 사시겠다고 하는 것이오?"


현대적으로 보면 화매소는 중앙에서 지급명령서 받고 온 관아들에게는 예산을 지급명령서대로 인출해주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기술 상 현지 물가 변동을 중앙이 실시간으로 알 수가 없는지라, 현지 화매소에 검토 기능을 나눠줬더니, 이런 류의 기관이 항상 그렇듯 대부분의 경우 지급명령서보다 예산을 깎아서 주고 있다.

애초에 화매소가 멋대로 중앙에서 발행한 지급명령서보다 많이 주면 감찰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관아에게 협조 제대로 안하고 예산 집행까지 멋대로 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월권이다.


윤필상의 마음 속에 대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경식이 느낀 것과 같은 충동이 피어났다.


'모조리! 쓸어버릴까? 3천 갑사가 있으면 입도 뻥긋 못하게 도륙을 내버릴 수 있다.'


물론 그랬다간 참신한 역적 행위라고 잡혀서 진짜 물리적으로 찢겨 죽을 것이다.


자기도 윤.로 형제처럼 됐다간 파평윤씨 가문은 진짜 박살이다. 윤필상은 눈물을 삼키며 견뎌야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모피랑 인삼 무역하라고 만든 관아고, 자기도 그걸로 돈 벌려고 꼴박했는데, 자기가 책임자가 됐으니 본분대로 일 하면 이득 중 10분지 1 정도는 자기 몫 아닌가.


이제부턴 정말 위무사 경영 뿐이야.




출병한 갑사들을 동원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두만강 이북의 성저야인들의 마을에 진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세종 시절의 4군 6진 개척과 달리 그다지 큰 충돌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될 수 있었냐면, 사실 두만강 바로 건너편의 성저 야인들은 이전부터 조선에 복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의 국경 개념은 현대처럼 명확하지 않고 중층적이다. 두만강 바로 너머는 관헌이 파견되지 않았어도 복속한 야인들이 조선의 법을 따르고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성종조 말기의 니마차 우디캐(올적합)에 대한 원정은 10명도 못 죽인 코미디였지만, 그 때 쫄아서 도망친 우디캐 대부분은 아직 조선 인근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다만 요새 조선 군사력이 약해진게 티가 나니까, 성저야인들도 조선인들 삥을 자주 뜯었을 뿐.


이 시점에 이미 두만강 유역의 성저야인들의 마을들은 인구가 수만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1)


흔히 여진하면 떠오르는 수렵민족이라는 편견과 달리 이들은 이미 조선의 영향으로 농업 사회로 진입하였으며 조선에게서 초피를 대가로 농우와 철을 사들였다.


그에 비하면 육진 지역은 초피 공납을 바치느라 야인들에게 소와 철을 넘겨야 해서 되려 나날이 가난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야인을 통제할 기반이어야 하는 육진 지역이 점점 가난해지니, 성저 야인들이 더욱 성장하여 나중엔 이탈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원래 역사의 연산군 대에는 공물의 분정량이 늘어나면서 함경도 지역의 빈궁화는 심화된다.(*2)


경식이 바꾸는 조선에서는 그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현대의 훈춘, 연변, 크라스키노, 투먼에 새로 설치된 4진은, 조선 내부 보통 군현들과는 달리 규모와 무관하게 화매소와 경시(경매장)가 설치되고 물가도 전국에 공시되었다.


심지어 모피, 인삼 구매가 면세였다. 경매장에서 모피와 인삼을 팔 수 있는건 위무사랑 오진(* 육진 중 내륙에 있는 부령을 제외한 두만강 유역의 다섯 진.)의 민회 사람들 뿐이긴 해도.


세종이 죄인들을 억지로 전가사변 시켜도 인구가 유지가 안되던 오진 지역으로 수많은 상인과, 심마니와, 사냥꾼들과, 그냥 일확천금의 꿈에 부푼 사람들이 몰려왔다.


원래 오진과 그 두만강 건너편의 야인들의 마을은 조선인과 야인들이 섞여 사는 전근대적인 국경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성 중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4진 목책이 만들어지자마자 기존 함경도 쪽 주민들을 위주로, 많은 외지인들이 들어왔다.


이런 일이 생기면 보통은 외지인들이 문제지만, 이번에는 함경도 주민들이 주로 문제였다.


조선인들 피셜, 함경도민들은 원래 반쯤 야인이다. 특히 전투력에 있어서 그들은 완전히 탈조선급이다.


물리적으로 조선땅을 탈출하자 그 전투력은 더욱 치솟았다.


항상 착취 당하느라 화살도 활도 못 만드는 지경이었던 함경도에 새로 설치된 경시를 통해서 들어오는 무기들은 그것을 부추겼다.


"자, 이것은 군기시에서 만든 창!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만 번을 단련하여 바위를 쪼개고, 갑옷을 찔러도 10년 동안 날이 상하지 않네!"


요새 학당에서 배우느라 뭘 좀 주워들은 사람이 상인에게 시비를 걸었다.


"혹시 그 뒤에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 같은 걸 소개하려 그러시오?"


함경도민의 평균 지능을 초월한 농담이라서, 그와 함께 배운 일부 사람들만 주변에서 좀 깔깔거렸다.


그러자 그걸 들을 상인이


"아, 방패는 없수다. 왜냐면 이 창은 진짜로 바위를 베거든."


하면서 아기 머리통만한 돌을 내려찍더니, 돌이 '퍽!' 하면서 정말로 쪼개지는 것 아닌가.


물론 석수라면 그 돌의 정체가 무르기 짝이 없는 이암(泥岩)임을 알 수 있겠지만, 시장판에서 경매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그렇게 형편 좋게 해설해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것이 좀 연출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 해도, 군기시의 첨단 기술인 도가니 강철은, 원래 역사에서도 앞으로 400년 정도 가장 강력한 고급 강철로 먹힌다.


군기시제 무기들은 오진 주민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원래대로라면,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쥐여줘봤자 엿 바꿔먹고 팔 것이다. 심지어 적에게 팔기도 한다.


이 오진 주민들도, 공납이 폐지되기 전이었다면 이 철을 야인들에게 팔아서 초피를 산 후 공납으로 바쳐서 빚더미에 앉는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진 주민들이 철을 야인들에게 주고 초피를 받는 것보다는, 철을 야인들 목에 대어 주고 초피를 받는 게 더 경제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제학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 지식이고 경식도 따로 전수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의 시초 대영제국의 역사서에는 자주 나오는 경제적 지혜를 함경도민들은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그리고 야인들은 떠올렸다. 세종(세종은 정복왕이라는 뜻이다.)에게 지배 당하던 공포를, 두만강 너머로 쫓겨나던 굴욕을.


이전까지 초피를 공납하느라 야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초피를 사야했던 함경도 주민들은, 파견된 갑사들(대부분 함경도 출신이다)과 자신들의 주먹을 뒷배로 삼고 평소의 울분을 풀었다.


"뭐? 초피를 사는데 고작 소금을 내놓는다고? 장난하나? 초피 하나 당 소 한 마리는 주셔야겠어. 어차피 초피가 급한건 너희들 아니냐."


평소처럼 조선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야인들이 값을 어처구니 없게 불러댔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반응은 야인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야인들의 말에 서로를 멀뚱히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하하!"


"뭐, 뭐냐. 뭐가 그리 우스워?!"


"네 놈들이 아직도 우리가 공납 때문에 부르는대로 값을 쳐 줄 줄 알고서 이렇게 도두치려 하는구나."


"이제 너희야말로 우리에게 잘 보여야 할 것이야! 조정에게 토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아니지, 이 놈들이 아직도 세상 바뀌는 걸 모르는 모양이니 지금 혼쭐을 내주자!"


이런 식으로 조선인들이 야인들을 두들겨패서 초피를 뺏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했다. 조선인들 중 오직 함경도민들만이 할 수 있는 묘기였다.


공납이라는 현물세 때문에, 두만강 이남 함경도에서 과대평가 되어 있던 초피의 가격은 급격히 하락했다.

물론 그냥 함경도민들이 야인들을 약탈하고 무분별하게 팔아대서 그런 것도 있다.


반대로 오진 주민들의 삶은 급격히 나아졌다.

경매장을 설치하니 상인들이 몰려왔고, 초피를 사기 위해 몰려온 상인들이 북방에선 귀한 남방의 온갖 물자를 가져왔다.


야인들이 챙기던 초피 무역의 이득이 오진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진 주민들은 성을 쌓을 때 받았던 돈이나, 초피를 팔아 번 돈으로 남도의 물산들을 마음 껏 누렸다.


"이야, 이게 쌀밥이라는 건가? 남도에서는 이런 걸 매일 먹는다고?"


"아니, 남도에서도 부잣집에서나 먹는다는데? 이거 참 호강하는구만!"


"이제 겨울이어서 목면이 필요했는데, 요새 목면을 팔러 오는 장사꾼들이 많아서 굳이 남도까지 안 가도 되겠어."


그리고 '조선식 재테크'를 익숙히 하고 있는...그러니까 위무사의 매점매석으로 돈을 벌려고 했던 윤필상은 장기투자를 못하는 무식한 백성들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지경이었다.


윤필상은 벌써 주변 오진 백성들을 모아서, 상인들에게 무분별하게 팔지 말고 재고를 모아서 서울의 초피 가격이 오른 다음에 한꺼번에 팔자고 타이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두만강 이북에 설치된 경시에서 직접 모피를 판매할 수 있는 것은 위무사와 인근 오진의 민회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외지인들도 그냥 위무사에게 신고하면 두만강 이북에서 사냥한 담비나 캔 인삼을 위무사에게 팔 수 있게 한 수준이라 다들 두만강 너머로 가서 수작을 부렸다.


"아니, 조선 놈들이 왜 여기서 사냥을 하고 있어! 네놈들 법은 멋대로 국경을 넘으면 죽는 것 아니냐!"


"이 새끼들이 언젯적 얘길 하고 있어? 이젠 두만강 너머도 조선의 땅이다!"


이 조치는 밀매도 활성화 시켰다. 오진보다 남쪽 지역의 함경도민들이 신고를 하고 두만강 이북에서 잡아온 것들을, 위무사에 팔지 않고 그냥 길주 화매소의 경매장 등 타 지역에서 팔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위무사는 사냥꾼들에게는 초피 한 마리를 5전에 사고 경매장에 내놓을 때는 50전부터 부르니 제 정신이면 아무도 정직하게 위무사랑 거래하고 싶지 않아한다.


신규 4진 중 염포진(* 鹽浦鎭, 현 러시아 크라스키노) 근처는 그런 밀매가 이뤄지기 딱 좋은 곳이었다. 밀매 하면 뒷골목인 미래와 달리 원래 이 시대에 밀매는 배 타고 해상이나 강 위에서 하는 게 제일 전형적인 수법이다.


"따라오는 놈들은 없겠지?"


"물론이지. 물건은 준비해왔나?"


무슨 양산형 소설의 암시장 상인들의 전형적인 대화 도입부 같은 대사를 치며 거래를 하는 이 밀매상들이 거래하는 것은 이런 클리셰대로 '흰색 가루' 였다.


"따라오는 놈들은 없겠지?" 라는 대사를 친 쪽이 준비해온 물건이 바로 남도에서 실어온 목면이랑 소금이랑 쌀이니까. 가루가 아닌 것도 있지만 하여간 흰색이다.


그리고 "물건은 준비해왔나?" 라는 대사를 친 쪽이 준비한 것은, 지금 북방의 최대 히트 상품이자 위무사의 독점 상품인 인삼과 모피였다.


드럽게 별 거 없어보이긴 하지만, 지금 북방과 남도의 거래품 중 제일 가치 있는 것들은 이게 맞다.


그리고 이들은 "해치웠나?!" 라는 대사를 친 소년 만화 조연들이 곧 멀쩡하게 살아 있는 적을 보게 되듯, "따라오는 놈들은 없겠지?" 라는 대사를 친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들은 곧 여진족 특유의 가죽배들이 사람이 가득 탄 채 우르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위무사가 육군은 중앙에서 지원해준 돈 덕에 빵빵해도, 수군에 대해서는 이렇달만한 지원이나 개혁을 못 받은 상태였다.


여진족 하면 기병이 떠오르지만, 사실 동해 쪽 여진족들은 옛날부터 해적질도 잘 한다.(*3) 위무사는 현지에서 야인들을 토관 만호로 임명해서 수군으로 활용했다.


관군은 악소배 밀매상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생긴 것만 보면 여진족 쪽이 해적 같지만, 아무튼 이들은 만호 벼슬도 받은 관군이다.




야인들도, 미래의 한국인들이 알 듯 '고결한 야만족'은 아니었다.


지들이 인디언 다 처 죽여놓고 나중에 회상하면서 미화해주는 미국인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정직하게 역사를 기록했다.


이 시대의 야인들은 오진 지역을 알짱거리면서 약탈해놓고, 조선 분위기를 봐서 귀순한다고 뻥을 친 다음 받아처먹기만 하고 튀는게 표준적인 대조선외교전략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3천이나 되는 중장병을, 아예 요새까지 지어서 전진 배치해버렸고, 심지어 보급선까지 영구적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이제 그 짓도 하기 어려워졌다.

3천이 중국 군담 소설에서나 적어보이지, 이건 신형 강철 두정갑으로 중무장하고 기병이랑 보병을 자유롭게 수행 가능한 양계 출신 갑사들 수만 센 것이다.

동아시아식으로 이것저것(대부분 성 쌓는데 동원된 주변 주민들) 넣어서 뻥튀기 하면 1만 정도 되고, 이 전투병력 3천만으로도 씨족 수준으로 흩어져 있는 야인들에게는 재앙이다.


게다가 함경도민들은 원래 여자들도 표범 정도는 맨손으로 때려잡는데 이들 손에 칼이 쥐여졌다.

기존의 원정들이랑 달리 아무리 못해도 몇 년 정도는 이렇게 초토화 하고 다닐 것이라는 건 불보듯 뻔해 보였다.


이제 조선에 신종할거면 신종하고, 안 할거면 죽는 양자택일이 강요되기 시작했다.


이미 신종하고 있던 야인들이나, 신종하려는 의향이 조금이라도 있던 야인들은 빠르게 조선에 줄을 댔다.


포로로 잡아갔던 조선인들을 바로 쇄환하고, 토관직을 받고, 병사들에게 협조하고 위무사에 초피를 팔았다.


그리고 주변에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조선에 줄 대는게 늦는 야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동만주에서 '임금은 신하의 모범이 된다'를 체현해냈다. 지금 왕이 500년 뒤 지혜를 활용하듯, 조선인들도 500년 뒤 일본 군인들이 만주에서 써먹는 지혜를 활용했다.


"황 장군! 저들이 바로 성종조에 조선을 범하고 근래도 우리를 계속 습격하는 우디캐 놈들입니다!"


"과연. 너희 알타리부가 향도(* 嚮導, 길을 알려줌)한 공로가 크다. 이번에 승리하면 내가 장계에 너희의 공로를 아뢸 것이다."


지금 이러고 있는 두만병마사 황형(黃衡)은 조정은 물론이고 윤필상의 명령도 없이 이러고 있었다.


사실 함경도 쪽 장군들의 의무 중 하나가 성저야인이 습격 당하면 개입하여 지켜주는 것이었으니, 그에 따라 일하는게 맞다고 우기려면 우겨도 된다.


자기가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황형 본인이 성종 때 우디캐 정벌에서 제일 큰 공로를 세운 장수 중 하나다. 우디캐족 300명이면 조선군 1만을 대적한다고 하지만 황형은 그냥 이겼다.


하물며 이 정도 정예병과 신무기가 있다면 무서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성종 시절 우디캐 정벌 때 돌아보니, 우디캐 놈들은 집에 초피를 몇백 장 씩 쌓아두고 있었다.(*4) 저들을 토벌하고 전리품을 얻는 것은 위무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 소총이라는 새 총통을 받을 수는 없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조선인들이 새로 쓰는 무기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너희가 화약을 굽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니 준비나 하여라. 아, 그리고 저 제일 큰 집은 내가 직접 들어가볼테니 불을 지르거나 하지 말아라."



두만강 너머에서 몇 개월만에 이런 깽판이 사방팔방에서 벌어지니, 마치 세종대왕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조선인들을 남김없이 구축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여진 예거들은 다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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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미주>


*1 : 1588년(선조 21)에 증보된 <제승방략>에 나타 난 5진 부근의 번호부락 수는 289개, 호수는 8,523개입니다. 1호를 5~6명으로 잡으면 42,000~51,000명 정도가 성저야인으로 존재했던 셈이지요. 다만 건주위의 경우 조선과 달리 호 당 평균 14명에 달하는 대가족적 사회였습니다. 여진 사회가 일반적으로 그랬다면 선조 시기에는 12만명 정도가 성저야인으로 존재했던 것이지요. 동시에 조선이 이러한 호구조사가 가능할 정도로 번호에게 조선법에 의한 지배를 강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연산군 시기는 번호야인들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는 시기라 이러한 자료가 부족한데, 일단 작 중에서는 임의로 수만 정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성주. (2014). 조선 변경정책의 허와 실 ― 두만강 유역 女眞 藩胡의 성장과 발전 ―. 명청사연구, 42, 159-186.>


*2 : 원래 역사에서 연산군 7년에 만들어진 신유공안(辛酉貢案)은 공납의 양을 증가시켜서 국가 재정을 현실화하기 위한 개혁이었습니다. 연산군이 폭군이다보니 이 신유공안도 연산군이 사치하려고 세금을 폭증 시킨 폭정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공안 개정의 필요성 자체는 성종 시기에도 제시되었고 그 준비도 진행 중이었는데 성종이 급사하는 바람에 미뤄진 것입니다. 신유공안은 당대 기준으로는 합리적인 증세였다는 연구도 있고,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로도 신유공안으로 증대된 공납은 그 누구도 성종 시절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백성들의 고충이 커진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건 공납제라는 현물세 체제의 자체적인 모순 상 극복할 수 없던 것이지요. 그러나 작 중 조선은 원래 역사의 조선 후기처럼 토지세(전세)로 세금이 거의 단일화되고 있는 중이지요.

또 신유공안의 개정은 원래 역사에서는 신유년 4월에 공안상정청이 설치되고 불과 3개월 뒤인 7월에 완료됩니다. 조선 중앙 조정의 재정회계가 상당히 철저하게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작 중에서 박경식이 날림으로 지폐개혁을 진행했어도 조선이 어떻게든 꾸역꾸역 돌아가고 있는 것은 이런 부분을 반영하여 상상한 것입니다.

<소순규. (2019). 燕山君代 貢案改定의 방향과 辛酉貢案의 특징. 사학연구,(134), 123-164, 10.31218/TRKH.2019.06.134.123>


*3 : 11세기 동해의 여진족은 고려는 물론이고 일본까지 침공했을 정도로 항해술이 발달했습니다만, 몽골의 출현 무렵부터 여말선초 시대에는 그 정도로 활약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종 대부터는 3~4명 정도가 타는 작은 가죽배(者皮船)를 타고 강을 건너와서는 노략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성종대부터는 그 빈도가 증가하고 급기야 연산군대에는 가죽배에 돛을 달고 항해할 정도로 항해술이 발전합니다.


*4 : 집에 초피를 많이 저축해두고 있었다는 건 우디캐(올적합) 제족 중 도골 우디캐의 풍습으로 성종실록 22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5칸 정도의 집을 하나로 연결해서 공동생활을 했고, 큰 구리솥에 밥을 지어 사람이 먹고 죽을 끓여서 말을 먹였다고 합니다. 특히 쌀을 재배하고 도정해서 다른 우디캐와 쌀을 교역함으로써 가죽들을 벌어들였다고 하니, 이 시대에 여진족들의 농경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으며, 특히 만주에서도 쌀 재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에서 쌀을 재배한 쌀에 미친 민족 조선인' 밈은 여진족들의 농경 수준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인들의 밈인 것이지요.

<김순남. (2009). 조선 성종대(成宗代) 올적합(兀狄哈)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 49(0), 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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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0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8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0 507 25쪽
»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4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7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4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3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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