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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7.05 18:00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826,053
추천수 :
32,319
글자수 :
513,290
유료 전환 : 1일 남음

작성
24.07.02 18:00
조회
9,157
추천
524
글자
23쪽

일하는게 취미

DUMMY

경식이 조선에 와서 동아시아사 알못 티를 계속 내고, 경제학으로 사대부들 뚝배기를 깨는 일을 더 많이 해서 그냥 경제학도로만 보일 수 있지만, 경식도 나름 사학도요, 역사가 좋아서 사학과 들어간 사람이다.


지금 일상을 살고 있는 궁은 조선 전기의 궁궐 건축 양식 그 자체요, 아직도 종종 참조하는 중국의 법률들은 원전 실물이고,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의 교조화로 사라지는 조선 전기의 풍습들도 여럿 남아 있다.


사학자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역사적 사료와 연구 대상이 산더미 같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경식에게는 조선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취미 생활이고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오, 도화서에서 제일 뛰어나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아주 똑같아."


그 때문에 경식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어진 제작이었다.


진전(* 眞殿, 어진이 봉안된 사당)에 들어가 역대왕들의 어진을 보니 참 신기했다.


아직 조선 건국에서 시간이 많이 안 흘렀다보니 역대 왕들 어진이 거의 다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오, 이게 태종 이방원에...세종은 진짜 뚱뚱하네. 그리고 문종, 예종, 성종까지...이 중 21세기까지 남는게 태조랑 세조 어진 뿐인가?'


사실 아직 조선 전기인데도 그다지 관리 체계가 잡혀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태조 어진을 보아하니, 남아 있기는 하나 따로 다시 옮겨 그리지는 않는지, 꽤 낡고 빛이 바래고 삭은 모양새였다.


그걸 본 경식은 이걸 영구히 보존하고 남길 방법을 궁리하라고 신하들에게 닥달했다.


신하들은 이 희한한 명령에 당황했다.


종이 위에 그리는 그림을 대체 어떻게 영구히 남기라는 것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스러운 왕명이 없었다.


하지만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역대 조상들을 한꺼번에 파는 초필살기급 어명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역대 어진을 20년 마다 다시 그리게하여 진전에 봉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단 참봉직을 만들어 어진들을 관리하게 하고, 낡은 어진들은 전부 다시 그리게 하시오.

그러나 양안조차도 20년에 한 번 하는 것이 법으로 되어 있으나 지켜지지 않았으니, 영구히 지켜질 법일지는 모르겠소."


경식이 조선의 재정과 행정력을 급격히 팽창 시키기는 했으나,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기존 조선의 방식대로 굴러가는 부분이 태반이다.


경식 스스로도 자기 살아 있는 동안 근대 수준으로 발전 시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20년에 한 번' 같은 조항 따위는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금을 걷기 위해 해야하는 양전도 안 하는 나라가 무슨 놈의 그림을 20년에 한 번 일제히 갱신해서 그리겠는가.


왕은 대신 다른 아이디어를 내놨다.


"내가 만든 인쇄기에 어진을 새긴 판을 달아 인쇄하여 각 군현의 관아에 봉안하게 만드는 것은 어떻소?"


각 지방에 설치된 관아의 객사에는 원래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를 비치한다. 그 자리에 왕의 초상화를 두자는 얘기였다.


마치 북한에서 공공기관마다 수령님 사진을 걸어놓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전제군주정이라는 점에서 같은 현상이기는 하다-, 그런 의도는 아니고 수백개를 각 지역마다 비치하면 몇백년 뒤에도 한두개 쯤은 남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대신들에게서 반론이 나왔다.


"지금도 전패를 엄히 관리하게 하여 손실한 자를 대역죄로 다루는데, 역대조종의 어진 역시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작은 고을에 조종의 어진을 맡기었다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골 구석탱이 군현에 역대 어진 열댓개를 뒀다간 수령들이 어떻게 관리하겠냔 말이다.


쥐나 좀이 먹었을 때 수령들을 매번 일일히 대역죄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어진 관리 대충하는 건 봐줄 수도 없다.


그도 그런 것 같아서 경식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서양 군주들이 자기 얼굴 알릴 때 많이 사용한 것을 베낀 것이다. 금화 말이다.



왕은 자신의 어진의 초본을 도화서에게 그리게 하고, 그 초본을 바탕으로 주자소에서 일하던 철장들에게 나머지 작업을 하게 명했다.


왕은 자기 얼굴이 찍혀 나온 금패를 보고 흡족해했다.


"3년 새 주자소의 주자공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군. 이 정도면 이제 그림을 넣은 책들을 인쇄해도 되겠어."


구텐베르크는 인쇄술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금 세공업자로, 아버지에게서 조폐 기술을 배웠던 인물이다.


구텐베르크식 인쇄술을 위해 활자를 만드는 기술 역시 금화를 찍어내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철에 글자를 양각으로 세겨 만든 펀치를 구리판에 대고 찍은 다음, 그 구리판 위에 주형틀을 대고 녹은 납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고려나 조선의 모래로 주형을 만드는 방식보다 훨씬 정밀한 활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경식은 1년 차에는 급하게 만드느라 기존 금속활자는 그대로 쓰고 건성유 잉크랑 인쇄기만 만들었지만, 2년차 부터는 금속 활자도 구텐베르크 식으로 만드는 것을 연구 시켰다.


그걸 역으로 활용해서, 서양에서 금화를 찍는 방식을 재현했다.


철에 어진을 세겨 펀치를 만든 후에, 그걸 금판에 대고 찍어서 금어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종의 영구보존용 어진이다보니, 유통하기 위해 만드는 금화는 아니고 기념용 주화랑 비슷한 것이 되었다.


"이 금어진을 역대조종묘와 각 지역의 진전에도 봉안하여라."


왕이 이렇게 불꽃 효도를 하는 중에, 사치스럽지 않냐던가 불교에서 불상을 만드는 것과 닮았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다 강화도 수군훈련원으로 끌려갔다.


경식은 수군을 잘 활용하면 이렇게 유익한데 왜 조선이 수군을 소홀히 했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조선 전기여서 남아있는 보물은 어진 외에도 많았다.


"지정조격(至正條格)이 지금 홍문관에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일찍이 세종조 때에 저화의 법을 시행할 때도 참고한 법이기도 합니다."


원나라의 법전이었던 지정조격은 한국인들에게는 라면박스 뒤지다가 나온 것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전세계의 유일한 원나라 당대의 법전 실물이 버려지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물론이요, 몽골 대통령이 방문해서 실물을 보기까지 했다.


경식은 실패한 저화법 따위 참고하지 않고 거의 혼자서 뿅 지폐를 만들어 내는 바람에 몰랐는데, 성종조 시절까지도 조선에서는 종종 참고하던 법이었다.


그 이후로는 조선도 경국대전을 완비하면서 지정조격을 더 이상 참고하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소실된다.


그런데 향교에서 가르칠 교재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율학에서 가르칠 책을 편찬하다가 경식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옛 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홍문관은 지정조격에 주해와 언해를 달고, 인쇄해서 각 고을 군현의 향교, 아니, 학당에도 전부 비치하도록 하여라!"


옛 법을 항상 개좆으로 알고 밀어버리던 왕이 갑자기 저러니 신료들은 황당했다.


"이미 경국대전이 완성되었고, 대명률이 쓰이고 있는데 굳이 원의 법을 반포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 내 심모원려가 있으니 홍문관은 하루 빨리 시행하라!"


경식의 취미 생활 덕에, 홍문관은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아니, 지금 소학언해, 성종실록, 경세집약도 완성이 안되었는데 지정조격의 주해랑 언해도 편찬하라고?!"


"지정조격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누구 없나?"


"파평부원군이 지정조격에 밝은데..."


"파평군은 지금 번리도원수로 나가있지 않소!"


"예문관의 정희량(鄭希良)이 문리가 뛰어나니 홍문관에 배속하는 것이 좋겠소!"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식의 눈에 조선 초기 경복궁 설계도인 경복궁조성의궤(景福宮造成儀軌)도 눈에 띄어버렸다.


원래 조선시대 전기의 의궤들은 임진왜란 때 전부 홀랑 타서 소실된다. 나름대로 안전하게 보관한다고 외사고(外史庫)를 네 군데에 지었는데도 그랬다.


왕은 역대 의궤들도 언해하고 그림도 포함해서 인쇄해서 전국에 비치하라고 명령했다.


"외사고를 더 지어라! 강화도에도 하나, 함흥에도 하나, 평양에도 하나!

찍어내는 판도 같이 봉안하고, 해인사 승려들에게서 장경판전을 지은 법과 사고의 책과 판을 보관하는 법도 취록하여 와라!"


자기 취미 생활을 위해 이거 지으라 저거 지으라 하고 신하들 괴롭히는게 완전히 진시황 급이었다.


그런데 하필 짓는게 무덤이나 장성도 아니고 문과의 나라 조선에서는 그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는 서고이니 아무도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홍문관에 편찬하도록 시킨 것이 이미 산더미처럼 많았다.


향교에서 교과서로 써야 한다고 농서, 산술, 율학, 유학, 병서 등 온갖 책을 새로 편찬하고 주석을 달면서 언해까지 시킨 상태였는데, 경식의 눈에 귀해보이는 책이 있을 때마다 또 일폭탄이었다.


왕이 첫 년부터 삼년상 시위로 대간들을 밀어버리고 홍문관의 언론 기능을 거세한 뒤로 할 일이 없어질 뻔 했는데, 신진 문관들 교육에, 새 학제에서 사용할 교재들 편찬에, 왕이 필요할 때 마다 책 편찬을 시키니 되려 언론 기능을 할 틈이 없어지는 지경이었다.


덕분에 홍문관에서는 대간 혁파 직전 및 직후와 같이 왕에 대한 뒷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금상께서는 경세의 재가 있으시긴 한데, 세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학문에는 관심이 없으신 듯 한데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는건지 모르겠소."


조선 기준으로는 학문이라고 하면 유학 외에는 다 잡학이다. 유학 빼고는 온갖 책을 다 좋아하는 이번 왕은 사대부들에게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세종께서도 잡학에 관심이 깊으셨고, 세조께서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성종대왕께서 유별난 것이셨을지도 모릅니다."


세종이랑 세조를 닮은 것 아니냐는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따지고보면 경식이 하는 일들은, 아직까지도, 혹은 아직까지는, 세종과 세조 시대에 했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북방 개척? 세종이 했다.


대마도 토벌? 세종이 했다.


유구랑 수교? 세조가 했다.


언해본 책을 편찬하는 것이나, 잡학 관련 관찬 서적을 편찬하는 것, 활자를 만드는 것 모두 세종과 세조의 공통된 업적이었다.


되려 아직까지는, 딱히 글자도 못 만들었으니 세종 하위 호환 정도로 보일만도 하다. 땅은 넓혔으니 세조는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경식이 뭘 할 때마다 항상 태종, 세종, 세조를 팔았던 관계로, 아직까지는 '선대 조종들의 업적을 이어받고 계승하려는' 왕으로 보였다.


그냥 사학자로서 취미 생활을 하는게 곧 조상의 업적을 빛내는게 되니, 경식에게는 참 좋은 환경이었다.





경식이 보기에 조선 전기의 문물 중 안타깝게 사라진 것은 관찬 기록들만이 아니었다.


기술에 관심이 부족했던 조선의 특성 상 민간의 기술들은 국가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기록에 남지 못해 후대로 이어지지 못해 사라진 것이 많았다.


경식은 이것들도 기록에 남기기로 했다.


사실 이게 경제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해서 더욱 그래야했다.


"와서에서는 각 소의 와장들이 청기와를 굽는 법의 기록과 비교가 끝났나?"


"예, 전국 7개소의 와장들이 기꺼이 기와 굽는 법을 고했는데, 그 중 네 군데가 서로 방법이 대동소이하여 누구에게 금란권(* 작 중 특허 제도에 대한 창작 용어.)을 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경식의 눈에 들어온 안타깝게 사라진 조선 전기의 민간 기술은 청기와였다.


좋아서는 아니고, 원각사인가 뭔가 하는 사찰에서 청기와를 새로 올렸는데, 사대부들이 그걸 보고 상소를 해서 경식도 듣고보니 신경 쓰여서 그랬다.


경식이 공중 화장실에서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도입한 뒤, 지방 관아들에게도 지방 재정에 보태라고 공중화장실을 만들고 염초를 굽고 팔게 시켰더니(*1), 어느새 염초가 민간에 풀려버렸다.


불교 사찰들이 청기와를 계속 소요하니 어디 와장들이 익히고 있었다가, 작년부터 시장경제 체제가 조선 전국에 퍼지기 시작한 걸 보자마자 청기와를 구워서 팔아대고 있던 것이다.(*2)


"청기와는 대궐 안의 정전에 써야 마땅한 것인데, 어찌 사찰에 쓸 수 있겠습니까. 철거하소서!"


"음...아니, 철거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조선 전기의 청기와를 굽는 법은 조선 중기 때도 일시적으로 실전되고, 20세기에도 실전되어서 명맥이 끊긴 적이 있다. 청기와장들이 그만큼 청기와 제작법을 비밀스럽게 전수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기술을 자기 혼자만 알고 남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뜻의 '청기와 장수' 라는 속담이 있을까.


청기와 장수들이 청기와 굽는 법을 꽁꽁 숨긴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청기와는 비쌀 때는 한 장이 집 한 칸 가격이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비쌌기 때문이다.


돈이 복사가 되는 비결을 알려줬다가 너도나도 만들면 큰일이지 않은가.


과연, 와장들은 아무리 어르고 댈래도 청기와 제작법을 나라에도 안 알려주려고 했다.


물론 이를 위해 경식이 준비한 것이 있었다. 특허 제도다.


자칫하면 조선인들에게 낯선 제도가 될 수 있겠지만, 경식은 기존 제도 활용하고 개조해서 근현대 제도와 비슷하게 만드는 요령하나는 끝내줬다.


의무교육을 수료한 한국인이라면 조선의 '금란전권'이라는 제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시전 상인들에게 미허가 점포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금란전권은, 사실 서양의 특허 제도의 뿌리랑 비슷하다.


서양의 특허 역시 처음에는 특정 상인이나 길드에게 정부가 독점권을 부여하고, 해당 상인이나 길드가 단속을 할 수 있게 허가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식의 조선에서는 특허권 제도의 이름은, 금란권이 되었다.


금란권을 받지 않고 청기와를 구워 파는 장인들은 금란권을 받은 장인의 권리를 침탈한 것으로 간주되어서, 금란권을 받은 장인이 고소를 해서 매출의 일부를 받거나 영업정지도 시킬 수 있다.


대신 금란권을 받으려면 현대와 마찬가지로, 그 기술을 기록해서 국가에 제출해야한다.


현대적 특허의 의의가 바로 이것이다. 특허 제도의 의의 이전에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기술을 발견해도, 자신들의 기술을 비밀스럽게 전수하여 실전되기가 쉬웠다.


기술을 재산으로 만드는 것을 공인하는 특허는, 그 대가로 기술을 국가가 기록하고 관리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때문에 특허는 서구의 기술을 급격히 발전 시킨 제도로 간주된다.


물론 특허 제도 만들었다고 바로 사람들이 '정말 좋은 제도군! 빨리 내 비법을 나라에 까발려야겠다!'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양도 특허 제도가 15세기에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졌고, 16세기에는 다른 유럽 국가로 퍼졌지만, 전유럽 사람들이 비밀스러운 기술을 너도나도 특허로 내지는 않았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금란권을 받으면 다른 가게를 단속하여 압수하거나, 합의하여 매출 일부를 받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냥 하던데로 기술을 숨기고 있어도 돈은 잔뜩 벌 수 있다.


그래서 법을 지키면 이득을 줄지는 불확실해도, 안 지키면 손해는 확실하게 난다는 것은 각인시켜줘야 했다.


"또 관 사람들이 오고 있는데?"


"저번에 그 금란권인가 뭔가 쓰라는 얘기하려나 본데. 죽여도 안 한다고 얘기 했는데 왜 저래?"


전라도 강진의 청기와 가맛골. 원래 조선에서도 공장안(工匠案) 등의 명부가 있어서 어디서 청기와를 굽는지 등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도, 웬만한 일이면 죄다 징발해서 역으로 부리는 걸로 때운 조선의 요역제의 특성 상 이렇다 할만한 관리가 안되고 있었던 것 뿐이다.


이 가맛골은 몇개월 전에도 관에서 찾아와서 기술을 나라에 알리는 대신 금란권을 받아 보호 받으라고 권유 했으나 거부한 곳이다.


그러니 법이 세워진 지금은 금란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게 아니라 단속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너희 강진 가맛골의 기와장들은 들으라! 나라에서 다른 기와장들의 금란권을 확인한 바, 너희의 청기와는 개성의 청기와장들이 굽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너희의 가마를 몰수해달라는 소장이 접수되었으니, 너희는 관령으로 와서 재판을 받으라."


기와장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한답니까? 우린 개성은 구경도 한 적 없습니다."


"너희는 본 적 없겠으나, 개성의 청기와장들이 너희들의 청기와를 보고서 자기들이 만든 것과 똑같다고 소장을 올렸다."


촌놈들 코 베어가기는 서울 사람들만의 고유 기술이 아니다.


고려 시대부터 상업이 발전하였고 지금도 조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상업도시인 개성 역시 현왕 이래로 발전하고 있는 제도에 힘 입어 촌놈들의 코를 베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황당한 사건을 전달 받은 형조와 의정부 대신들은 왕에게 개성 와장들이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는 것 같으니 취하해야한다고 했으나, 왕은


"법을 세울 때부터, 기술이 같은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조선 팔도 어디에든 금란을 할 수 있다고 정했는데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다."


면서, 대신 개성 와장들과 강진의 기와장들을 모두 서울로 데리고와서 각자의 기술을 시연해서 같은 기술인지 다른 기술인지 비교하게 했다.


"기와의 모양새를 만드는 것이 똑같은데 같은 방법 아닙니까?"


"유약을 만드는 방법이 다른데 어째서 같은 방법이겠습니까! 기와 모양은 만드는 방법이 누구나 다 비슷비슷하고요!"


이런 식의 싸움이 네 곳에서 동시에 나니, 특허소송이라는 것을 처음 겪는데다가 기와 굽는 법 따위 알리가 없는 형조에서는 머리가 터지려고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대책도 경식이 만들었다. 청기와를 만들 수 있는 전국 와장들을 계로 조직해서, 각 가마에서 제일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협회를 만들고 기술심리관 역할을 맡게 시켜서 특허소송에서 진술할 수 있게 했다.


기술심리관으로 뽑힌 이들은 싸움을 계속하는 대신 타협을 선택했다.


이런 카르텔이 다 그렇듯, 누가 봐도 비슷한 기술인 것들도 세부적으로 뭐가 다르네, 뭐가 다르네 하고 다른 기술인 것으로 원만하게 합의 되어서 각 가마터가 다른 특허를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툭하면 실전되었던 청기와 제작 기술은 조선 최초의 특허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


기술이 기록으로 남아 사라질 우려가 줄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그러니까 불교의 과도한 사치 풍조를 억제할 때가 됐다.


그냥 조선에서 하던데로 때려잡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는다. 경식의 조선에서는 도시들 한정이나마 행정력이 이전보다 훨씬 증가했다.


그러니까 소비세를 부과한다.


물론 후생의 사중손실(dead-weight loss)이 발생하긴 하는데, 세금은 원래 경제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청기와장들이 배를 불리고 절에 청기와를 올려서 발생하는 후생보다, 사치를 억제하면서 재정을 충당하는 것이 조선에는 더 중요하다.


"아니, 청기와 3천장을 팔았더니 세금이 3만전이라고!!!!!!!"


"기와 한 장을 팔 때마다 세금이 10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100% 에 육박하는 세금을 맞은 청기와장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보통 이런 세금 폭탄이 떨어지면 당연히 암시장이 발생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행 무역에는 금이랑 은에 관세를 200% 먹이자 벌써 사행무역에 따라가는 상인들은 이미 밀거래를 요령 껏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와는 탈세하기 어려우니까 청기와를 제일 먼저 표적으로 삼아서 소비세를 걷는 것이다.


금이랑 은이야 숨겨서 옮기면 되지만, 기와는 절 건물에 올리는데 건물을 옮길 수는 없지 않은가. 시골 어디 암자에 청기와 올릴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 값은 소비자들...그러니까 눈치 없이 청기와를 올리던 사찰들에게 전가되었다.


세도가와 종친들에게 받은 시주로 청기와를 올리던 거대 사찰들은 공사를 중지했다.


그것은 사대부들과 왕이 보기에 좋았다.


"사찰에도 청기와를 올렸는데 궁의 정전이나 종묘에 청기와를 올리지 못한 것이 매우 그르다고 여겼다. 와소에서 들어오는 세로 올해에는 정전과 종묘에 청기와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청기와장들은 조정에 청기와를 팔 수 밖에 없었다.


조정에 물건을 팔면 소비세나 거래세 자체가 면세고, 파는 물건의 소비세율에 비례한 사후 세제 혜택도 있다.


소비세율 100%인 청기와의 경우, 절반은 시장에 팔고 절반은 정부에 납품하면 청기와장들은 세금을 전부 공제 받는다.


때문에 기존에 공납을 바치던 각지의 민회 건, 이렇게 점차 국가의 명부에 등록되어 가는 상인과 공인이건, 너도나도 앞다투어서 정부에 먼저 팔려고 했다.


"앞으로도 다른 종류의 물속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공장계를 조직하고, 그들의 직능을 호조의 금란서(* 禁亂署, 특허청)에서 기록하여 관리하라."


호조와 평준도감은 세금은 세금대로 걷으면서 백성을 조종하는 젊은 왕의 경세술에 혀를 내둘렀다. 이번만큼은 왕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되어도 반드시 외울만 했다.


외워뒀다가 꼬운 놈이 보이면 세금 폭탄을 때려줄 것이다.


---


<이하 미주>


*1 : 경식이 스위스식 염초 제작법을 도입한 것은 31화 <서울의 여름>입니다. 몇 번 작 중에서 강조했지만, 아직도 지방 군현들 중 상당수는 중앙 재정이랑 인력의 한계로 화매소가 설치된 30여 개를 제외하면 기존 방식대로 돌아가고 있지요. 그래서 경식의 조선에서도 여전히 '알아서 돈 벌어서 써라' 라는 의미로 여러 사업 아이템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때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지도 모르겠군요.


*2 : 청기와는 세조가 세운 원각사 등 당시 조선 정부에게 우대받고 있던 몇몇 사찰들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궐에서도 정전 정도에서나 쓰이는데 사찰에서 쓰인다는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 연산군 2년 4월 기사에 나오지요. 하지만 성종 시기에는 봉선사와 장의사 등 여러 사찰들에도 청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연산군 시기에는 그냥 탕춘대 건물에도 청기와를 올리는 등 사용이 확대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탕춘대 건물의 청기와는 장의사를 철거하고 빼온 것 아닌가 추측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작 중 경식은 연산군이 원래 역사의 미래 시간선에서 했던 일을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작 중에서 청기와를 굽는 곳이 강진현으로 설정된 것은, 예종 8년에 回回靑相似石 이라는 푸른색 염료를 강진에서 굽는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재해석하여 소재로 활용한 것입니다. 세조가 원각사를 세울 무렵에 저 '회회청상사석'이라는 염료를 전국에서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해당 염료를 활용해서 청기와를 구운 것 같습니다.

<이지희. (2022). 조선 전기 청기와의 제작과유약 원료의 수급문제. 서울과 역사, 111, 7-50.>

<손신영. (2010). 조선시대 청기와에 대한 인식과 실재. 강좌 미술사,(35), 215-238.>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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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바다 이야기 2 +84 24.07.05 6,537 491 21쪽
53 바다 이야기 +51 24.07.04 7,774 448 23쪽
52 오라 남으로 +64 24.07.03 8,596 467 24쪽
» 일하는게 취미 +82 24.07.02 9,158 524 23쪽
50 가자 북으로 +50 24.07.01 9,100 524 22쪽
49 신항로 3 +55 24.06.28 9,740 480 22쪽
48 신항로 2 +82 24.06.27 9,694 515 25쪽
47 신항로 +49 24.06.26 9,979 480 25쪽
46 수완가 +60 24.06.25 10,348 468 22쪽
45 아이신기오로 +101 24.06.24 11,049 557 24쪽
44 자본과 기술 +76 24.06.21 11,582 563 21쪽
43 인클로저 +81 24.06.20 10,918 528 23쪽
42 봉 잡았다 3 +70 24.06.19 11,394 551 24쪽
41 봉 잡았다 2 +80 24.06.18 11,516 522 22쪽
40 봉 잡았다 +91 24.06.17 12,167 561 23쪽
39 탈상 +90 24.06.15 12,553 529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2,556 550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12,154 515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5 24.06.12 12,344 53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61 24.06.11 12,183 522 21쪽
34 돈과 전쟁 +55 24.06.10 13,003 560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8 24.06.07 14,052 568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9 24.06.06 14,260 603 25쪽
31 서울의 여름 +38 24.06.05 13,636 543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4 24.06.04 13,371 552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4,099 585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6 24.06.02 14,464 63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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