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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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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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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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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봉 잡았다 2

DUMMY

과연, 경식이 제안한 조약의 내용을 일본 사신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조선방을 하카타와 사카이(현 일본 후쿠오카와 오사카)에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짧게 말하자면 그렇소."


그래도 아주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교역을 위해 상대국에 자치적인 상업 도시, 즉 방(坊)을 세우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도 고대부터 있던 일이다.


한국사에서도 장보고가 당나라에 세운 신라방 같은게 있었고, 지금도 일본이 조선에 왜관을 세워놨다.


다만 동아시아 개념에서는 아쉬운 쪽이 상대국에 설치하는 편인, 방 내지 관을 조선에서 나서서 일본에 설치한다는게 약간 특이했을 뿐이다. 물론 꼭 그런 것도 아니니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진짜로 특이하다고 할 것은 일본과의 교역을 그렇게 싫어하던 조선이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꿨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경식이 내민 조약의 내용을 살피면, 불평등 조약이 왜 불평등한지 알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내용을 본다면 뭐 이런 개뻔뻔한 조약이 다 있냐고 욕할 내용 투성이였다.


일본에 설치된 조선방에 머무는 조선인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적용하지 않나, 일본은 조선산 물품에 세를 메기지 말라던가, 일본에 해적이 많으니 조선군이 임의로 잡을 수 있게 해달라던가, 해안을 측량할 수 있게 해달라던가, 조선인들이 일본에 세를 낼 일들은 조선 지폐로 지불한다던가 등등.


강화도 조약도 조선을 벗겨먹으려는 흉계가 담긴 조약이었는데 지금 경식이 들이민 것은 그냥 이제부터 너희를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 예정이라고 선언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본 사신들은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본은 지금 이미 센고쿠 시대에 돌입했다. 이미 중앙정부의 법률은 무의미해졌고, 각지 다이묘들이 자기 네 지방의 법을 집행하는게 보통이다.


심지어 사카이의 경우 에고슈(会合衆)라는 도시민들의 자치조직이 이미 존재했다. 하카타 역시 유사한 조직이 나타났다.


조선의 치외법권 요구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보였다. 막부 측에서 조선방의 치안을 지켜줄 능력이 아예 없는 이상 안된다고 하기 어렵다.


조선산 물품에 세를 매기지 말라는 것도, 일본에는 아직 관세 개념 자체가 없고, 무엇보다 자기들이 조선산 물품이 아쉬운 상황이라 문제가 없어보였다.


또 일본에 해적이 많다는 것은 동아시아인들 모두가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미래에도 그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이어가는지 해적 만화를 세계에 수출할 정도다.


이미 제 기능을 못하는 막부가 조선 배들을 일일히 지켜줄 수도 없으니, 조선인들이 스스로 해적이랑 싸우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해안측량이 좀 찜찜했다. 동아시아에서도 남의 나라 지도 만들겠다는 것은 침략을 위한 정탐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아마 조선이 이상할 정도로 뭔가를 팍팍 퍼주고 받아가려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사신단 내에서 돌았다.


하지만 설마 조선이 일본을 침공하기라도 하겠는가. 그 위대한 원나라도 감히 넘보지 못한, '신이 지켜주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대마도 하나 제대로 못 이기는 허접 조선이 뭘 하겠는가.


그리고 자기들도 바보는 아니다(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부분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으나 저희가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니 상부에 보고하여...' 로 넘기기로 했다.


전임 사절 권한으로 왔지만, 원래 외교에서는 불리한 건 이런 식으로 어물쩡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세를 지폐로 내겠다는 것은 오히려 좋아보였다. 자기들이 조선 지폐가 필요해서 왔는데 이러는 것은 거의 조선이 퍼주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이전에 대마도와 조선이 맺은 계해약조와 달리 배가 드나드는 걸 수를 제약하지도 않고, 일본에서 지폐가 잘 통용되도록 관헌을 파견해서 돕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 조약이 맺어지면, 대마도와 규슈의 영주들이 조선과 밀무역으로 얻던 이득들 중 상당 수가 막부로 직접 들어오게 된다.


조금 찜찜한 것은 '차후에 봐서 몇몇 곳에 더 조선방을 설치하도록 하자' 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영주들이 무역의 이득을 나눠 먹을게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그 때의 일이다. 언제나처럼 핑계를 대며 미루면 그만인 일이다.


그냥 구걸하러 왔는데 놀라울 정도의 외교 성과를 얻게 되어버린 사절 등경수좌(等慶首座)는 싱글벙글 했다.(*1)


그리고 곧 영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2월 25일, 오시에 왜선 4척이 비가 갠 틈을 타서 갑자기 녹도로 들어와 만호 김세준(金世俊)과 군관 2인, 진무(鎭撫) 5인, 군사 20여 명을 죽였습니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오순(吳純)의 보고였다.


싱글벙글하던 일본 사신단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해야했다.


"지, 지금 못난 저희 나라(弊邦)가 변란을 당하여 조정이 난민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물론 조선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경식도 동아시아사 알못이기는 해도, 지금 일본이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어서 내부를 전혀 통제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경식이 지금 그려 놓은 큰 그림이 바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본 전국에 대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통제를 못하고 있는 막부에게 불평등 조약을 걸어 조선 시장에 편입 시킨다.


그리고 막부를 지원해서 점점 일본 전국 다이묘들을 진압하여 막부의 아래로 두되, 그것을 빌미로 막부에 대한 조선의 영향을 더 늘인다.


때문에 벌써부터 막부에게 티가 나게 갑질을 시전해서 막부가 조선을 경계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걱정 마시오. 우리나라도 귀국의 그러한 사정을 헤아리고 있는 바요.

그러고보니 약조에 각지의 거추(*巨酋, 이 시기 일본의 영주인 다이묘를 가르키는 말.)와 조선 간의 일은 일본 조정과 무관하게 각자 처리함을 더하면 어떻겠소?"


일본 각지의 다이묘에게 개별 외교권(조선 한정)을 준다는 것을 명문화 하자는 소리였다.


국가의 주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미래인들이 보면 그냥 일본을 박살내겠다는 소리임을 알겠지만, 지금의 구걸이나 하고 다니는 무로마치 막부는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서계(*書契, 외교문서)에 더하신다면 저희가 반드시 일본 국왕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경식은 일본 사신들과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치고, 실질적인 대책 논의를 위해서 대신들을 모아 불렀다.


새삼 생각해보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연산군 시기는 외교적으로 별 사건이 없는 시대인줄 알았는데 북쪽에서 터지는 일을 처리하니 남쪽에서 또 일이 터졌다.


물론 조선사 전체로 보면 '일본인들이 왜구했다' 같은 일은 동의어 반복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라서 정말 별 것 아닌게 맞긴 하다.


깃발 좀 훼손 되었다고 전쟁 일으키는 자존심 강한 나라 '대영제국'의 지혜를 탑재한 경식이니까, 평소의 조선이었다면 별 것 아닌 걸로 넘어갔을 일을 만주 진출 명분으로 쓰고, 일본에 불평등 조약을 먹이는 흉계로 발전 시키는 것이다.


대신들이 논의한 대책은 평범하고 상식적이었다.


"지금 만호를 살해한 자는 대마도의 어부 아니면 반드시 삼포에 머무는 왜인일 것입니다.

자질이 높은 자를 보내 삼포의 장군과 함께 삼포에 살고 있는 왜의 추장을 불러 문책하고, 또한 대마도주에게도 통문하여 왜적을 반드시 잡아야겠습니다."


"좋소. 육조와 의정부는 절목을 준비하여 그대로 시행하시오. 그런데..."


왕이 저렇게 말을 꺼내면 뭔가 또 일을 벌인다는 신호다.


지금 왕이 뭔가 하기만 하면 자기들 앞으로 일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학습한 호조 관헌들은 벌써부터 긴장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 전국의 양전을 1년 이내로 진행하라는 무지막지한 명령이 내려와서 중앙의 호조가 텅텅 비었을 정도인데 뭐가 또 내려오면 진짜 사직해서라도 도망쳐야 한다.


"장차 앞으로 일본과의 교린(交隣)이 늘면, 일본인들은 그 심성이 간악하여, 우리가 후대하여도 예사롭게 여기며 교만하고 흉포하게 구는 폐단이 늘어날 것이오.

이런 일은 오직 위무하여 엄히 징치하는 것으로만 다스릴 수 있을 것인데, 우리나라의 수군은 그 역이 고되어 도망하는 자가 많고 그 기강이 문란하오.

이런 폐단을 경장해야만 능히 일본과 화평을 지킬 수 있을테니, 그 대책을 논해야 할 것이오."


한 마디로 지금부터 일본을 줘팰 준비를 하자는 얘기였다.


호조는 자기들 일이 아닌 것 같으니 안심했다.


일본은 줘패야만 말을 듣는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야 일본과 평화를 지키며 잘 지낼 수 있다니 뻔뻔한 소리 같지만 동아시아식 표현은 원래 다 이렇고 어차피 사실이기도 하다. 그 점은 미래의 미국도 증명했다.


방금 여진들을 줘패놓고서 이젠 일본이냐는 말은 새삼 할 것도 없었다.


이 왕의 롤모델은 신하들 대하는 것은 세조요, 땅따먹기 좋아하는 것으로써는 세종인듯 했다.


벌써부터 신하들은 이 왕은 대체 무슨 묘호를 받게 될까 같은 흉참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복왕 시즌 2 라는 뜻의 세조가 제일 어울릴 것 같은데, 그건 이미 땅을 한뼘도 넓히지 못한 누가 가져가 버렸다.






아무튼, 왕이 하는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야인과 왜놈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상식이다.


야인을 성공적으로 줘패서 정복을 하고도 돈이 남는, 조선의 원래 국력과 제도로는 불가능 했을 신기한 일을 이 왕은 해냈다. 이 왕은 분명 일본에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래서 대체 어떻게 수군을 개혁하느냐는 것이었다.


경식이 오기 직전까지 자주 제안되던 것이 '수군이 녹을 한 푼도 못 받으니 백성들 토색질이나 자꾸 해대니, 수군에도 예산이랑 급여를 줘보자' 는 얘기였다.


물론 원래의 조선은 돈이 없어서 못했다.


그런데 경식은 해냈다. 작년에 이미.


그리고 딱히 대단히 바뀌지는 않았다. 잘해야 도망이 줄었다는 정도.


경식은 미래에서 조선의 문제점을 '서리와 아전들에게 월급 안 줘서 그 계층들이 부패했다' 는 수박 겉핥기식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경식이 와 있는 조선 전기는 서리와 아전 계층에게 시키는 것만 많고 주는 것은 없다보니, 실제로 부패가 심하고 도망치는 일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경식이 저렇게 알고 있는 조선 후기는, 사실 서리와 아전 계층도 나름 지방 재정 내에서 급여를 받았다. 심지어 각 지방 관아마다 서리와 아전 계층에게 급여규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서리, 아전 계층의 부패는 딱히 줄지 않았다. 되려 돈을 많이 받는 고위 아전들이 더 자주 해처먹었다.


경식이 바꾼 조선도 비슷했다.


여전히 돈이 부족해서 지방 아전이나 서리들에게는 돈을 못 줘서 대충 굴러가는 모양새이긴 하다.


하지만 중앙이나 부목급 군현에 설치된 화매소와 경매장 등 주요 관아에는 아전과 서리들에게도 급여를 주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부패가 근절되지 않았다.


후진국에 일상적으로 만연한 부정부패의 문제는, 인터넷 밈에서 조선 비판하는 이야기 수준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과 수준이 비슷한 경식 및 조선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쉽게 부패가 근절되는 것이면 행정학은 왜 있겠는가.


하여간, 지금 조선 수군도 비슷했다. 급여를 쥐꼬리만큼이나마 줬지만 여전히 토색질은 근절되지 않았고, 딱히 할 게 없으면 물고기나 잡고 다니며, 소금을 굽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경식 덕에 시장 경제가 전면적으로 도입된 후 더 전국적으로 소금과 물고기 장사를 하고 다닌다는 점 정도였다.


심지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함경도랑 남도를 오가며 초피-목면 무역도 하고 있었다. 경식이 다스리는 조선인들은 이런 것에만 적응이 희한하게 빠르다.


"서정을 진행하실 때와 같이 고본을 모집하여 대선을 만들고, 총포를 지급하고 갑사들을 배속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고본을 모집하는 것은 이미 나도 생각하고 있는 바요. 그러나 갑사들이 어찌 수군에 속하려 하겠소?"


지금 조선 수군은 질적으로도 별로지만, 양적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사실 질적으로는 차라리 기술적으로 극복이 되니까 낫다.


작년에 마포 행궁을 차렸을 때 이래로 공조와 병조에게 새 배를 만드는 연구를 하라고 명령도 내렸고, 대포와 총을 위주로 한 새 전술도 연구하게 시켰다.


판옥선 비슷한 커다란 함선도 만들어졌고, 장거리 항해를 고려한 대형 범선을 대포로 무장 시킨 배도 만들어졌다.


아직 양도 충분하진 않고 시험용 함선이라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에 주로 투자할지도 안 정해진 상태지만.


하지만 병사들의 양적인 문제는 딱히 경식도 손을 댄 부분이 없다.


조선에서 수군은 전통적으로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고 부를 정도로 험한 일로 여겨졌다. 신분은 양인인데 하는 일은 천민 수준으로 거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사 수급이 항상 어려워서, 죄인을 집어넣거나 세습을 시키는 등 별 조치를 다 하고 있는 상태였다.


경식이 손댄 것은 오히려 구조조정 쪽이었다. 기존에 지방에서 미곡을 나를 때 동원했던 조졸들이, 화매소 도입으로 필요성이 줄자 확 수를 줄였다.


이제 조졸들이 하는 건 중앙이 지방 화매소에서 사서 급하게 날라야 할 것이 있을 때 동원되는 '퀵 배달 서비스' 정도다.


게다가 고본 모집도 지금 조선에서는 생각보다는 대단히 신통한 방법이 아니다.


돈이 모이는 속도 자체도 납전첩보다도 느렸고, 결국 모인 돈도 300만전 조금 넘은 수준이라 갑사 3천이 한계였다.


고정비용만 해도 1년 넘기면 바로 적자로 꼴아박는다. 윤필상이 요동이랑 밀무역까지 하며 돈을 벌려고 눈이 벌개져 있는 이유가 있다.


경식이 일본에게 불평등 조약 뒤집어씌우려고 흉계를 꾸미는 지금도 윤필상은 새 수익원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다.


딱히 좋은 방법을 내놓지 못하는 대신들을 보고 경식은 다시 '대영제국의 지혜'를 빌리려고 해봤다. 아무튼 근세부터 지구 최강의 해군을 가진 나라니 분명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영국군은 어떻게 해군을 모집했는가.


징병관들이 일단 술집에서 대기를 탄다.


적당해보이는 놈팽이가 있으면 술을 한 잔 대접한다.


그리고 놈팽이는 술을 다 마셨을 때 쯤에 잔 바닥에 있는 은화 한 닢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징병관들은 술에 취한 놈팽이를 그대로 병영으로 끌고 간다.


그러면 선임들이 환영해준다. "자진입대를 환영한다!"


놈팽이는 돈을 받았으니 해군 입대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음...이건 별로 도움이 안되겠군. 이미 조선이랑 별 차이가 없고.'


사실 미래 한국에서도 해병들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바다 관련은 시공을 막론하고 다 비슷한가보다.


또 다른 근세 유럽의 제도는 매관매직이었다.


유럽은 근세에 매관매직이 아예 공식화 된 관직 등용 방식이었다.


미래인들이 들으면 왜 그러고도 안 망했냐고 신기해 하겠지만, 유럽에선 중세까지 귀족들 내에서 관직이 세습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매관매직으로 돈 있는 놈에게 관직을 파는 것으로 바꾸면, 파는 값은 국왕 금고로 들어오고, 돈 벌 줄 모르는 무능한 귀족이 관직에 앉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따지고보면 동아시아도 관료들부터 실무진들까지 모두에게 급여를 거의 안 줬는데도 안 망하고 돌아갔으니 참 신기한 일 아닌가.


전근대는 다 같이 주먹구구로 돌아가서 그걸로도 경쟁이 된 것이다.


경식이 바꾸는 중인 조선도, 아직 근대를 형성하기엔 멀고 멀었다.


화폐 도입이야 그냥 경식이 유능해서 성공한 경식본위제 수준으로 해낸거고, 토지세 개혁이나 시장경제 도입은 이미 조선 내에 기반이 있던 것을 활용한 것이다.


근대적 관료제나, 국민군을 기반으로 한 군대 같은 건 멀고 먼 이야기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일련의 지식들이 조합되며 지금의 조선에 최적화 된 새 방법이 떠올랐다.




진주 남강을 돌아다니며 진주 장시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수적질을 하던 전 조졸들은 지금 망가진 배를 고치고 있었다.


함양군민들에게 충각 공격을 받은 것 수리는 아니다. 그건 이미 작년 일이다.


조졸은 남들은 다 싫어하는 천역이지만, 그들은 이상하게 토색질이 체질에 맞는 바람에 군역에서 해방된 뒤로도 수적이 되어버렸는데, 자기들과 함께 군대에서 쫓겨난 이 배가 마치 동료 같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 아직도 고쳐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슬슬 이 배도 끝 아닌가? 더 덧대도 소용 없을 거 같은데..."


"뭐? 그럼 이 배를 버리자는 건가? 배가 없으면 우리가 뭘 해먹고 산다고? 고칠 수 있을 때까지는 고쳐보자고."


하지만 지금 이 수적단은 그야말로 진퇴양난 상태다.


그들을 후원하며, 인근 군현의 민회 농민들이 화매소 경시에 물건을 내놓지 못하게 가로막게 시켰던 진주의 장사꾼들은 그냥 민회랑 타협을 해버렸다.


민회에 농민들만 있는게 아니라, 향리나 향반들이 대거 섞여 있는지라 그들과 계속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진주 수적단은 일감이 그렇게 끊겨서 적당히 수적질을 하거나 물고기 잡아서 알고 지냈던 상인들에게 파는 등 군 시절 하던 돈 벌이를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적질 한 것이 꼬리가 너무 길었는지 슬슬 그들을 찾으러 다니는 방이 이곳저곳에 붙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감을 찾자니, 밭도 없고 다른 일머리도 없는 막장 인생들만 모아놓은 놈들이라 그럴 재간도 없다.


"그래도 우리가 물귀신이 되면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가 배 타는 거 말고 재주는 없다해도 정 할 게 없으면 지게꾼이라도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텐데..."


배가 이제 곧 끝이라고 중얼거렸던 임맛생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제일 현실적인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행정력이라고 해봤자 사진도 없고 경찰도 없는 시대다.


그들이 수배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우리 수적이요' 하고 티 나게 몰려다니고 배 타고 다닐 때나 들키지,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각자 알아서 일하면 들킬 일도 없다.


더군다나 근래는 경시가 온 나라에 설치되어서 상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라 상인들이 부릴 임노동자나 지게꾼 수요가 늘어난 상태다. 아무리 막장인생이어도 그런 일조차 못할 것은 없다.


이렇게 억지로 배를 계속 타겠다면서 이런 삶을 이어가는게 명백하게 더 위험하다.


배 타는 게 더 좋다고 해도 수적단이 딱히 새 배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어디 선상들 밑으로 들어가는게 낫다.


그런데 맛생이에게 반박했던 강막쇠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들고 있던 망치를 바닥에 던져가며 성질을 부렸다.


"너 이 자식! 이제와서 '동료'를 버리겠다는 거냐! 이 배는 우리가 조군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함께 했던 녀석인데 이걸 버리겠다고!"


경식이 봤다면 참수 했어도 시원찮을 진짜 범죄자 수적들이 무슨 우애 깊은 해적 만화 같은 대사를 치는 것을 보고 황당해 했겠지만, 이 수적단은 그런 미래 지식 모른다.


덕분에 수적들 끼리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때를 노려 산음현에서 보낸 역졸들이 몰려왔다.


조선에서 지방 치안을 담당하는 관아는 따로 없지만, 중앙에서 보낸 지방 관헌들은 필요에 따라 역졸들을 동원할 수 있다.


산음현감에게 '남강 강가에 그 수적들이 배를 대고 배를 고치는 것 같다' 고 신고가 들어오자, 바로 역졸들을 동원해서 온 것이다.


그 덕에 자기들끼리 싸우던 수적들은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다.


싸움을 시작하던 순간의 우애 깊은 해적단스러운 기세는 어디다 버리고, 포승에 묶인 채로 너 때문에 잡혔네 하며 싸워대기 시작했다.


압송되어 온 수적들의 처분에 대한 논의는 산음현감에서 경상도 관찰사로, 그리고 중앙 조정까지 올라갔다.


현감부터 관찰사까지 모두 사형이 맞는 것 같다고 건의해 올렸기 때문이다. 군율이 아닌 사항은 그들 선에서는 사형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앙 조정 대신들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이전에는 조졸로써 역을 졌는데, 조졸의 역에서 해방된 후에도 스스로 배를 고치고 몰고 다녔다니 그 재주가 쓸만 합니다.

성정이 난폭한 이들이어서 조졸로 쓰기는 어려우나, 이번에 세우는 해동제국사(海東諸國司)에 쓸 수군의 군액이 모자란데 충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만드는 대일본교역 회사...를 가장한 사략해적단에 집어넣자는 말이었다.


진주 수적단은, 이렇게 변해가는 조선에서 원래 역사에서는 없었을 그들의 천직을 찾게 되었다.


경식이 백성들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것 하나는 정말 탁월했다.


---


<이하 미주>


*1 : 강화도 조약보다 더 뻔뻔한 내용들로 가득한 경식이 내민 약조문들을 일본 사신들이 뭐가 나쁜지 전혀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은, 이전 화 본문에서도 이야기 하였듯 실제 역사에서 제국주의 열강들과 만나 불평등한 개항 조약을 맺게 된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청나라는 난징 조약에서 항구의 할양, 관세의 고정, 치외법권 적용 등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었으나, 전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앞서 코칸드 칸국과 거의 같은 내용의 조약을 맺기도 했었지요. 전근대의 맥락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조약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경우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의 의도를 의심하긴 했으나, 결국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조약을 맺게 되지요. 재밌는 것은 일본은 첫 개항 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미국이 관세라는 개념을 알려준 덕분에 5% 라는 저관세율이나마 적용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조선에게는 그조차 알려주지 않아서 조선은 관세 자주권을 한동안 완전히 상실합니다.

현대로 보면 통화 정책 주권을 남의 나라에 가져다 바치는 일본 막부의 행위 역시, 당대에는 전혀 심각한 문제로 인지되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중국 화폐의 신용도에 의존해야 화폐 정책이 굴러가는 상태였고, 조선 역시 후기에 상평통보의 수량이 부족하자 중국의 동전을 수입해서 써야 했을 정도로 대부분의 나라는 적절한 화폐 정책을 운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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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9

  • 작성자
    Lv.41 휴유유
    작성일
    24.06.18 20:44
    No. 61

    사략해적만한게 없긴 하죠. 국가에서 나포 허가장만 발급해주면 자본을 모아서 배와 선원을 마련해서 해적질하는건 민간에서 알아서 하니 ㅋㅋ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이니 정부에서 관리하려나 보네요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79 공포의머왕
    작성일
    24.06.18 21:28
    No. 62

    세조 묘호가 어울리는데 이미 세조가 있다? 그럼 이전 세조를 다른 묘호로 바꾸면 해결 아님? 원역사 영조도 원랜 영종이었다가 영조로 바꾼 거라던데 못 바꿀 이유가 있음?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56 박가ㅇ
    작성일
    24.06.18 21:56
    No. 63

    해적과 일본을 통제하는 조선정부의 임(금)

    찬성: 3 | 반대: 1

  • 작성자
    Lv.41 ja******..
    작성일
    24.06.19 00:16
    No. 64

    으아악 흉악한 영길리 놈들의 정책이다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24 Alloien
    작성일
    24.06.19 01:35
    No. 65

    옆동네의 사황
    이 동네의 칠무해

    그렇게 대해구시대가 열렸구나!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56 상상무한
    작성일
    24.06.19 01:47
    No. 66

    넓을 광자 써서 시호는 광종으로 쓰면되겠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 mo******..
    작성일
    24.06.19 01:57
    No. 67

    1498년이면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 정확히는 전국시대에 속해 있습니다. 1467년의 오닌의 난 이후 수도 교토는 초토화되고 지방은 센고쿠다이묘들의 전쟁으로 무정부 상태에 가깝게 변하죠. 이 당시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즈미이었는데, 1493년 메이오 정변으로 전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몰아내고 쇼군 직에 오른 지라 정통성은 쥐뿔도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1508년 요시타네가 요시즈미를 다시 몰아내고 복위하게 되죠. 원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지만, 개변된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30 3균주의자
    작성일
    24.06.19 08:12
    No. 68

    일본인들이 세를 지폐로 내는걸 좋아한거 맞겠죠? 조선인들이 아니라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4 dhukdw
    작성일
    24.06.19 08:45
    No. 69

    적어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혐조라 부르겠네요 ㅎㅎㅎ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8 임펠
    작성일
    24.06.19 11:00
    No. 70

    이대로 가면 고조나 성조 받아야할거같은데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4.06.19 11:00
    No. 71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n7******..
    작성일
    24.06.19 13:34
    No. 72

    남들 중세시대에 혼자 제국주의시대 침략적외교권 행사하네ㅋㅋㅋㅋㅋㅋ 해안선 측량에 화폐주권침탈에 치외법권ㅋㅋ
    지방정부에 외교권인정 ㅋㅋㅋㅋ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35 홍삼절편
    작성일
    24.06.19 21:24
    No. 73

    사카이의 합의중이라고 쓴 건 에고슈라고 읽힙니다. (えごうしゅう) 라고 독음이 붙어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9 내가김가다
    작성일
    24.06.20 22:59
    No. 74

    무종...윾머리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雪花or說話
    작성일
    24.06.22 08:06
    No. 75

    고잉메리호 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fo******
    작성일
    24.06.26 18:10
    No. 76

    자진입대를 환영한다 아쎄이! 이 시대에는 기열공군이 없으니 안심하고 입대하도록!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68 무뇌드라군
    작성일
    24.06.26 18:44
    No. 77

    해적들의 자진입대 전통은 오래되었구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mg****
    작성일
    24.06.27 04:55
    No. 78

    여기서 말하는 하카타가 지금의 후쿠오카. 원래 서로 다른 도시였는데 근대에 합치면서 후쿠오카로 정해짐. 대신 기차역을 하기로 함. 그래서 지금 후쿠오카 중앙 역은 후쿠오카역이 아니라 하카타역.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4.06.27 11:33
    No.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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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1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0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0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6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9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5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4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2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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