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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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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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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6.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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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DUMMY

식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이 상황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다.


'1년에 이자가 10%니까 더 많이 이자를 받으려고 기다린다던가...아니, 민회에 돈 맡기는 이자들이 더 비싼데 굳이 그럴리가?'


되려 새 국채 이자율이 더 높으니 번개 같이 달려와서 갈아타려고 하는게 맞다.


'요역 면제권이 있어서? 아니, 납전첩은 한 장에 1천전이다. 이걸 살 정도로 돈 있는 사람들은 요역 할 일이 없지.

요새 요역도 돈을 주는데다가, 가난한 사람들 위주로 모으고 있고, 이전에도 그런 부자들은 남한테 대립 세웠을걸.'


합리적인 이유들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식은 조선에서의 삶을 통해 축적된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럴 때는 보통 뭔가 굉장히 전근대적이고 조선스러운 찐빠가 터진 것이다.


"...혹시?"


문득 한가지 짚히는 것이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납전첩은 공명첩을 개조해서 만든 것(*17화 참조.)이다.


처음 노사신이 납속보관책을 시행하자는 주장을 해서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만든 제도니까.


신료들이 '나라가 백성에게 빚을 진다' 는 개념을 이해 못해서, 비교적 조선인들에게 익숙한 공명첩을, 나라가 다시 되살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원래의 공명첩에 비해서 개선된 면이 여럿 있다.


노사신이 처음 공명첩 팔자고 했을 때는, 그 공명첩으로 파는 자리 중에 실제 벼슬자리인 실직도 존재했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 매관매직이라고 욕 먹는 일이기도 했고, 경식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실직은 빼고, 그냥 봉작만 주는 것으로 개조했다.


그러니까 무슨무슨 대부, 무슨무슨 시랑 같은 칭호만 주는 것이다.


그나마도 진짜 봉작이 아니라, 봉작명 앞에 '납전'이라고 단서 조항을 붙여서 진짜 봉작에 비하면 '가짜'이라는 티가 나게 만들었다.


사대부들 반발을 줄이려는 최대한의 조치였다.


혜택도 확 줄였다. 요역을 면한다고는 써 있으나, 경식의 조선에서는 이미 요역제가 거의 다 붕괴해서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있으나 마나 한 혜택으로, 받은 봉작 품계에 맞는 비싼 옷을 입을 수 있기도 하다. 조선은 신분제 국가라서, 원칙적으로는 돈 많아도 옷 마음대로 못 입는다.

물론 다들 안 지키고 사대부들이 괜히 빡쳤을 때만 쓰는 법이긴 하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 후기에 공명첩이 실제로 이렇게 변하기도 한다.


아무 혜택도 없다보니 백성들이 안 사려고 해서 강매를 해야하는 지경이 되어서 또 문제가 됐지만.


그에 비해 경식이 만든 납전첩은 10% 라는 조선 기준으로는 쥐꼬리 같은 이자라도 붙어 있으니, 혜택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리고 이름을 적어 넣는 란은 뺐다. 공명첩을 개조한 척 하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채권을 만드는 것이니,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납전첩 내용은 이런 식이 된다.


'교지, 이 자를 납전 가선대부로 임명함, 이 첩을 지닌 자의 요역을 면한다. 홍치 8년 X월 X일, 이 첩은 홍치 9년 X월 X일 이후 호조에 납 할 수 있다.'


그래서, 납전이라는 부분만 빼면, 훌륭한 벼슬 임명장으로 보였다.

아무 실권도, 녹도 없는 장식용 품계에 불과하지만.


모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납전첩이 거의 공명첩의 개조 정책인만큼, 그 행정 세부 사항은 기존 공명첩 절목에 기반하고 있기에 상당히 조밀하게 이루어졌다.


사간 사람의 이름이나 주소 등의 상세한 정보도 장부에 기록되었다.


대부분 서울에서 팔렸던지라, 그들에게 관헌이 찾아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가 작년에 납전첩을 사간 사노...이제 양인인가? 하여간 임복(林福)이냐?"


"그렇습니다만."


"네가 사간 납전첩은 이제 나라가 다시 걷을 때가 되었다.

납전첩의 법을 방으로 알릴 때 쓰여 있었듯, 식리 1할을 더해서 1100전으로 값을 쳐주니, 납전첩을 내놓아라."


그걸 들은 임복이 허탈하다는듯 웃었다.


"아아! 백성이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나라가 구제하는 것에 내 재산을 보탰는데, 나라는 나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고 그깟 100전을 위해 첩을 산 것으로 아는구나!

이 첩을 내놓으면 우리 집안은 다시 천민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라가 우리를 내치는데, 더는 살아 무엇하리!"


"아, 아니, 이 놈이 왜 갑자기 칼을! 잠깐!"


이렇게 신분상승의 욕구 때문에 첩을 사고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정직한 편이다.


지폐 투기를 하다가 물려서 첩을 산 사람들은, 투자 더럽게 못하는 대평이 정도를 빼면 더 영악한 재테크 무빙을 보였다.




"이리오너라!"


"무슨 일이시오?"


"이곳이 상민 최말동의 집이 맞는가? 과연 파평부원군 대감의 청지기군. 웬만한 사대부들 집보다 크겠어."


"과...관아에서 오셨소? 무슨 일로?"


"네가 작년에 납전첩을 사간 것, 1년이 되어서 이제 다시 나라에 팔면 식리를 더해서 받아갈 수 있는데 오지 않아서 살피러 왔다."


왕이 윤필상을 숙청하려고 자기부터 조지나 하고 쫄았던 최말동은 안심했다.


"아아, 납전첩 말이군. 그게 1년이 지났다고 해서 나라에 다시 꼭 팔아야한다는 법도 없지 않소?"


맞는 말이긴 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조선은 아직도 법은 그냥 참고사항에 가까운 전제군주국가라는 것이다.


법이 없어도 나라가 작정하면 맘대로 집행할 수 있다.


압수 및 수색을 하려면 법원의 영장 발부가 필요한 근대적 구조는 아직 기대해선 안된다. 관헌들은 그냥 밀고 들어갔다.


"잡아떼는 것이 수상하군. 납전첩은 어떻게 했지?"


"아니, 왜 남의 집을 멋대로 들어오고, 어어, 이게 무슨 짓이야!"


최말동의 집을 뒤져보니, 돈은 참 많았는데 결국 납전첩은 나오지 않았다.


말동은 의금부에 끌려나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곤장은 답을 알고 있다. 조선식 최첨단 심문 기술이 동원되자 말동은 금새 납전첩이 어디로 갔는지 불어댔다.


"납전첩을 시골 사람들에게 되팔이했다고..."


그걸 사간 사람들도 다양하다. 어디 대상부고들은 물론이고, 향반 지주, 노비들까지.


어찌보면, 경식이 의도한 정책대로 움직인 셈이다. 채권은 증권 시장에서 거래가 되어야 하니까.


사실 그렇게 만들려고 원래 공명첩의 이름을 비우는 부분도 없앤 거고.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납전첩을 '채권'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벼슬 임명장'으로 이해해버렸단 것이다.


채권 개념으로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돈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진 서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지방 사람들은 이 납전첩을 보고 채권 개념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냐하면 작년에 납전첩에 대한 방을 붙인 것이 서울, 평양, 전주 셋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대부분 서울에서 팔리는 바람에 서울 사람들 외엔 납전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했다.


그래서 시골 사람이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기술을 평생 연마한 서울 사람들은, 납전첩을 이용해서 시골 사람들의 코를 마구 베었다.


웃돈을 받고 납전첩을 시골 사람들에게 판 것이다.


"에헴, 이제 우리 집안도 양반이다. 교지가 이렇게 내려왔는데 누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핫하! 장사치라고 괄시 당하는 것도 이제 끝이다! 가선대부 나리에게 고개를 숙여라!"


"그런데 납전가선대부라는게 뭐지? 돈을 내는 가선대부?"


"글쎄?"




이 모든 사정을 알게 된 경식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에잇 싯팔, 조선에서 정치 못해먹겠네 진짜.'


어째 일이 이상한 사고가 안 터지고 잘 굴러간다 싶더니, 그냥 모르는데에서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조선에서는 구휼 수준으로 낮은 이자율인 10% 짜리 국채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빠르게 사는 거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역시 어설프게 기존 제도 변형해서 운용하려고 했던 게 잘못인가?'


사실, 위무사 고본첩(주식)이 팔리는 속도가 더 느렸다.


아직도 조선에서는 돈을 나눠주겠다는 장사 얘기보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님은 양반입니다' 쪽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오해의 여지 없이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이런 공명첩을 개조한 가짜 채권 말고, 진짜 건조하게 '호조 발행 채권 일천전' 이라고 써 있는 걸 발행하는게 맞았나 싶었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이미 2년차의 납전첩을 발행해서 전국의 화매소로 보낸 상태고, 서울에서도 벌써 꽤 팔려나갔다.


더 두들겨 패서 뺏듯 회수해봤자 반발만 계속 커질 것이고, 시골 어딘가로 팔려간 납전첩은 아마 영원히 안 돌아올 것이다.


"일단 화매소로 다시 파발을 보내서, 이미 판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팔리지 않은 납전첩들은 전부 태우도록 하시오. 또한 이미 팔려 나간 납전첩에 대한 식리는 작년의 것도 함께 계속 계산하도록 하시오."(*1)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어서 그렇지, 사실 이렇게 다들 납전첩의 원금도 이자도 상환 받기 원하지 않는다면 현금이 급할 이유도 사라진다.


조선은 이미 회계 기술이 있을만큼 있는 나라다. 작년의 뉴딜 때 원천징수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현금은 오가지 않고 회계처리로 상계해서 진행할 수 있다.


금융기관도 만들었겠다, 하려면 어음으로 지급하거나 마이너스 통장도 굴릴 수 있다.


납전첩의 이자도 단리라서, 지금까지 발행한 납전첩에 대한 이자를 계속 붙인다 해도 매년 100만전도 안된다.


경식은 이 공명첩과 채권의 과도기적 정책은 폐기하고, 내년에는 그냥 진짜 채권을 만들기로 했다.




강무로 쓴 돈을 제하고, 남은 작은 예산은 소박한 공사에 쓰기로 했다.


광희문 바깥에 활인서를 증설한 것이다.


온돌도 깔고, 기와도 올려서 꽤 좋은 시설이 됐지만, 광희문 바깥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 가고 싶어하는 의원이 부족했다.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으니 승려를 동원하라는 꽤 괜찮은 팁이 나왔다.


경식이 생각해보니 원각사인가 뭔가 하는 무지 큰 절이 서울에 있는데, 맨날 유생들이랑 싸우기만 하는 것 같았다.


가진 전답도 많은 것 같은데, 무료 봉사 할 수 있지? 라는 논리로 의술을 아는 중들을 차출해서 활인서에 집어넣었다.


경식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처참했다.


경식도 종교인들이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나라에서 살다 왔다보니, 종교인들을 무료로 부려먹어서 빈민 구제 활동 벌이는데에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경식의 인권 의식이 최초로 사대부들과 일치했다.


하긴 원래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원각사를 밀어버리고 기방으로 만들어버리니, 그냥 봉사활동 단체로 부려먹는 경식은 그보단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된 김에, 조선 불교에는 어떤 의학 전통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노사신을 불러서 해설하게 했다. 경식이 아는 범위에서 제일 불교를 잘 아는 대신이 노사신이었다.


막상 듣고보니 좀 실망스러웠다. 상당수의 경우 그냥 불경을 외는 것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승려들이 씻는 것을 강조하는 계율들이 더 도움이 될 듯 했다.(*2)


'잿물이랑 기름으로 만드는 비누는 씻었다간 사람 잡아서 그냥 안 만들고 있었는데 역시 그거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렇게 백성 구제를 위해 골몰하고 있는데, 감히 성균관에서 또 노사신은 불경을 어쩌고 하며 난리를 치길래 몇 명 차출해서 활인서에 집어넣었다.


결국 다시 한 번 경식이 직접 빡세게 뛰어서 활인서를 제대로 돌아가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경식은 의학 같은 거 모른다.

상식은 상당히 풍부한 편이라서 일반인보다는 낫다 정도지, 조선 시대에 적절하게 적용할만한 의학 기술은 그냥 모른다.


한의학에 대해서도, 전갈이나 수은이나 소주 같은 걸 약재로 쓰는 걸 거르는게 최대지, 그 이상 유의미한 지식은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근대적인 위생 개념 도입이나, 시스템에 대한 개혁이 최대였다.


일단 활인서에 환자들을 빽빽히 놓지 말고, 2m 정도 거릴 띄우게 했다. 척마다 다르긴 한데, 짧은 척으로는 10척 정도 되는 거 같았다.


그리고 환자들이 눕는 자리도, 거적데기 대신에 오승포라도 깔게 했고, 다른 환자가 들어서면 반드시 갈게 했다.


또 이제 슬슬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환기를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하게 만들었다.


환자들을 돌보는 이들 역시 최대한 자주 옷을 갈아입고, 한 번 입고 난 옷은 반드시 빨게 했다.


이렇게 규정을 만들고 나니, 결국 비누를 만들긴 해야했다.


조선의 전통적 빨래 방식...그러니까 오줌, 잿물, 콩가루 등으로는 여러가지로 부족했다.


조선이 워낙 가난하다보니 비누 원료로 쓸 기름 공급이 좀 불안했는데, 일단은 풍년으로 값이 떨어진 콩을 사들여서 콩기름을 짜는 걸로 쓰기로 했다.


만들어진 비누는 무수리들에게 아주 반응이 좋았다.


'흠, 생각해보니 콩기름을 짜고 난 깻묵도 비료로 쓸 수도 있고, 비누를 퍼트린다면 기름 수요도 늘고, 풍년 때 콩 값 하락을 방어할 수 있겠는데?'


비누랑 함께, 소주도 최대한 정제해서 소독용 알코올로 쓰려고 했다.


내의원들에게 소주를 강하게 내린 다음 상처를 씻으면 성처가 쉬이 덧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의원들이 왕이 어디서 이런 사이비 의술을 들었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의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이론을 들은 내의들의 한의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대저 술이라는 것은 약재로 적당히 마시면 마시면 모든 맥을 조화시키고 나쁜 독을 물리치며, 차가운 기운을 제거하고 혈맥을 돌게 합니다.

전하께서 내리신 술의 외용(外用)은 어떤 이치로 가능한 것인지 고금에 들은 바가 없나이다."


그야 당연하지. 미래 지식이니까 옛날과 지금(古今)엔 없어야지.


"내가 손수 내 면창(여드름)을 다스리며 알아냈네."


왕의 희한한 경험론을 들은 내의들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여드름에 소주를 발라서 알아냈다고? 소주로 세수라도 했단 말인가?


자꾸 내의원에 약으로 쓸 소주를 들이라고 할 때는 상 중이라 몰래 술 마시려고 핑계 대는 줄 알았는데(*3), 설마 그걸 여드름에 바르고 있었던 것인가?


정확히는 여드름 짜기 전 후에 침이랑 피부를 소독한 것이지만, 그런 걸 알 수 없는 내의들의 의문은 깊어져갔다.


"하여간, 소주를 정순하게 내리면 물도 기름도 씻어내는 성질이 있는데, 이 성질 때문에 피부에 상처가 나 독기가 들어갈 수 있을 때, 소주로 상처를 씻으면 그것을 막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네."


경식은 나름대로 조선인들 수준에 맞게 설명한다고 하는데, 대체로 실패하는 편이다.


여전히 내의들 대부분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한 명이 나섰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전하께서 하교하신 이치가 가해보입니다. 저 또한 직접 팔에 상처를 내서 소주가 어떤 징후를 보이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의원 봉사 김공저(金公著)였다.


그러고보니 이전에도, 무슨 약이 중국에서 들어오기만 하면 자꾸 자기 몸에 실험을 하는 이상한 의관이 있다고 경식도 들었는데 그였던 모양이다.


마침 잘됐다. 또 한 가지 필요했던게, 이러한 조치가 경식의 미래 지식 치트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조치들이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음을 실험 시키고, 연구 시켜서, 의학에 아예 자리잡게 만들 생각이었다.


딱 이 생체 실험왕이야 말로 이 임무를 맡기기에 적당해보였다.


"훌륭하네. 이 참에 활인서에 제조로 가면 어떻겠는가? 내가 내린 조치들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 환자들을 직접 보며 득해하고 논하게."


한편, 내의원에 있는 약 재고 중에 활인서에 써도 좋을만한 약재가 뭔가 있나 물어보았다.


"새로 지은 활인서에는 대풍창(한센병)에 걸린 이들이 있으니, 이들에게는 당약(*唐藥, 중국에서 들여온 약) 중에는 호마자(胡麻子)를 쓰면 좋습니다."


'뭐? 그게 뭔 소리야? 이 시대 기술로 무슨 나병을 고쳐? 나병은 최소 항생제가 있어야 고칠텐데?'


"호마자라는 약재는 무엇인가?"


"호마는 중국에서 들어온 마와 비슷한 풀인데, 그 씨를 전탕하여 내복하는 약으로 씁니다.

특히 내복할 때는 풍습으로 인한 은진(*癮疹, 두드러기), 습진 등을 고치는데에 씁니다."


경식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아~완벽하게 이해했어(이해 못함)'을 자기가 시전하게 되었다.


사실 이해 못해도 상관은 없을 거 같다.


무슨 약이건 간에 결국 나병 못 고치잖아? 자 쓰레기죠.


설명을 다시 상세히 듣자하니 아무래도 피부에 좋다고 대충 피부에 생긴 질환엔 다 쓰는 약인듯 했다.


이 시대 의학 수준이 이랬다. 두드러기건 습진이건 나병이건 다 피부병이니 다 같은 약으로 퉁친다.


"음...설명은 이만 됐고 무엇인지 한 번 보여주게."


그리고 내의원에서 가져온 것은 경식이 미래에서도 본 것이었다.


어머니가 건강 식품이라면서 한 통 사와서, 경식도 주전부리로 자주 먹은 것이었다.


"...이거 아마인이잖아?"


서양에서는 린넨천을 만드는데 쓰는, 아마의 씨앗이었다.(*4)


"혹시 이 호마를 우리나라에서 키우고 있나? 아니면 오직 중국에서 들여오기만 하는가?"


"매번 중국에서 가져오기 어려워, 전의감의 전답에서 약간 키우고 있습니다."


"이 호마의 줄기는 어떻게 쓰는가? 삼베와 같이 천을 만드는데 쓰기도 하는가?"


내의들이 또 왕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식도 참 이상하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를 키우고, 호마(胡麻)라고 부를 정도로 마랑 비슷한 건 알면서 왜 천으로는 안 만든다는 말인가.


그러고보니 중국에서도 키우는 모양인데, 듣고보니 중국에서도 아마포를 썼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거 같다.


하여간 잘됐다. 아마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고, 삼베보다는 천의 질도 좋다. 섬유를 이용해서 갑옷도 만들 수 있고, 종이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씨앗을 볶아서 기름도 짤 수 있다. 약재로도 쓰는 모양이고.


난민들을 동원해서 직물 공장을 만들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경기도는 삼베를 키우기에는 따뜻하고 목화를 키우기에는 추운 곳이다.


삼베는 황해도에서 더 질이 좋고, 목화는 삼남에서나 잘 자란다.


그래서 원래는 남부에서 기른 목화를 사와서 원료로 공급하려고 했는데, 경기도에는 아마를 키워서 원료로 쓰면 될 듯 했다.


빈민구제소를 세우는데 되려 얻는 것이 참 많았다.


---


*1 : 조선 후기의 공명첩은 작 중에서 묘사된대로 점점 값은 싸지고 혜택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켜주는 등의 혜택을 주었으며, 값은 비싸고 자주 행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야 온갖 종류의 공명첩이 발행되며 값이 싸지는 추세가 나타납니다. 현종 시대에 가면 작 중 묘사대로 특전은 거의 없어지는데요, 백성들이 사지 않으려고 해서 강제로 파는 일도 발생하고, 숙종 때에는 공명첩은 나라가 백성에게 사기치는 거라고 비판까지 나옵니다. 박경식의 납전첩은 의도치 않게 200여 년을 앞선 미래 기술 공명첩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2 : 일단 활인서에 불교 승려들이 차출되어 일해야 했던 것은 실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불교의 한국 전통 의학에 대한 영향은 고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 드러납니다. 불교가 수용되면서 인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불교의 학이 함께 유입되었고, 조선 초기 의서인 『의방유취』에도 서두에 불교와 도교 철학과 윤리관이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전근대 의학이 다 그렇듯, 본문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불경이나 주문을 외우거나 인도의 수행법이나 도교의 양생법 등도 섞여 있는 등 주술적 면모가 많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이현숙. (2009). 질병, 치료, 종교∶한국 고대 불교의학. 한국사상과 문화,(48), 141-180.>

<신동원. (2004). 조선시대의 의학론. 의사학, 13(1), 134-145.>


*3 : 단종실록 즉위년 기사를 보면, 문종의 상을 치르던 단종이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상하자 대신들이 소주랑 우유를 마셔서 기운을 보충하라고 상언하는 일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소주가 약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4 : 아마인, 혹은 아마자가 중국에서 고대부터 약재로 쓰였음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중국에서 아마가 최초로 재배된 것은 기원 전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마를 천으로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야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아마가 쓰였는지 아닌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 주장에서는 조선시대 의서에 호마(胡麻)라는 이름으로 적힌 것이 바로 아마이며, 호마라는 단어가 현대에는 참깨를 뜻하지만 당시 의서에는 참깨는 흑호마(黑胡麻), 흑지마(黑芝麻) 등의 이름으로 적혀 있다고 합니다. 본작은 그 주장을 반영하여 아마가 조선에서 약재로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아마인이 대풍질, 혹은 대풍창을 고치는데 쓰인다는 것은 송나라의 의서 도경본초(圖經本草)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쓴대로, 대풍창 혹은 대풍질은 보통 한센병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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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1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1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1 465 21쪽
»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79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7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6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1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4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5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7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3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4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2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1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1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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