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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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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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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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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DUMMY

남도에서는 함양군민들이 해적들을 퇴치하고, 북방의 새 4진에는 진격의 세종을 재현하기 위해 방벽을 건설 완료 했을 무렵.


조선은 올해도 풍년이었다.


왕이 '역시 내가 성군인 탓인가?' 같은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하는 바람에 조정의 분위기가 쌔해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


사실 그냥 원래 역사에서도 이 시기 조선은 풍년이었다. 대풍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성도 쌓고 창고도 짓고 해보자며 제안이 나오던 시기다. 결국 가난해서 못했지만.


쌀 값이 또 떨어지니 농부들은 울상이지만, 농지가 없이 유랑하여 정부가 내리는 요역만 바라보고 사는 빈민들은 요역 산료만 받아도 먹고 살만해지니 좋고, 정부도 노동자들에게 줘야할 밥 값의 선이 낮아지니 좋다.


원래 역사의 조선은 이 때 하려던 역사가 고작 조창 새로 짓는 것이었는데, 경식이 그걸 1년차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게다가 이젠 세금도 고정적으로 들어오는게 최소 1500만전은 넘으니, 뭔가 사업을 계속 벌일 수 있다.


다 늙은 고목 같던 조정 신료들의 마음 속에 꿈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경식은 역사를 벌이기 이전에, 조선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위한 사소한 사업들을 먼저 몇 개 생각해내서 진행했다.


앞서도 봤지만, 갑자기 시장 경제 체제에 노출된 농민들은 이제는 풍년에도 괴롭다.


이러면 차라리 흉년에는 쌀값 올라서 팔자가 피기라도 해야하는데, 1가구 당 농경지가 1결 미만인 곳이 많으니 이들은 흉년 한 번 터지면 그대로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제도적으로도 몇 개 손을 대고, 기술적으로도 몇 개 농민 소득 개선을 위한 방안을 내놨다.


우선 기술적으로, 첫째는 대형 낫이었다.


서양에서 쓰는 커다란 낫을 군기시에 만들게 해서, 적전(*籍田, 왕이 권농을 위해 직접 경작하는 의례를 보이는 밭.)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며 추수해보였다.


이미 추수가 한창인 9월에야 만들어서 좀 늦어서 그렇지, 농사에 대한 기술 혁신은 사대부들도 필요성을 느끼는지라 신료들의 평도 좋았다.


도성 근처 경기도에 전답을 가진 신료들은 바로 군기시에서 사가서 써먹었다.


둘째는 가마니 틀이었다.


경식이 '가마니'라는 단어를 꺼내자 신하들이 못 알아 듣길래 희한하다 싶었는데, 사실 조선은 아직 가마니가 없어서 그렇다.


가마니는 일본에서 쓰던 가마스(かます)가 일제 시대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인데, 경식은 그걸 몰랐다.


지금 조선에서 쓰는 섬은 날이 다섯, 일곱 정도라서 쉽게 찢어지고 흩어지며 곡식도 자주 새어나간다. 그런 주제에 짚도 가마니보다 많이 쓴다.


게다가 지금 화매소에서 쌀을 거래할 때, 분명 쌀 안에 모래를 섞거나 썩고 묵은 쌀을 가져온 여흥 민씨 같은 놈이 있을게 뻔해서 일일히 뜯어서 검사하고 있는지라, 그 때마다 섬 소모가 심했다.


그래서 날을 스물 다섯개로 늘인 새 틀을 만들고 가마니 틀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마니 틀은 민속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고, 구조도 간단해서 어렵지 않았다.


사실 구조가 너무 간단해서 굳이 군기시에서 대량 생산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그래서 견본용으로 몇백 개만 만들어서 전국 관아에 보내기로 했다. 손재주 좋은 사람이 보면 금방 따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이 가마니를 만드는 것을 장려할 겸 농민들이 부업으로 삼아 만들 수 있게 각지 관아랑 화매소에서 매입하도록 했다.


셋째로는 그네(훌테)였다.


훌테를 민속박물관에서 봐서 조선 시대에는 당연히 있는 건줄 알았던 경식은 이것에서도 놀랐다.


조선에 와보니 타작을 도리깨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전세계적으로 타작하는데에는 도리깨가 아주 근래까지 표준이었으니 또 안 이상한 거 같기도 했다.


그럼 훌테는 언제 어디서 발명되어서 언제부터 조선에서 쓰였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조선에 와 버린 지라 알 길도 없으니 그냥 자기가 발명하기로 했다.


갑옷용 찰을 만들던 철장들을 동원해서 보름 정도 연구해보니 훌테의 머리 부분은 금방 만들 수 있었다. 그냥 철판을 빗처럼 자른 거니까. 하루에 수백 개 정도는 쭉쭉 뽑혀나왔다.


이것 역시 신료들도 유용하다고 좋아했지만, 마침 추수 후에 탈곡이 급했던 농민들은 아주 부리나케 사갔다.


족답식 탈곡기도 좀 연구하면 만들 수 있을 거 같지만, 극단적으로 간단한 훌테에 비하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경식은 워라벨 찾느라 일을 설렁설렁하는게 기본인지라, 차차 해도 되겠다 싶어서 미뤄뒀다.


넷째로는 선물 거래(futures)를 도입하기로 했다.


최초의 선물 거래는 1697년 일본 오사카의 도지마 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200년 정도 앞서긴 하지만, 이미 곳곳의 화매소에서 미곡 거래를 경매로 하는 것에 백성들이 익숙해졌으니 못할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반드시 나타나는게 투기다.


선물 증권이 있으면 쌀을 직접 들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현재 쌀 시세는 또 화매소에 공개 되어 있으니 그거 값대로 거래하면 되니, 그대로 투기로 직행할 것이다.


하지만 경식이 생각하기에는 1차적으로 필터링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화매소가 완전히 개방된 시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식이 만든 여러 종류의 공식 시장에 드나들며 물건을 팔려면,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신분 증명서가 필요하다.


일단 농민의 경우, 호구단자에 등록되어 있고 8부제에 따라 세금을 내는 책임자로 뽑힌 경우, 미곡을 관할 화매소에 내놓을 수 있다.


둘째로 상인의 경우, 등록첩을 발부 받은 보부상이나 선상이라면 타 지역의 물산을 평양이나 경강의 경시를 드나들며 사고 팔 수 있다.


셋째로 이임이나 면임으로 뽑혀서 임명장을 지닌 사람이 공안에 등록된 지역 특산물을 화매소 경매소에 내놓는 것이 가능했다.


넷째로 서울의 경우, 계를 조직하여 상안에 등록된 상인들이라면 경시를 드나들며 사고 팔거나 서울에 점포를 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 기관들이라면 모든 종류의 시장에 드나들며 수수료를 면제 받고 사고 팔 수 있다.


웬만하면 들어오는 상인들 전부에게 등록첩을 내주고 상안에 등록 중이라서 거의 개방 같아 보일 뿐, 여전히 봉건적 특권 상인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시장 형태다.


이래서, 농사 끝나서 할 일 없는 중년 남성들이 화매소에 죽치고 앉아서 하루 종일 쌀값 표만 보고 있기는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순 없지. 일단 내년 춘궁기까지만 준비할 수 있게 해볼까.'


까짓 거 해보니까 일 터져도 다 나중에 수습이 되는 거 같았다.


2년 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고 경식의 자신감이 이렇게 하늘을 찔렀다.


덕분에 미뤄뒀던 사법 관련 업무도 진행이 시작되었다.


육조와 의정부에게 선물 계약 관련 양식에, 그 증권 양식, 화매소에서 거래 보증, 관련 법률이나 화매소에 파견할 관헌 인사 등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군, 현의 수령 중에는 재주가 용렬한 자가 많아, 이런 송사에 대해 능히 대처하지 못할 이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임시로는 율관 서리들에게 선물 관련 교육을 추가로 하고 파견하며, 앞으로는 사송에 관해서만 업무를 보는 관헌을 사헌부에 속하게 만들어서 전국 군현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오.

새로 입격한 관헌들 중 율학에 재주가 뛰어난 이들을 계속 추천하도록 하시오."


마지막으로는, 쌀 수매제를 만들기로 했다.


사실 작년에 뉴딜 때 했던 것과 별 차이는 없다.


그런데 그 때는 그냥 국채 발행해서 급하게 일회성으로 사들인거고, 이번엔 아예 제도화하고, 빈농들과 계약을 맺어서 장기적으로 할 것이라는 점 정도가 차이다.


"양전이 근래에 없었는데, 이 수매를 하려면 양전으로 다시 전안을 작성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호판의 말이 옳소. 내년에는 아예 전국을 양전하면 어떻소?"


호조판서 이세좌는 왕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의 후임들이 자신을 싸늘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남은 예산을 어디에 쓸 것이냐가 문제다.


신료들은 왕이 몇 번이나 설명한, 정부가 돈을 써야만 백성들도 살 수 있는 이 상황이 지금도 신기했다.


가난에 항상 시달려서 뭐 사업을 제대로 한 것이 없던 것이 서러웠던 문무백관들이 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왕이 다음 예산 쓸 곳 고민을 하니 벌써부터 최부가 달려와서 '전하앗 방금 수차라고!' 하며 나왔다.


딱히 수차 얘기를 안 꺼냈던 경식은 최부에게 수차 못 만들고 죽어서 한이 된 귀신이라도 들러붙은 건가 싶었다.


물론 경식이 원래 살던 세계의 역사에서는 수차 못 만들고 죽어서 한이 되었을만한 사람이긴 하다.


"어...알겠소. 군기시 자리 하나 줄테니, 아예 새로운 종류의 수차를 연구하고 군기시에서 생산하는 것이 어떻겠소?

다양한 종류의 수차가 있다면 백성의 공력을 크게 덜 것이오."


최부는 좋아하며 군기시로 들어갔다.


수차 얘기를 하니 대신들도 여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포행궁은 증축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니, 올해는 석빙고를 증설하는 것을 우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옳소. 마포행궁은 낡은 건물을 먼저 철거하고 다만 터를 늘이는 것을 우선 하는게 좋겠소."


사실 지금 자연촌락이 형성된 수준인 마포로는, 앞으로 점점 늘어날 서울의 물류를 감당하기 어렵다.

용산이나 서강이 역할을 분담하고는 있으나, 그래도 작정하고 운영될 항구 도시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작정하고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터를 넉넉하게 크게 잡았다.


도시의 성벽도, 성형 요새 구조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한양 도성을 성형 요새 구조로 강화할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성벽이 산에 걸친 곳이 많은지라 되려 어려웠다.


병조 판서 성준이 물어봤다.


"작년부터 진(鎭)을 지을 때 이러한 꽃잎과 같은 모양(*1)으로 해자를 파고 치를 쌓게 명령하셨는데, 이러한 축성은 일찍이 없는 묘리인데 그 이치는 어떠한 것입니까?"


경식은 뭐 설명 잘 못하겠으면 '일단 까라면 까' 로 넘어갔던지라, 경제학을 포함해서 아주 많은 부분의 '미래 지식 치트키' 를 신하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경식도 잘 모른다. 경식은 군사사를 그렇게 냅다 파진 않았다.


성형 요새 구조에 대해서는 유튜브에서 대충 본 거랑, 어디 위키에서 본 정도, 그리고 별모양으로 예쁘게 만들어진 관광지들(고료가쿠나 바우르탕어Bourtange 같은 것) 사진을 좀 본 게 전부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핵심적인 원리는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해서 일단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듣고보니, 이 성형 요새에서의 방어전에 대해서 실전적 훈련이 한 번 필요할 거 같았다.


마침 가을이겠다. 강무(講武)를 해볼 때가 된 것 같았다.




강무는 왕이 친림하여 군사 훈련을 겸하는 수렵대회다.


전근대 기준으로는 수렵으로도 상당한 군사훈련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강무는 이 무렵, 그러니까 성종 시기부터 조선에서 거의 시행이 되지 않았다. 조선 군사력 약체화가 본격화 된 것이 바로 성종 시기부터이다.


덕분에 강무를 할 줄 아는 인원이 이미 조정에 없는 지경이었다. 국조오례의에 문서로는 남아 있는데 실제로 시행해본 사람들이 없다.


게다가 왕이 명령한 강무도 기존의 사냥이랑 전혀 달랐다.


"훈련은 실전이다! 이번 강무에서는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닌, 병사들을 동원해서 대규모의 진을 짜고 지휘하며, 성을 포위하는 훈련을 해본다!"


다녀온 군대라고는 그냥 대한 육군 병사 뿐인 박경식이 굉장히 정예한 무인인 척 외쳤다.


그런데 막상 훈련할 군대를 병조에서 계산해보니, 수가 좀 초라했다.


"함경도에서 서정을 진행하고 있는 3천, 평안도에서 국경을 지키는 2천을 빼면 8천 정도를 모을 수 있겠습니다."


'아, 맞다. 내가 보병들은 다 해산시켰지.'


조선군의 이론 상 병력 10만 중 대다수는 번상하는 정병이었다. 2개월 동안 복무하는 걸 8번에 걸친 로테이션이니, 전국에는 실제로는 13,000 정도가 복무한다.


그리고 그 정병의 대다수는 무기도 갑옷도 없는 허수아비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건설 노역부로 쓰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건설 노역은 돈 주고 노동자 동원해서 한다. 게다가 동원된 보병들에게도 10전 정도 월급을 줬더니, 생각보다 지속적으로 깨지는 돈이 많았다.


그래서 보병들은 그냥 해산해버리고, 갑사(甲士)를 중심으로 직업군인 위주로 재편성했다.


다만 모두를 갑사로 바꾸기는 좀 돈이 후달렸다. 개혁 이전에 평시에 근무하는 갑사는 서울에는 1,000명 정도, 양계에는 2,000명 정도. 하지만 갑사 총원은 15,000명에 달한다.


갑사들은 5단위로 나뉘어서 6개월 마다 로테이션 복무하기 때문이다.


기병과 보병을 겸하는 정예병인 갑사를 15,000명을 풀복무 시키면서 월급 주면 지금 조선은 파산한다.


그나마 3천은 주식회사 '번리위무사' 에서 월급 알아서 벌게 해서 그렇지, 15,000명 전부를 정부 재정으로 월급 주면 진짜로 예산 자체가 부족하다.


사실 세수를 더 짜낼 방법은 '대영제국의 지혜'를 떠올려서 이미 생각해놨지만, 지금이 전쟁 중도 아니니 그다지 급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걸' 도입하면 전국 토호들이 양전하러 다니는 관헌들을 진짜로 때려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게, 직업군인제와 지금의 번상제를 섞는 것이었다.(*2)


갑사 예비 인원 총 1만 5천 중 3,000명이 입번하던 걸, 5,000명을 길게 복무하며 급료를 받는 '장번급료갑사'로 편성한다.


나머지는 그냥 이전처럼 로테이션 돌린다.


이렇게 하면 상비군 5천 + 1만 예비대 중 입번하는 2천 정도를 합치면 7천 갑사 정도를 상비군으로 둘 수 있다.


그리고 정병 중에 기병들은 그나마 무기나 종이 갑옷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월급을 적게 주고 보병으로나마 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6천 가량은 이 정기병들을 보병으로 편성해서 굴리고 있다. 정기병 역시 5단위로 입번 시켜서, 총원은 3만 정도다.


그래서, 지금 조선의 상비군은 금군 1천 가량을 빼면 총 13,000명 정도고, 예비대까지 합치면 45,000명 정도가 되겠다.


결국 원래 역사에 비해 수는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정예도에 있어서는 몇 배나 높아졌다.


"병사란 무릇 정예함에 달렸지, 그 수에 달린 것이 아니오.

군액이 높아 백성들의 고초가 심해 그것을 덜고자 군액을 줄인 것이니, 그에 맞는 정예함을 가져야 마땅하오.

병조는 입번 중인 병사를 모두 소집하시오."




장소는 함경도 보낼 갑사들에게 짓게 시켰던, 서울 북쪽의 성형 요새(현 의정부시 의정부동 일대)로 결정되었다.


맨날 부패하고 FM 대로 안 돌아가고 돈이 없는 조선이지만, 일단은 동시대 기준 고도로 중앙집권화 되고 정비된 관료제가 있는 나라.

체계가 작동하니 정말로 20여 일 만에 전국의 병사들이 모였다.


그리고 조선스럽게, 갑옷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철갑이 부족했다. 부족한 철을 영끌해서 만든 3천 철갑은 서정군에게 입혀준 바람에 군기시 재고도 없다.


신기술로 양산되기 시작한 철은 이제야 들어오고 있어서 아무리 군기시라도 이제와서 8천명 분의 철갑을 입히는건 무리다.


다행히 미래용사 이순신이 트립한 것이라도 되는지 이상하게 정예한 갑사들도 있어, 그들은 자기 집에 잘 보관했던 철갑을 입고 와 갑사들 일부는 철갑으로 무장했다.


나머지의 좀 군기 빠진 갑사들이나, 정병들은 어쩔 수 없었다. 철이 부족한 동안에 군기시에서 만들어둔 종이갑옷이 1만개가 살짝 안되었는데, 그걸 입히고 훈련 시키기로 했다.


다행히 무기는 충분했다. 철갑 생산이 중지된 건 장구류 중 제일 철을 많이 처 먹는게 철갑이어서 그렇지, 무기는 생산량을 줄여서나마 계속 만들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소총은 여전히 부족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통박을 굴려서 분업해도 하루에 열 개 만드는 것조차 아슬아슬 했다.

미래 한국에서는 소총은 강선총(Rifle)을 말하는 것인데, 이 소총은 강선도 없는 그냥 개머리판 달린 조총 수준인데도 그랬다.

그리고 서정군에 보내는 게 훨씬 우선이라 이 훈련할 병사들에게 줄 재고는 거의 없었다.


거기다가 이번에 명에서 궁각을 들여오는 것도 실패해서, 활 생산도 멈춰버렸다.


하지만 원딜의 민족 조선이 원딜 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이 과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강철 활대로 석궁을 만들었다.




"준적인-!! 거발!!!"


팍! 파바바박!!


초기형 총과 활은 둘 다 원딜 무기 같아서 비슷해 보이지만, 운용 방식이 달라 과도기 동안에는 잠시 공존한 무기다.


그리고 석궁은, 총과 활의 딱 중간 쯤 되는 무기였다. 하기에 따라서는 활의 운용 방식을 따를 수도 있고, 총의 운용 방식을 따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 어중간함 때문에, 활과 달리 총이 등장하자마자 사라졌지만.


그래도 지금은 조선이 바로 그 과도기인지라, 잠시 동안에는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전하께서 만드신 소총의 개머리판을 쇠뇌에도 다니, 과연 그 적중함이 총과 같습니다. 쇠뇌로 그 사법을 익힌다면, 후에 소총이 충분해졌을 때도 어찌 소총을 다루지 못하겠습니까."


실제 총으로 하는 훈련에는 못 미쳐도, 쇠뇌도 개머리판을 단 형태로 개조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슷한 훈련이 가능하다고 경식과 병조 관헌들은 기대했다.


활대를 도가니강으로 만들어지는 스프링강급 강철로 만드니, 위력이 확실히 이전에 없던 수준으로 올라갔다.


특히 강력한 석궁은 무난하게 종이갑옷을 뚫었다.


하지만 석궁은 너무 강력하면 장전이 어렵다. 총에게 밀려난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때문에 장전할 때 편리하도록 안장을 앞에 달고, 염소발 지렛대(Goat's Foot Lever)도 지급했고, 위력은 그 이상을 넘지 않도록 활대 재질과 굵기를 표준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법의 변화였다.


조선의 현행 전술 체계에서는 야인들을 상대하기 위한 산개 대형이 주요 진법 이었다.


전근대 군사사라고는 테르시오 방진이라던가 선형진 같은 것 밖에 몰랐던 경식은 평소대로의 서양중심주의 사관대로 무작정 바꾸려고 했다.


그러다가 무관들에게서 반대가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산과 숲이 많고 평지가 적습니다. 또한 야인이 침입해오는 곳 역시 그러할진대, 이런 진을 짜는 것은 어렵습니다."


경식은 군알못이다. 전근대 전투는 주로 전략 게임으로만 배웠다.


무관들의 반대를 들으니 좀 자신감이 꺾여서 취소할까 했다가, 지금 산개 대형의 제일 치명적인 단점을 생각하자 반론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러나 진이 조밀하지 않고 흩어져 있으면 병사들이 각기 임기응변으로 싸울 뿐 서로를 도울 수 없는 법이다. 우리나라의 병졸은 그렇게 정예하게 싸울 수 있는가?"


'우리 군대 다 빠졌잖아' 라는 반박할 수 없는 팩트에 무관들도 경식의 밀집 진법의 필요성이 있음을 동의했다.


대신 신호를 추가하여, 산개 대형과 밀집 대형을 바꿀 수 있게 훈련하기로 하였다.


경식이 또 추가하려고 한 것은, 강력한 사격 통제와 진을 유지하도록 규율을 강하게 잡는 것이었다.


조선사를 인터넷 밈 수준으로 배운 경식은 어디선가 조선군이 병자호란 때 사격통제를 못하고 병사들이 각개사격을 했다가 졌다고 들은 것 같았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조선군이 수급을 기준으로 포상을 하는 냉병기 시절의 상벌제를 유지해서 그렇다고 들었던 것 같고.


그래서, 밀집대형일 때는 각개사격을 막고 일제사격을 중심으로 한 전술과, 수급보다는 진 유지와 명령 수행에 따른 상벌제로 바꾸려고 하였다.


"명령 없이 사격하는 것에 대한 벌과, 진을 흐트러뜨리고 함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벌을 높히고, 수급에 대한 상은 줄이는 것으로 군율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경식의 무식함이 드러났다.


"명에 따르지 않고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병졸은 참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더 엄히 처벌하겠습니까?"


"뭣?"


그제야 조선군의 현행 군율을 읽어보았다.


정말이었다. 조선의 군법은 상상을 초월하게 엄격했다.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주장이 명령하는 것에만 따르는 것이 군법이고, 그걸 어기면 참형이었다.


그 명령 체계는 반드시 깃발과 북과 꽹가리여야 했고, 장수를 포함해서 누군가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듣고 명령 체계에 따른 명을 듣지 않으면 그것도 참형이었다.


아주 많은 조항이 있었는데, 전부 다 '참한다' 로 끝났다.(*3)


전근대 군대는 진형이 흩어지면 몰살 당하기 십상이라서 상상을 초월하게 엄격하였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미래인으로서 처벌을 경감하고 싶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줄여야 할지 생각해보진 않았다.


그리고 경식이 원하는 선형진이나 테르시오도, 따지고 보면 이런 엄격한 군율이 있어서 대포가 날아다니는 전장에서도 진을 유지할 수 있던 것 아니겠는가.


이건 경식도 어쩔 수 없었다. 군령을 바꾸는 것은 보류하기로 했다.


병사들은 사격 통제에 대한 군령도 다시 하달 받았고, 일제 사격 진형과 각개 전투 산개 진형을 전환하는 훈련도 다시 받았다.


각개 전투의 산개 진형을 위주로 훈련 받은 정예병들이다보니, 단순한 일제 사격 밀집 진형은 되려 빠르게 적응했다.


"그럼, 이 정도면 병사들에게 무기와 갑옷도 지급되었고, 훈련과 분수(*分數, 조선시대에는 군편제를 말함.)도 거의 마무리 단계인가?"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공성 강무의 절목도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하라. 수성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다리를 올리고, 공성군은 진영을 성 근처로 옮겨라!"


미래 용사의 치트라기에는 비슷한 훈련이 전세계에 항상 있긴 했지만, 조선에서는 명맥이 끊긴, 모의 실전 전투 훈련의 공성전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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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지금이야 오망성, 육망성으로 불리는 서양에서 별을 나타낸 문양이 별을 뜻한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전 동아시아에서는 별 모양을 그냥 원이나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성형 요새를 모양을 보고 '별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서양적인 관념이고, 이전 시대의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다른 것을 연상할만 하지요. 하필 꽃잎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원래 역사에서 미국의 시티은행이 상하이에 최초 진출 했을 때 상하이인들이 '화기은행(花旗银行)' 이라고 부른 것을 따온 것입니다. 시티은행의 앞에 항상 성조기가 걸려 있었는데, 성조기의 별 모양을 보고 중국인들은 꽃모양이라고 생각해서 화기(花旗)라고 불렀고 그걸 따서 시티은행의 중국 명칭도 화기은행이 되었습니다.


*2 : 이런 병농일치 부역병제와 모병제의 혼합적 조직은 실제 역사의 조선이 후기에 채택한 구조입니다. 조선 후기 중앙군인 오군영이 이렇게 운영되었지요. '장번' 역시 조선에서 실제로 직업군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오군영도 전체가 이런 구조는 아니었고, 훈련도감은 대부분 장기번상하는 장번병이었고, 어영청과 금위영은 번상하는 병사 중심이었고, 총융청과 수어청은 지방군 중심이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후기 조선군은 20,000~25,000명 정도의 상비군을 운용했지요. 작 중 조선은 재정적으로 훨씬 나아진 상태인데도 되려 조선 후기 상비군보다 군인의 수가 적은 셈인데, 사실 박경식이 군인 월급을 원역사 조선 후기 군대보다 훨씬 높게 잡아서 주고 있으며, 몇몇 구멍을 생각 못해서 돈이 과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몇번 언급했으나, 원역사 조선 후기 훈련도감군은 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해서 스스로 급료를 벌어야 했을 정도로 생계가 열악했습니다. 공식 월급은 쌀 6말~9말 정도였죠.


*3 : 작 중에서 대략적으로 설명하는 조선군 당시의 전술과 군율은 세종 말기에 만들어진 계축진설(癸丑陣說)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름 자체는 그냥 진설이지만 구분을 위해 만들어진 년도를 따서 현대에는 계축진설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수송대의 경비에서부터 야간 취사, 행군, 숙영, 정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전부 갖춰친 당대의 필드 메뉴얼 같은 책입니다. 작 중 묘사대로, 여진족이 황제의 칙서를 가져와도 듣지 말고, 장수가 목소리로 명령해도 듣지 않게 하고, 규율 위반을 죄다 사형으로 처리하는 극히 엄격한 명령체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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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7

  • 작성자
    Lv.24 위스덤
    작성일
    24.06.07 20:23
    No. 31

    여기서 군재(?)까지 보여주면 진짜 신하들이 전부 다 해줘 할거 같은데요 ㅋㅋ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13 Wladysla..
    작성일
    24.06.07 20:38
    No. 32

    전하 지금 개ㅊ.... 수차라고!

    찬성: 13 | 반대: 0

  • 작성자
    Lv.34 UltronMk..
    작성일
    24.06.07 21:03
    No. 33

    이상하게 정예한 갑사... 일본에서 그린 임진왜란 그림에서 쌍검 들고 즐기는 자의 얼굴을 한 인물이 떠오르니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28 운케이스
    작성일
    24.06.07 21:12
    No. 34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4.06.07 21:16
    No. 35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無雙狂人
    작성일
    24.06.08 00:59
    No. 36

    재밌게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한편만Tn
    작성일
    24.06.08 01:15
    No. 37

    인공이 죽기전에 성형 요새만 제대로 공구리 쳐 놓으면 경제는 몰라도 임란은 무난하게 넘기겠군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93 cavin
    작성일
    24.06.08 10:35
    No. 38

    고구려 요동지역 성엔 치 라는게 있었다는데 머 조선선 다 잊어버렸겠쥬
    보단 스프링강끕 강철!!!! 이거 어마어마한 거 같은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지나95
    작성일
    24.06.08 11:41
    No. 39

    (조선을 본다): 부패하고 FM은 장식... 이것도 나라냐?
    (동시대 다른 나라들을 본다): 아!! 조선 정도면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관료제국가였구나!!

    찬성: 18 | 반대: 0

  • 작성자
    Lv.25 OttoMode..
    작성일
    24.06.08 15:49
    No. 40

    각주 숫자가 다릅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은색의왕
    작성일
    24.06.08 16:35
    No. 41

    세어나간다 > 새(어) 나간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75 뻔쏘
    작성일
    24.06.09 03:04
    No. 42

    철로만든 석궁까지. 2년째 이런데 얼마나 강해지려고? 이러다 폭주해서 명나라 대가리 박살내러 가겠다. 아무튼 주인공 의회제 전환해서 놀고 먹으려고 열심히 일하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8 li******
    작성일
    24.06.10 17:59
    No. 43

    연참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g4******..
    작성일
    24.06.11 11:13
    No. 44

    동양쇠뇌는 서양의 쇠뇌와 달리 중국 춘추시대에 이중레버 방아틀 개발해서, 전장이 큰 활대를 써 강한 힘을 걸 수 있고,
    큰 힘을 버티니 당기는 거리도 애기 팔뚝 길이만한 서양 석궁보다 훨씬 긴데, 거기에 스프링강 활대와 개머리판을 도입했으니 아주 강력할듯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g4******..
    작성일
    24.06.11 11:15
    No. 45

    앉아서 활대에 두 발을 걸고 두 손으로 활줄을 잡아 허리와 다리를 펴며 방아틀에 장전했는데 이 방식으로 안 될만큼 강력해서 염소지렛대를 도입한 걸까요 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mo******..
    작성일
    24.06.14 12:21
    No. 46

    참고로 선물거래 부분에 나오는 저 도지마라는 곳은 지금 일본 여행 한창 가보시는 분들은 익숙하실 오사카의 "우메다"입니다. 오사카역도 있는 곳이라서 굉장히 붐비는 곳이죠. 아직도 이곳에는 쌀시장을 기리는 쌀 모양의 조각상도 세워져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4.06.23 22:25
    No.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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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0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78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7 494 22쪽
»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6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38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3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5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7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3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2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2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0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2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1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1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69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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