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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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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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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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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
글자
22쪽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DUMMY

조선 동북쪽 끝자락 두만강에 붙은 기회의 땅 아오지.


기회가 아니라 (노동)교화의 땅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 조선에선 기회의 땅이다. 미래에도 조선 아니냐는 말은 하지 말자.


이곳에서 나는 검은 보석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석탄 말고, 초피 이야기다.


그리고 그 아오지가 보이는 두만강 이북의 수령님 윤필상은 속이 석탄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두만강 유역의 초피 무역 시장은,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과점 시장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번리위무사가 법적으로는 두만강 이북의 초피 포함 모피랑 인삼 무역을 독점한다.


두만강 이북에서 인삼을 캐는 것이나 사냥하는 것 자체는, 위무사에 신고만 하면 자유다.


하지만 그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두만강 이남으로 내려가기 전에 위무사에 반드시 팔아야하고, 그 물건은 위무사가 새 4진의 경시(주로 염포진)에 내놓아서 외지 사람들이 사간다.


하지만 위무사가 그걸 사들일 때 값을 보통 후려쳐야지, 초피를 5전에 사들이고선 팔 때는 50전 씩 부르니 다들 암시장으로 거래하려고 했다.


여기에, 오진 사람들에게도 민회를 구성 시키고 새 4진 경시에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해주는 바람에, 위무사는 실질적으로 독점이 불가해졌다.


오진 사람들에게서, 공납 때는 정말정말 귀했던 초피가 어디서 막 솟아났는지, 경시에 오진 민회 사람들이 다량의 초피를 내놓았다.


단속? 당연히 하고 있다.


"이 초피요? 함경도에서 잡은 겁니다. 함경도에서 잡은 건 우리가 경시에 내놓아도 되지 않습니까?"


단속을 해야할 갑사가 오진 이임에게 뭘 받더니


"으음! 털의 모양새를 보니 확실히 함경도에서 잡은 것이렸다."


이런다.


대체 어떻게 털만 보고서 함경도 담비인지 시베리아 담비인지 알아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더 철저하게 단속 시키려고 엄포를 놓아도 마찬가지다.


"근래 함경도는 초피가 잘 나지 않는데 어디서 저리 많은 초피가 나서 경시에 내놓았단 말이냐? 두만강을 넘어와서 사냥하고서 뻔뻔하게 함경도 것이라고 하는 놈들을 철저히 잡아라."


그리고 갑사들이 돌아와서는 이런다.


"딸꾹! 어...사냥하는 거 같은 친구들한테 물어봤는데...딸꾹! 두만강 남쪽에서 잡은게...딸꾹! 맞답니다."


"고기 누린내가 나는구나."


"딸꾹! 요새 사냥만 하고 다니니 고기를 많이 먹어서...딸꾹!"


"술 냄새도 나고."


"그윽, 식초입니다."


"식초를 왜 마셔?!"


함경도 출신 갑사들은 전투에는 정예해도 다른 것은 정예하지 않았다.


갑사들은 함경도민들이랑 다 동향 사람들이니, 함경도민들이랑 같이 짜고 복속하지 않은 여진족들을 털고 다닐 지언정 제대로 단속을 하는 일이 없었다.


윤필상은 왕에게 상언해서 갑사들에게도 상피제를 도입해서 함경도 출신은 함경도에서 복무 못하게 해야한다고 할까 고민했다. 조선의 신료들의 마음 속에도 근대가 자라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국가가 강력한 행정력을 투사할 수 있게 해주는 엄정한 군대는 조선에는 아직 먼 미래 기술이다.


차라리 이 갑사들보다 여진족들이 쓸만했다. 여진족을 토관으로 삼아서 해적...아니 단속을 시키니, 강이나 바다에서 밀매하는 놈들은 잘 잡았다.


물론 더 강하게 나가려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저 바로 밑의 길주 화매소의 대간 출신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도원수 대감...혹시 야인들을 부려서 조선 백성들을 '갈취' 하신 겁니까?"


대간 출신들이 따질 말이 벌써부터 귀에 선했다.


그게 지금 임금 귀에 들어가면 파평 윤씨 가문은 그대로 끝이다.


윤필상을 돌게 만드는 것은 신나 있는 함경도민들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이 위무사 고본첩을 샀다니까. 내가 위무사 밑천을 댔는데 왜 위무사 허락을 받고 장사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외지에서 온, 말씨를 보아 서울 출신인, 상인이 단속하러 온 갑사에게 고본첩을 들이대며 따졌다.


근처 여진족들에게서 어떻게인지 얻어 온 초피들을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다가, 함경도 출신이 아닐 때만 갑자기 정예하게 단속하는 갑사들에게 걸렸다.


경식이 도입한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제도이다.


주주들이 경영에 간섭하고 중대사항을 의결할 수는 있으나, 경영을 직접하지는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위무사는 조정 각사, 특히 내수사랑 군기시가 지분을 상당히 가졌고, 의결권을 최대 소유자가 독식하게 정관을 만들어놔서 경영권은 실질적으로 조정 손아귀에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 그런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익숙할 리가 없다. 상인들끼리 그 정도 구조가 시도되려면 원래 역사 기준으로도 조선 후기는 되야 한다.


고본첩을 사서 밑천을 댔으면, 함께 장사하는 처지지 무슨 놈의 '여긴 위무사 관할이고, 님은 위무사가 나중에 돈 벌면 그거 밑천 댄 만큼 받기만 하면 됩니다' 라는 말인가.


함경도민의 평균 지능을 가진 갑사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못 알아들어서 일단 윤필상 수령님에게 데려갔다.


윤필상은 의외로 왕이 만든 고본계의 이치를 잘 이해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상인들에게 '자본'을 대서 소유권만 가지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짓...그러니까 장삿속 밝은 양반들이 이 무렵에 이미 많이 하는 그걸 자주 해봤으니까.


본인이 경영 담당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해봤을 뿐.


그 진상 장사꾼도 그렇게 설명하니 대충 알아듣고 물러났다. 어째선지 '오오! 왠지 양반이 된 기분!' 하면서 물러나는게 뭔가 이해를 잘못 한 거 같긴 한데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 상황에서, 함경도에 초피를 사러 온 외지 상인들의 선택은 셋이 된다.


1. 정직하게 위무사가 파는 합법적이고 두만강 이북의 것이 확실한 초피 사기.(비쌈)

2. 암시장에서 사기.(해적인지 단속인지 당할 위험성 있음)

3. 수상할 정도로 품질이 좋지만 아무튼 두만강 남쪽에서 잡은 오진 민회 사람들이 내놓는 초피 사기.(쌈)


볼 것도 없다.


이런 과점 시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담합 시도다. 윤필상은 오진 주민들과 타협을 해야했다.


윤필상이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 비유라도 꺼냈을 것이다. 대충 비슷한 얘기니까.


"서울에서 겨울을 맞았을 때 비로소 초피의 값이 오르니, 그 때를 노려 초피를 파는 것이 제일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다네.

자네들도 나라에서 가격의 방을 붙이는 걸 볼 수 있을 터. 지금 우리 진의 초피 값이 전국에서 제일 낮네. 그리고 상인들은 그걸 서울에 팔아서 모리를 취하지.

초피를 닥치는대로 팔지 말고, 초피를 모아서 파는 것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야. 잠시만 초피를 팔지 않으면 안되겠는가?"


하지만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에는 중대한 반론이 있다.


마시멜로를 참고 두 개를 받아낸 아이들과, 참지 못한 애들의 가정을 비교해보니, 참지 못한 애들의 집안이 더 가난했다는 것이다.


부잣집 아이들은 부모가 나중에라도 마시멜로를 하나 더 사주는 경험을 겪어서, 기다리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그럴 기회를 얻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함경도민들, 특히 오진 주민들은 가난한 쪽이었다.


'함경도민은 그런거 몰라. 서울에 겨울 왔을 때 함경도민들은 이미 얼어 죽고 있어. 함경도민은 눈 앞의 목면 한 필이 더 소중해.'


윤필상은 돌 것 같았다.


사실 오진 사람들이 몰래몰래 팔아봤자, 그 물량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다.


수를 세어 본다면, 지금 위무사가 야인들에게서 뜯어낸 초피 재고가 훨씬 더 많다.


군대를 동원하고 지배하는 쪽이랑, 보따리상이랑 그 양에서 비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명백하게 오진 주민들이 파는 초피의 양은 공급부족을 해결 못하고 있다. 서울의 초피 가격은 작년보다도 폭등했다.


염포진에서 수로로 닿는 곳 중에 화매소가 설치된 도시들은 길주, 함흥부, 강릉부, 경주부 넷.


이 도시들에서의 초피 가격은 사진 지역과 얼마 차이가 안 나고 있었다.


경식이 화매소 도입 첫 년에는 화매소에서는 미곡가만 집계했지만, 둘째 해 여름에는 공납을 혁파하면서 공납으로 받던 물품 300여 개도 전국 화매소에서 경매를 시작하고 가격 집계도 진행했다.(* 27화 참조)


덕분에 화매소가 설치된 지역 중심으로 조선 전국의 물가가 공시되고, 전국 물가 구조를 모두가 알 수 있게 되었다.


가격공시표에는 평양, 서울의 초피 값이 작년보다도 더 올라 있는 것이 드러나 있다.


남도에서는 사진에서 물길이 금방 닿는 경주까지는 값이 낮고, 진주에서부터는 값이 올라 있다.


염포진에 집하되어 전국으로 팔려가는 초피가, 조선 최대 시장인 서울이나 평양으로 가려면 태백산맥을 넘던가 한반도를 통채로 빙 돌아가던지 해야한다.


가격공시제로 인해 전국의 시장 정보가 원래 역사보다 훨씬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문제로 조선 전체 시장은 아직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최소 철도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나마 미곡이 제일 잘 연결된 편으로, 미곡가는 전국적으로 가격차가 2배 이내로 좁혀진 상태다.


해남의 정귀영의 사례처럼 지주들까지 끼어들어 미곡을 거래하는지라 자본이 제일 많이 투자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막 전국의 가격이 공시된 곡물 외 잡물들은 그럴 투자를 할 사람도 부족했고,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다면 역시 직접 초피를 서울과 평양에 팔게 하는 것이 제일 큰 이문을 남길 것인데...'


문제는 교통과 통신기술의 한계다.


이 시대는 경제 규모가 작다보니, 배나 보부상단이 드나드는 것에 따라 도시 물가가 휙휙 오르내린다.


또, 가격공시표도 실시간이 아니다.


한 달이 끝나면 가격 집계가 끝난 후에 돌리는데, 조선 북쪽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사진은 그걸 받는 속도조차 느리다.


이미 12월인데, 윤필상이 보는 최신 공시표는 10월 것이다.


위무사에서 모은 초피를 지금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가도, 서울에 도착하면 "지금 초피가 대폭락이야...휴." 란 대사로 맞아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무사가 지금 가진 초피 자체가 상당히 많다. 이 초피를 팔다가 중간부터 더 살 사람이 없어지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1)


딜레마에 빠진 윤필상에게, 두만병마사 황형이 나섰다.


"제가 의주목에 부임했을 때 보니, 중국 역시 요새 초피로 사치하는 풍조가 돌아 값을 높게 쳐줍니다.

우리나라에 팔 초피는 그대로 오진 주민들이 팔게 두고, 위무사는 중국에 초피를 팔아 기물을 받아와 우리나라에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필상이랑 마찬가지로 유능한데 돈 밝히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다운 주장이었다.


황형이 위무사로 차출된 이유도 이것이었다.


황형은 작년에 의주 목사로 일할 때 일은 안 하고 중국이랑 무역만 열심히 해서, 의주 화매소 관헌(역시 대간 출신들이다)들이 왕에게 상소까지 했다.


경식은 무역 자체는 별 상관이 없고, 되려 장려할 일로 생각했지만, 아직 관세 제도도 도입을 안 했는데 무역으로 해처먹고 있는 것이 괘씸했던지라 자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대신들이 "황형은 무재가 뛰어나 성종조 때의 서정에서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능력이 아까우니 다시 서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라는 것 아닌가.


'와, 돈 밝히고 무역 좋아하는데 군재도 뛰어나다니 진짜 위무사 최적화 인재잖아?'


황형은 원래 역사의 조선에서는 없었던 그의 천직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서 밀무역해서 치부하는게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윤필상이랑 황형 둘은 그걸 새삼 따질 인물들이 아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은 대책이네만, 남쪽으로 내려가 관서로 갔다가 다시 의주로 올라가면 늦네. 겨울이 끝날 것이야.

그냥 올해는 넘기고, 서울과 평양에 위무사의 창고를 지어서 초피를 보관하고 내년 겨울에 팔게 하는 것이 좋겠네."


"아니오,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서쪽으로 곧장 가면 요동이 있는데 무얼 돌아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윤필상은 잠시 뇌정지가 왔다.


"서쪽에는 건주위 야인들이 있는데 어찌 그리로 간단 말인가?"


"제게 날랜 기(병)갑사 1천과, 지금 있는 소총을 전부 주신다면 바로 요동으로 가 초피와 인삼을 무역하고 오겠습니다."


윤필상은 이 미친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다.


제대로 된 매출이 한 푼도 없는 상황이라 절실하긴 하다.


또 중국과의 무역은 윤필상도 해봐서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잘 안다.


거기에 황형이 윤필상의 흔들리는 고민을 끝낼 결정타를 한 번 더 넣었다.


"지금 야인들은 겉으로는 복속한듯 하나, 지금 위무사가 내리고 백성들이 무역하는 쌀과 면포와 소금으로는 그들의 탐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입조한 야인들은 필시 서울로 입조하여 사여를 받으려 할텐데, 그때 분명 중국의 비단을 요구할 것입니다.

성종조 때 노략질도, 조정에서 그것이 부담스러워 입조를 막았더니, 그들이 짐승과 같은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에서 초피를 무역하여 비단을 우리나라에 팔면, 조정은 그 비단으로 야인들에게 사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의주목으로 있을 때 일찍히 요동도사와 (밀무역하느라)연을 맺어둔 일이 있습니다.

제가 간다면 분명 기쁘게 맞아줄 것입니다."


황형과 윤필상은 돈을 밝히는 면도 닮았고, 여진을 패봤다는 점도 닮았고, 자기들이 돈 밝히는만큼 남들도 돈 밝힌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점에서도 닮은 이들이었다.


무력만으로는 여진을 복속 시킬 수 없다는 것에서 둘의 판단도 일치했다.


두 사람은 꼭 사욕만을 챙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야인들을 영구히 복속 시키기 위한 대국적인 삼각무역을 구상해 낸 것이다.


"알겠네, 1천 기를 이끌고 가되, 되도록이면 건주위와 싸움은 피하고, 돌아올 때는 급하지 않으니 남쪽으로 오게."


황형이 젊어서 그런지 과격하긴해도, 성종 때의 정벌 때도 공을 세웠고 의주목을 지낸 것도 무재가 있어서 그런 것이며, 여진을 적당히 달래는 지혜도, 그리고 재부를 쌓는 재주도 함께 지녔다.


윤필상은 황형을 믿어보기로 했다.


허가를 받은 황형은 갑사 1천기에, 그 외 현지의 함경도민이나 알타리 야인 보조병 등을 합친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직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동도사 장수(張岫)는 웬 여진족 같은 놈들이 동쪽에서 처들어왔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여진족이면 여진족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여진족 같은 놈들이라는 건 무슨 말이냐?"


"생긴 모양새는 여진족 같은데, 몇몇이 머리는 상투를 틀고 있고 조선말을 씁니다."


고생해서 남만주를 가로지르고 도착한 황형이 들었으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만주의 겨울은 혹독하다.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도 2주 가량이 걸리는 길인데, 식량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현지 조달'이 필요했다.


그러나 겨울에 자연에서 뭘 채취해서 구할 순 없으니, 가는 길목에 있던 여진족들에게 '협조'를 좀 구했다.


황형의 부대는 전근대 군대가 현지에서 협조를 받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물자를 조달하며 맹렬하게 서진했다.


그 과정에서 여진족들의 따뜻한 모피옷을 좀 얻어 입느라 비주얼이 여진족처럼 된 것 뿐이다. 사실 실제로 일부는 여진족이라서 더 여진족 같아 보였다.


"나는 조선의 병마사 황형인데, 건주여진이 노략해 간 명의 백성을 찾아 쇄환하기 위해 왔소!"


그것이 며칠이 걸려서야 장수의 귀에 들어가서 겨우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둘이 서로 밀무역 할 때 제일 많이 대던 핑계가 백성을 쇄환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는 없었다.


아예 없는 걸 뻥을 칠 순 없는지라, 여진에 잡혀갔던 중국인 포로들이 실제로 몇십 명 끼어 있긴 했다. 황형이 오다가 주웠다.


나머지 조선인(과 야인) 수천 명이 초피랑 인삼을 바리바리 싸 들고서 들어온 것은, 조선이, 아니, 동아시아 관헌들이 으레 그렇듯 일을 할 때 비용을 현지 조달하기 위해 하는 당연한 관습이니 어쩔 수 없다.


"아니, 황 공께서 의주목으로 지내는 동안 많은 연(밀무역)을 맺었는데, 갑자기 체직되어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다시 오시다니! 대체 어떻게 동쪽에서 오셨단 말이오?"


"나라에서 다시 저를 동북의 변장(邊將)으로 불러 야인들을 위무하도록 하여, 번리들을 침탈하는 올적합을 토벌하였습니다. 그 때 대국의 백성들을 찾았기에 하루 빨리 쇄환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인삼이랑 초피를 야인들에게서 많이 뜯어서 무역하러 왔다는 동아시아식 표현법을 장수는 아주 잘 이해했다.


"과연, 황 공이 의주목으로 있을 때부터 그대가 용맹함은 내가 누누히 들었소. 아조의 제일번국인 조선에 황 공과 같은 장수가 있는 것은 종사의 흥복이오."


꼭 황형이 선물로 가져온 초피 때문만은 아니고, 나름대로 진심과 인정을 담아 칭송했다.


황형의 군대는 중국산 비단을 바리바리 싸 들고 의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의주목으로 있을 시절 황형이 뒷배를 봐줬던 상인들에게 팔았다.


'탐관오리' 황형을 의주목에서 짜르고 "해치웠나?!" 했던 의주 화매소 관헌들이 "장군께서 왜 거기서 나오시오?"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건주 여진이 겨울이면 언제나 그랬듯 또 평안도를 노략질하러 왔기 때문이다. 남쪽은 슬슬 얼음이 풀리는데 평안도는 아직도 압록강이 단단히 얼어있어서 순식간에 건너왔다.


사실 연례 행사라서 굳이 더 핑계를 댈 것도 없지만, 이번 공격의 이유는 황형과 관계가 있었다.


황형이 건주여진의 영역을 주파할 때, 삼위육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온 동청례를 함께 데리고 갔다.


지금 이 모든 일의 원흉 중 하나가 동청례요, 야인들과 혈연이 있는 동청례가 위무사로 안 왔을 리가 없다.


동청례는 일가 친척 중에 건주위에 복속한 추장들이 꽤 있었다. 동청례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을 타일러서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동청례가 '황 장군 하나면 너희들이 따르는 건주 몰살 가능'이라며 설득했더니 우르르 조선으로 줄을 갈아탔다.


동청례랑 혈연이 없는 부족들이 이 황 장군이라는 조선인의 군대에 어떻게 '협조'해야했는지 보고 쫄아서 그런 건 아니고, 혈육의 정을 느껴서 그렇다.


그리고 새로운 조선의 번리가 된 야인들은 만포 건너편(현대의 지안시, 옛 고구려 국내성)으로 보냈다.


여기까진 원래 조정에서 논의한 대책이다.(*2)


그것은 건주위의 심기를 건드렸다. 거기가 건주위가 조선 약탈을 갈 때 다니는 주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압록강 건너의 번리로 삼는다는 것은 건주를 견제하겠다는 말 그 자체다.


조정에서 저런 대책이 논의 된 이유 자체가 그 목적이 맞기도 하다.


하지만 침략을 해오는 걸 막으려고 군대를 전진배치를 했더니 도발이라고 우기며 침략해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한 핑계인듯 했다.


당황한 의주목 이영분(李永蕡)은 희한하게 타이밍 좋게 (어째선지 중국 비단을 잔뜩 든)군대를 끌고 나타난 황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번에 돌아가는 길에서 평양을 들려 놀 수 있을 줄 알았던 병사들은 싫어했지만, 황형도 나름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선비다.


자기가 항상 줘패던 여진 놈들이 감히 자기 (전)나와바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평소대로의 노략질이라면 아마 수백 정도가 왔을 터.


황형은 자진해서 가겠다는 병사를 300명 남짓 데리고 건주여진을 요격하러 떠났다.


황형이 데려가는 병력의 수를 보고, 이영분은 자기가 아쉬워서 손 벌리는 주제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병사가 피로하다고 하나, 1천 철기를 데려오고서 그 중 이것만 이끌고 가는 것이 과연 가하오? 이길 수 있는 것이오?"


"글쎄...예상과 달리 수천의 여진이 온다면 조금 힘들지도 모르오."


"진다는 말이오?"


황형은 짧게,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승리 선언을 했다.


"이기오."


---


<이하 미주>


*1 : 원래 역사에서 유럽의 해외정복 주식회사들은, 막상 현지에서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더니 돌아온 고국의 시장에서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덤핑 판매를 해야하는 일이 무척 흔했습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포르투갈의 배는 평소 시세의 5분의 1 수준으로 후추를 팔아야 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1601년 처음 인도네시아로 보낸 배는 향신료 가격 폭락 때문에 향신료 현물을 주주들에게 배당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17세기 쯤에는 동인도 회사들은 아시아의 물산을 무작정 유럽으로 가져오기보다는, 아시아 내에서 중계무역을 해서 충분히 이윤을 모으고, 이득이 나는 범위에서 아시아의 물산을 유럽으로 보내며 자본을 키워가며 성장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작 중 황형과 윤필상의 조선-여진-중국 삼각무역 계획은, 그들은 위무사 경영 첫 해에 벌써 1601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를 뛰어넘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 25화 <대초피시대>에서 두만강 건너편 여진들의 준동을 언급하며 위무사를 설치하게 되는 동기로 작용했습니다만, 원래 역사의 연산군 2년에서도, 작 중 조선에서도 건주위 여진 역시 조선을 침탈하고 공격한 바 있습니다. 이에 원역사의 조선에서는 동청례를 삼위경차관으로서 파견하여 타이르거나 토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건주삼위 부족들 중 일부가 만포 건너편에 조선을 위한 번리를 형성하고 싶어한 것도 실제 역사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조선이 거부하여 무산되었습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결국 타이르는 것도 큰 효과를 얻지 못했고, 원정을 해내지도 못했습니다. 작 중 동청례는 번리위무사의 설치 때문에 두만강 유역의 번리에 대한 일도 하고, 건주삼위에 대한 일도 동시에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 중 조선은 그냥 무력으로 순조롭게 협조(?)를 얻어냈습니다.

<한성주. (2012). 조선 연산군대 童淸禮의 建州三衛 파견에 대하여. 만주연구, 14,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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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신항로 +47 24.06.26 6,332 389 25쪽
46 수완가 +58 24.06.25 7,359 379 22쪽
45 아이신기오로 +98 24.06.24 8,190 464 24쪽
44 자본과 기술 +72 24.06.21 9,135 480 21쪽
43 인클로저 +79 24.06.20 8,636 459 23쪽
42 봉 잡았다 3 +67 24.06.19 9,115 485 24쪽
41 봉 잡았다 2 +79 24.06.18 9,247 455 22쪽
40 봉 잡았다 +90 24.06.17 9,844 493 23쪽
39 탈상 +87 24.06.15 10,255 474 21쪽
»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1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89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0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77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6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5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36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29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1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2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2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1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69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67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89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59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0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68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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