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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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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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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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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자본과 기술

DUMMY

나라가 흉년이 들던지 말던지, 서울은 향락과 사치에 빠져 있었다.


경식 1년차에 지폐가 막 도입됐을 때는 디플레이션에 투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고, 2년차는 서울은 지폐가 좀 쓰이기 시작했으나 서울에서조차도 쌀과 병용됐고, 3년차인 이제야 전국으로 지폐 사용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 지방 화매소도 경매를 시작하면서, 서울에 몰려 있는 돈을 위해 지방의 많은 물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되려 공납으로 공짜로 물건을 받던 시기보다, 일부 물자들은 더 많이 서울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사실 경식이 국가 재정을 계속 들여다보느라 천만전, 백만전 단위로 자꾸 값을 따지다보니,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서 급료를 너무 펑펑주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1전을 5만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경식은 월급 10전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조선은 아직도 21세기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경제랑 그다지 차이가 없다.


조선 백성 중 거의 20% 가량은 1인당 하루에 1문도 안되는 돈, 그러니까 한 달 소득이 3전도 안되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서리들에게 주는 월급도 서울에서야 토색질 등 부업을 좀 해야 생활 가능한 수준이지만, 타 지역보다 기본 물가가 배는 높은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선 전체로 보면 중간은 넘는 소득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100전을 받는 갑사나 40전 받는 보병은 말할 것도 없다. 갑사를 뽑는 무과도, 보병을 뽑는 취재도 지원자가 몰려들고 있어 병조에서 시험을 더 까다롭게 보자는 상언을 할 정도였다.


경식이 과도하게 병사 정예화를 원해서 그렇지, 원래 역사처럼 대충 잡아와놓고 한 달에 쌀 6~9말 주고서 갑옷도 안 주고 병사를 시켰다면 쪽수로는 10만 대군을 진작에 만들고도 남았다.


함경도 갑사들이 돈 받은만큼 일해서 북쪽으로 쭉쭉 뻗어가고 있으니 논란이 없는거지, 사실 대신들도 왕이 월급 너무 펑펑 주는 거 아니냐고 따질 법한 상황이다.


군기시도 장인들이 상번하러 왔다가 그 월급과 서울에서의 향락을 맛보곤 다시는 지방으로 안 내려가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 갈수록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생산된 물건은 다시 지방에 팔아서 지방의 돈을 또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꼴을 보니 지방 사람들은 '와! 서울은 돈이 아주 썩어넘치는구나!' 라고 생각할 법 하다.


그래서 더욱 유랑민들이 서울로 몰려오는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서울 도성 안은 사치와 향락이 계속되고, 도성 밖에는 난민촌이 형성된 모습이 되었다.


서울 어디에는 난민촌이 형성되어 있고 어디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꼴은, 딱히 유교맨 아니어도 뭔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낄 만 했다.


이에 예문관 봉교 강덕유가 총대를 잡고 상언했다.


"지금 충청, 전라 양호 지역에서 보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나라에 사치하는 풍속이 위아래를 가리지 않아 어지럽습니다.

하물며 도성 밖에는 유랑민들이 구걸하고 있는데 도성 안에서는 민간의 잔치마다 소주를 분별없이 마시고 노비들조차 긴 소매를 입고 다니니 과연 옳겠습니까.

청컨데 사치하는 것을 엄히 징치하여 금하소서."


"음..."


봄 동안에 와소에게는 청기와도 구워서 팔라고 했고, 관요의 도자기 장인들에게는 더 비싸게 팔릴만한 백자를 만들게 경쟁 붙이고, 장원서(掌苑署)랑 상의원(尙衣院)에는 향수랑 화장품 만들어서 팔라고 명령했던, 조선 최고의 사치 조장자였던 왕은 곤란해졌다.


설마 보릿고개를 넘으니 보리 농사가 흉년일 줄은 몰았지.


"내 생각에는 단순히 사치를 막는 것보다는, 유랑민들에게 항산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네."


"근래 전하께서 양전을 하시며 전답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일부 전답을 다시 받았다고 하나, 여전히 우리나라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 가난한 나라입니다.

어찌 그들에게 항산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양전 중에 겸사겸사 행해진 토지 분배는, 사실 그렇게 전면적으로 이뤄진 일은 아니다.


원래는 1결 가지고 있었는데 갈아주던 남의 집 땅 2결을 얼떨결에 받아버려서 중소지주가 된 집은 애초에 제 집 먹을 거리가 있고 소도 가진 집이다.


대부분의 빈농은 잘해야 1가구가 인력으로 갈 수 있는 반 결 정도나 얻었고, 그나마도 빚에 시달리다가 흉년이 들자 그냥 밭을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경식은 근대적으로 강하게 보장되는 토지소유권을 만들고 싶어서 한 양전인데도, 조선인의 대부분은 조선의 미약한 토지소유권 개념을 벗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농촌에서 자꾸 도시로 유입되는 인력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내가 이미 다 생각해놓은 바가 있으니, 예문관은 물러나시오."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여름의 마포 행궁.


경식의 해답은 또 뉴딜이었다.


유랑민들에게 일자리 만들어준다고 도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을 자갈로나마 임시 포장해서 만들기도 했고, 마포 행궁 건설도 한창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물건이 지금 만들어져 시범을 보이고 있다.


조선의 기후 상 한강에 물이 좀 차 있는 여름에 딱 쓰기 좋은 물건이다.


"오오오! 돌아간다!"


"실이...실이 사람이 없이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경식은 올해부터 섬유산업에 본격 투자를 하려고 작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조선의 직물을 수입해간다는 걸 알고서 바로 싱글벙글 하며 교역 확대를 계획한 것이기도 하고.


지금 조선에 자본을 투자하거나 돈을 빌려줄 외국은 없었지만, 자본을 투자하는 법을 알고 있는 왕은 있었다.


민회를 조직하면서, 각지의 화매소를 통해서 각지 민회들과 거래 계약을 맺어서 지방의 원료를 서울로 끌어들이고, 기존 조졸들을 활용해서 운송하는 체계도 만들어놨다.


또 주요 경공업 원료들에 대해서는 거래세를 완전히 면제해서 흐름이 막히지 않게 완비해놨다.


덕분에 작년 가을부터 돗자리 원료인 왕골풀, 비단의 원료인 생사, 포의 원료인 삼, 목면의 원료인 목화솜 등이 서울 인근에 잔뜩 집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왕골풀은 경식이 안 시켰는데 왜 집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거의 다 경식이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정병영...그러니까 즉위 1년 때 만들어진 난민촌의 난민들 상당 수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떠났기 때문에 비어버린 병영 건물들을 뜯어서 공장으로 개조했다.


원래는 그냥 이걸 공장으로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유랑민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구조를 바꿀 틈이 없어서, 집으로도 쓰게 했다.


그렇게 직장과 집이 일체인 건물이 되어버렸지만 일자리 주고 집 주는데 이걸로 불만스러워하면 역적이다.


덕분에 어쩌다보니 정병영들은 유랑민들이 로테이션해서 입주하는 서울의 위성 도시들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수차왕 최부를 정조사로 중국에 보낸 것이었다.(*1)


돌아오자마자 봄에 가물어서 보리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부는 역시 자기가 조선에 남아서 수차를 보급했어야 이런 일이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역시 수차 못 만들고 죽어서 한이 된 귀신이 들린게 분명했다.


그럼 수차 만들게 해줘야지.


왕이 최부에게 시킨 임무는 원나라 때 쓰인 왕정(王禎)의 농서를 사오게 한 것이었다.


최부가 그렇게 좋아하는 수차에 대한 내용이 가득 쓰여 있으니 분명 좋아할 것이었다.


왕정농서는 경식이 조선으로 오게 된 원인인 졸업논문 작성 때 조사했던 자료 중 하나다.


중국은 왜 산업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냐는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는게 바로 이 왕정농서에 실려 있는 수력 방적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에 기술을 전수해줄 외국은 없지만, 훔쳐올 외국은 있었다. 경식은 뭘 훔쳐야 하는지 알고 있고.


최부는 귀환하고서 두어 달 동안 농서의 내용을 연구하더니 결국 수력 방적기를 만들어냈다.


돌아가는 수력방적기를 보고선 자기도 자기가 만든게 믿기지 않는지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신료들도 입이 떡 벌어져서 놀라고 있다.


경식이 보자하니 신료들이 소총을 처음 봤을 때나 군기시 분업 때보다 더 놀라는 거 같아서 좀 질투가 났다.


솔직히 경식도 신기했다. 중국은 이걸 200년 전에 만들었다고?


"이 수전대방차(水轉大紡車)가 있으면 공력을 들이지 않고 실을 만들 수 있으니, 여인들이 날마다 길쌈을 하여 베를 짜는데도 아직도 나라의 포물이 넉넉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물산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뭔가 맘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가져오라고 시키고 자기가 빨리 만들라고 해놓고서 왜?!


그야 경식에게는 이 수력 방적기...그러니까 왕정농서에 실린 이름으로는 수전대방차의 단점을 미래에서 봐서 알고 있으니까.


"삼베 실이나 비단 실은 만들 수 있겠으나, 면화 실은 만들 수 없겠군."


신하들은 이것만 해도 기존의 몇수십 배, 아니 몇백 배는 좋은데 왕이 대체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하는가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니 이 왕은 자기가 엄청나게 성과를 내놓고서 뽕에 취해 있는 신하들에게 찬물 끼얹는게 매번 반복된 패턴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경식이 지적한 점은 실제로 중국의 수력 방적기가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수전대방차는 오직 대마, 비단 같이 섬유 자체가 긴 것들만 실로 꼬아낼 수 있었다.


원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제일 일반적인 옷감이 목면이 되는데, 섬유가 짧고 엉켜있는 면화는 이 수전대방차로는 실을 짤 수 없었다.


결국 수전대방차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도태되어, 다시 사람이 돌리는 물레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면화를 실로 짤 수 있는 수력 방적기는, 영국의 산업혁명 때 아크라이트가 만들어낸다.


아크라이트도 뿅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16세기에 만들어진 독일의 작센식 물레(Saxon wheel)에 플라이어(flyer)라고 섬유를 정렬해주는 부품이 있었는데, 그걸 추가한 것 뿐이다.


여기에 영국에서 존 케이가 만들어 낸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을 더하면, 그대로 산업혁명 당시의 기술로 진입한다.


그리고 경식은 이걸 다 기억하고 있다.


한 마디로, 기술적으로는 바로 산업혁명 수준으로 뿅 만들어낼 수 있다.


'음...그래도 지금 조선 수준에서는 이걸로 만족할만한가?'


하지만 문제는 결국 사회경제구조다.


중국이 왜 산업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는가, 하는 논의에는 기술적인 문제 말고도 사회경제 구조 측면에서 접근한 주장도 있다.


중국은 농업과 상공업이 서로 수요와 공급의 평형을 맞춘 균형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농업이 발전해 잉여 농산물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도시로 가서 상공업에 종사한다.


그럼 도시의 수공업 생산물들의 공급이 증가하고, 도시민과 농민들에게 공급되며, 점점 가격이 하락한다.


반면 농민들은 수공업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게 되고, 농산물을 도시에 팔아서 삶의 질이 상승한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시가 커지면, 도시의 수공업 생산물들의 공급 과잉 상태가 되고, 반면 농산물은 공급이 부족해진다. 도시민들의 생활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도시에 남아 수공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다시 농촌으로 떠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중국은 농업과 공업이 서로 수요와 공급이 평형 상태에 이르러 발전은 정체하고 만다.(*2)


즉, 이런 일이 반복하지 않도록 농산물을 싸게 공급해줄 시장과, 반대로 공산품을 비싸게 구입해줄 시장이 필요한 것이다.


영국은 이 부분에서 달랐다.


아메리카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시장을 수로로 연결해낸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공급되는 막대한 농산물과 목화 등 원료를 런던으로 끌어들였다.


반대로 그 생산물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도에 이르는 전 세계에 팔려나가 끝없이 이익을 창출했다.




그 외에도 중요한 요소들이 몇 가지 더 있기는 한데, 일단 여기서 끊고 이런 부분들을 조선과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농산물 및 섬유의 원료를 공급해줄 곳은 오직 조선 내부 뿐이다.


그리고 완성된 포목을 사줄 시장은 조선 내부 시장이랑, 왜관으로 일본이랑 조금 무역하고 있는게 전부다.


물론 일본 개항 시키기가 잘 진행된다면 일본 시장에 더 깊게 들어갈 수 있겠지만, 아직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부분이고.


더군다나 지금 흉년으로 몰락한 빈농들이 바글바글한데, 기계화를 무턱대고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


섬유원료들은 공급이 부족해져 가격이 폭등하고, 실직자가 늘어나 조선 국내 시장의 소득은 감소하고, 포목의 공급은 급증해서 가격이 떨어져 수익이 감소하여 사업이 지속되지 못한다.


위에서 말한 평형 상태가 훨씬 빠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작아서 더 빠르다.


그래서 지금은 기계화도 마구 진행할 수는 없다.


일단 목화는 경식이 만든 작센식 물레로 실을 잣게 만들고, 비단이랑 삼베는 수전대방차로 실을 잣게하고, 베틀은 기존 베틀을 쓰게 한다.


그리고 작센식 물레와 수전대방차를 결합해서 수력방적기로 발전시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공조에서는 내가 지시한 생산계획수립이 완료되었소?"


"예, 전하. 지시하신대로 13승포, 8승 목면, 명주를 생산하면 각기 30만필, 40만필, 20만필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작년 군기시에서 갈려나가며 생산관리를 실전으로 배운 공조 관헌들은 원재료 공급량, 1인 당 생산속도, 판매 가격까지 좌라락 계산하여 최적의 값을 제대로 찾아냈다.


특히 포목의 원재료인 실의 경우, 삼베실과 비단실은 수전대방차로 짜지만, 목화실은 선대제수공업 형태로 공급받도록 생산체인을 짰다.


경식이 고안해서 군기시에서 만든 작센식 물레를, 빈민들에게 빌려주고, 목화솜을 준 다음 실로 잣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낸 실을 무게를 달아 값을 쳐주고 받아와 목면의 원료로 쓰는 것이다.


민간에는 부업거리가 생기고, 공장은 원재료를 아웃소싱하여 공급받을 수 있으니 둘 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경식이 이걸 자기는 안 건드리고 남에게 계산을 맡겼더니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이게 많은 거야, 적은 거야?'


결국 경식은 다시 공조에서 올린 자료를 손수 검토하며 확인했다.


"...2만명을 투입하는데 이것 밖에 안 나오고, 이걸로도 원재료를 다 쓴다고?"


공조 관헌들은 '이 많은 포물이 있으면 넉넉히 국용에 보탤 수 있으며 유랑민들은 항산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니 백성을 보살피는 성은이 어쩌고' 하고 칭송하려고 했는데 왕이 또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1명이 포 하나 짜는데 7일은 걸리니 1년에 50필 정도고, 2만 명이니 90~100만필 정도가 한계가 맞다.


그리고 조선에선 2만명이나 전업으로 베를 짜는 공장을 만들어본 일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조선에서 본 적 없는 초유의 대형 프로젝트다.


그리고 90만필이면 조선 백성 열 명 중 하나는 입히며, 나라가 공무역으로 쓰는 포목 양 만큼은 된다.


이거 재료 사온다고 지방에서 작년에 추수한 삼베, 목화, 생사를 쓸어왔는데 이 왕은 대체 얼마나 포목이 생산되어야 만족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작년 군기시도 철이 부족해서 고작 3천명에게 철갑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렸지...'


물론 그 뒤로 새 철 생산 기술을 알려준 덕에 작년보다는 생산이 원활해져서, 준비 중인 해동제국사에게 줄 대포나 소총이 생산되고 있다.


지금 섬유 원재료 생산도, 아직 조선 전체의 생산력을 쥐어짜는 상태는 아니다.


서울에 집하된 원재료들을 다 합쳐도 전국 섬유 원료의 10% 좀 안되는 수준이다. 농민들도 그냥 좀 남을 거 같은 재료를 떼어서 나라에 판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제 시장경제가 도입된지 3년차라, 작정하고 상품작물 재배를 시작한 지역은 극소수다.


시장경제가 더 퍼져나가고, 작정하고 플렌테이션적 재배를 퍼트린다면 섬유 원재료 공급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재위 동안에 조선의 도시화율을 20~30% 정도까지는 올릴 생각이었던 경식에게는 벌써 '조금만 섬유산업 늘리면 원재료 부족해짐' 이라는 말로 들렸다.


'겨우 2만명 짜리 공장 돌렸는데 조선 섬유원료의 10%를 쓰면 20만명만 종사해도 조선에서 가능한 원료 공급량을 다 쓴다는 것 아냐!? 원재료 양이 부족할까봐 기계화도 안 했는데!'


그래서 경식은 순식간에 영국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식민지가 필요해!'





다행히 경식이 동아시아의 재앙이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여진족과 쓰시마한테만 재앙이었을 뿐이다. 이건 세종을 포함해서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계속 그랬으니 경식이 유난히 심한 것도 아니다.


영국은 뛰어난 해양 기술 덕에 봉인을 뚫고 비져나와서 전세계에게 '문명화'를 시켜줬으나, 조선에게는 그런 해양 기술 없다.


지금 조선의 해양 기술은 쓰시마를 경유 안 하고 바로 하카타로 가는게 최고 업적인 수준이다. 조선의 항해 기술로는 류큐까지도 맘대로 못 간다.


덕분에 류큐, 대만, 홋카이도, 필리핀, 보르네오 등 많은 섬들은 경식의 마수가 뻗혀 오는 시간을 미룰 수 있었다.


대신 경식이 눈을 돌린 곳은 이미 확보한 두만강 이북의 4진이었다.


경식은 다시 제국주의 교육서 편찬 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 근대사 교과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일제 시대에 남면북양...그러니까 한반도 남부에서는 면화를 기르는 걸 장려하고 북부에서는 양을 기르는 걸 장려했댔지?'


목화는 평안도 남부까지는 어떻게든 자라니, 거기까지는 목화랑 함께 아마를 심는 것을 장려한다.


문제는 함경도와, 이번에 새로 얻은 두만강 이북 지역이다. 여기는 목화는 못 키울테니까.


여기서는 아마를 키우는 동시에 양을 유목하게 한다. 아마는 러시아에서 제일 많이 재배하는 것으로 기억하니 아마 만주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두만강 이북은 산이 많은 동네니 산에서 양을 키우면 땅을 조금이라도 덜 놀릴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입은 옷 중 양모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적다보니 경식도 조선에는 양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제사에 양고기도 올리고 양털로 펠트나 직물도 만들고 있었다.


양고기는 향신료가 없어서 더럽게 누린내가 났지만.


되려 양털로 만든 옷이 귀물로 여겨져서 신분에 따라 맘대로 못 입는 수준이니, 생산을 늘리고 사용 금제를 해체하면 꽤 돈이 될 듯 싶었다.(*3)


일본에는 역 강화도 조약을 시전하려하고 한반도에는 남면북양을 시전하려는 평등한 제국주의자 경식의 머릿 속에 만주를 가득채우는 양 목장과 아마밭이 펄쳐졌다.


마침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던 직물 공장 덕에 서울로 몰려든 빈민들은 급하게 처리해냈지만, 결국 빈농과 유랑민 문제는 1인 당 경작지의 크기가 너무 줄어서 생긴 것이다.


조선 내 전답이 없는 빈농은 지금 추정치만 해도 조선에 300만 정도는 된다. 궁극적으로는 새 경작지가 있는 만주로 인구를 보내는 것 밖에 답이 없다.


올해의 유랑민들은 보리 농사가 망하고 파종기가 지난 늦봄이 되어서야 발생해서 만주로 보낼 적기를 놓쳐버렸지만, 장기적으로는 개척민들을 계속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고보니 지금 위무사에서는 잘 하고 있으려나? 겨울도 끝나고 인삼철도 지나서 수입이 부족하다고 징징거리던데...'


---


<이하 미주>


*1 : 최부는 실제 역사에서도 연산군 3년에 질정관(質正官), 즉 글의 음운(音韻)이나 제도와 문물에 대해 묻는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습니다. 표류하여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에서 중국어와 중국의 제도를 잘 알게 되어서 적임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절사로 파견된 원래 역사와 달리 정조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 다른 것보다는 수차와 관련된 정보를 빼오라는 목적으로 파견되었다는 약간의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2 : 경식이 졸업 논문에 쓰려고 연구했던 이 이론은 마크 엘빈(Mark Elvin)이 주장한 High-level equilibrium trap 이라는 이론입니다.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송나라 이래로 중국 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맞춘 상태가 기술을 정체시켰다는 이론입니다. 중국은 막대한 경작지와 높은 수준의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인구를 보유하여 임금의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1인 당 구매력이 감소하고 기술 발전의 동인이 감소했다고 주장합니다. 작 중에서 나온 수전대방차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해서 쇠퇴한 것도 해당 이론에서 제시하는 기술 정체의 예시 중 하나입니다.


*3 : 현대인들의 심상에서는 조선의 의복 문화에서 모직물이 잘 연상되지 않으나, 양모 등을 압착해서 만든 펠트를 전(氈)이라고 썼고, 모를 사용해 직조한 직조물을 계(罽)또는 담(毯)이라고 썼습니다. 계의 경우 고위층만 쓸 수 있는 고급 옷감으로 여겨져서 자주 금지 당하는 품목이었습니다. 전의 경우 군관들이 쓰는 갓인 전립을 만드는데에 계속 사용되었지만, 계와 담은 후기에는 쇠퇴합니다. 성종 시기에 계담을 민간에서 쓰는 것을 금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니, 작 중 시점에는 아직 모직물이 존재하고 있겠지요. 경식은 돈을 뽑기 위해 또 조선의 역사의 궤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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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0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0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78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7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5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37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2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4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6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3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2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2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69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1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1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1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69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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