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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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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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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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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아니 내 10만 철기가!!!

DUMMY

예조판서 성현이 본 그것은 그렇게 군기시 관헌들이 실전으로 생산관리를 배우고, 그와 동시에 경식이 소총을 직접 개발하느라 두세 달 정도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식년시를 할 때가 다가오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데 왕이 서울에 없으니 환장할 일이 맞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이, 왕이 시킨대로 이것저것 했더니 철갑이 막 튀어나오고, 왕이 직접 개발하고 있는 소총이라는 새 총통도 이제는 뒤가 안 터지고 멋지게 발사되니, 병조 관헌들에게는 국뽕이 치사량 수준으로 주입되었다.


"전하의 신이한 묘리로 기계가 끝없이 생산되니 종사에 그지 없는 흥복이옵니다!"


"일찍이 우리나라가 고구려였을 시절에는 그 10만 철기가 요동을 제패하고 수, 당을 꺾었는데, 근래는 우리나라가 천하에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가 되어 1만의 병사도 부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하께서 하교하신 비의가 있다면 우리도 고구려처럼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벌써 가노들이 짚신 삼는 것도 전하께서 내리신 분업의 비의를 따르도록 시키고 있나이다!"


"주상 전하 천세!!"


"아니, 좀 진정 하시오들."


병조 관헌들이 맛이 가서 자기를 칭송하는 것을 본 경식은 자기가 요새 만들던 게 화약이 아니라 마약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뭔데. 짚신을 그렇게 대량생산해서 뭘하려고.


"내가 내린 경영의 이치를 아직 익히지 못한 것이 분명하군. 난 분명 이러한 경영에는 재료의 공급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을텐데."


병조 관헌들도 이제 생각해보니 뽕에 취해서...아니, 생산품들 품질관리 하느라 바빠서 재료 공급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쓴 거 같다.


솔직히 말해서 공조의 선공감(繕工監)이 철 공급을 맡고 있는지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신경 안 쓴 것도 있다. 이놈의 선비들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가 자꾸 조선의 공업을 망친다.


그제야 형조 관헌들이 선공감에 가서 철의 재고를 물어봤다.


"처음에 6만근을 사 들이고, 그 뒤로도 두 달 간 4만근을 사 들였는데, 지금 벌써 절반을 써서 5만근 밖에 없소이다."


세상에. 어떻게 철이 두 달 만에 5만근이 사라진단 말인가.


"아니, 선공감이 이렇게 철을 사들이는 것을 이리 게을리 하다니, 군무의 경장이 시급하여 전하께서 이곳에 행궁을 세우신 것을 모른단 말이오!"


"군기시에서 다 쓴 것인데 무슨 소리요!? 경강으로 들어오는 배들에게 철이라는 철은 다 사들이고 있는 바람에 한양의 철 값이 배는 뛰었소!"


조선 전기의 연간 철 생산량은 200t 정도로 추산된다. 군기시는 두세 달만에 그 15% 인 30t 가량을 써 버린 것이다.

1년을 풀로 돌렸으면 조선 철 연간 생산량의 90% 를 잡아먹는 괴물이 됐을 것이다. 아니, 두세 달 동안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늘어서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군기시 관헌들은 지금까지 만든 철갑과 병장기의 갯수를 세보았다.


칼, 창, 화살, 갑옷을 다 합치면 완전 무장 시 철이 45근 들어가는데, 화살이나 칼은 여분도 필요하니 합치면...


"1천 명 분을 좀 넘겨서 만든 참이니, 우리가 5만근을 쓴 게 맞소."


병조의 꿈이었던 10만 철기가 시작도 못하고 물거품이 되었다.




군기시 관헌들이 염치도 없이 왕에게 찾아가서 '우와아아앙! 주상에몽! 큰 일 났어!' 하며 상언했다.


제일 생산이 더딘 갑옷 80벌을 기준으로하여 계산해도 이대로라면 보름 뒤에 철 5만근이 홀랑 사라진다.


원래 경식은 이런 속아문(* 屬衙門, 육조의 아래에 속한 관아.)이나 도감들의 보고는 해조(* 該曹, 해당 조)에서 먼저 대충 처리하고, 되도록이면 삼정승이 논의한 다음 들어오게 한다.

표면 상 이유는 그게 규정 상 맞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귀찮아서 그렇다. 왕에게 직소를 허락한 것은 박경식이 혼자 차력쇼로 이끌고 있는 평준도감 관련 업무 뿐이다.


군기시가 이렇게 왕에 직접 상언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월권 행위다. 구태여 병조랑 공조 관헌들을 통채로 데려온 것도 그 보고 체계를 지키라고 한 것이었는데 이러는 것이다.


'이 새끼들 이제 왕을 화수분 취급하는 걸 숨기지도 않는군...'


경식도 대충 갑옷 생산량이 일 20개를 넘겼을 때부터 원료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조짐을 느꼈다.


하지만 생산관리와 분업이 얼마나 강력한지 신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걸 뒤로 하고 계속 밀어 붙인 것이다.


하여간, 철 공급의 부족은 단순히 무기를 못 만드는 걸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서울로 갈 철이 부족해져서 철 값이 배로 뛰었단 것도 문제지만, 지금 조선 병사들의 기강도 문제다.


조선에서의 짬을 어느 정도 먹은 경식은 합리적 경제적 동물(Homo economicus) 조선인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철 값이 올랐을 때, 이 철로 된 무기랑 갑옷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주면 어떻게 될까?


병사들은 분명 지급받은 철갑의 찰을 팔아먹는다.


그래서 철 공급의 문제가 더욱 복합적인 문제가 된다. 무턱대고 경장을 진행하기에는 이미 경식은 조선인잘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대비를 안 하고 있던 것도 아니다. 공조를 같이 마포 행궁으로 끌고 온 것 자체가 철 생산과 공급에 관련해서 업무를 보라고 시킬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병조와 공조를 데리고 마포로 내려올 때, 이미 경식은 조선 전국의 공업 물류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 정도 안 할거면 굳이 이런 마을에 행궁 씩이나 안 만들었다.


공조에게 시키려고 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새 철 양산 기술 개발과, 조선 전국의 철소를 파악하고 안에 등록 시키고, 그 공급망을 확충하기 위해 배 건조량을 늘리라는 것이었다.


새 철 양산 기술 개발은 어떻게 하냐고?


사실 그냥 경식이 알려준다.


경식이 교수에게 딱 걸린 졸업 논문, 그 논문 내용 중에는 '산업 혁명기 기술 중에는 중국이 이미 개발한 기술과 유사한 것이 있다' 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있는게 바로 초기 산업혁명기의 제철 기술이다.(*1)


"새로 만든 로에 철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 되었느냐?"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넣으니 한 번에 1천근이 들어갑니다."


경식이 건설을 지시한 것은 벽돌로 만든 용광로와 반사로다. 특히 지금 실험 중인 것은 반사로였다.


1784년 영국에서 헨리 코트가 개발한 반사로에 의한 연철 양산 기술은, 고대 중국에서 개발된 초강법과 유사하다.


한국에서도 고대 한성 백제에서 초강법이 사용되었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이유는 몰라도 지금 조선에서는 초강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사용되는 조선의 기술은 서양에서는 고대부터 중세 초까지 사용된 괴련철 제철 기술 수준이었다.(*2)

차이가 있다면 그나마 주철을 사용하는 기술은 알려져 있다는 정도.


건설에는 정병영의 난민들을 동원했다. 다들 비숙련 노동자이다보니 시킬게 벽돌 굽기, 기와 굽기, 숯 굽기 정도 밖에 없었다.


저들은 안 그래도 장인들이 많이 도망치는 자리요, 나라 필요성에 따라 공장으로 배속했다가 병사로 배속했다가 바꾸는 자리인지라 채워넣기 딱 좋았다.


올해에 제대로 된 원료 공급망이 만들어진다면 내년에는 베짜기를 시킬 생각이다. 제대로 된 취직도 인프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철장들에게 주철이나 잡쇠 등 반사로에 넣고 녹이게 했다. 아직 기술 실증 단계고, 풀무에 연결할 수차를 못 만들어서 풀무질은 난민들이 했다.


놀랍게도 그다지 문제가 없이 순조롭게 연철화하여 녹아나왔다. 시키는대로 했던 철장들보다 시킨 왕이 더 놀랐다.


되려 철장들은 '과연, 잡쇠를 강엿쇠둑이랑 판장쇠둑에서 녹이는 것을 커다란 로에서 하는 것이구만!' '판장쇠둑을 벽돌로 크게 만들면 이렇게 쉬운 것을 여지껏 몰랐네!' 하고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들은 경식은 '그게 뭔데 공돌이 놈들아' 하고 따질 수가 없어서 '음, 아무튼 뭔가 비슷한 기술이 있었나보군.' 하고 넘어갔다.


사실 반사로법 자체가 애초에 고대에서도 유사한 기술이 있으니, 조선의 수준에서도 초월적인 수준의 기술이 아니다.


도가니법 역시, 철장들은 나름 놀랍긴 해도 납득이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뽕쇠를 시우쇠에 물리면 외유내강한 깡쇠를 만들 수 있는데 이렇게 하니 공력이 안 들고 순식간이군!"(*3)


"이것이 참말로 주상께서 만드신 방법인가? 사실 주상마마는 임금보다 딱쇠(대장장이)가 맞으신거 아니여?"


왕이 들었으면 '뽕쇠는 뭐고 깡쇠는 또 뭔데 공돌이놈들아' 하고 따졌을 일이지만, 이 수다는 왕 귀에는 안 들어가고 군기감 주부에게 들키는 바람에 후자의 대장장이가 참람한 소리 했다고 좀 얻어맞은 것 말고는 도가니법도 잘 굴러갔다.


용광로도, 서울에는 철광석 재고가 없어서 고철과 사철을 넣는 것으로 실험했더니 잘 돌아갔다. 수력 풀무만 만들어서 인력 소요만 줄이면 될 거 같았다.


제일 놀라는 것은 '이게 왜 바로 되는가' 하고 있는 박경식이지만, 사실 이 기술들이 조선의 기술 수준에서 맥락을 벗어난 수준은 아니다.


철을 녹이는 수준의 온도를 버티는 세라믹 제작기술도 있고, 철을 녹이는 수준으로 온도를 올리는 법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원리를 모르고 경험에 의존하며, 세습으로 기술이 전수되고, 상호 기술 교류가 없이 산에 틀어박혀 자신들만의 마을(鐵場都會)을 만들어 철을 판 철장들의 사회 특성 상 혁신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경식이 이번에 공조에 명령한 것 중 하나는 그 철장들의 사회를 직접 파악할 수 있도록 계로 조직하여 철장안에 등록시키는 것이었다.




분명 대간 출신이요, (성종에게 깝쳤다가)퇴직해서 고향에서 잘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조로 끌려 온 이덕숭(李德崇)은 지금 그 실무를 맡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이덕숭의 뜬금없어 보이는 인사는 임금이 대간들에게 빡쳐서 그런 건 아니고, 성종 시절에 '철장도회제를 폐지하면 어떻냐' 라고 한 번 건의했던 것이 들켜서 그렇다.


그의 임무도 조선 기준으로는 합리적이었다. 그 고향이 충청도니까 대충 잘 알지 않냐며 충주의 감야관으로 뽑았다.


이전에 철장도회제가 잘 굴러갈 때는 품계도 없이 철장도회의 철장 중 하나를 뽑아서 시키던 말단 중의 말단이다.

지금은 철장도회제가 형해화되는 바람에 사라졌는데 왕이 경장한다고 부활 시켜서 종9품직으로 삼아서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리 이덕숭도 딱히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라가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벼슬자리도 역이요, 관리 경력 있으면 반 쯤 강제 차출해서 왕창 부려먹는다.


서울에서 결정된 정책을 전달하러온 경차관 박희손(朴喜孫)과, 충주 출신인 철장(鐵匠) 김납 외 난민촌 출신 기와장들도 함께 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인 충청도 충주 말흘금(末訖金) 철장(鐵場). 철장도회제가 개판이 되긴 했어도, 여전히 조선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대규모 철산지 중 하나다.

서울과 남한강 수계로 이어져 있어서 서울을 위한 철물 공급의 핵심 지역이기도 하다.


고향이라는 이유로 말흘금 사람들에 대한 대민업무를 직접적으로 맡게 된 김납은 철장 사람들에게 공납이 이제 폐지된다는 소식부터 전했다.


"공납을 폐지해? 그럼 우리는 어쩌라는 말이여?"


철장들은 공납을 폐지한다는 말에 되려 반응이 미묘했다. 왜 이러는지 알려면 조선의 공납제에 다시 알아야 한다.


조선의 공납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고을에서 나지 않는 공물(不産貢物)들이 많이 배정되어 있다.


현대인들이 보면 그냥 바보 같은 정책이지만,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조선은 이미 문종 시절에 지방민들이 다른 지역을 드나들며 공납용 물품들을 사고 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공물을 마냥 생산지에만 배정하면, 대가를 받지 못하고 뺏긴 지방민들이 생산을 줄이고 태업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놓은 정책이 불산공물을 배정하는 것이다.


철이 안 나는 고을에 철을 공납하라고 배정하면, 그 고을 지방민들은 철이 나는 곳까지 가서 철을 사야한다.


그리고 철이 나는 고을의 지방민들은 그렇게 다른 고을에서 온 사람들에게 철을 팔아서 대가를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


실제로는 이 구조에서 철이 나지 않는 고을들은 급하면 호미나 쟁기를 녹여서 공납하는 일도 벌어졌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경제에는 좀 많이 까막눈이다보니 아무튼 중앙은 돌아가는 거 같으니 그냥 얼렁뚱땅 넘어갔다.


이 구조에서 당연히 상인들이 제일 큰 이득을 얻었지만, 철기 시대 이후로 사실 상 필수품인 철을 생산하고 있는 철장들도 꽤나 수혜자였다.


불산공물 같은 현대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정책을 하고, 백성들을 부역 시켜서 철장도회에서 일을 시키는 등의 정책을 한 것도 결국 철장들의 마을이 붕괴하거나 철장들이 도망치면 안되니까 특별히 우대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봤듯, 이미 공납제 중 상당 부분은 붕괴하여 사주인들이 매집해놓은 물자를 시전에 내놓으면 경주인들이 그걸 사고 영수증만 각 지역에 보내는 구조였다.


철장들 역시, 자신들과 신뢰 관계가 있는 상인을 구해서 서울에 철을 내다 파는 입장이었던지라 그 구조에서 철장들은 돈을 벌면 벌었지 그렇게 막심한 손해는 아니었다.


"지금 서울에서는 시전에서 철을 사서 쓰니 우리가 철을 못 팔 일은 없네. 우리는 그대로 철을 팔면 되는 일이야."


"뭐야, 별 거 아니었어?"


"바쁜데 시시한 소리를 하고 있어."


관리까지 데려와서 뭔가 말한다고 하길래 좀 긴장했는데 저러니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철장들은 다시 흩어지려고 했다.


경차관 박희손은 벼슬아치를 보고도 떨기는 커녕 시큰둥하기만 한 이들을 보고 놀랐다.


"관헌이 왔는데 나팔을 불기는 커녕 이렇게 태연하니, 철소의 철장들은 어지러운 백성(亂民)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사실 그럴 만도 하다.


태종 시절 공납제의 시대부터, 향리와 토관들이 철 가지고 백성들 갈취 할 때는 철소 주변의 백성들을 갈취할지언정 이 철소에 사는 철장들은 직접 갈취하지 못했다.


철이 워낙 부족한 조선 전기에, 항상 철로 된 연장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이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감야관이라는 관직이 사라진 이유도 철장들이 죄다 무식한 깡패들이라서 도저히 관직 같은 걸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덕숭과 김납의 그 설명을 듣자 박희손의 등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전하께서 자주 이르신 백성들을 움직이려면 일단 그들이 이득을 보게 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라가 백성을 갈취하면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그 물산을 숨기려 하지만, 나라가 백성들에게 이득을 준다면 백성들은 나서서 나라에게 물산을 바치오. 이것이 내가 이른 고본계(股本契)의 이치요.'


솔직히 그냥 나라가 나서서 장사하려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사대부로써 걸리긴 했는데, 치부해서 백성을 강탈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잘은 몰라도 어쨌든 주상께서 백성들을 위해서 한다는데 그런거겠지.


사대부들이 부를 더럽게 쌓는걸 경멸했지, 이런 경영의 중요성을 외면하진 않았다. 게다가 뭔가 화수분처럼 뽑아내는 왕인 것도 사실이다.


흩어지는 철장들을 막기 위해 박희손은 체통도 버리고 직접 소리를 쳤다.


"잠깐, 철장들은 흩어지지 말고 들으라! 나라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내려, 너희에게 철을 물처럼 만들어내는 비법을 전수하고, 너희가 만드는 철을 비싸게 사주려 하는 것이니 모여서 역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말흘금 사람들이 사대부 무서운줄 모르고 눈을 부릅떴다.


뭐? 역을 져?


철장들은 위에서 말했듯 전략자원들인지라, 철을 바치는 것 외의 역도 지지 않는다. 되려 철을 캐기 위해 타 지역민들을 부역으로 부릴 수 있다.


다들 손에 쇠연장을 들고 있는 놈들이 저러니 박희손은 사대부로써 위엄이고 뭐고 지릴 뻔 했다.


"아, 아니, 나라는 이제 요역을 강제로 지게 하지 않는다. 지폐를 값으로 넉넉하게 주니, 지폐를 벌려거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야."


서울에서는 보통은 여기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며, 40전 정도 값을 부르면 갑자기 충민으로 변하는데 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폐? 아아, '이것' 말인가?"


라며 자기들이 넉넉히 가지고 있는 지폐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뭐, 뭐지?! 대체 어떻게 전답이 없는 곳에서 이런 수준의 지폐를?!'


박희손이 아직도 경제를 익숙히하지 못해서 착각하고 있지만, 세상의 부는 농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농지가 어느 정도 있지만 그 비중이 결코 크지 않다. 산에서 살다보니 그 밭도 다 척박하여 자급자족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들의 주업은 어디까지나 철 생산이었다. 부족한 물자는 철을 팔아서 이곳에 온 상인들과 교역하여 얻는다.


작년에 왕이 만든 제도에서 최중요 교역 물자는 미곡이며, 최대 조세원은 토지세이다.


하지만 이들이 생산하는 철은 공식 시장에서의 거래는 아직 서울과 평양에서만 이뤄진다.


열흘에 한 번 오는 철 전문 상인들과 거래는 여전히 물물교환으로 이뤄진다.


심지어 철에 아직 이렇달만한 과세도 없으니, 그들은 지폐가 그닥 절실하지 않다.


그렇다고 공식 시장에서 돈을 쓰기엔, 그들은 읍에서도 꽤 떨어진 곳에서 마을을 세워 그들만의 사회를 이룬채 살고 있다.


저 수상할 정도로 많은 돈은, 수확철 쯤에 지폐로 전세를 내라는 아전바치들의 말을 좀 들어서, 귀찮은데 십년치 전세 지폐를 모아두자고 마을의 의견이 모여 한 번 사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농사 지어서 화매소에 팔고 세금을 낸다는 대다수 백성들의 일은 이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였다.


작년의 충청도에서 기근? 그것도 남의 일이었다. 기껏해야 상인들이 조 가격을 평소보다 많이 불러서 좀 싸움이 났을 뿐.

나라가 지폐를 뿌리지 않았으면 정말 굶어죽을 뻔한 빈농들과 달리 이들은 딱히 돈을 빌리지도 않았다.


아직도 조선은 지폐가 차지하지 못한 시장이 잔뜩 있었다.


사실, 한양과 평양 인근을 제외하면 상인이 아닌 대다수 백성들은 지폐를 아직도 그냥 세금 내기 쿠폰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서울 근처와 달리 아직도 추포와 오승포가 거래되고 있는 곳도 부지기수다.


일족들이 다 서울에 살던 박희손은 이런 사정을 제대로 몰랐지만, 충청도 시골에 살던 이덕숭이 먼저 이런 사정을 헤아려서 설명해주자 박희손도 왕이 하교한 말이 떠올랐다.


'아직 철장들은 지폐의 가치를 모를 것이다. 지폐를 쥐여준들 쓰는 법을 모를테니, 지폐를 쓰는 맛을 알게 하는게 우선일 것이다.'


'그걸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떠올려도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전부터 역을 면제 받은 이들이라 억지로 부른다해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지폐를 준다하여도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이들을 기꺼이 따르게 해야하는가...?'


---


<이하 미주>


*1 : 고대 중국의 제철기술 중 초강법은 전한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용해된 철을 공기에 노출 시킨 채로 휘저어서, 철에 포함된 탄소를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탈탄하여 강철화 하는 기술입니다. 송나라 때에는 석탄을 사용한 제철도 널리 퍼지는지라, 이 둘이 결합하면 마치 산업혁명기 시작 무렵의 영국의 제철과 기술적으로 매우 유사해보입니다. 그래서 '왜 같은 기술을 가졌는데 중국은 산업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나아갔을까?' 라는 떡밥에서 자주 언급되지요.

다만 근래에는 중국의 기술은 실제론 여러 단점이 있어 산혁기의 기술만큼 혁신이 될 수 없었단 반론도 나오는 편입니다. 이를테면 초강법은 녹은 철을 휘젓는 중 기포가 들어가서 별도로 망치질을 해서 다시 단련을 해야했지요. 그에 비하면 헨리 코트는 반사로법과 함께 롤러 압연법을 개발하여 해당 문제도 해결해냈습니다.


*2 : 본문에서 언급된대로 초강법은 고대 한성 백제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철기의 미세조직 상에서 초강법으로 정련된 철의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다만 초강법을 실제로 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적은 아직 발굴된 사례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제철 기술은 문헌 상으로도, 유적 상으로도, 미세조직 상으로도 명백하게 괴련철을 이용한 제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서양은 고대부터 14세기 경까지 사용하던 기술이지요. 철을 녹이는 용광로를 이용한 수철로는 조선에서도 꽤 숙련된 장인들만 운용 할 수 있는 기술로 여겨졌습니다.


*3 : 19세기 중반의 실학자 이규경은 철 생산에 많은 관심을 보여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중국과 조선의 여러 제철 기술들을 기록했고 당시 조선의 제철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안을 여럿 내기도 했습니다. 그 중 흥미로운게 그가 호남 완산주에서 대장장이들에게 들었다는 비전의 제철법인데, 무쇠로 만든 그릇을 다시 녹임으로써 숙철(연철)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장도장들은 '뽕쇠'라는 단단한 철과 '시우쇠'라는 연한 철을 서로 물려 단련하면 장도를 만들 때 좋은 철을 만들 수 있다고 증언했지요. 경식이 미래 기술인줄 알았던 것들이 일선 철장들에게는 '생각은 못했어도 원리는 대충 이해가는 기술'로 비춰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조선 시대의 기술들을 반영한 것입니다.


참조문헌

<이남규. (2019). 한국 고대 제철공정의 재검토 — 중국과의 비교적 시각에서. 한국고고학보,(111), 116-151.>

<최영민. (2015). 고대 한반도 중부지역 초강정련 기술에 대한 고찰. 중앙고고연구,(18), 39-66.>

<조대연. (2017). 고대 철 제련로의 전개과정 및 철 생산 복원실험에 관한 검토 - 유럽의 사례를 중심으로 -. 숭실사학, 38, 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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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봉 잡았다 +90 24.06.17 9,847 493 23쪽
39 탈상 +87 24.06.15 10,260 474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2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2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2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1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9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0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6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8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4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4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2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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