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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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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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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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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봉 잡았다 3

DUMMY

일본 사신단이 통신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난지 얼마 안되어 서울 곳곳에 붙은 방을 보고 성균관 유생들은 또 나라가 이상해져 간다고 탄식했다.


"배를 바치면 수군 벼슬 자리를 준다니 이것이 후한 영제 때의 매관매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난언을 하는 성균관 유생들 중 일부가 잡혀 들어와


"그럼 너희에게 수군 벼슬을 줄테니 해보겠느냐? 사정(*司正, 무관직 정7품 벼슬)부터 시작하면 되겠구나."


하고 왕이 친국을 했더니 수군으로는 벼슬을 줘도 가기 싫다고 바로는 말을 못해 말을 계속 빙빙 돌리기만 했다.


놀란 신하들이 '여...역적도 아닌데 친국은 좀 과하다고 생각해요.' 라고 소심하게 말리려다가 봄에 있던 연회에서 왕의 술 주정을 떠올리고서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왕은 평소대로의 폭정만 했다. 성균관 유생들 수백 명을 수군으로 배속 시켰다. 그냥 병사는 아니고, '나는 선비를 후대한다' 면서 7품부터 9품 벼슬까지 골고루 줬다.


물론 수군이 천역으로 여겨지는 조선 사회의 특성 상 유생들의 가족은 아들이 유배라도 당하는 마냥 통곡했다.


하지만 아무튼 과거도 합격 못한 애들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들은 왕 앞에서 당당하게 절개를 보임으로 발탁된 것이니, 왕은 그들을 용서하며 하해와 같은 성은을 내리는 것이요, 선비들은 그 보답으로 충정을 다하여 싸울 것이니 사실 상 자진입대라고 할 수 있다.


사관들은 사초에 '금상은 상을 비판한 어린 유생들을 용서하고 크게 쓰시니 인군의 풍모가 있으신 분이시다. 성상의 은혜에 감동한 의민과 의사들이 팔도에서 자진입대하니 여간 교화가 아니었다.' 라고 썼다.


절대로 왕의 지난 술 주정 때문에 절개가 꺾여서 그런 건 아니고, 왕의 은혜에 감동해서 스스로 쓰는 것이 맞다.





경식은 납전첩의 실패랑 고본계의 애매한 성공을 보고서, 조선은 역시 아직도 신분제 국가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직 조선인들은 돈을 주는 것보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벼슬이라도 받는 걸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수군을 모집하려면? 이전에는 그냥 천역으로만 취급받던 수군을, '벼슬'로 만들어서, 공명첩으로 팔면 어떨까?


배를 탄다는 점에서, 병사들을 지휘한다는 점에서 실직이기도 하다.


정말 좋은 방법이었다. 기존에 일본 왜관과 사무역을 하던 서울 상인층들은 앞다투어 수군 공명첩을 샀다.


이번에는 시골 사람들 코를 베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공명첩은 이름도 써 주고, 실직도 주는, 진짜 벼슬 임명장이다.


다만 돈 주고 샀다는 티는 나도록 '납전 해동제국사'를 앞에 붙이고 군관직인 만호, 사직, 사정 등으로 임명한다.


해동제국사에 자본을 대는...특히 '배'라는 현물 자본을 대는 이들을 그대로 해동제국사 소속의 장수로 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의 선원들은 그대로 수군이 된다.


돈 주고 군대 들어오는 놈들에게 높은 자리를 줄 수는 없어서, 아무리 배가 많고 커도 만호가 최고위직이기는 하다. 여진족들에게 토관직을 내리는 예를 참고한 것이었다.(*1)


애초에 만호 수준의 벼슬을 받을 정도로 배가 많거나 큰 선상들도 별로 없었다.


있었다 한들 선단을 나눠서 군관으로 임명하여 여러 첨사들 아래로 나눠서 배속하여 군벌화 하지 못하게 막을 계획이기도 했다.


그들을 통제할 첨사는 매관이 아니라, 과거 붙어서 입격한 진짜 관헌들로 배치한다.


한 마디로 매관매직해서 들어온 상선들은 배 한 척 단위, 혹은 잘 해야 몇 척 정도 규모로 쪼개진 작은 용병단에 가깝다. 통제와 지휘는 정규 관헌이 하고.


또 이 관직 저 관직 오가는게 일반적인 조선의 상례와 다르게, 해동제국사에 돈을 내고 들어간 놈들은 해동제국사 내에서만 보직이 오갈 수 있다.


유생들이 좀 반발했지만 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경식은 '꼬우면 니들이 수군하던가.' 하며 손수 수군에 배속시켜줬다.


여전히 조선의 재정으로는 만 명 단위로 충원해야하는 수군들의 녹을 다 충분히 줄 수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경식이 행정 조직을 너무 급격히 확장해서 슬슬 돈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역시 번리위무사를 세우면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한다.


'군인들에게 알아서 돈 벌게 하기'다.


물론 지금 수군도 알아서 돈 벌고는 있다. 물고기를 잡는다던가, 소금을 굽는다던가, 함경도랑 남도를 오고가는 배달 알바를 뛴다던가.


하지만 이번 해동제국사, 즉 일본과 무역에 달린 돈은 고기잡이랑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해동제국사는 당연히, 번리위무사가 두만강 이북에서 나오는 모피랑 인삼 교역권을 독점했듯,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한다.


해동제국사에 속하지 않은 상인이 일본인들과 교역하려 들면 단속할 권한도 있고, 왜구를 단속할 권한도 있다.


그리고 나라는 돈은 한 푼도 안 준다. 애초에 그러려고 머리 굴려서 제도 만들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원래 이게 조선 군생활의 표준이다.


그리고 번리위무사에서 올라온 보고를 보니,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번리위무사에 돈을 댔으니 자기도 4진에서 맘대로 장사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상인들이 자꾸 나온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번에는 해동제국사에 투자하는 이들이 직접 경영에 뛰어들게 해준다.


결국 아주 간단히 말하면, 해동제국사 공명첩은 대일본 사략 라이센스다.





"거발-!"


팡! 파바바방!


"어휴, 이게 그 화포라는 거구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일세. 이 콩 볶는 소리 나는 작대기가 그렇게 무시무시한가?"


"자네는 작년에 북방에서 황 장군이 야인들을 이 총으로 한 방에 일백 놈을 잡았다는 말도 못 들었나? 주상께서 친히 만드신 무기라고 하는군."


"에엥? 콩알만한 납 구슬 하나를 날리는데 무슨 야인이 한 방에 일백이나..."


선장이 해동제국사에 돈 주고 벼슬을 사는 바람에 졸지에 해동제국사 소속 수군이 된 이들은 어디까지나 일반 상인들이었다.


물론 전통적으로 일반 농민들 강제로 데려다놓고 10만 대군이네 100만 대군이네 허풍을 치던 동아시아에서는, 그냥 일반 선상들 데리고서 수군이라고 우기는게 대단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들을 동원하는 목표가 '왜구를 잡는 것' 인데 아무 준비도 안 시키고 보내면 죄다 썰릴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무기도 주고, 갑옷도 주고, 사용법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도 해준다.


훈련을 받으면서 잡담을 하던 선원들에게 그들의 선장...지금은 '해동제국사 사직 나리' 가 된 최말동이 사모에 꽃까지 꽂아서는 파란 비단으로 된 관복까지 입고 나와서는 헛기침을 했다.


"에헴, 훈련은 잘 들 받고 있느냐?"


전 선원, 현 수군이 되버린 부하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장사꾼이던 자기들의 보스가 이렇게 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 당황스러워서 어물쩍 거렸다.


"이 놈들, 사직 나리가 납셨는데 빨리 예를 갖추지 않고 뭘 하느냐? 너희도 이제는 다 수졸이요, 나는 군관인 것을 몰라? 불손하게 굴면 군령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야."


돈으로 알량한 권세 좀 얻었다고 바로 갑질을 시전하는 최말동에게 선원들이 말대꾸 했다.


"군령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 맞습니까? 저희가 듣자하니 돈 주고 자리를 산 관헌은 판결을 하려면 첨사 나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뭐, 뭣?!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훈련원 나리들이 알려주던데요. 언문으로 된 책도 줬고. 나리한테 꼭 전해주라면서..."


조정에서는 친절하게도 선원 하나하나에게까지 해동제국사 소속 '납전 관헌'들의 권리와 의무를 주르륵 써놓은 책자까지 줬다.


한자는 거의 까막눈이어도 언문은 읽는 최말동은 바로 그 책을 뺏어 읽었다.


'왜적과 사사로이 거래해서는 안된다. 지정된 화매소가 아닌 곳에서는 거래하지 말 것, 화매소가 아닌 곳에서 거래 시 파직하고 가산을 적몰한다.

군령을 빙자하여 수졸을 함부로 벌해서는 안된다. 태형 이상의 벌은 자신이 속한 거진의 첨절제사의 허락이 있어야 행할 수 있다...'


온갖 '하지 말라' 의 향연이었다.


그나마 해도 되는 것은 왜구나 밀매꾼을 때려잡는 것과 그 전리품을 챙기는 것 정도였는데, 전리품도 '알아서 나누기'를 절대 하면 안되고, 반드시 화매소에 팔고 그 값을 나눠야 했다.


게다가 지급하는 무기와 소모품들도 공짜가 아니었다.


임명장을 잘 보니 뒷장에 그 값을 적어놔서 영수증처럼 만들어놨다.


책을 보니 전리품을 화매소에 팔면 그 값은 3분의 1은 납전 관헌에게 주고, 3분의 1은 나라가 가지고, 3분의 1은 무기 값을 갚는데 쓰는 것으로 처리한다고 한다.


이 빚을 갚지 않으면 또 파직에 가산을 강제 집행해서 뺏는다.


배를 바치고서, 그대로 그 배를 지휘하는 사직으로 임명되어서 그야말로 공짜로 관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최말동은, 나라가 생각보다 자기를 잘 벗겨먹는 쪽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채 한 해가 가기 전에 200 여 척에 병사 수는 1만 3천에 달하는 넘는 새 수군(돈 안 줌)을 모아냈다.


사실 숫자로 치면 세종 때 대마도 정벌할 때 수보다도 적긴 하다.


군기시를 빡세게 돌리는데도 총이랑 대포 생산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평균으로 치면 1척 마다 대포 3문 정도 지급했을 것이다. 총은 병사 중 한 20~30% 정도에게 줬고.


그냥 상선을 징발한 것과 뭐가 다르냐고 따져서는 안된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는 의기로 기쁜 마음에 자진 입대한 의민들이다.


절대로 일본과 교역권이 탐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왜구로부터 남변을 지키러 온 이들이다.


상선들에게 대충 총이랑 대포 좀 쥐어줬다고 전투력이 있겠느냐는 의심도 적절하지 않다.


지금 조선의 주력 함선인 맹선도 평소에는 조운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군용으로 쓰는 배다.


이런 식으로 싸우던 건 동아시아 평균이요, 따지고보면 유럽도 비슷하며, 앞으로도 수백 년은 변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총이랑 대포는 충분히 센 거 맞다.


해동제국사에는 저 '납전 해동제국사 관헌' 들 말고도, 기존 수군에 배속되어 있던 부대들도 여럿 배속 시킬 것이라서,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갑자기 돈 주고 들어온 상선들이 대포 좀 있다고 얼마나 세겠는가. 물론 기존 조선 수군도 별로긴 한데, 납전 관헌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정규 관헌들이 필요하긴 하다.


왕은 매관매직으로 뽑아낸 수군이 퍽 자랑스러운 듯 살펴보며 말했다.


"과연 민간의 배가 근래에는 군선보다 크다는 최부의 말이 맞구나. 저토록 큰 배를 민간에서 쓰고 있었다니.

우리나라가 천하의 빈궁한 나라라고 항상 조정에서 논했으나,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나라가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갈취하려 하니 백성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꼭꼭 숨긴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는 '백성들에게 뭔가를 돌려주는 정책'을 하니 백성들이 알아서 따른다는 말이었다.


왕이 즉위 후에 항상 말하는 지론이었으니 사실 상 자기 정책을 자화자찬 하는 것이었다.


매관매직으로 모은 군대가 그렇게 자랑스럽냐는 디스가 나올 것 같지만, 왕의 술주정이 아직도 생생해서 그냥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왕은 이미 두만강 너머도 개척해냈다.


실적으로 만들어 낸 권위, 엄마를 팔아서 만든 공포, 그냥 태어날 때부터 센 정통성. 이로써 그 누구도 왕에게 반항할 자는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셋이 합쳐진 왕 앞에서는 매관매직 좀 했다고 비판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수군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막부의 사절들이 돌아갈 때 같이 어세겸(魚世謙)과 이계동(李季仝)을 통신사로 보냈는데, 이것저것 준비를 다 마치니 딱 마침 돌아왔다.


성종 10년 이래로 거의 20년 만에 간 통신사였다.


돌아온 통신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위기를 뚫고 돌아온 듯한 표정이었다.


한창 내전 중인 곳에 보낸 무리한 짓인 건 알고 있어서, 왕은 특별히 연회를 열어가며 그들을 환영했다.


통신사들의 첫 보고는 탄식이었다.


"왜인들이 우리를 박대하는 것이 심하며, 나라가 전란에 한창 휘말려 그 참혹하기가 두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니 우리를 맞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경식도 동아시아사 알못이어서 대충 '전국 시대에 접어든지 얼마 안된 때니까 개판이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심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이 가는 길에 들린 하카타가 그들이 도착하기 바로 전에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조선에 사신을 보낸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16살 소년이요, 정통성 있는 후계자도 아니고 호소카와 가문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세운 쇼군이다.


이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바닥 밑에는 밑바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쇼군으로 옹립된 명응의 정변을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변화였다.


덕분에 지금 일본은 막부 자체가 천황을 뒷전으로 만들어놓고 무인들끼리 지배하는 체제인 주제에, 또 막부도 뒷전이 되어서 호소카와 가문이 지배하는 옥상옥 같은 정치 구조였다.


이런 이상한 구조는 사실 일본에 앞으로도 수백 년, 심지어 통일된 후에도 반복되니 일본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일본이 막후정치를 좋아하는 건 거의 전통 수준이다.


물론 경식은 그런 일본사 모르고 관심도 없다. 일본 귀족들 이름이라고는 게임에서 나온 후지와라 씨, 소가 씨, 모노노베 씨 정도 밖에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슷할 것이다. '호소 뭐시기? 어차피 그 녀석들 일본 통일 못했잖아? 자 쓰레기죠. 나는 일본 전체를 먹는 계획을 말하고 있는데.'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거 같아서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통신사 정사와 부정사는 신숙주가 찬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예를 따라, 해동제국기에서 바뀐 바를 증보하여 책자를 찬집하시오. 일본의 바뀐 정세에 상세히 알아야 앞으로도 능히 접대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중요한 건 그래서 조약을 맺었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세겸은 왕이 관심이 없어서 의례적으로 대충 넘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꼬장꼬장 '이야기를 들으셔야 합니다!' 하고 따졌다.


대신들 중에 제일 꼬장꼬장한 타입이어서 일부러 듣기 싫어서 일본으로 보낸 건데 돌아오자마자 저런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통신사 사절들의 모험이나 일본 내의 정세는 경식이 이따위로 대충 넘길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번에 경식이 제안한 역 강화도 조약...그러니까 조선식으로 표현하면 정사약조(丁巳約條)이 아주 제대로 똥...혹은 대박을 밟았기 때문이다.




"하카타와 사카이에 조선방을 세우겠다고, 조선의 통신사들이 말했다고?"


"그렇습니다, 관령."


경식이 하카타와 사카이에 조선방을 세우겠다고 제안한 것은, 그냥 경식이 이름을 아는 대충 조선에서 가까운 전통 시대의 항구가 그 둘이어서 그렇다.


역사책으로 알게 된 것도 아니다. 근세를 다루는 대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일본의 무역항으로 설정된 프로빈스가 그 둘이어서 알았다.


하지만 지금 막부의 실권자 호소카와 마사모토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하카타는 명나라와 일본의 감합무역에서 명의 물산이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곳이고, 사카이는 그 물산이 교토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치는 항구다.


게임에서 주요 항구 프로빈스로 설정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경식은 일본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이 막 던진 일인데, 하필 이 인간이 대외무역으로 생기는 이득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물론 조선과의 무역보다는 명나라와의 무역이 주였지만, 조선 역시 일본에서 나지 않는 목면 등의 물자가 들어오고, 명나라의 물건을 들여올 수 있는 창구다.


그래서 조선과의 교역 확대가 꺼려질 것은 없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정세가 문제다.


통신사들이 오면서 본 얼마 전에 전투가 벌어져 쑥대밭이 된 곳이자, 조선에서 개항을 요구하는 하카타가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다.


하카타는 일본의 사절들이 출발할 때만 해도 친 호소카와계 가문인 쇼니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하카타는 오우치에게 올해 초 점령 당했다. 통신사들이 본 전투의 폐허가 그 흔적이다.


게다가 이 조선왕이 보낸 약조에, '일본 해적이 조선을 침탈하자 추가했다는' 마지막 조항 역시 의미심장해보였다.


'각지의 다이묘와 조선 간의 일은 막부와 무관하게 각자 처리함'


이 조항만 없었다면, '조선은 그냥 교역해주겠다는건데 하필 오우치가 하카타를 점령해버린거군'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우치가 하카타를 점령한 절묘한 순간에 이런 조항을 넣어버리니 호소카와는 제대로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국왕은 일본 내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심지어 우리와 오우치 중 어딜 선택할지 상황을 봐서 고르겠다는 것이렷다!'


호소카와는 몇 가지 조항의 수정을 요구했다.


일본의 해도와 지도를 넘길테니, 조선은 오우치가 지배하는 하카타로 오지 말고, 대신 호소카와의 휘하인 사카이로 바로 올 것.


또한 '일본 해적'...그러니까 오우치 등 반호소카와 다이묘들에 대해 자유로운 교전권을 인정해줄테니 호소카와 가문과 척지지 말 것.





위에서 말했듯, 지도를 넘긴다는 것은 곧 군사 기밀을 넘기는 일이다.


사실 다이묘들에 대한 각기 외교권은 거부하는 셈이지만, 적어도 자신들과의 동맹은 보장하겠다는 소리가 된다.


이런 강렬한 러브콜을 받은 통신사들은 당황했다.


왕은 자기들에게 이런 일본의 사정 같은 거 안 알려줬다. 기껏해야 마지막 조항이나 해안 측량 요구는 일본이 안 받아들여도 어쩔 수 없으니 빼도 된다 정도.


통신사절들도 그냥 불쌍한 일본에 이것저것 주는 대신에 교역을 하자는 제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구애의 춤을 던지니 쉽게 자기들 선에서 처결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심지어 조선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막부만이 아니었다.


통신사들이 돌아가는 길에 들른 하카타에서 오우치 가문 역시 통신사들에게 접근해왔다.


"사카이에는 조선방을 두지 말고, 하카타에 조선방을 세우십시오!

우리가 서국의 상인들이 조선방에 드나드는 것이나, 조선의 상인들이 서국에서 거래하는 것을 보장하겠습니다!

또한 조선을 계속 침탈하는 쓰시마에 대한 토벌 역시 우리가 지원하겠습니다!

영보에서 들어온 당물(* 唐物, 중국 물품) 역시 조선과 거래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오우치는 백제 왕족의 후예를 자칭하며 조선에게 교역을 요구하는 등 막연하게나마 호의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정세가 더욱 절묘했다. 지금 오우치는 교토의 호소카와와 적대하고, 큐슈에서는 친 호소카와인 쇼니 씨와 쟁패를 다투고 있었다.(*2)


그 와중에 조선이 하카타에 방을 세워서 자신들과 거래하려 한다니 이 기회를 잃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독점해 온 쓰시마는 오우치의 적인 쇼니와 엮여 있기도 하며, 조선이 쓰시마 왜구를 좆 같게 여긴다는 것은 규슈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다.


오우치는 자기들 신하도 아닌 쓰시마를 팔아서 조선의 호의를 사려고 했다.




쓰시마는 이 상황을 인지하고서 조선 통신사 일행을 어떻게든 가로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경식이 아무리 동아시아사를 몰라도 이 시대 조일 관계를 중계하던 것이 쓰시마 도주인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쓰시마가 한일의 중간에서 외교 문서를 자꾸 손질해서 의사 소통을 제대로 못하게 했다던가, 임진왜란 때도 어물쩍 넘기려고 했다는 점 등도 알고 있다.


이렇게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이득을 챙기고 있던 놈들이니, 막부와 직접 교류하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쓰시마를 사전 제압했다.


올해 2월에 있던 왜구의 군관 살해 사건을 핑계로, 수군들을 계속 순찰 시키며 쓰시마에서 나오는 배는 죄다 털어대고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정도가 지나면 왜구들이 원시적인 화약 무기를 쓰기 시작해서 조선 수군이 대응하지 못하기 시작하는데, 아직은 일본에 화약 무기가 없다.


게다가 경식이 군기시 개혁으로 슬슬 대포의 수도 늘이고 있는지라 조선 수군의 화력은 조금이나마 강력해졌다.


군기시에서 생산된 새 대포를 강매 당한지라, 어떻게든 돈을 뽑아내야 하는 수군들은 열심히 '쓰시마 왜구' 들을 격퇴하며 왜구들을 재료로 돈으로 연성해냈다.


"아이고! 우린 정말로 그냥 물고기나 잡으러 온 겁니다!"


"웃기는 소리! 이곳은 조정에서 허가한 어살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네가 왜적이 아니라면 어째서 이런 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딱히 쓰시마 사람들도 정직하지 않다. 조선에서 허락하지 않은 어살에서 물고기를 잡는 불법 조업은 그냥 숨 쉬듯이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일단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다 삼척 장검을 탑재하고 있다. 조선인은 갑사나 함경도민 정도는 되어야 가지고 있는 커다란 칼 말이다.


일본인 기준에서는 다들 이렇게 하고 다닌다고 우겨도, 조선 기준에서는 죄다 왜구가 맞다. 억울하면 센고쿠 시대 같은 난세에 살지 말았어야 했다.


딱히 털어먹을 게 없어 보이는 물고기만 있는 배였지만, 시장 경제에는 다 돈으로 바꿀 수단이 있다.


'왜구'들은 지금 한창 인력이 부족한 함경도와 4진 지역으로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개판이 되어 있는데 통신사들이 쓰시마를 경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통신사는 쓰시마를 경유하지 않고 하카타로 가버려서, 쓰시마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쓰시마는 세종보다 지독한 조선의 새 왕에 이를 박박 갈았다.





통신사절들은 이렇게 일본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는 왕의 심계에 감탄했다. 일본의 막부부터 거추들까지 죄다 조선에 손을 벌리는 것을 보니 일본의 사정도 꿰뚫어보고서 큰 그림을 짜낸 것이 틀림 없었다.


'치국과 경세의 재능, 해동에서 일어나는 일을 꿰뚫어보는 심계! 금상께서는 대체 갖지 못한게 뭐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돌아와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왕이 보고를 듣고서 '와...그런 일이 있었나요? 전혀 몰랐네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식 본인도 놀랐다. 이융은 당연히 모르고 경식도 모르는 일인데, 그냥 어쩌다보니 얻어 걸린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절묘했다.


연표를 달달 외운 사람이 일부러 하려고 해도 이렇게 절묘한 순간을 노려서 외교적 이득을 챙기는 것은 못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올해 조선 내부에서는 자꾸 사고가 났는데, 일본에서 자꾸 대박이 터지니 벌충이 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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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미주>


*1 : 사직, 사정 등의 벼슬은 오위에 속한 무반직 벼슬인데, 원래 조선에서는 실제로 직무가 없이 관료에게 녹을 주기 위해 자리를 만든 명예직이었습니다. 조선에 신종하는 여진족들에게,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주는 자리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경식은 그런 자리를 당연히 싫어하기 때문에 뜯어고쳐서 실직으로 쓰고 있습니다. 육군으로 비유하면 사정은 소대장, 사직은 중대장 정도 지위로 굴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번 화에서 묘사된 수군의 경우, 소선이나 대선의 선장 정도 자리가 되겠습니다.


*2 : 작 중에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썼습니다만,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히노 토미코가 주도하여 일으킨 명응의 정변이나, 쫓겨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이야기, 그리고 아직은 꼭두각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이야기 등은 훨씬 전개가 복잡합니다.

물론 경식의 시점을 통해서 계속 강조했지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이니만큼 많은 부분을 단순화하고 생략하여 전개에 꼭 필요한 부분만 본문에서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작 중 시점인 1497년에 마침 하카타를 점유하고 있던 쇼니 씨가 오우치에게 밀려 하카타가 오우치의 손에 들어 간 것 등의 사건은 실제 역사의 연표를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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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3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3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1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1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4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8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8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30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8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7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3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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