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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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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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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5.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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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글자
22쪽

돈이 복사가...안된다고?

DUMMY

1월이 되었다.


2개월 짜리 앙증맞고 깜찍한 뉴딜 정책도 백성들의 호응을 크게 받으며 성황리에 끝나고, 지폐로 걷는 전세도 순조롭게 최소 1400만전 이상은 잘 들어올 것이 거의 확정된 상태.


원래 예상의 1600만전에 비하면 10% 이상 빵꾸가 났지만 조선에서는 이 정도면 기적이다.


호조 관헌들은 1년을 경장하느라 몸을 태운 보람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왕은 웬일로 정책에 희한한 찐빠가 안 생기나 신기해하고 있을 때.


평준도감제조 홍귀달이 보고 했다.


"이제 시중에 추포가 없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그거 잘되었소."


"?"


"?"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잘된게 맞긴 하다. 조선에서 지폐 이전에 저화를 시도한 이유 중 하나가 저 추포 때문이니까.


추포는 삼베로 만든 5승 이하의 천이다. 승(升)은 날실의 갯수로, 1승은 80올이다.

베틀의 폭은 다들 포백척(布帛尺) 1척(약 46.6cm)으로 같으니 승수에 따라 옷감의 실의 밀도가 달라진다.

1승이면 46cm 에 실이 80올 있는 것이고, 5승이면 46cm 에 실이 400올 있으니 승수가 높을 수록 촘촘한 옷감이라는 것이다.


실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삼베옷의 경우 최소한 8~9승은 되어야 사람 옷으로 입을만하다. 오승포는 상당히 저질옷이나 겨우 해 입는다.


그런 정오승포도 사실 꽤 비싼 편이라, 쌀 4~8말은 된다. 일상 거래 하기에는 꽤나 값이 높다. 이 때문에 소액거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추포다.


추포는 규격 정오승포, 상오승포보다 못한 천을 통틀어 말한다.

추포는 2~3승 정도로 짜서 실이 너무 성겨서 자루로 만들어도 콩조차 못 담는 수준이다.


이러니 조선은 초기부터 실만 낭비하는 추포 못 만들게 하려고 별 수단을 다 쓰고 저화 정책도 시도해봤지만 성공한게 없다.


어떻게 보면 '실용적 가치'는 전혀 없지만 '포는 곧 돈'이라는 신용이 성립해서 조선이 나름 화폐 경제로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추포가 커버하던 저액 화폐의 자리에 경식이 만든 지폐가 들어왔다.


지폐가 등장하기 전까지 추포 가치는 쌀 2~3말 정도.


그런데 가격이 안정된 지폐는 풍년, 추수기 기준 1전에 1말 정도 한다. 그리고 지폐는 0.1 전인 1문부터, 10전인 1냥까지 여러 단위의 종류가 있다.


추포는 소액거래를 위해 실용적 쓸모가 전혀 없음에도 억지로 만들어진 존재.


나라에서 세금으로 받는다고 공표된데다가, 더 낮은 단위까지 커버하는 지폐에 비할 경쟁력이 없었다. 그래서 1년 사이 추포가 순식간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잘된 것 아닌가? 정책 의도를 순식간에 달성했으니까 말이야.


"추포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아서 국용을 낭비하지 않게 된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지폐의 법을 만들 때 하교하시길 '추포를 종이로 만들어 지폐를 찍어라' 고 명하셨는데 이제 추포가 없어 지폐지를 만들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아, 그랬지.


추포가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 중 또 하나는 이것이었다. 평준도감에서 지폐를 만들 때 재료로 추포를 쓴다.




처음 지폐법을 만들 때 경식이 명한 '추포를 종이로 만들어라!' 는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관헌들은 '추포를 종이로 만들라는게 무슨 뜻인지...?' 하고 어리둥절했다.


왜 모르나 경식은 당황했지만, 이내 곧 알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잡초, 지푸라기, 닥나무, 삼베심 등등 온갖 식물성 재료로 다 종이를 만들지만, 헝겊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경식이 알고 있는 헝겊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이랑 유럽, 아랍에서는 써도 조선에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식이 '이세계 용사' 가 되어야 했다.


추포를 거친 칼로 찢어 헝겊으로 만들고, 이것을 물에 담가 물레방아로 두들겨 고해(叩解)한다.


'...왜 헝겊으로 종이 만드는 방법은 없으면서 물레방아는 있지? 조선 전기에 수차 없던거 아니었나?'


박경식이 잘못 안 것이다. 조선에서 계속 실패하던 수차는 관개용 수차고, 물레방아는 조선 전기부터 조지소에서 썼다.


하여간 그 뒤는 그냥 한지랑 공정은 같은데, 경식이 쌍발뜨기를 도입했다.


종이가 질기지 못하다고는 하나 생산량이 4배에 달하고 저숙련자도 금방 익힐 수 있으니 유용했다.

게다가 지폐지는 삼베 섬유로 만드는 것이라 닥 섬유로 만들던 기존 한지에 비해서 강해서 강도가 그렇게 약하지도 않다.


또 추가 공정으로, 사이징(Sizing) 표면 처리를 더했다.


원래 종이는 표면처리를 안하면 털이 부스스 일어나며 잉크가 쉽게 번져 글을 쓰거나 인쇄할 수 없다. 흔히 아는 한지가 그런 건 표면처리를 안 한 것이다.


반면 표면처리를 하면 매끈하고 단단해지고 잉크가 잘 번지지 않는다. 전통 한지도 도침이라고 두드려서 이런 표면처리를 하는 공정이 있다.


박경식의 방식은 하루 종일 방아로 두드리는 이 도침을 생략하기 위해서, 근세 서양에서 했던 것처럼 아교풀을 발라서 표면처리를 한 것이다.


왕이 뿅 하고 갑자기 조지소 생산성을 폭증 시키니 신료들은 왕이 자기들 몰래 어디서 이런걸 배워왔나 당황했지만 경식은 '너희가 알 필요는 없다.' 라며 넘어갔다.


하여간, 이런 공정으로 지폐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지폐지 전지를 가로 10등분, 세로 4등분 하여 40장을 만들면 지폐 한 장이 된다.

기존 저화는 한 장이 가로 세로가 1척이 넘어서 한 장이 사람 몸통만 한 수준이었는데, 경식의 지폐는 현대 지폐랑 비슷한 크기로 작게 만들었다.(*1)


그리고 앞서 말했듯, 국수틀을 써서 인쇄기도 만들었다.


사실 그래도 좀 속도가 부족해서, 그냥 1냥 짜리 지폐, 5전 짜리 지폐, 1전 짜리 지폐를 많이 찍어낸 것으로 땜빵했다. 소액권은 나중에 찍어도 된다.


그래서 이제는 소액권을 본격 만들려고 했는데...재료가 없는 것이다.


"...오승포를 갈아서 쓴다던가 해서는 안되겠는가?"


"넝마가 된 저포를 구매 중이긴 합니다만, 1문, 5문의 지폐는 그 액수가 적어 찍어내기 위한 장수는 많아야 하는데, 800만 전을 찍어내기에는 양이 부족합니다."


지금 조선에서 사실 지폐는 작은 일상 시장에서는 1전 짜리나 좀 쓰이고, 쌀이 여전히 화폐로 기능하고 있다.


정확히 물가를 현대랑 비교하기는 어려운데, 1전 짜리도 대충 5만원권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할 것이다.


몇 천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건 배 타고 다니는 대상부고들이나 가능하지 시장의 소시민들에게는 언감생심인 일이다.


그래서 지폐를 일상에서도 통용할 수 있게, 그리고 통화량은 같게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평준도감에서 진행 중이었다.


이번에 세금 등으로 회수된 지폐들을 재활용해서 1문, 5문 지폐로 다시 만들려고 했는데, 액면가액을 동일하게 맞추려면 종이는 10배 더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원료 공급에 쇼티지가 터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 전국에 돌아다니던 추포가 벌써 사라져?'


경식 생각대로, 조선 전역으로 보면 추포가 지폐 재료로 갈려서 사라진 비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사라진 추포는 서울 인근 것들 뿐이다.


지방은 추포가 남아 있지만, 추포가 화폐로써 가치를 잃자 지방과 서울을 드나들면서 굳이 추포를 가지고 올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다.


있는 추포도, 기존의 쌀 2~3말 정도 가치를 기대하고 만들어진 건데 이젠 그냥 폐기물 취급으로 떡락하니 사람들이 굳이 팔려고 안한다.


지방에 남아 있는 추포들은 지폐 구경하기 힘든 시골에서 좀 쓰이다가 사라지거나, 실로 다시 풀어서 사용될 것이다.


물론 이 사정까진 경식이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교적 평범한 대책을 내놨다.


"어쩔 수 없지. 올해 삼베가 추수되면 그걸 재료로 해서 만드시오."


평준도감 관원들이 놀란 표정을 숨겼다.


'왜 대책이 평범하지??'


왕이 또 어디서 배운건지 알 수 없는 비범한 대책을 내놔서 (관헌들을 고생시키는 대신) 해결할 줄 알고 보고 했던거라서 더 놀랐다.




신료들에게 지금 왕의 이미지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뚝딱뚝딱 하면 뭔가 막 나온다. 돈도 나오고 종이도 나오고 책도 나오고 아무튼 뭐가 나온다.

가끔은 자기들을 뚝딱뚝딱 때리긴 하는데, 하여간.


이런 인식은 조선 조정의 오랜 염원, '조창 시설 확충하기'를 왕이 순식간에 해내면서 더 강해졌다.


이제 돈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하던 조선은 없다(고 신료들은 생각했다). 관료들은 돈 없어서 못하고 미뤄던 자기들의 염원을 마구 왕에게 아뢰기 시작했다.


"제가 일찍이 성종조에 중국에 가서 수차의 묘리를 배워 그것을 만들어 바쳐 올렸으나, 만드는 공력이 많이 들어 미처 전국에 만들어 내리지 못한 바 있습니다.


이제 국용이 넉넉하니 수차를 만들어 보내 크게 쓰게 하면 수리의 이로움이 클 것입니다."


최부의 요청이었고,


"전하께서 향교를 혁파하고 학당을 세우시려 하시는데, 책이 비싸 글을 가르치려 해도 볼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전하께서 만드신 인쇄기의 묘리가 신이하니 천자문과 소학을 찍으시어 널리 펴시고..."


인쇄기 보자마자 뺏어가려 했던 예조의 요청이고,


"전하께서 전세의 제도를 경장하신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경장으로 인해 호조의 공력이 크게 소요되어 체아직들을 불러 쓰고 계시는데, 산관과 율관과 사자(* 寫字, 글자를 예쁘게 옮겨 쓰는 잡직)를 쓰시는 것은 합당하나, 어찌 무반을 문반과 뒤섞어 쓰겠습니까.

미뤘던 식년시를 시행하여 호조의 인원을 추가하시어..."


군바리들을 우르르 호조에 밀어넣어서 실무 시키느라 인사체계가 개판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조와 병조의 요청이었고,


"북방의 방비는 개국이래 우리나라의 큰 근심입니다.

이제 전하의 경장으로 국용이 넉넉하며 2만 금군을 갖추게 되었으니 군사들에게 무기를 갖추게 하고 조련하여..."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언제 금군 2만이 있었어?! 나도 한번 보고 싶네.

혹시 경기도 유민들 대충 다 불러모은 저거 말이니?


"그만, 그만! 경들의 뜻은 알겠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경들이 이르는 것은 나도 염두하는 바요. 하지만..."


"하지만?"


"실은...돈이 없소."


"..."




확실히 조선의 조세 능력은 급증했다. 물론 호조가 보고한 것처럼 10배까진 아니고.


이전까진 현물이랑 징발로 때웠던지라 정확히 액수를 산정하기 어려워서 몇 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신료들이 확실히 체감할 정도로 늘기도 했다. 경식은 이제 1년 차라서 그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호조 관헌들의 느낌적 느낌으로는 4~5배 정도.


하지만 이것도 흉년에 백성 구휼하고, 평시랑 비슷하게 물건 쓰고, 관헌들 늘리고, 서리들 급여 주고, 건설 좀 하고, 창고 건설 후 미곡 사서 가격 안정 시켰더니 홀랑 사라지다 못해, 100만전의 추가 적자까지 생겼다.


조세 효율이 개선된거지 조선이 갑자기 부자가 된게 아니다. 조선은 여전히 가난하다.


관헌들을 확 늘였다고는 하나, 지방의 거점 도시들에 대한 세무행정이 늘었을 뿐 여전히 대부분의 군현은 수령 1명이 향리들을 부려서 굴러간다.


아전들 급여를 준다고 하나, 원래 역사의 조선 후기보다도 낫긴 한데 여전히 먹고 살기도 아슬아슬한 수준이라 부정부패가 없을 수가 없다.


백성들 구휼이랑 건설은 그나마 잘된 편이다. 사실 각 부목 마다 창고 수 십 칸 정도 지은게 다지만, 원래 역사에서는 이것도 수 십 년 뒤에나 이뤄진다.(*2)


이게 지금 조선 국력의 한계였다.




물론 세수가 대강 예측이 되고, '국채'라는 개념이 생겼으니 세수 범위에서만 쓴다면 앞으로도 아예 돈 못 쓸 일은 없다.


한마디로 작년에 세입에 비해 200만 전 정도 많이 썼지만 올해는 그만큼 아껴쓰면, 즉 1500만 전 정도는 올해 예산으로 쓸 수 있단 말이다.(*3)


대형 프로젝트를 하기에는 좀 사려야 한다는거지, 원래보다 훨씬 늘어난 정부 조직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다.


앞으론 도시 개발도 하고 공업도 진흥 시켜야 하니, 급하게 우당탕탕 늘린 행정 조직을 구조조정해서 세출을 줄여야할 것이다.


첫 번째 그 구조조정 대상은 '금군 2만명'이다.


'그...훈련원 습독관 동청례던가? 걔는 이게 금군으로 보여?'


수도를 지키는 병사로 배속은 되어 있으니 어찌보면 맞긴 하다.


이들 전부 사실 그냥 난민이라는게 문제지.


조선 초, 성종 시기는 병사들의 노역부화가 제일 심각하게 진행된 시기다.


박경식도 처음에는 이미 그런 상황인걸 못 받아들이고 능 공사에 병사들을 안 썼는데, 이게 이제보니 1년 사이 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폐 도입하는 것만해도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병사들을 그냥 잡역부로 쓰면서, 경기도민들 구제한다고 정병위에 대충 넣어가며 일 시키고 밥도 먹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들 무기도, 갑옷도, 전투력도 없다.


건국 시절엔 직업군인이요, 정예한 방패병인 팽배수조차 성종 무렵부터는 '무거운 방패를 드니 힘이 세다' 라는 지극히 조선스럽게 합리적인 이유로 노역에 동원되어 이젠 그냥 노역부로 전락했다.


나름 체아직 관헌인 팽배수도 이 꼴인데 그 이하 의무복무 군인인 정병은 어떻겠는가.


결국 순응하고 병사를 그냥 노역부로 삼아서 경기도민 유랑민들을 배속 시키고 먹여 살린 것이다. 그랬더니 어느새 2만명이나 바글바글 모였다.


이젠 흉년도 끝났겠다. 그들을 돌려 보내야 한다. 사실 창고 공사를 제외하면 작년 재정의 대부분은 저들 유지하는데에 소비됐다.

물론 공짜로 먹일 순 없어서 이것저것 토목공사나 종이 제조 등에 동원하긴 했지만 이제 서울 근처엔 그럴 건덕지가 없다.


그래서 이제 해산을 하려니...


"저어언하아아!!! 신들을 버리지 마소서어!!"


"아이고, 상감마마! 저희를 버리시면 저흰 앞으로 어찌 살란 말씀입니까!!"


대성통곡의 장이 열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나라 버리고 튀는줄 알겠네...'


경식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역시 2만명을 갑자기 쫓아내는건 무리다.


신료들도 '인군은 백성을 어루만져야 하는 법' 이라며 백성들 편을 드는 쪽이 꽤 많았다.


아무리 전제군주정이라고 해도, 조선 백성들이 '해라' 하면 '넵 흑흑' 하고 그대로 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애초에 전답도 없어서 유랑하던 사람들이었다. 돌려보내려고 해도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조선에서는 지주의 토지소유권이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데, 지주가 땅을 놀려두면 다른 사람이 멋대로 경작할 수 있게 허가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랑민들은 그런 놀려지는 땅을 기습 경작하고, 지주랑 사후 협상해서 소작료를 나중에 갈라 가지는 것이다.


유랑민들도 딱히 그 삶이 좋아서 한게 아니다.


게다가 박경식이 예측하기에는 올해부터는 그게 안될 것이다.


박경식의 예측은 그렇다치고, 백성들도 돈을 쥐꼬리만큼 줄 지언정 집 주고 밥 주고 옷 주는 이 서울 군대(싸움 안 함)가 좋았다.


그리고 의외로 유용한 예비 서리 인력풀이기도 했다. 박경식이 만든 글 배우면 병역 채운 걸로 처리해주는 제도에는 이 난민들도 많이 지원했다.


물론 이들은 이 병영에 붙어 있으려는 이들이지만, 노역 끌려가는 것보다는 공부하는게 낫다 판단한 이들도 있고, 병영에서 주는 급여보다 서리 급여가 배나 높아서 그렇다.

그리고선 서리 합격한 뒤에도 병영에 붙어서 밥도 먹고 옷도 받아서 살았다.

경기 인근에 지은 병영들은 이미 일종의 관사(官舍)와 노숙자쉼터가 뒤섞인 무언가에 가까웠다.


이들은 뺑이 좀 치면 되는 이 프리미엄 복지 관사(초가집, 벼룩이랑 쥐 많음)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관헌들도 이들을 필요로 했다. 병사들을 잡무에 동원하는건 왕이 아닌 각사 관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이들을 불러서 각종 잡역부로 부렸다.


이런 일은 원래 선상노비(選上奴婢)라고 해서 지방에 있는 노비를 차출해서 서울로 올려서 쓴다.

그런데 요역제가 한창 붕괴된 성종 부터는, 차출된 지방노비가 그냥 포를 서울 각사에 납부하고, 각사에서는 그걸로 사람을 사서 썼다.(삥땅도 쳤다)


그런데 왕이 경기 백성들 먹여살리겠다고 부대를 새로 만들어서 월료도 직접 주고 있으니, 그들을 부리면 대립가로 받은 포는 챙기고 공짜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나라 곳간을 도둑질 하기 위해 상하가 하나되어 움직이니 능히 임금도 이길 수 있었다.(上下同欲者勝) 조선의 성리학적 이상이 이렇게 실현되었다.




하여간, 그렇게 난민들의 병영은 일종의 인력사무소가 된 셈이다.


이 주먹구구로 돌아가고, 모두가 한입 뜯어 먹으려하는 나라 꼴에 왕의 한숨만 늘었다.


어쩔 수 없다. 해산은 안되겠다.


어차피 조선군의 번상제를 타파하고 전문직업군제로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난민 2만명이 훈련한다고 군대가 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병적을 정리하고, 지금 쯤 만연하고 있는 대립을 공식화하면 세수도 다시 늘어서 얘들 밥 값 정도는 나오겠지.'




박경식이 조선사에는 약해도 방군수포제와 대립, 군포제 같은건 알고 있다.

교과서에서 대동법을 통한 공납 개혁과 함께 제일 잘 다루는 경제사회제도 변화 중 하나니까.


그리고 바로 지금이 방군수포제가 생기기 직전의 작폐인 대립제가 만연하는 때다.


선상노비도 지방의 노비가 직접 올라오지 않고 포를 중앙에 바쳐서 사람을 사서 쓰고,

서리도 지방 향교의 낙제자가 직접 올라오지 않고 포를 중앙에 바쳐서 사람을 사서 쓰고,

병사도 지방 병사가 직접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사서 쓰는, 그런 상황이다.


이에 대한 혁파책을 내놓으라고 신료들을 모았다.


모든 신료들이 멀뚱멀뚱 거리고 있을 때 모친상 마치고 돌아온 유자광이 먼저 아룄다.


"신이 외방을 자주 돌아다니며 백성을 살필 일이 많았는데, 이 폐단은 결국 군액(=군사비)이 과하게 편성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정군이 10만, 보인이 30만이라 하나 어찌 그들이 군역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군액을 감하여 민생을 구제하는 것이 제일이 될 것입니다."


유자광이 나서 말하는데 신료들은 여전히 멀뚱거리기만 한다.


"다른 의견은 없소?"


"유자광이 아뢴 민폐는 과연 그러합니다. 이전 조종조에서 그것을 구제하고자 하였으나 능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군국의 일은 나라의 대계인데 어찌 함부로 군병을 줄이겠습니까?


신 등도 이 폐단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어떤 계책을 마련하여 없애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내려주시기 바랄 뿐입니다."(*4)


몰라. 니가 알려'줘'. 군사력 줄이지 말고.


"..."


'당신이 치트키 이세계 용사님이잖아. 당신이 알아서 해줘.'


신료들의 파업이었다.


---


<이하 미주>


*1 : 본문에 나온 저화의 크기는 경국대전에 나온 규격인 '저주지는 길이 1척 6촌, 폭은 1척 4촌'과 '저상지는 길이 1척 1촌, 1척' 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척은 같은 척이어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느 척인지에 따라 크기가 다른데, 일단 본문에서는 포백척으로 상정하고 약 46.6cm 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하면 구 저화는 길이 74.6cm, 폭 65.2cm 가량의, 본문 표현대로 '몸통만한 크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크기라고 계산하면 현대 지폐랑 비슷한 크기로 자르려면, 폭을 4등분, 길이를 10등분해서 40장 정도로 잘라야겠죠.


*2 : 많은 조창이 창고 건물을 못 갖췄다는 것은 9화 <아 장사하자 2>에서도 주석에서도 언급되었지요. 아산의 공진창의 경우 작 중 시점으로부터 20여년 뒤인 1523년(중종 18)에 23칸 짜리 건물이 지어집니다. 또 충주 가흥창의 경우 1521년(중종 16)에 80칸 짜리 건물이 지어지고요. 특히 충주 가흥창의 경우 연산 1년에 충청감사 김일손(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그 맞습니다)에 가흥창에 시급히 창고 건물을 짓고, 사주인을 혁파 해야한다는 상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원역사에서는 그가 상소를 올릴 무렵에 작 중에서는 박경식이 용산 락 페스티벌을 벌여 사주인들을 혁파했고, 그 연말에는 가흥창 건물도 지어줬으니 작 중 시점의 김일손은 왕에게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3 : 계산이 어려우실 수 있는데, 작 중 조선은 1년차에 정부 조직 유지에 1000만전 가량, '뉴딜'에 창고 건설과 미곡 매입에 700만전(원래 예측은 600만전)을 소비했는데, 전세가 당초 예측 1600만전보다 적은 1400만전 가량이 들어오고, 경매장에서 거래세로 100만전 가량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직 작 중 조선이 거래세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해서 경식은 임의로 연간 100만전 정도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4 : 박경식이 신료들을 부르고 유자광은 군액을 감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신료들은 군비를 줄이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 내용은 연산군일기 3년 기사에 있던 토론 내용을 일부 따온 것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군비를 줄이는게 맞다, 줄여선 안된다, 현상 유지하되 탈영병을 굳이 잡지는 말자, 일부 부대를 해산하고 그들을 보인으로 충당하여 군비를 대게 하자, 번상을 띄엄띄엄 시키자 등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왕이 알아서 해' 하고 선언해버리는 전개가 되었군요.


작가의말

캡틴설리반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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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자본과 기술 +72 24.06.21 9,139 480 21쪽
43 인클로저 +79 24.06.20 8,641 459 23쪽
42 봉 잡았다 3 +67 24.06.19 9,116 485 24쪽
41 봉 잡았다 2 +79 24.06.18 9,248 455 22쪽
40 봉 잡았다 +90 24.06.17 9,847 493 23쪽
39 탈상 +87 24.06.15 10,260 474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2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2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1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0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8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9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2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4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7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4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3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2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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