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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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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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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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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5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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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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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글자
22쪽

백성 2

DUMMY

서울 근처에 난민촌이 있거나 말거나, 서울 도성 안에서는 풍년을 즐기며 번성하고 있었다.


빈민들에게는 겨울은 추위를 버티는 계절이지만, 어느 정도 재산과 소득이 있는 이들에게는 가을에 수확한 것을 마음껏 쓰는 시기다.


국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잔치를 벌이는 집도 가끔 있었고, 그럼 신하들이 버르장머리 없이 사치하는걸 막고 금주령을 내려야한다고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미 졸곡을 지나서 술을 아예 못 마시게 하는 시기는 지났지만, 이런건 원래 괘씸죄가 더 중요하게 적용된다.


미래에서 금주령의 부작용을 익히 들은 박경식은 시큰둥 했지만, 그래도 부친상 중에 금주령 안 내리는 왕이라고 욕 먹기는 싫어서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러고선 얼마 뒤 또 미복잠행을 나갔다. "금주령이 잘 시행되나 시찰하겠다." 는 이유였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야 이놈들아! 빨리 치워! 술냄새 빠지게 주방 문 다 열고! 부채질도 해!"


"아니, 이런다고 하룻밤 사이 냄새가 빠집니까?"


"넌 집안이 물고 나는 꼴을 보고 싶으냐?! 안되면 주방을 헐던가!"


이 난리가 난 곳은 액정서 별감 안중남(*1)의 집.


액정서는 왕실의 비서 기관 중 하나로,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와 함께 왕실을 뒷배로 깡패질을 하는 양대 양아치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두 기관의 주요 차이는, 내수사가 전국을 무대로 합법 도적질을 해서 돈을 번다면, 액정서는 서울의 암흑가를 장악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액정서 소속 별감 놈들은 암흑가답게, 금주령이 떨어지자 '밀주' 사업을 시작했다.


거기까진 항상 하던대로니 별 문제 없었다.


문제는 갑자기 왕이 '손수 밀주 단속이나 나가볼까~' 하고 나들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액정서는 왕의 비서기관. 즉 왕의 미복잠행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이들 중 하나다.


박경식은 제 바로 옆에 그 밀주범이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정보를 흘려버린 셈이다.

어찌보면 박경식은 아직도 조선에 적응이 덜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왕은 부정부패를 보면 눈을 휘번뜩이며 전부 때려죽인다는 것은 이미 서울에 소문이 자자한 사실(과장 함유)이다.


이에 별감들은 급하게 자기네 집 구석에 잘 모셔져 있던 술들을 치우고 있었다.


"이제 곧 전하께서 출타 하신답니다! 시위 담당자는 안중남!"


'이런 싯팔...'


옷에 베었을지도 모르는 술냄새를 지우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궁으로 향했다.




"오늘 미행하는 동안에는 날 종친부(* 宗親府 : 왕실의 종친이 속한 관서.)의 어른이라 말하여라. 돈을 좀 쓸 것이니 '나리' 보다는 높아 보여야지."


"예, 알겠습니다. 혹시 누가 봉호(封號)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엥? 봉호? 그런거 생각 안 했는데...어, 어...연산군?"


"알겠습니다, 연산군 대감!"


자기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말해놓고서 되게 겸연쩍다는 듯 머리를 긁는 임금을 보며 다들 의아해 했다.




왕이 처음으로 간 곳은 시전이었다.


"시전에는 밀주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호위로 데려온 내금위 관헌이 말했다.


'아오, 그걸 굳이 말해야 하냐고!'


아무도 알 리 없는 안중남의 속만 타들어갔다.


그러나 왕은


"안다. 그러나 모처럼 나왔는데 인심을 좀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시전을 살피는 것 아닌가.


'...밀주 단속이 아니라 그냥 놀러 나온건가?'


안중남이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을 때 왕은 시전을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아녀자 이엄을 보더니 멈춰섰다.


"시전에서 이런 것도 파는가? 고관대작들도 흔히 쓰지 못하는 것인데."


사대부 같아 보이는 이가 이런 소리를 하니, 사치하다고 트집잡고 때려부수려는건가 겁 먹은 가게 주인이 친절해졌다.


"아이고, 여인들이 꾸미는 것을 사내들이 어떻게 막겠습니까?

사대부 규수 집안의 여인이면 모일 때 다들 초피를 두르려 하니, 도성 고관대작 분들도 부인 등쌀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지요."


"내 안사람은 겸손하여 굳이 그런 사치를 좇지 않는다네."


상인이 순간 '네? 갑자기 그런 소리를? 어쩌라구요?' 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표정을 가다듬고 "현숙한 부인을 두셨으니 복이 많으십니다." 하고 다시 기름칠을 했다.


"지폐로도 받는가? 값은 얼마인가?"


"지폐로는 300전이 됩니다."


"뭐? 얼마? 장난 말고 제대로 부르게."


"그, 그것이, 그 초피는 야인들이 들여오는 것이라 매우 귀한 것입니다.

거기에 요새는 또 경강방에서 경매란걸 하니 정말 부르는게 값이라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경매장에서는 사고 팔 때 세를 매기고, 세를 내지 않은 것은 도성에서 팔지도 못하니 이렇게 됐습니다."


"어허, 나라에서 경매에서의 초피 값도 다 방으로 써 붙이거늘 어디서 경매 핑계를 대며 속이려 드는가!"


"아이고, 나리! 초피라고 다 같은 초피가 아닙니다. 양계에서 나는 담비랑 두만강 너머의 담비랑 털이 다른데..."


왕이 그렇게 한참을 드잡이질 하다가 250전으로 깎고서는 좀 뒤로 빠져서 호위 관헌들에게 묻는다.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결국 이엄은 외상으로 사야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여항소시.


흔히 조선 전기의 상업에 대해 시전 정도만 말하고 끝내곤 하지만, 사실 인구 10만이 넘는 대도시 한양 쯤 되면 공식 시장 외에도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여항소시는 그런 서민들의 뒷골목 시장이다.


'역시 그냥 놀러 나오신건가? 여항시에도 밀주라곤 없을텐데...'


아직도 불안해하는 안중남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왕은 여항으로 들어갔다.


골목에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지러이 돗자리를 깔고 장사하는 소상들과 그걸 사며 흥정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팥은 얼마인가?"


"쌀로 사면 팥 한 되에 쌀 한 되 반이오."


"허! 이 사람이 참. 그럼 콩 값은 얼마인가?"


"쌀로 사면 쌀 한 되에 콩 세 되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 팥이 문자로 쓰면 어찌 되는지 아는가?"


"모르오."


"적두일세. 붉을 적자에 콩 두자를 쓰지. 즉 팥도 사실 콩의 별종인걸세.

그런데 콩은 쌀의 삼분지 일 값인데 팥은 어찌 쌀보다 비싸단 말인가? 팥 값도 콩 값처럼 내리는게 맞네."


"뭐래 이 미친 놈이? 그럼 네 집에선 메주도 팥으로 쑤던가."


"사실 팥으로도 메주를 쑬 수 있는데...아니 안 팔거면 안 팔면 되는 것이지 이놈이 왜 멱살을 잡아!"


시장 바닥에서 자연 과학의 혁신을 일으키는 흥정을 보며 왕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저 혁신적인 자연 과학 이론이 흥미로운 건 아니고.


"역시 여항에서는 아직도 지폐가 잘 쓰이지 않는군?"


"그렇습니다. 비록 지폐가 1문에서 1냥까지 값이 있다고 하나, 1문 짜리 지폐가 드무니 1전 아래의 값은 쌀로 사고 팔지요."


"역시 그런건가..."


여항에는 그런 풍경 외에도, 서리나 서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병사와 돌아다니며 소상들이 파는 물건을 뒤적이고 다니기도 했다.


"이 조는 어째서 세를 납했다는 관인이 찍혀있지 않는 것이냐?"


"무슨 말씀입니까? 조는 원래 세를 내지 않는 것 아닙니까?"


"어허! 도성을 드나드는 모든 물목은 관인을 찍어야하는데 무슨 소리인가!"


이건 조를 팔던 상인 말이 맞다.

조는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이다보니 일부러 면세하고 있는데 서리가 야료를 부리는 것이었다.


"역시 생계형 부패는 막기 힘든가..."


전근대 국가에서 이런 소소한 부패를 막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미래의 한국도 80년대만 해도 만연한게 경찰과 공무원, 교사들의 수뢰이지 않았는가.

서리들에게 산료를 준다하나 최소 생활만 가능한 수준인지라, 생계형 부패를 박멸하는건 사실 경식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삥을 뜯는데 안 말릴 수는 없는 법.


겸사복을 시켜 말리자, 겸사복은 갑자기 급발진해서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아니, 잠깐! 왜 이런 일에 칼을 빼들려하는가!"


그 말에 겸사복은 '전하께선 원래 부정부패하면 다 처죽이는거 아니셨습니까?'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리들이 왕은 못 알아봐도 겸사복은 알아보는지라 금방 관두고 도망쳤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는 나 말고 저 연산군 대감께 하여라."


"감사합니다 대감!"


왕은 가짜 작호를 불릴 때마다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크흠. 별거 아닐세. 아까 같은 그런 일이 자주 있는가?"


"자주 있기는 한데, 조는 세를 내지 않는게 법도라고 말하면 웬만해서는 그냥 가는 편입니다. 이번 서리가 좀 질긴 편이었지요."


"그놈 이름은 혹시 알고 있나?"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잡기 쉽지 않겠군.


"그 조, 지폐로도 값을 받는가?"


"아이고! 지폐로 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이 정도 양의 조는 지폐 한 장 값도 되지 않습니다!"


'하긴, 1말 정도니 3문이어도 많이 주는 셈일텐데...한 장이라.

아무래도 1문 짜리 지폐는 본 적이 없고 1전을 먼저 생각해서 이러는 모양이군.'


그 정도로 지금까지 지폐 발행 때는 1전 짜리의 양이 많았고, 일상 거래에서도 많이 쓰인다.


화폐경제를 더 퍼트리려면 역시 1문 단위 지폐도 더 많이 필요했다.


사실 경식도 1문은 안 챙겨왔다. 1문이면 저 밑의 경주인저 시장이나, 경강삼방의 싼 숙소에서의 밥 한끼 값 정도 될까.


물론 경식이 겨우 1전을 아낄 필요는 없는 몸이다.


"그냥 웃돈 받은 셈 치고 받게." 하고 지폐로 상인이 팔던 조를 싹 사갔다.




이번에 왕이 향한 곳은 경주인저다.


안중남이 본격적으로 불안해졌다.


'결국 밀주 단속을 하시는 것인가! 어떻게든 다른데로 돌릴 수는...'


"전...아니, 대감? 경주인저는 근래는 모리배들이 몰리고 불량한 한량들이 많아 가실 곳이 못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안 별감? 그래서 자네들을 대동한 것인데."


사실 액정서에, 조선 최강 전투력의 부대인 내금위, 겸사복까지 예닐곱을 대동하고 다니는데, 이 전투력으로 불량배 몇 못 잡으면 그게 이상하다.


"저는 대감 몸이 상하실까 걱정되어..."


"그 정도야 내가 알아서 피하지. 걱정 말고 경주인저로 갑세."


경주인저는 원래 지방에서 올라온 서리들(경주인)이 머무르며 지방관아와 연락을 담당하는 곳이다.


공물을 납부하러 올라온 서리들도 이 경주인저에 머무르며 세공물을 납부 하는게 원래 원칙이다.


그런데 경주인이 하던 서리들을 숙식 시키는 이 일을 경강의 사주인들이 가로채고 있는 상태였다. 덤으로 사주인들은 물건을 빼돌려 시전에 팔기도 했고.


경주인은 사주인들이 물건을 빼돌리는 바람에 공납이 늦어지면 대신 책임지고 얻어터지는 서러운 일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식이 사주인들을 손수 때려잡고, 경매장을 설치해서 관아가 경매장에서 필요한 물자를 사도록 바꾸었다.


그럼 그 뒤로 경주인은 뭘 했을까?


사주인에게 일을 뺏기기 전에, 경주인저는 지방 사람들이 모이고 물건이 모인 곳 답게 자체적으로 숙박 시설로 변하고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사주인이 박살 난 뒤, 경주인저는 다시 그 일을 도맡아 했다.


이걸 포착한 경식은 바로 숙박업소 관리법을 만들어서 관리를 시작했다.


각 업소마다 계를 조직 시켜서 세납 책임과 영업권을 주고, 타 영업점이나 미등록 업체를 단속하고 감시할 수 있는 권리도 줬다.


장부와 거래영수증과 숙박증도 표준화해서 매출에 따라 세금을 걷으려고 했다.


경주인도 공인이라, 원래는 줄뻔했던 월급도 이렇게 영업권 주는 걸로 생색을 내며 아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아날로그 방식이다보니 잘 돌아가진 않았다.


장님도 경저 근처에 오면 매일 수 천 명이 드나든다는 것을 눈치채겠지만, 그들이 신고한 매출은 반년 동안 수백명 정도였다.

미래 한국에서 현금 결제하면 깎아주는 소상인들을 생각하면 이들과 대충 비슷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조선에 중요한 세금은 토지세이니 이런 소상공인 괴롭혀봤자 민심만 나빠질 것이라 대충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서울의 암흑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고.


경식이 경주인저를 보고서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사극에서 본 주막들이랑 비슷한 느낌이군. 그런데 큰 곳은 기와까지 올렸어.'


사실 교과서만 잘 봤어도 기억하겠지만, 주막은 조선 후기에야 나온다.


물론 경식이 조선 전기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알았듯 주막의 맹아 쯤 되는 시설인 사주인저나 경주인저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제도권 내의 숙박 시설로 탈바꿈 한건 경식의 정책 때문이었다.


게다가 경식이 도입한 경매 때문에 조선에서는 없었을 풍경도 보였다.


"이번 물건은 특히 좋은 것입니다! 두만강 너머 야인들이 가져온 초피 10벌! 서강 경매장에서 사온 값 그대로 200전부터!"


"220전!"


"225전!"


경주인저 앞마당에서 사설 경매장이 열리기도 하고,


"평양에서는 초피가 1벌에 10전 꼴이라는데..."


"아니, 양계에서 잡히는 초피는 털이 거칠어서 그렇네. 꼬리 정도나 붓으로 만들만 하지."


"함경도에도 경매장 설치 안되나? 함경도쪽에 야인이 많아서 담비를 잘 잡을텐데."


"내가 들으니 함경도 야인들은 농우와 농기구가 급해서 소와 철을 그리도 비싸게 산다더군."


"봄이 되면 배를 사서 그쪽으로 가볼까."(*2)


매달 방으로 돌리는 가격 공시를 보고 소문을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풍경만 보면 조선은 벌써 자본주의 국가, 중상주의 국가로 변한 것 같군.'


물론 이런 모습은 서울, 잘 쳐줘도 마찬가지로 경매장이 설치된 평양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실제로 관헌들은 아주 많은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직 조선 땅의 대부분은 농업 경제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첫 해의 화폐도입과 토지세 개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니, 올해는 이 재원을 기반으로 상업과 실물경제를 본격 확대해야겠지.'




왕이 서울의 풍경들에서 그런 영감들을 얻고 있을 때, 양아치 안중남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여자랑 쑥덕거리고 있었다.


"안 별감님? 여기서 뭐하세요?"


"겨울이?!"


안 별감이 뒷배를 봐주며 술도 좀 거래하고 있는 기방에서 배우고 있는 소기(少妓) 김겨울이었다.


"너야말로 아직 1월인데 왜 여기서 돌아다니느냐?"


"왜냐니...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악기를 배우러 온거죠."


안중남이 왕 쪽의 눈치를 보며 겨울이에게 속삭였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나라에서 금주령이 지켜지고 있나 살피러 왔다!"


"그건 안 별감님이 봐주시는 일이잖아요."


지금까지 니가 우리한테 받아 처 먹은 건 뭔 줄 알고서 이러느냐는 눈치를 담은 목소리로 김겨울이가 쏘았다.


"아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높은 분이 와서 그렇다."


"...안 별감님도 어떻게 못하는 분이 있다고요?"


그게 누구지? 임금? 임금이 여길 왜 와?


안중남도 여기서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저기 계신 종친인 '연산군 대감' 께서 암행 중이시다. 주상의 손발 같은 분이라 저분 눈에 들어가면 우린 끝장이다."


"...? 조선 팔도에 그런 종친도 있었나요?"


"어허! 아무튼 그런줄 알아라."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주실건데요?"


"그걸 생각 중이다. 혹시 기방에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느냐?"


"지금 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아나요?"


그 때 '연산군 대감'이 안중남을 불렀다.


"아무튼 내가 대감이 기방으로 못 가게 어떻게 해볼테니, 어서 가서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라. 빨리!"


어린 겨울이 눈에도 놀라울 정도로 지금의 안중남은 못 미더웠다.




박경식은 조선에 온지 만 1년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돌아다니면 아직도 조선 시대에 들른 관광객 같은 기분이 되었다.


덕분에 이런 '서울 구경 처음 온 촌놈' 같은 연출도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연출이 아니라 진짜이긴 하지만.


"이 사주인저는 꽤나 으리으리하군! 기와도 올리고 말이야."


"대감, 거긴 기방입니다."


"그으래? 역시 이런 곳이면 사사로이 세우는 기방도 있고 그렇구나."


안중남에게는 끔찍하게도 주변에 많고 많은 기방 중 임금이 관심을 보인 곳이 하필 자기가 봐주던 곳이다.


'시설이 놀라울 정도로 좋구만. 굴뚝이나 부뚜막 모양새를 보아 온돌도 있는 것이렷다...'


조선에 온돌이 완전히 널리 퍼지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 사실 지금은 궁궐조차도 모든 칸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다.


이 기방은 그야말로 최신 시설의 건축물인 셈이다. 과연 이런 곳이니 겨울에도 기방을 영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에서 동태를 살피던 김겨울이는 안중남이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직접 나서기로 했다.




경식은 나름 조선의 풍경에서 차기 정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지만, 이렇게 두리번 거리고 있으니 다들 서울 처음 와 본 촌놈으로 오해했다.


경식이 두리번 거리며 뜸을 들이는 틈을 타서 김겨울은 뒷문으로 들어가 바로 스승 매월에게 아룄다.


매월은 겨울이 가리킨 사내를 보았다.


옷 입은거나, 키 크고 피부가 흰게 분명 지체 높은거 같기는 한데, 하는게 영 촌놈 같았다. 얼굴에 여드름이 박박 돋은 걸 보아 어려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정말로 저 촌놈이 서울구경 온 듯 알짱거리는 사내가 밀주 단속을 하러 온 임금의 수족인가? 매월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저분을 모셔라. 일단 술이 없는 방으로 안내해. 이패들을 보내 성품을 알아보아라. 그 사이 왈짜들을 시켜 술은 경강으로 옮기겠다."


한마디로 시간을 끄는 사이 술을 빼돌리겠단 거다. 하긴 기생들이 제일 잘하는게 바로 사내 시간 뺏는 일이다.


이에 겨울 외 이패 기생들이 나와 이 '대감'을 꾀고 있는 것이다.


"거기 알짱거리는 손님, 들어오실건가요, 마실 건가요?"


향낭을 잔뜩 지니고 분을 잔뜩 뿌려 냄새가 독할 정도로 나는 여인들이 나와 채근했다.


"흠? 여기서 일하는 기생이냐?"


이곳은 삼패의 싸구려 기생집이 아니다. 그래서 별감을 뒷배로 밀주 장사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지체가 높은 기생일수록 단순하게 손을 꾀려고 해서는 안된다. 남녀 관계는 미래에도 밀당이 필수가 아닌가. 사내란 되려 애를 태울 수록 넘어오는 존재들이다.


"지체가 퍽 높아보이시는 분이 서울 기방 처음 보는 것처럼 목 빼고 구경만 하시니 눈에 띌 수 밖에요. 풍류를 아시는 분이시라면 들어오시지요. 기방오불도 모르시는 한량이라시면 그냥 돌아가시고요."


"미안하지만 내가 부친상을 치루는 몸이라."


"효성이 깊은 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졸지에 상 중인 사대부를 도발해서 기방으로 꾀려고 한 년이 된 김겨울은 태세를 빠르게 전환했다.


"내가 이렇게 소복을 입고 있는데도 못 알아보다니 아직 더 배워야겠구나."


'조선 사람들은 태반이 평소에도 흰 옷인데 그걸로 어떻게 알아?!'


"내가 기방 드나들고자 이러는건 아니고. 공무가 있어 돌아다니는 것이다. 너희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신경 안 쓰긴! 그 공무가 잡으려는게 우린데!'


"그나저나 여기서 뭔가 냄새가 나는구나. 시큼한게 꼭 수..."


"기생들이 쓰는 사향의 냄새입니다. 근래는 여항의 여인들도 흔히 쓰지요."


다른 기녀가 둘러댔다. 촌놈 같던 사내조차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로 구차한 변명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됐다. 이곳은 볼만큼 봤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


기녀들의 촌놈 붙잡아 시간 끌기 작전은 실패했다.


안중남은 절망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곧 왕이 한성부 관헌들을 불러 이 기방을 초토화하고, 의금부에서 국문하고, 거기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미래를 상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왕이 가는 곳은 한성부판윤 동헌이 아니었다.


그 대신 경강삼방 쪽으로 향하겠다며 남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안중남의 절망이 사그라들었다.


'남쪽으로 간다! 남대문으로 나가서 경강으로 가려는거야!'


'우린 이 틈에 광희문(* 동남쪽에 있는 한양도성의 문)으로 빠져나가서 용산방에 술을 건네면 되겠군!'


기방 왈짜들도 이 기회를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경식이 광희문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안중남은 기방 왈짜들이랑 자기들이 길이 겹치고 있다는걸 알고서 절망했다.


"대감, 광희문은 시신이 드나들고 문 밖에는 병자들이 모여 있어 가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그곳을 잠시 들러 살피려는 것이다."


남소문이라고도 불리는 광희문은 도성에서 사망한 자의 시신을 밖으로 운구할 때 쓰는 문이다.


묘지도 근처에 많이 있고, 곧 죽을 운명인 자들도 몰려 있고 병자들을 위해 굿한다고 무당집도 인근에 몰려 있으니 다들 불길하다고 여기는 곳이었다.


그래서 왈짜들도 거기로 몰래 빠져나가서 용산에 있는 점포에 술을 맡기려고 한 것인데 뜬금없이 왕도 광희문으로 간다니 황당할 지경이었다.


안중남은 하늘이 자기를 괴롭히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


<이하 미주>


*1 : 안중남은 연산군일기에 언급되는 실존 인물입니다. 다만 실제와는 행적이 다릅니다. 연산 6년 기록에 두모포에서 백옥을 캐서 바친 상인으로만 언급되다가 8년에 갑자기 액정서 서방색으로 다시 등장하는걸 보아, 백옥을 바친 뇌물 값으로 액정서에 등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만 따온 캐릭터로 보시는게 맞겠습니다.


*2 : 작 중에서 초피, 즉 담비가죽이 여러번 언급되는데, 담비 가죽과 관련된 사치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 역사의 조선에서 성종~중종 연간에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작 중에서 초피이엄(귀덮개)가 300전으로 언급되는데, 실제로도 연산군 대에 초피 한 마리 값이 면포 10필 정도 되었다니 작 중에서는 그냥 초피 하나도 50전은 되는 셈이지요. 모피는 지금도 비싸지만 전근대에도 상당한 사치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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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신항로 2 NEW +72 9시간 전 3,734 332 25쪽
47 신항로 +47 24.06.26 6,357 391 25쪽
46 수완가 +58 24.06.25 7,369 380 22쪽
45 아이신기오로 +98 24.06.24 8,200 465 24쪽
44 자본과 기술 +72 24.06.21 9,139 480 21쪽
43 인클로저 +79 24.06.20 8,641 459 23쪽
42 봉 잡았다 3 +67 24.06.19 9,117 485 24쪽
41 봉 잡았다 2 +79 24.06.18 9,251 455 22쪽
40 봉 잡았다 +90 24.06.17 9,849 493 23쪽
39 탈상 +87 24.06.15 10,261 474 21쪽
38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56 24.06.14 10,173 478 22쪽
37 생일 축하합니다 +55 24.06.13 9,892 452 23쪽
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3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3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1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1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4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8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8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30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8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7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5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3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 백성 2 +40 24.05.27 12,593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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