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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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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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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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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백성 3

DUMMY

광희문(光熙門)을 나서자 바로 즐비하게 늘어선 움막들이 보였다.


경식이 난민촌에서도 본 그것과 똑같았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이라서 이미 숱한 병자들이 죽어서 묻히길 기다리고 있지만, 땅이 아직 얼어서 묻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조선의 의료복지는...혜민서 말고 뭐가 있지? 동시대 세계는?'


조선은 정규 기관으로써 의료 기관은 한양의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말고는 없는 수준이다.

각 지역에 의학생도가 있긴 하나, 향리 계층으로써 세습되는 자리고 수령이 교육 시키는 수준이라 시설이나 기관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동시대 서양도 대단히 발전한 수준이라곤 할 수 없으나, 중세 무렵이면 이미 곳곳에 도시가 발전하고 수도원 등에서 빈민 구호를 하거나 순례자 병원을 운영하던 것에 비하면 조선은 그보다도 열악했다.


물론 전근대 의학을 더 키워봤자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시대에 의학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근대로 전환될 때 인류 평균 수명의 증가 대부분은 영양상태 개선과 위생 개선, 영유아 사망률 감소를 통해 가능했다.


'이들을 위해서 뭔가 한다고 해도...그냥 최후를 좀 더 따뜻한 곳에서 기다리게 해주는 정도가 전부이려나...'


경식은 왕으로 돌아가서 해야할 일을 하나 씩 머리 속에 정리하며 다시 경강삼방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조선사를 관통하며 정부가 관리하지 못하는 상인 계층이 성장해야 했을 공간인 용산.


이젠 토벽에 목책이나마 세워진 소도시로 변화했고, 관리들도 파견된 항만 도시로 변했다.


이곳을 장악했던 사주인들이 조선 후기에 점차 자본이 쌓이면서 여각, 객주, 공인 등으로 발전하는게 원래 역사의 궤도지만, 경식이 관세사를 설치하고 관리하면서 사주인들도 강제로 변해야 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고나 방저가 똑같은 같은 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주인층들도 숙박 시설이나 창고 시설로써 영업을 하고 있다.


일단 국가가 관리하는 숙소나 창고도 그냥 기존 사주인들 중 몇몇의 집을 뺏은 거라서 특별히 대단히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물류가 급증해서 그 관고로는 감당할 수도 없어서 그렇다.(*1)


물론 이제는 국가가 관리하는 상안에 등록된 이들이라는게 다르다. 이제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뒷배가 된 이들은 쑥쑥 성장하여 지극히 상인스러운 양심으로 세금을 상인 기준에서 성실히 납부하고 있다.


그 발달한 상업 소도시는, 이미 유흥가가 진출하기 시작하여 서울 도성에서 직접 하기에는 약간 그런 일들이 좀 더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왕이 관료들 기강을 잡는다던가 행정 인력을 늘인다던가 이것저것 했지만 딱히 1년 만에 뿅하고 청렴해지지는 않았다. 사실 되려 좀 더 엉망이 됐다.

그래서 이미 밀주 양조장들이 관리들에게 인정 좀 먹이고서 자리 잡은 상태다.


겨울이라서 배가 못 다니니 객은 뚝 끊겼지만, 그런 일을 하기에는 참 적당하니 서울에 본점을 두고 있는 업체들도 이곳에서 부업을 하고 있었다.

안 별감이 뒷배를 봐주고 있던 기방도 그렇다.




"헉, 허억! 이제 따돌렸겠지?"


"저놈 이미 우리가 술 빼돌리는거 알고 있는거 아냐? 아니고서야 이렇게 길을 정확히 따라올리가..."


"그...그럼 이렇게 도망치고 술 숨겨도 소용 없는거 아냐?"


"술독은 버리고 도망칠까?"


"허튼 소리 마! 술 한 독이 얼마인지는 알아!"


겨울이면 누룩이 잘 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에 미리 만들어둔 술로 겨울을 넘겨야하는건데, 금주령으로 술 값이 오른 지금 버리기에는 아깝다.


덕분에 버리지도 못하고, 몰래 빼돌리는 것이니 수레를 쓰지도 못하고 낑낑거리며 지게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용산방에 도착했다. 이제 지점의 양조장에 잘 되돌려 놓으면 임무는 완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잠깐, 지금 지고 있는 물건이 뭐냐. 관인도 안 찍혀 있는데. 좀 봐야겠다."


평소에 못 보던 수상할 정도로 정예한 병사가 용산방 성문을 지키며 왈짜들을 가로막았다.


아하, 번상이 바뀌어서 이 친구는 인정을 아직 못 받아서 이러는거구나, 하고 지폐를 쓱 내밀었다.


"어허!! 어딜 감히 인정으로 어물쩍 넘기려고 하는가!!! 이런 비리는 주상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정병 김막동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왕이 듣는다면 '엿 한 번 줬다고 총애씩이나?!' 라고 할 소리지만 아무튼 이렇게 용산의 기강이 잡혀 있었다.




안중남은 왕을 경강삼방 중 용산만은 아닌 아무데로나 유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용산은 이전에 친림하셔서 바로 잡으셨는데, 이번에는 마포나 서강으로 가시는건 어떨지요?"


"듣고보니 그도 그런데, 이미 미정시(오후 2시) 아니냐. 거기까지 가면 돌아갈 때를 맞추지 못할 것이야."


"사실 용산까지 가는 것도 시간이 약간 애매합니다. 아직 1월이라 해가 일찍 집니다."


"그도 그렇군...그럼 돌아가는게 낫나?"


'됐다!'


"아니, 생각해보니 미시(오후 3시)까지가 경매 시간이지? 용산이 비록 강이 얼어 선상은 안 온다고 하나 보부상들의 경매는 계속하고 있을 것인데, 지금 빨리 가면 그걸 볼 수 있겠어."


'젠장! 안됐잖아!'


변덕스러운 상사를 모시면 이렇게 고생스럽다. 안중남은 울상을 지으며 왕을 따라가야겠다. 말려내기는 커녕 마음이 급해진 왕이 말까지 얻어서 한달음에 용산까지 가고 말았다.


그런데 용산방에 와보니 뭔가 이상하다.


"주상 전하의 총애 좋아하네! 이분들이 누군지 몰라!"


"혼자 정예한 척은 다 해먹는구만!"


멀리서 보자니, 문을 지키던 병사들과 방에 들어가려던 보부상들이 실랑이가 난 것 같다.


이럴 때야말로 끼어들어야지, 양반으로 태어나서 뭣하는가? 바로 박경식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가?"


"헉...! 저, 저...! 나리...!"


그 얼굴을 알아본 막동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방에 들어가려고 했던 왈짜들의 얼굴이랑, 안중남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막동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정을 듣자니 안타깝게도 이 실랑이는 정의로운 병사들과 밀주상의 다툼이 아니었다.


막동이는 혼자만 FM 대로 하려다가 같은 병사들이랑도 다투고, 상사인 수문장에게까지 깨지고 있었다.


모두가 장님인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라지만, 모두가 부패한 나라에서는 강직한 자가 벌을 받는 법이다.


과연 수문장도 왕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굴이 잿빛이 되어 있었다.


"정병 막동의 말이 옳거늘 어째 수문장은 막동을 나무라는가? 이들의 짐을 조사하여라."


이미 누구도 이 젊은 나리가 누구길래 무슨 권한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묻지 않았다.


왈패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채 병사들과 호위관헌들이 지게의 짐을 뒤지자 청주와 소주가 나왔다.


다들 심각해진 와중에 되려 짐을 조사하게 시킨 왕만 덤덤했다.


'역시 금주령이 내리자마자 이렇게 밀주 사건이 터지는군...'


겸사복들이 또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해치울까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일단 진정시켰다. 경식은 이들이 왕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길래 이렇게 급발진하는건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너희는 누구이길래 이런 술을 방으로 들이려 하느냐? 탁주도 아닌 청주와 소주인걸로 보아 세력 있고 부유한 자들에게 접대하는 술이렷다."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한 왈짜들이 솔직하게 사정을 다 불었다.


서울 경저리의 기방에서 밀주를 판매하고 있으며, 양조는 이 용산방에서 행해지고 있고, 사실 여태 뇌물을 줘서 숨기고 있었다고.


'높으신 분이 친히 밀주 단속 나온다' 고 소식이 전해지는 과정에 김겨울이 중간에 낀 바람에, 안중남에게는 다행히 그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다.


왕이 수문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문장은 사시나무 떨듯 왈짜들보다도 더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용산방 수문장 주윤문은 들으라. 비록 지금 네 임무가 급하고 내가 편전에 있지 않아 처벌하지 않으나, 내일도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막동이를 보고도 말했다.


"기정병 김막동은 성품이 강직하여 그 공로가 크므로 상하겠다. 역시 편전에서 논하겠으니 방을 계속 시위하며 기다리라."


그리고 제일 문제인, 걸린 밀주꾼들.


왈짜들은 왕이 자기들에게만 말을 안 하고 뭔가 뜸을 들이니 되려 더 겁이 났다.


"...추운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궁으로 돌아가서 논하지. 이들은 일단 추포하여 한성부에 넘겨라."




경식은 원래 하려던대로 용산방을 좀 더 본 후에 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과연 아직 강이 녹지 않아 배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지게나 등짐이 이곳저곳 놓여 있어 지금은 대부분의 상인들이 보부상임을 알 수 있었다.


또 관아에서 운영하는 창고 외에 사설 창고들도 그 사이 건물이 더 커져 있었다. 급하게 지었는지 상태가 영 별로긴 한데, 경식의 눈길을 잡아끄는게 있었다.


'창고마다 수레가 꽤 많이 배치되어 있군. 민간에서는 꺼리는 줄 알았는데.'


미래 한국인들이 흔히 아는 '조선에서는 수레가 안 쓰였다' 는 것은 오해다.

박경식도 조선에 대한 사관이 좀 삐딱하긴 해도 한국에 있을 때도 그게 오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조선은 왜 수레 보급이 부족했냐는 논의에는 미래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있긴 한데, 일단 박경식 본인이 조선에 와서 생각하기론 그냥 수레 만드는 기술과 도로가 부족해서 그런 것으로 보고 있었다.


수레 사용을 장려했는데도, 서울 내에서는 수레를 쓰다가도 도성 밖으로 나가면 수레가 자꾸 부서진다면서 그냥 짐을 머리에 지고 간다는 사례들이 자꾸 보고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차 개선해가려고 했는데, 이제보니 경강삼방 쪽에서 서울로 물건을 옮길 때는 수레가 꽤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2)


보부상들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경매에서 호가를 부르고 있었다.


암시장 같은데로 안 빠지고 거래가의 5%를 성실 납부하고 있으니 이들 정도면 조선 상인 중에서는 양심 0티어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이번 물건도 훌륭한 것입니다! 육진에서 잡은 담비가죽! 이 정도면 궁에서도 탐낼만 하지요!"


"아까부터 이놈도 저놈도 다 최고의 초피라고 하는데 이런 사기가 어디있나!"


"그래! 딱 보니까 어디 토끼 가죽에 숯가루를 바른거구만!"


"아니, 아직 가격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초를 치시나! 안 살거면 경매에 오지를 마시오! 10마리에 100전부터 시작합니다!"


"..."


"아무도 값을 안 부르잖아! 더 낮춰라!"


"우우우!!!"


경매에서 물품을 내놓고 팔고 있는 상인이 오만상을 찌뿌러트렸다.


"초피라는 것이 이렇게 조선에서 유행이었나? 가는 곳마다 초피 이야기만 하는군."


"성종대왕 시절부터 초피로 사치하는 풍조가 퍼져 이런 모습은 매년 벌어집니다."


"그나마 겨울이 끝물이라 값은 지난 달보다는 낮아진 거 같군. 시전에서 상인이 부른건 이제보니 바가지였어."


그런 이야기를 하며 경식은 미래에서 배운 근세 유럽에서의 모피 무역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경제학만 활용해서 그렇지 경식의 복전 중 하나는 사학이고, 주력으로 파고 든 건 근세 유럽 사회경제사다.


모피 무역은 근세 유럽의 사회경제사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찾아와 세계 기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추위를 버티기 위한 방한구가 필요해졌고, 모피는 그런 목적과 사치재로써 수요를 동시에 충족하는 물건이었다.


특히 그 때 히트 품목은 담비 모피와 비버 모피였다. 러시아는 담비 모피를 위해 시베리아로 진출했고, 서유럽은 비버 모피를 위해 캐나다로 진출했다.


'지금 조선은 아직 16세기라서 소빙하기가 시작된 건 아닐텐데...그냥 대륙성 기후로 추운 것이랑 소득 증대로 수요가 증가한건가? 내가 모르는 사업 아이템이 있었군.'


이 모피 무역을 활용한다면 개발에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식이 그런 구상을 하고 있을 때, 경매가 끝나간다는 걸 눈치 챈 주변의 숙소들은 호객을 시작했다.


"나리, 서울로 장 보러 오셨습니까? 서울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묵으시지요. 서울은 지금 금주령이 추상 같이 떨어져서 약주 한 잔 못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코 앞으로만 내려와도 밀주가 성행하는데 무슨 금주령이람...'


호객하려던 장사꾼에게 갑자기 병사가 끼어들어서 뒤늦게 FM 대로 밀주 단속을 하려 들었다.


"네이놈! 여기는 국법이 미치지 않는 곳인줄 아느냐! 금주령이 내려있는데 어딜 감히!"


평소에는 뇌물 주고 잘만 물장사하던 장사꾼은 뇌물 값이 부족하다는 뜻인줄 알고 병사에게 지폐를 한장 슥 내밀 뿐.


방금 전, 대충 왕이 온 순간 쯤부터 정예해진 병사는 "누가 이런 거 받으려고 하는 줄 알아!" 하고 호통을 쳤다.


"이보게. 거기 나졸."


'누구인지 몰라도 아무튼 수문장이 납작 엎드리던 높으신 분'이 부르자 병사는 바로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예, 예이 나리?"


"됐으니까 가보게."


"허...허나..."


"자네 상관한테도 내가 말 해 둘 테니까. 괜히 이제 와서 여기 장사꾼들 괴롭히지 말고 들어가게."


병사는 쭈글해지며 돌아갔다.


호객하려던 상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더 자세가 낮아졌다.


"아...아하하...지체 높으신 분인걸 못 알아뵙고...저희 가게가 아주 좋은 곳은 아니니 오시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지요."


하며 물러났다.


물론 장사꾼이 이 사람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도전자가 다가왔다.


"의관을 보아 지체가 높으신 분인데 저희 가게에서 묵으시지요."


순간 그 호객꾼을 보고서 경식은 양반도 여기서 장사를 하나 놀랐다. 비단옷을 입고 초피를 둘둘 두르고 큰 갓을 쓴 게 상민이 입을 의관이 아니었다.

부상대고들이 의관을 사치스럽게 입어서 사대부의 의관을 범한다고 신료들이 몇 번 투덜거린 적이 있는데 과연 이런 이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옷만 봐도 이 자가 영업하고 있는 가게가 얼마나 잘 나가고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아니, 됐네. 이제 곧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 잠시 출타를 나온 것 뿐이야."


"그렇습니까?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름은 뭔가?"


돌아가려던 호객꾼을 경식이 불러 잡았다.


"말업을 좇는 천한 놈이라 대단한 이름은 없고, 그저 천구지금(千仇知金)이라는 이름만 있습니다."(*3)


경식은 천구지금의 옷차림을 위부터 아래까지 찬찬히 살피고 말했다.


"초피 무역으로 치부했군. 여기서 초피를 도고하고 있겠어. 초피 외에도 가죽 잡물을 다루고. 아마 아비 때부터 여기서 자리잡았을테고."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요?"


경식이 갑자기 셜록홈즈의 스캔 재능을 각성한건 아니고, 간단한 추론이었다.


초피 경매가 이뤄지는 자리에 있었으니 관련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일 것이요, 초피를 과도하게 두르고 있는 것은 자기가 취급하는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또 초피는 절대 수량 자체가 적어 초피만으로는 장사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며, 방금의 가짜 초피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초피 외의 여러 가죽을 다뤄봤으니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치부는 하루아침에 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초피의 유행이 성종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니, 이 자의 아비 대부터 초피 취급을 시작했다고 치면 얼추 시간이 맞다.


천구지금이 으리으리한 옷을 빼 입고 다니는걸 보니 경식도 은근 사대부들이 복식금제 같은 꼰대질을 한 이유가 은근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녀석들에게서 세금을 제대로 걷어야하는데...법인세 같은 건 지금 꿈도 못 꾸고 어떻게 안되나?'


높으신 분이 자꾸 자길 빤히 처다보니 천구지금은 불안해졌다.

워낙 사대부들이 상인들을 트집 잡고 때려잡는 일이 많은 시대라서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경식도 천구지금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굳은걸 눈치챘다.


"크흠. 아무 일 아닐세.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았구만. 난 이만 해가 지기 전에 서울로 돌아가야겠네. 이만 갑세."


"예, 연산군 대감!"


'...거, 갑자기 봉호를 묻길래 급하게 둘러댄건데 왜 하필 저걸 말했는지...참 듣기 그렇구만.'




왕이 또 싸돌아다니더니 또 무슨 죄인을 추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료들은 머리가 아픈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 왕은 자기가 포졸이라도 되는 것인가. 왜 돌아다닐 때마다 죄인을 직접 잡아온단 말인가.


내의원까지 허겁지겁 달려와서 안부를 물었다.


"전하! 옥체는 상하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번에는 편곤을 직접 휘둘러 사주인들을 때려잡았으니(그런 적 없음),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오해를 안 하면 이상하다.


"내 몸이 상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느냐. 아무 일 없으니 경망하지 말라."


'아무 일! 없었다!'는 저 소리를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긴가민가하는 내의들을 뒤로 하고, 왕은 석강(* 저녁에 여는 경연)을 핑계로 신료들을 모았다.


신료들은 왕이 또 이러네 하는 표정을 숨겼다. 이 왕은 경연을 항상 정책 연구 자리로 만들고, 심지어 듣도보도 못한 이론으로 신료들을 눌러서 관철 시킨다.


오늘은 또 무슨 신비한 이론을 떠올려서 신료들을 고생시킬까.


특히 호조는 귀납적 추론을 통해서 이 왕이 이런 식으로 운을 띄우면 주로 자기들 앞에 일폭탄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이 말을 좀 띄우자마자 호조는 패닉 수준의 공포를 느꼈다.


"저, 전하! 아직 작년의 전세의 결산도 미처 다 끝내지 못했는데 또 다른 경장은 무리합니다!"


"응? 아직 뭐 경장한다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경식 딴에는 요새는 신료들 너무 바쁜 걸 배려해서 속도 늦춰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호조는 아직 한창 바쁘다. 원래 재경직은 결산 때가 제일 바쁘다.


사실 끔찍하게도 호조의 귀납적 추론은 정확했다.

요 며칠 간 왕이 둘러보고 오며 '이거 뜯어고쳐야지' 라고 생각한 부분만 대체 몇 개였을까.


"크흠! 뭔가 또 새 법을 세우겠다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건 아니고, 내가 여항을 살피니 병사들이 금주령을 핑계로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았네.

그러니 이번 금주령은 역시 취소하고, 기강이 해이한 몇몇을 벌하고 기강이 잘 잡힌 병사는 좀 상을 논하려하오."


"그런 일은 경연이 아니라 편전에서 논할 일이 아닌지..."


"아이고. 듣고보니 그렇네. 그럼 그건 내일 편전에서 말하고, 오늘 석강은 여기서 파하겠소."


왕이 자기가 사람들 모아놓고서 멋대로 빼려고 하자 신료들이 되려 왕을 붙잡았다.


"전하! 군주의 몸은 보통 사람과 달라 보살피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잠행하실 때 몸이 상하지 않았다고는 하시나 겨울의 한기에 기운이 상하신 것 아닌지 어의가 살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하들은 이 좌충우돌하는 젊은 왕에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이고, 알겠네, 알겠어.' 하면서 왕은 어의를 좀 보더니 내전에 들었다.


왕의 하루 서울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



왕이 또 죄인을 직접 추포했다는 황당한 소식에 놀랐던 중전은 왕이 무사한걸 알고 안심했다. 왕이 시전에서 사온 선물도 받았다. 신료들 걱정이랑 달리 주상이 딱히 한기에 기운이 상하지도 않은듯 했다.



왠 젊은 놈이 위세를 부리며 초피이엄을 외상으로 받아가서, '시발, 이렇게 크게 떼먹히는건 또 처음이네...' 하고 투덜거리던 시전 상인 김정복은 곧 내시들이 와서 초피이엄 값 250전을 주자 '젊은 놈'의 정체를 알고서 벌벌 떨었다.



시장에서 멱살잡이를 하다가 사이 좋게 한성부에 잡혀온 상민 박장쇠와 조팔월은 뒤늦게 들어오는 왈짜들이 영 불편했다.



조 한 말을 1전을 받고 판 손검불은 돌아가서 오랜만에 쌀밥을 먹었다.



퇴근해서 정병영으로 돌아간 김막동이는 오늘 자신의 무용담을 약간의 과장을 더해 떠들었다.


"그렇게 내가 딱 왈짜들을 막고 있을 때 말이야! 주상 전하께서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나타나셔서! 철퇴를 휘둘러서! 그놈들을 막!"


"오오오!"


"근데 저거 참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상이 왜..."


"어허, 분위기 깨지게 무슨 말이야. 그냥 좀 들어."



별감 안중남은 왕이 내전에 든 사이 제 소속 관아가 평소에 하는 일 답게 슬쩍 빠져나가서 경주인저로 가서 저가 돌보는 기방으로 갔다.


"하하하하! 주상께서 금주령을 거두신단다! 너희는 인제 살았다! 이게 다 내가 주상께 긴밀히 간한 덕이니 감사하거라!"


"안 별감님이 주상께 간 하셨다고요? 정말요?"


낮에 안중남의 추태를 봤던 김겨울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허, 이 어린 놈이 어딜 어른을 의심하려 들어!"



낮에 본 '연산군 대감'의 정체가 이상하게 신경쓰였던 천구지금은 제 가게에 온 객 중 제일 높은 사람인 정숭조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저, 하남군 대감. 혹시 연산군 대감이라는 종친이 서울에 계십니까?"


"연산군? 그런 종친은 들어본적이 없네."


"피부가 희고 고우며, 얼굴도 잘생겼지만 면창(* 여드름.)이 있는 분입니다. 갓 스물이 된 정도고 수염은 없습니다. 키가 크고 몸이 가늘었습니다. 눈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듯 했습니다."


"....그런 분을 참으로 뵈었는가? 잘 듣게. 어디서도 그걸 발설해서는 안될 것이야."




신료들도 하루 일과가 끝나 퇴청했다. 하지만 어디 다닐 때마다 일을 새로 만들어오는 이 왕 때문에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올해도 일이 많을 것이 예정되어 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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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미주>


*1 : 14화 <호조는 오늘도 갈려나간다>의 말미에서 나왔던 설정입니다. 윤은로 밑에서 일하던 사주인들을 때려잡고 그 집을 압수해서 '방저(坊邸)' 라는 이름으로 관영 숙박시설을 운용하고, '관고(官庫)'라는 이름으로 경매를 올리기 직전 물건을 올리는 창고로 개조해서 쓰고 있지요.


*2 : 조선의 도로와 수레 등 육운은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미진했는지 조정에서도 꾸준히 언급되었고 후기의 실학자들도 비판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게 좀 과장되어서 수레가 없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고요. 이에 대해서 지형이나 기후 상 도로를 건설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제시되나, 중국은 더 험한 곳에도 도로를 만드는 일이 흔했고, 한반도 내에서도 삼국 시대에는 도로와 수레가 자주 쓰인 것을 생각하면 부족한 설명이지요. 우마의 부족도 원인으로 제시되나, 당대 사람들은 되려 수레가 우마가 죽는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 이상한 주장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상업이 미발달하고 전쟁도 없어 대규모 물자를 나를 일 자체가 적었던 조선 사회의 특성 상 그다지 도로와 수레가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용욱. (2022). 고려~조선시대의 도로 및 수레 연구. 한국상고사학보, 116(116), 83-111.>


*3 : 천구지금은 중종실록 13년에 언급되는 실존인물 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용산은 아니고 마포에서 살며 대대로 장사하여 크게 치부하였다고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3부자(三父子)라고 언급되는데 정확한 가족 사항이나 나이는 알 수 없군요. 하여간 원래 역사에서는 사치를 과하게 부리고 다니다가 사헌부에게 걸려서 곤장을 맞다가 삼부자가 다 같이 죽고 맙니다. 이에 중종이 사헌부를 체직했더니, 대간들이 '하찮은 악소배 따위가 감히 사치 부려서 징치한건데 왜 사헌부를 벌하시죠?' 라고 따집니다. 조선의 계급사회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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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조선의 하늘 +44 24.06.12 10,062 465 21쪽
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81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70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60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3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6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9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5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5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4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2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 백성 3 +56 24.05.28 12,563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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