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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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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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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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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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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뉴딜 1

DUMMY

지금 조선에 필요한건 정부가 지출을 늘려서 민간에 돈이 풀리게 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지금 조선 정부는 돈이 없다.


돈을 찍어내면서 무슨 소리냐고?


조선은 내년 1월에 전세 1600만전이 들어올 예정일지언정 아직까진 제대로 된 지폐 세수가 없었단 뜻이다.


지금까진 지폐로 받아서 직접 조정으로 들어온 세입은 경강삼방 포구에서 들어온 거래세가 유일하다.

이것도 액수가 아직 70만전이 안된다. 1600만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물론 조선은 아직 상업보단 농업 국가고, 경매장 설치 자체가 오래 안됐으니 당연한거긴 하다.


지금까지 조정 각사에서 쓴 돈은 다 왕 직속의 평준도감(* 平準都監, 작 중 창작 관서로, 중앙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함.)에서 찍어낸 지폐를 각사에 빌려준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백관들은 자기들 부서 앞에 왕 이름으로 된 빚이 왕창 달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지폐의 법 자체가 이권재상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공공연히 신하들이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정책의 의도 자체가 빚으로 신하들을 옭아매어서 왕권을 확립하려는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사실 동아시아 세계관에서는 화폐 정책 의도가 그것이 맞아서 안 그렇게 보이면 더 이상하다.


그리고 신하들은 왕에게 수백만전 짜리 빚을 줘서 목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관아가 빚을 져서 뭘 한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왕은 빚 잔뜩 달아두고 진짜 빚쟁이처럼 신하들 두들겨패서 뺏으려고 할 거 같다.

신하들은 경식의 능력은 믿어도 성깔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각사에게 '돈 빌려가라' 고 자꾸 닦달을 해도 최소한만 빌려갔다.


이런 이유로, 지금 조선이 찍어낸 지폐 중 조정 각사들에 지고 있는 빚의 비중은 상당히 적다. 다 합쳐서 1천만전 정도.


"내년이 되면 1600만전이 전세로 들어올 것인데 씀씀이를 더 키워도 될 것이오. 각 사는 지폐도감에서 돈을 더 빌리는 것이 어떻소?"


'...어디다 더 쓰라는거지?'


이미 지금 관헌을 마구 뽑아 녹을 주고, 서리들에게도 돈을 주고, 병사들에게도 돈을 주는, 조선 건국 이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가난이 워낙 익숙하니 갑자기 더 돈을 펑펑 쓰라니 명령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좌의정 신승선이 조선에서는 상식적인, 심지어 경제를 모른다면 현대인들에게도 옳아 보이는 말을 했다.


"전하께서 재정하신 지폐의 법으로 국용이 풍부해졌으나, 일시 풍족하다고 하여 과히 쓰면 추후에 부족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1600만전이 들어오면 1000만전은 각사에 분급하여 각사가 평준도감에 지고 있는 빚을 탕감시켜주고, 600만전은 횡간(예산안)에 따라 분급하여 각사가 쓰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모르는건가...'


사실 모르는게 당연하다. 애초에 지금 관헌들 대부분은 왕이 도입한 지폐 제도 원리도 잘 이해 못한 상태다.


경식은 자기가 밀어 붙인 지폐 정책이 생각보다 잘 굴러가서 잊고 있지만 신용 화폐는 달로 가는 우주선보다 늦게 나왔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1969년, 달러의 금태환 폐지는 1971년)


거기서 뉴딜 비슷한걸 하라고 해도 과도한 미래 정책일 뿐이다. 케인즈가 '정부 재정을 확대해야 민간 경제가 삽니다' 라고 처음 주장했을 때도 전세계 대부분이 이해를 못했다.


경식은 또 다시 '비의를 강하겠다' 하고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각 잡고 설명하자 의외로 신료들 반응은 좋았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비책대로라면 백성들의 괴로움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흉년이 든다해도 능히 구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지? 의외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네?'


경식은 자기가 조선인 눈높이 설명 테크닉이 발전해서 그런건가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맞다. 케인즈주의의 유효수요나 완전 고용 같은 개념은 전혀 안 꺼냈으니까.


경식의 주장은 '백성들에게 요역 때 돈을 줘서 일 시켜서, 조창과 부목 군현에 창고랑 항구를 짓자' 는 것이었다.


사실 조선은 이미 요역이 형해화 되어 있고, 조운 체제 정비 이야기를 맨날 했으면서도 각지 조창에 창고 건물도 못 지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신료들도 항상 신경 쓰고 있던 문제다.


경국대전 상으로는, '8결에 일부(一夫)를 내되 1년의 요역은 6일을 넘지 못한다. 만약 길이 멀어서 6일 이상이 되면 다음 해의 역을 그만큼 감해 준다' 로 되어 있다.


지금은 경국대전 반포에서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대.


하지만 고려공사삼일이란 말이 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요역제는 다 형해화 되어 있었다.


일단 1년에 6일 동원하는거 자체가 너무 짧아서 뭔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가벼워보이는 규정은 박살나고 다들 추가로 동원해야했다.


그리고 밥도 공구도 안 주는 요역 따위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조선인들은 착취적인 정부 정책에 일방적으로 당해주지 않았다. 8결에 1명이라는 규정만 맞추면 되니 노인네를 보냈다.


이 상황에 조정의 대응은, 박경식도 본 그 꼴이었다.


군인들을 노역부로 쓰는 것이다.


성종조에 조선의 제도가 완비되었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로 수렴된다.


'조창에 창고 건물이 없어서 세곡이 죄다 쥐가 쏠고 비바람에 쓸려나가는데 창고 좀 지어요' 는 원역사에서 성종~연산군 시대에서 상소문의 단골 소재였다.


그리고 이것이 미뤄지던 이유도 단골 멘트였다.


'돈이 없다.'


그래서 이 모든 문제는 하나로 해결된다.


이젠 돈 있다.




평준도감 관헌은 이극규, 홍귀달 등 호조 관헌이거나 최소한 호조 한번을 역임한 인재들로 채워져 있다.


그나마 지폐 제도의 대강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주로 호조 출신이기 때문이다. (윤필상도 그 중 하나였는데 지금 짤리고 근신 중이다)


그래서 평준도감제조로써 이극규가 총대잡고 상언했다.


"전하께서 비록 '호조는 씀씀이를 늘려 요역에 나오는 백성들에게 지폐를 주어 조창을 짓게하라'고 명하셨으나, 아직 전세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조정 각사가 지폐로 물건을 사고 사람을 쓰는 것은 전부 평준도감에서 새로 찍어낸 지폐를 빌리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각 조창을 짓고 백성을 쓰려면 역시 지폐를 평준도감에서 찍어내 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일찍이 이르신 전량지리(*1)에 따르면 돈은 그것이 양이 많아지면 값이 헐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600만전을 조창과 평양방(* 평양부에 지을 예정인 항구)을 짓는데 쓰라하셨으나, 그 돈이 풀리면 지폐의 값이 헐해질까 신은 두렵습니다."


맞다. 경식이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사태도 그 지폐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제 막 시작한 지폐 제도가 붕괴하는 것이다.


일종의 중앙은행인 평준도감을 직접 관리하는 것도, 지폐의 통화량이 아직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인데도 이자율을 10% 에 달하는 수준으로 유지해서 디플레에 가까운 상태를 만드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다.


아직 경제학을 전혀 모르는 조선의 선비들이 돈 맛 좀 들렸다고 지폐를 막 찍어냈다간 흥선대원군 꼴 난다.


사실 지금 경식이 운용하는 신용화폐 제도는 원래 채권 시장 같은 금융 제도가 받쳐줘야 제대로 굴릴 수 있다.

지금 조선의 지폐 제도는 집을 기둥을 안 세운 채로 지붕부터 세운 것이나 다름 없다.


이게 잘 굴러간건 경식이 사실 재정학에 초인적인 재능을 가진 미래 지식 치트키 용사여서...가 아니고, 조세로 걷는다는 강제력을 발휘해서 그렇다.(*2)

애초에, 현대와 비교하면 아주 잘 굴러가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 조선의 지폐제도는 1년 사이 지폐 가치가 쌀 값이랑만 비교해도 3배 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현대 기준이었으면 '경제 망했다' 소리가 나올 상태로 굴러갔다.

이건 경식이 온 미래의 국가와 비교하면, 전통적으로 경제가 망한 나라로 유명한 러시아와 비슷하거나 못하고 베네수엘라보다는 나은 수준이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의외로 조선은 이미 베네수엘라의 재정건전성을 뛰어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냥 그 전에는 더 개판이어서 신료들이 보기에는 선녀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여간, 중앙은행이 국채 담보를 잡고 돈을 막 찍어서 정부 재정을 조달하는 구조는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딱 이극규가 말한대로 되니까.


이에 영의정 노사신이 말했다.


"이전에 성종조에 가뭄이 들었을 때, 납속보관의 법(納粟補官法)을 시행하여 미곡을 구하여 백성을 구휼하는데 쓴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비록 미곡이 아닌 관이 급히 사용할 지폐가 부족한 것이나, 그 예를 본받아 납전보관의 법(納錢粟補官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노사신 이 영감은 왜 지폐 얘기 하면 항상 개똥 같은 소리만 자꾸하지? 저번에는 폭력 본위 같은 소리나 해대고.'


경식은 조선의 명성 높은 매관매직 제도인 공명첩이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건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미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선왕인 성종 시대에 처음 시행된 것이다. 지금 노사신이 말한 납속보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노사신이 이걸 제안하는 이유가 또 있다. 왜냐하면 노사신이 그 때 얼마 안되는 찬성측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노사신은 그걸 응용해서 관에 돈을 내면 벼슬을 내리는 제도를 실시하자는 거다.


당연하지만 당시도 그런 매관매직을 하면 어쩌냐는 반대가 심했다.


지금도 그렇다. 형조, 이조, 예조가 나서서 영의정을 인디언밥 치듯이 비판했다.




그 때 대간 출신인 형조 관원이 각을 잘못 재고 들어왔다.


"전하! 역시 노사신은 탐오하고 용렬하여 영상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니 내치소서!"


"저 놈을 호조 서리로 배속하여 함흥 화매소 고자(* 庫子, 창고 관리하는 서리.)로 쓰라."


경식이 이름도 모르는 그 관헌은 '아니!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외치며 끌려갔다.




하여튼, 공명첩은 안된다, 공명첩은.


물가를 갑자기 폭등 시키지 않으면서 정부 재정을 조달할 때 진짜 필요한 건 국채 발행이다.


1만전 짜리에 10% 이자가 붙은 국채를 정부가 발행해 팔면 어떻게 될까?


민간에 돌아다니던 1만전이 정부에게 들어오고, 민간의 인플레는 줄어든다.

그리고 정부는 그 돈으로 뭔가 사업을 하던 건설을 하며 민간에 지출한다. 그럼 민간에 돈이 다시 풀려 인플레가 원상복귀 된다.

그리고 정부는 세입으로 그 1만전과 이자 1천전을 갚는다. 이 돈은 세입이니, 민간에서 결국 뺏어온 것이라 인플레가 줄었으나, 국채를 갚느라 다시 민간에 돌아가서 인플레가 다시 발생한다.

중앙정부가 돈을 찍어내는 것과 달리, 돈의 총합은 전혀 변하지 않아 인플레 발생은 없다.(*3)


하지만, 지금 이 조선인 유교 사대부 관료들이 국채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먼저다.


지금 이들은 왕한테서도 빚 지기 싫어서 몸을 비트느라 돈을 안 쓰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관념에서 관은 백성에게서 세금을 받으면 받지 백성에게 빚을 지는 건 말이 안된다.

백성이 감히 어찌 관에게 '빚 졌으니 갚으라' 고 갑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세금을 적게 걷는 것' 은 그들의 세계관에서 가능해도, '정부와 국민은 서로에게 빚을 진 상태' 라는 건 이들의 세계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지폐 발행을 전부 '왕에게 빚을 지는' 형태로 진행하고 있는거고.


물론 권력으로 찍어누른다면 되겠지만, 협조를 얻으려면 적절한 설명이나 명분이 필요하다.


'흠...국채 발행...그리고 납속책...'


이 순간에, 박경식의 머리 속에 꽤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왕의 '저 버릇'을 아는 신료들은 쎄함을 느꼈다.




그 무렵 한강.


비트코인을 하다가 물린 사람이 한국에 잔뜩 있듯 지폐코인을 하다가 물린 사람이 조선에도 있었다.


문제는 지금 왕이 사토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인척 컨셉 잡은 주제에 갈수록 발행량을 줄이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비트코인은 갈수록 값이 오르지만, 지폐는 그렇지 않다.

되려 경제 성장에 맞춰 지폐의 발행량과 유통량을 점점 늘리기로 이미 경식은 큰 틀을 잡아두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인플레이션을 부르고 지폐의 값을 낮춘다.


여러 상인들이 지폐가가 폭등하는 시기에 '쌀이 복사가 된다고!!!' 라며 지폐를 매집했지만, 왕이 윤은로를 때려잡고 지폐 발행을 재개하자 지폐의 가격은 점차 하락하며 가치가 안정되었다.


지금 쌀과 지폐의 상대가치를 봐도 그렇다.


제대로 된 시장 경제가 없던 조선인지라 가격이 제대로 안 드러난 상태여서 그렇지, 흉년에서 쌀 가격은 폭등하기 마련.


그 상태에서 지폐가 한양 성저십리 암시장에서 법정가치 "쌀 5되에 지폐 1전"을 벗어나서 쌀 15되를 주고서야 지폐 1전을 살 수 있었던건 당시 지폐 투기가 얼마나 극심하게 진행되고 있던 건지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은 풍년에다가 가격공개제로 유통이 급증하여서 곡가가 전국 전반적으로 하락한 상태.


이 상황에서 지폐는 대략 쌀 10되(=1말, 1두)로 교환되고 있다. 인쇄기로 대량 발행된 지폐는 이미 조선의 곡물 시장을 충분히 커버 가능할 정도로 발행되었다.


그 발행량은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풍흉을 고려 안 하고 쌀값이랑 비교만 해도 3분의 2 토막이 난 상태인데, 풍흉을 고려하면 지폐의 가치 하락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지금 이 한강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대평(大平)이는 정확히 윤은로가 때려잡히기 직전의 고점에서 풀로 지폐를 매집했다. 미래에 환생해도 절대 주식 같은 거 하면 안될 놈이다.


대평이와 비슷한 미래인들이 으레 그렇듯 한강 바닥 구경하려고 하는건 아니고, 호랑이에 잡혀가는 거랑 목 매달고 죽는 것 중 어디가 나을까 각을 재고 있다.


미래인들과 달리 조선인들 관념에서는 한강 다이빙은 별로 좋은 죽음이 아니다. 조선 관념에서는 물에 빠져 죽어서 무덤도 없는 물귀신처럼 서러운 존재가 없다.


그런 고민을 하는 대평이를 보고 아내 이조이가 집에서 나와 말을 걸었다.


"대식이 아범, 거기서 청승맞게 뭘 하고 있소?"


저놈의 여편네는 낭군 마음도 모르고 저런다.


"자네는 일 없네. 들어가서 아이가 글 공부 잘하고 있는가나 보게."(*4)


"서리 월료가 얼마나 된다고 요새 그리 글 공부를 하라고 보채시오? 차라리 장사나 잘하지. 나랏님도 장사꾼들 갈취 안 하겠다고 무슨 문권을 준다는데."


말이 쉽다. 21세기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도 사업을 하느니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하지 않는가.

이 조선은 미래인이 와서 바꾸려고 한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경식이 탐관오리만 보면 패죽이려고 해도 사실 구멍은 여전히 여기저기 뚫려있다.

얼마 전에 왕이 와서 때려잡은 사주인들은 다 관아의 각사이노였듯, 관아 서리만 해도 이것저것 해먹을게 아직도 많다. 더군다나 이제 월료도 준다.


하여간, 그래서 아들놈 글공부를 시키는 중이다. 저 죽어도 아내랑 아들이 먹고살기는 해야할 것 아닌가.

양반들이나 가는 줄 알았던 사학을 다니니 좀 양반이 된 거 같은 기분도 나고 말이다.


그런데 아내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장사나 하라니 자기 죽은 뒤가 걱정이었다.

(물론 코인질하다가 말아먹은 대평이보다 아내의 상재商才가 못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대평이는 뻔뻔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자네는 내가 없으면 어찌 살려고 그러는가?"


대평이 딴에는 이런 모든 생각을 하고 난 뒤에 한 말이지만, 아내 조이에게는 영 생뚱 맞은 헛소리일뿐.


"어찌 살기는? 어찌어찌라도 살아야지. 사놓은 지폐도 저리 많은데 아들놈 시켜서 장사라도 할 수 있겠소."


"아니, 그 지폐는..."


대평이는 나름 아내 몰래 한다고 숨기는 줄 알았는데 아내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지폐는 다 무어요? 난 또 무슨 장사 밑천으로 쓴다고 사 모은줄 알았는데 장롱에 처 박아 놓고 있으니 뭔질 모르겠소."


"..."


"오늘 추수하는데 어디 대감 댁 노비라는 놈이 와서 그랬소. 여긴 이제 대감 댁 전답인데 어딜 감히 멋대로 농사를 지었냐고."


"..."


"전답을 팔았소?"


"..."


말 없이 대평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많이 갈취해가긴 했는데, 농사 자체는 허락 받았소. 먹고는 살 수 있을 것이오."


대평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내 조이가 이어서 질문했다.


"정말로 저 지폐로 장사도 못하겠소?"


"저걸로는 배도 못 사고, 보부상을 하려니 아는 보부상이 있어야지. 남편이 물귀신이나 호랑이 밥이 되는게 좋은가?"


그도 그렇다. 원래 이 시대에는 장사하는건 원래 반 쯤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요, 기존에 인맥이 없으면 쉽지도 않다.


윤효정이 낯선 아산까지 가서 쌀을 팔 수 있던건 사대부인척 코스프레한 것과 가솔 노비들을 잔뜩 데리고 있어서고, 보통은 어딜 난장을 펴냐고 몰매나 맞는다.


이조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경매장 가서 방을 한번 보고 오시오. 내 들으니까 나라에 지폐를 내면 나중에 지폐를 더 얹어서 준다는데."


"뭐?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지폐를 내면 지폐를 더 줘?"


가서 방을 보니 내용의 대강이 이랬다.


'우리나라가 일찍히 개국할 때부터 농사를 천하의 본으로 삼아 농민을 크게 우대하였는데

...

그러나 풍년이 들었음에도 그것을 보관할 창고가 부족함은 나라의 큰 근심이었다.

...

이에 주상전하께서 납전첩의 법을 전교하셨다.

원납전할 이들은 호조에 문하라. 세부는 아래와 같다...'


돈을 내서, 납전첩을 사면 납전첩을 가지고 있는 동안 역을 면제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10%의 이자를 붙여서 납전첩을 호조에 팔 수 있다.


그러니까, 기존 공명첩을 납전첩이라는 이름으로 개조하여, 쌀 대신 돈을 내면 주는 '채권'으로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요역을 면해준다고 했지만, 사실 지금 경식은 요역을 곧 혁파할 생각이니 별 의미 없고 그냥 생색내기다.


방을 보고 온 대평이에게 아내가 말했다.


"지폐를 집 안에 쌓아놓지만 말고 그거라도 사보시오."


역시 주식이 안 될 때는 채권이 좋은 상품이다.


---


<이하 미주>


*1 : 전량지리錢量之理는 9화 <아 장사하자 1>에서 인플레이션 내지 화폐수량설을 부르는 작 중 창작용어라고 각주로 언급되었습니다. 박경식이 워낙 바빠서 경제학을 정리한 책을 아직은 따로 못 만들었고, 그때그때 관헌들에게 강의하면서 개념을 불어넣는 중이라서 혼동하고 있는 관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 박경식이 의도한 것도 화폐수량설에 가깝고, 작 중 평준도감에서 자주 사용되면서 작 중 평준도감 관헌들도 점차 화폐수량설에 가까운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2 : 화폐 제도가 조세 제도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 깊은 사례는 12세기 영국에서 시행된 탤리스틱(tally stick)이라는 물건입니다. 원래는 세금을 납부했다는 영수증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목간을 영수증으로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에 세금 납부한 내역을 기록하고 반으로 쪼개 납세자와 관리가 하나 씩 챙기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탤리스틱이 민간에서는 돈처럼 거래되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왕실에서 돈이 궁할 때 탤리스틱을 발행하여 국채처럼 사용했지요. 서양 근세사가 주력인 박경식은 탤리스틱의 사례는 모르고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한 결과 탤리스틱과 비슷하게 수렴된 것입니다. 이전 화들에서 본문과 주석에서 동시에 계속 강조했지만 저화의 실패 원인은 세금으로 받지 않는다는 불합리한 정책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어찌보면 작 중 조선은 금융기술에서는 이제야 12세기 영국과 비슷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3 : 실제로는 경제가 훨씬 복잡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이 도식은 아무도 돈을 따로 저축하지 않고 계속 사용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지요. 국채는 보통 정부가 늘인 예산을 실물 경제에 투입하기 때문에, 저축하고 있던 돈들이 시장에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국채 자체도 현금성 자산으로써 거래에 사용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화폐 발행에 비하면 나은 편입니다.


*4 : 아내가 남편에게 하오체를 쓰고 남편이 아내에게 하게체를 쓰는 것은 20세기 초 중간 계층의 언어 용례를 따른 것입니다. 조선 시대 초를 고증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아는 사극체 말투 자체가 20세기 초의 말투와 많이 유사한 편이지요. 그래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임의로 채용한 부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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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돈을 버는 자, 돈을 쓰는 자 +59 24.06.11 9,979 462 21쪽
34 돈과 전쟁 +54 24.06.10 10,767 494 22쪽
33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진다 +47 24.06.07 11,757 507 25쪽
32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68 24.06.06 11,841 536 25쪽
31 서울의 여름 +36 24.06.05 11,334 480 23쪽
30 우릴 돈으로 살 셈인가! +43 24.06.04 11,086 494 21쪽
29 아니 내 10만 철기가!!! +34 24.06.03 11,727 517 22쪽
28 또 이세계 용사 박경식 +94 24.06.02 12,073 565 25쪽
27 우리는 주인이다 힘차게 살자 +76 24.06.01 12,114 556 21쪽
26 농촌이 살아야만 나라가 산다 +91 24.05.31 12,173 554 20쪽
25 대초피시대 +62 24.05.30 12,471 543 22쪽
24 뒷수습 +49 24.05.29 13,094 490 20쪽
23 백성 3 +56 24.05.28 12,562 541 24쪽
22 백성 2 +40 24.05.27 12,592 534 22쪽
21 백성 1 +42 24.05.26 13,170 54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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