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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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이쪽입니다.”
우드가 앞장서서 길안내를 하고 있다.
사실 길안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넬림이 만들어 판 물건에서 나는 향이다.
뭐 그 향을 만든 것도 역시 아넬림이다.
으아, 정말 난 무척 무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어쨌거나 경매장에 물건을 위탁하면서 특수한 향을 뿌려 두었고, 그 향은 또 특별한 약을 코에 바른 사람만 맡을 수 있는 것이어서 우드가 그 약을 바르고 향을 쫓아 앞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난, 던필트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
“저도 몰랐습니다. 원 이런 곳을 만들어 뒀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이전 문명의 흔적이에요. 던필트는 이전 문명의 도시 위에 세워진 거죠. 이런 수로(水路) 시설을 만드는 것은 던필트로선 불가능이에요.”
“겨우 하수구 정도를 가지고 뭘.”
나는 아넬림의 말에 툭 쏘듯 말했다.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하긴 인구 천만이 넘게 사는 도시에서도 하수구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별로 본 적이 없는 나다.
당연히 이런 하수구 정도는 별 것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수구는 건물 밑에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처음부터 계획하고 만들지 않으면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후에 다시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래서 이런 규모의 도시에 하수구를 만들려면 아예 처음부터 계획하고 만들어야 하는데, 작은 마을에서 도시로 발전하는 경우, 사실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정말 규모가 커진다면 차라리 가까운 곳에 신도시를 만들어서 도시 전체가 이주를 할 수는 있겠죠.”
“그냥 조금씩 구역을 정해서 허물고 다시 짓고 할 수도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누가 내 집을 허무는데 가만 있겠어요? 저항이 만만치 않죠. 그러면 그 때마다 적당히 보상을 해 줘야 하는데 그게 쉽겠어요?”
“일단 완벽하게 도시를 장악한 권력자가 있어야 가능하겠네. 뭐 알았다. 이 하수구 대단하다. 인정해 줄게.”
인정 못할 것은 또 뭐겠어?
내가 이 대륙의 수준을 낮게 잡아 업신여겨서 남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 훌륭하다.
“어째 방향이 던필트의 동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 밖으로 통하는 건가? 그러니까 이 길을 통해서 물건을 밖으로 나른다는 말이군. 그럼 그 이종족은 성 밖에 있다는 말이겠지?”
“쫓아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외성으로 나오면서부터 하수구 냄새가 더 심해는 것 같습니다.”
“어딘가 오물이 모이는 곳이 있겠지.”
“그럼 그렇게 모인 오물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따로 던필트 성에서 하수구 청소를 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니 어떻게든 자연적으로 처리가 되는 방식이겠지. 명색이 과거 문명의 유산인데 뭐가 있어도 있지 않겠냐?”
“그럴까요? 그렇게 들으니까 그 방법이 뭔지 궁금해집니다. 주인님.”
“시끄럽고, 어서 길 안내나 해라. 맞게 가고 있는 거냐?”
“아무렴요. 아넬림 님이 만드는 건데 무슨 탈이 있을라구요.”
그래. 믿어라. 믿자.
우리가 아넬림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으리.
***
“이렇게 깊은 곳이 있으니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거군요.”
“하수구가 지하 유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는 걸?”
“몽땅 허물어지고 일부분만 남은 건데도 규모가 대단합니다. 벌써 얼마나 지하로 내려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파트 20층 정도는 될 거다.
이곳 건축 기술로는 같은 깊이라도 10층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한 유적이다.
꼭 무슨 탑 같은 것이 땅에 묻혀 있는 것 같다.
아니 정말로 원형의 탑이 땅에 묻혀 있고, 우린 그 탑을 통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 분명하다.
위에서 우리가 탑으로 들어 온 곳은 분명 꼭대기의 창문 정도가 맞을 것 같다.
“들리는군.”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귀울였다.
“뭐가 말입니까?”
“노래소리.”
“네? 정말요?”
“조금 더 가면 확실히 들리겠지. 가자.”
나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무척이나 슬프고 또 공허하게 들린다.
음유시인이란 이종족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어찌 들으면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 하면서도, 또 어쩌면 감당하지 못할 감정에 덜컥 던져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심해요. 페커님에겐 위험할지도 몰라요.”
아? 위험?
그건 또 무슨 소릴까?
“정신 차리세요.”
아넬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뾰족하다.
나는 찔린 것처럼 화들짝 정신이 깨어난다.
“우아, 이거 미치겠네. 세 번째 막의 능력도 마냥 좋은 건 아닌데? 홀딱 넘어가서 홀릴뻔 했다.”
“주인님. 괜찮습니까?”
“아, 괜찮아. 조심하면 될 거야. 그 참, 무서운 노래네.”
“노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페커님의 능력이 스스로의 화를 자초한 거죠. 아직 조절이 안 되니 너무 쉽게 강력한 감정에 휩싸여 버린 거예요. 그냥 듣는 제게도 그 절절함이 전해지는데 페커님이야 오죽하시겠어요.”
그런 건가?
하지만 정작 나는 아직도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뭐냐?
꼭 자살 지망생 같은 이 느낌은.
그냥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니 원.
짝짝짝!
아, 아프다.
너무 심하게 때렸나?
내 뺨을 내가 이렇게 치다니, 정신차리자. 정신!
후아압!!
대충 견적이 나왔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은 지하에 매몰된 커다란 건축물이다.
아마도 성벽의 방어 타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물이다.
그 중에서 망루 역할을 하는 탑을 따라서 내려왔고, 지금은 병사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공간을 지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좌우로 비슷한 규격의 방들이 나란히 연결이 되어 있는데 돌로 만든 건물이라 그런지 그다지 훼손의 정도가 심하진 않았다.
다만 돌쩌귀를 비롯한 흔적들이 문짝이 달려 있었던 과거의 영화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쉿, 저기다. 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이제부턴 우리 쪽의 빛은 끄고 움직이자.”
“넵. 페커 주인님.”
우드는 재빨리 빛나는 돌을 가죽주머니 안에 넣어서 빛을 가렸다.
빛나는 돌은 말 그대로 어둠을 쫓기 위해 연금술로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실제로 내가 만들 수 있는 연금 도구 중에서는 꽤나 고급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나마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제작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에테르의 변화에 따라서 그 때, 그 때, 작업에 변화를 줘야 하기 때문에 제법 난이도가 높은 편이라고 할까?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오호호호.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응? 호호호. 웃기지도 않아, 아직도 날 사랑해? 정말로? 그럼 일이나 해. 니가 그걸 하지 않으면 난 또 얻어맞게 될 거야. 호호호호. 그렇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 놈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아가씨에게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으흥, 채찍질 말고 다른 걸로 하면 안 되나요? 채찍질은 너무 아파요.”
“그야 아가씨께서 원하시면 그것도 좋겠지만 저 녀석이 보고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흐흥, 그래도 맞는 건 싫어요. 차라리 제가 봉사를 할게요. 여기 다른 분들도 제가 싫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키키킥, 조장, 뭘 그렇게 빼고 그럽니까? 우리가 이 답답한 지하까지 내려와서 얻는 즐거움이 바로 델리아 아가씨의 그 환상적인 가슴과 엉덩이 때문 아닙니까.”
“난 입이 좋던데.”
“난 가슴.”
“난 앞보단 뒤가 좋아.”
“뭐든 좋아요. 채찍질 보단 그 쪽이 나아요.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데 그 정도 보상은 해 줄 수 있잖아요.”
음음음음, 으으음, 으음, 으음, 으으음···.
여자와 병사 여섯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 새부리를 하고 있는 작은 이종족은 우리 속에 갇혀서 낮은 허밍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아까 내려오면서 듣던 노래는 제법 고음이었고 큰 소리였는데, 지금은 매우 낮고 단조로우면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다.
하지만 너무 진하고 깊어서 아예 없는 것 같은 공허와 슬픔이 그 소리에 담겨 있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그가 전하는 느낌은 비슷하다.
“아넬림, 재울 수 있지?”
“가능해요. 실내에다가 밀폐된 곳이라서 더 쉽죠.”
“그럼 저 이종족은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재우지.”
“알았어요.”
아넬림이 대답과 함께 손을 내밀어 슬쩍 흔들자 반응은 너무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털썩, 털썩! 쨍그렁, 쩔렁. 투덕.
“으음.”
“음.”
낮은 신음을 흘리고 한 여자와 여섯 남자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와, 아넬림님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건 진짜 향을 쓰신 겁니까? 아니면 흉내낸 겁니까?”
우드가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호들갑을 떤다.
“아넬림이 자신의 에테르를 변형시켜서 풀어 놓은 거야. 넌 아직도 에테르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는 거냐?”
나는 우드에게 핀잔을 주며 몸을 드러내고 실내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천정에는 빛나는 돌이 몇 개나 박혀 있어서 실내는 무척 밝은 편이다.
이종족은 사자우리 같은 철책 속에 한쪽 발목에 쇠로 된 고리를 감고, 그 고리는 쇠사슬에 연결되어 우리 바닥에 연결되어 있다.
저 정도 쇠사슬 길이라면 정확하게 창살 안쪽에서만 겨우 움직일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밖에서 보이지 않던 공간에는 가죽이나 뼈, 금속 등이 정리되어 쌓여 있고, 또 한쪽에는 침대와 옷장이 있는데 모양을 보아하니 여자가 쓰는 공간인 듯 했다.
여자는 그 침대 밑에 쓰러져 있고, 그 앞쪽으로 여섯 사내가 벽이나 의자 밑에 쓰러져 있고, 탁자에 엎어져 있기도 하다.
그 너머로 병사들의 침대로 보이는 잠자리가 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여 나는 숲지기 아넬림이에요.”
“오셨습니까. 오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노래하는 자, 다렌거라고 합니다.”
“그래요. 다렌거. 나는 이곳에 당신이 원해서 거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당신께 묻기 위해서 왔어요. 우리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당신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요?”
“아넬림님은 알고 있겠지요.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말입니다.”
“짐작해요. 저 여인을 당신이 품었겠지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어요.”
“뜨거운 열정이 차가운 이성을 녹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숲지기 아넬림.”
“그래서 여전히 그 선택을 이어갈 거란 말이겠군요.”
“아시는 것처럼 우리들은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알아요. 나는 이런 상황은 아니기를 바랐어요.”
뭔 소리야?
나는 아넬림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쉽게 정을 주지 않지만 일단 정을 주게 되면 모든 것을 걸어요. 이들이 준 마음을 쉽게 떠나지 않지요.”
“그래서 저 다렌거가 저기 저 창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단 소리야? 보아하니 저 여자 이곳에 있으면서 이곳에 들르는 자들과 그렇고 그런 짓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저 다렌거가 빤히 보는 이곳에서 말이야. 이봐, 다렌거 그걸 뻔히 보았으면서도 저 여자를 위해서 이런 곳에 갇혀서 노예 생활을 하겠다는 거야?”
“창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델리아가 당신에게 무슨 피해를 주었다고 험한 소리를 한다는 말입니까?”
허?
이거 적반하장 맞나?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 소린데 이 경우완 잘 안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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