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61화
“호수 정원에서 오셨군요.”
어?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덩치가 큰 분은 그리 많지 않지요. 거기다가 아버님과 형님께 원한이 있는 분으로 페커님 같은 체격을 가진 분은 한 분 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맞습니까? 페커님?”
“맞아. 제법이네?”
“대지의 틈, 그 곳에 놓인 하늘다리는 여러모로 가치가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여기에 왔지. 남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려고 말이야. 거기다가 목숨값도 치러야 하고 말이지.”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진다.
긴장, 두려움, 간절함, 절망감.
방금 녀석의 가슴에 절망감이 섞였다.
“목숨이라면 다른 것으로 대가를 치를 수도 없겠군요. 그럼 아버님과 형님은 사실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맞아. 나는 이 둘을 살려둘 생각이 없어. 지금은 이번 일에 관여한 다른 놈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거기서 잠시 기다려. 이들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 유언은 들려줘야 할 것 같아서 들어오라고 한 거야.”
녀석은 점점 커지는 절망의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있다.
“상관이 있는 사람이야 더 있겠지만,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상단 호위들이 호수정원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들까지 호수 정원으로 밀려들 텐데, 그 전에 돌아가셔서 막으셔야 할 겁니다. 그들까지가 끝입니다. 페커님의 복수가 도를 넘어서지 않으려면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으시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래? 하긴 여기 둘이 계획을 세운 거니까 우두머리와 행동대만 처리하면 나머지야 뭐 살려둬도 괜찮겠지. 좋아. 그럼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 처음에는 이들에게 받아 낼 생각이었는데 니가 조금 더 현명한 것 같으니까 네게 묻지. 보상을 받아야겠다. 무엇으로 보상을 대신하려는가? 상단의 일꾼들과 너를 포함한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잘 생각해라.”
녀석은 말이 없다.
점점 어두운 감정에 잠식당하고 있다.
아비와 형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내, 내가 주겠소. 내가 대가를 치르리다. 상단의 지분을, 지분의 2할을 드리겠소. 이익금의 2할을 호수 정원에 주겠소. 후우.”
어깨에서 피가 잘 멈추질 않으니 안색이 좋지 않네?
저렇게 두면 오래 가지 못하겠는데?
나는 품속에서 두 개의 병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
“이게 뭔지 알지? 마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마시는 거야. 그럼 난 더는 손을 쓰지 않을 거야. 하지만 창 밖에 태양 빛이 비칠 때까지 너희는 어떤 치료도 받을 수 없다.”
어쭈?
희망이 보여?
아, 큰 아들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네?
확실히 약이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닌 모양이지?
하지만 농축된 약을 한 병이나 꼴깍꼴깍 마시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저 둘째도 희망을 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많이 먹어도 안 죽는 약이었어?
“안 마시면 내가 대신 먹여주고. 그게 더 괴로울 거야.”
어쨌거나 약을 먹고 살아나면 살려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잖아.
더구나 저 늙은이는 살기 어려울 거고, 큰 아들 놈도 어깨와 무릎이 나갔으니 정상적으로 살긴 어려울 테니 말이야.
뭐 돈이 많으니 저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진 지들 능력이니 그냥 두자.
굳이 팔 다리를 끊어 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사람을 상하게 하는 건 왠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
지금도 저 시뻘건 피를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한꺼번에 늙어 버린 것 같은 상단주가 먼저 병을 들고 이빨로 뚜껑을 열고 거침없이 삼킨다.
큰 아들도 잠시 망설이다가 아비를 따라서 약을 먹는다.
우와, 이거 봐라?
셋 다 뭔가 희망이 가득한 심리 상태를 보이네?
뭐지?
***
아, 정말 짜증이 왈칵왈칵 밀러드네.
그 두 놈이 끈질기게 명줄을 유지했다.
알고 보니 그 약이란 것이 신체의 신진대사를 느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몸의 피를 느리게 돌게 만들고 기운을 돌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그런데 이게 부상자에게 사용을 하면 상태를 유지하는 효능이 있는 거다.
미칠 노릇이지.
약을 먹자마자 어깨에 구멍이 난 늙은이의 상처에서 피가 줄어들어서 지혈이 되는 거다.
물론 늙은이는 정신을 까무룩 놓아 버렸지만 말이다.
그건 첫째 아들이란 놈도 마찬가지였다.
얼마가 기막히고 코막히고 화가 나던지, 그냥 그 자리에서 두 놈의 목을 틀어버리려다가 내 입으로 한 말이 있어서 그냥 두기로 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무지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다른 누굴 탓할 수도 없군. 이미 너희 아비와 형이 시킨 일로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살게 되었구나. 천행이라고 생각해라. 하지만 다음은 없다. 약속을 어기면 경고 없이 목숨을 거둘 것이다.”
나는 둘째 아들에게 그렇게 경고를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 밖에 없었다.
하아, 어쩌다가 내가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을까?
받은 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나는 여명과 함께 부란타를 떠나 호수 정원으로 달려가면서 내내 후회를 했다.
그나저나 호수 정원은 내가 갈 때까지 무사하겠지?
설마 상단 호위전사란 놈들에게 해를 입거나 하진 않았겠지?
우드와 아넬림의 믿으면서도 약간 걱정이 된다.
내가 부란타로 떠났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는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누구도 호수 정원을 침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드와 도니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넬림이 나서서 비스무트의 향기를 이용하면 충돌 없이 모두 포획하는 것도 가능하니 말이다.
자, 빨리 가서 확인을 하자.
믿고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
부란타에서 호수 정원으로 가려면 두 개의 하늘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다리에 충돌의 흔적이 약간 보인다.
도니가 마법을 썼는지 에테르의 흔적이 널려 있고, 몇 곳에 핏자국도 보인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는지 다리가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서둘러 여관으로 가니, 공터에 털보 일당과 새로운 얼굴 서른까지 더해서 육십 명 가까운 사람들이 밧줄에 묶여서 앉아 있다.
그걸 감시하고 있는 건 우드와 고용인 남자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페커님.”
우드가 나를 반긴다.
“다 잡았네?”
“조금 전에 기웃기웃 하길래 잡아서 묶어 뒀습니다. 도니가 돕고, 아넬림 님이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저렇게 멀쩡하게 잡기는 어려웠을 거다.
“둘은?”
“들어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더는 일이 없을 거고, 일이 있어도 하늘 다리만 감시를 하면 대응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잘 했다.”
나는 우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포로가 된 놈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저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일 수도 없고 말이지.
포로의 수가 예순 하나다.
털보 무리가 서른하나에 상단 호위란 놈들이 딱 서른이다.
우리 호수 정원에는 그렇게 예순 한 명의 새로운 일꾼들이 생겼다.
아니 노예가 생겼다.
나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새로운 땅을 물색했다.
비어있는 땅 중에서 한 곳으로 다리를 연결하고 거기에 일꾼들을 몰아넣은 거다.
“너흰 앞으로 땅을 개간하는 일을 한다. 장비는 주겠지만 물이나 음식 그리고 기타 생활 용품들은 일을 해야 얻을 수 있을 거다. 너희에겐 일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고, 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거나 혹은 기어 내려갈 자유도 있다. 하지만 일을 흡족하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굶어야 한다. 특히 너희가 보듯이 여긴 물이 없다. 물을 얻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여기 이것이 너희가 해야 할 공사의 모습이다.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중앙에 저수지를 만들 땅을 파야 하고, 그 저수지에서 사방으로 뻗은 방추형의 수로를 파야 한다. 저수지가 만들어지면 거기로 물을 끌어 들이는 것은 내가 할 것이다. 그렇게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만드는 것이 1차 목표다. 그 후에는 다시 저기 옆에 보이는 저 곳을 개발한다. 그렇게 5년 동안 부지런히 일을 하면 그 후에는 자유를 준다. 우리 목숨을 노린 것이 비하면 정말 관대한 처분이다. 그런데도 불만을 터뜨리거나 일을 건성으로 하는 놈은 그 대가를 확실하게 치러 주겠다. 알겠나?”
새로 다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재료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땅들은 아직도 많았고, 당연히 하나씩 다리를 놓아서 연결하려는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다만 호수 정원이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미루고 있었던 것인데, 이젠 돈 안 드는 노동력이 생겼으니 일을 벌이기로 한 거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내가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이 저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왜?
그거야 내 힘이 인간을 뛰어 넘은 상태니까 그런 거지 뭐겠냐?
하지만 나는 직접 나서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운동은 해도 노동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니겠어?
여전히 몸을 단련하고 있지만 그걸 노동으로 대신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다.
그리고 나는 몸은 비록 전사의 몸이지만 내면은 마법사나 연금술사를 꿈꾸는 사람이다.
공부해야지. 아무렴 공부해야 하는 내가 땅을 개간하느라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거지.
내 일은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이 전부다.
나머진 우드가 알아서 할 거다.
건너편 땅에 몰아넣고 일을 할 도구를 넘겨준다.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일의 진척도를 파악해서 하루치의 물과 음식을 넘겨준다.
그 외에는 따로 관리도 하지 않는다.
다리만 막고,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다.
아마 예순 한 놈이 모였으니 그 중에서 힘이 센 놈이 다른 놈들을 장악하고 권력을 쥐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털보 그룹과 호위자 그룹이 서로 편을 갈라 대치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다.
예순 한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상은 앞으로 5년 동안 많이 굴곡이 있을 거고, 그건 자신들의 선택에 달린 거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음식을 제공하는데 배고픈 놈이 나오는 것은 그런 상황을 지들이 만들고 있는 것이니 스스로 고난을 생산하는 것일 뿐, 그걸 내가 나서서 이리저리 관리를 해 줄 생각은 없다.
그랬는데 역시나 며칠 지나니 털보 무리는 상단 호위 무리에게 확실히 밀려버린 모양이다.
딱 봐도 추레하고 불쌍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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