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상대를 잘못 골랐어 (2)
「“혹시 부장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집에 와서 바깥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자세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이 대리님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못 할 짓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이 대리님에게 용서받고 싶었던 거는 분명해요.”
“왜요?”
“잘은 모르겠는데, 잘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죽은 윤호성 부장의 사모님을 만나고 돌아와서 이것저것을 찾아봤다.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확신이 선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무슨 배경이었는지.
‘윤호성 부장과 나는 세한그룹이 비자금 조성하는 데 있어 사용된 일종의 말이었다.’
그래도 복수 따위 할 생각 없었다.
복수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 수 있을까도 막연했다.
몽땅 빼앗아 거짓꼴을 만들 수 있다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자산 35조 재벌을 거짓꼴로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일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재벌이랑 싸움하는 것도 성가셨다.
그렇게 없던 일로 치부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어때요? 같이 하실래요?”
“제가 하는 방법을 몰라서요.”
“어렵지 않아요. 한두 게임 하면 바로 알 거예요.”
“별로 관심 없는데.”
“그래요? 돈이 너무 커서 그런가요?”
“이민호 대표님, 세상에는 급이라는 게 있습니다.”」
재벌 3세들 모임에서 그놈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이놈이 왜 이러지’ 이유가 의아했지만, 옛 회사의 수장에게 한 방 먹여주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정한다. 순간 살짝 몰입한 걸.
아무튼 그것도 그냥 해프닝으로 여기고 넘겼다.
지들 놀이터에 인상 안 좋은 이방인이 나타났으니 텃세를 부리고 싶었겠지.
어찌 됐건 막판에 보기 좋게 이겼으니 아쉬움도 없었고.
그렇게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대표, 내가 이 대표 볼 면목이 없다, 진짜.”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정말 관리 잘했고. 농장주들도 도저히 원인을 모르겠대. 근처 농가에서 구제역 발생한 곳도 없었고.”」
<육가네>와 <하우스> 버거에 한우육을 대는 농가 몇 군데서 동시에 구제역이 발생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발생한 건 사실이었고 그러는 바람에 한우 수급에 차질이 생긴 건 물론이고 해당 농가에 피해가 막심했다.
확증은 없었으나, 조사할수록 한림사료의 그놈이 그랬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좀 더 확실하게 파볼까 하다가 그냥 만나보는 게 빠를 것 같아 녀석을 찾아갔다.
똑똑똑-
“네.”
“사장님, 이민호 대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네.”
그리고 감이 맞았다.
한재림은 자기가 한 일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채영이하고는 무슨 사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고. 혹시 이번에 청산농장이랑 우가, 행복한소농장 구제역 발견된 거랑 관련 있어요?”
한재림은 이민호의 얼굴을 대답 없이 한참 바라본 뒤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제가 했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네.”
또다시 침묵.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대답하면 되는 건데. 어렵나요?”
“설사 내가 했다고 해도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없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갈게요. 만약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것 무슨 의미죠? 뭐, 형사 고소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녀석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형사 고소 해봤자, 무슨 타격이 있을까. 운이 좋아 증거가 나온다고 해도 나나 윤 부장님 같은 사람만 더 나오겠지.’
“아무튼 그럼.”
음채영이 했던 것처럼 이민호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불쾌해진 한재림은 그를 불러세웠다.
“저기. 그럼 저도 경고 하나 하죠.”
문으로 향하던 이민호는 돌아서 그를 봤다.
“세상에는 계급이라는 게 있습니다.”
“?”
“채영이랑 결혼할 겁니다. 그러니까 채영이 더 헷갈리게 하지 마시고 이민호 씨는 이민호 씨랑 어울리는 부류의 사람을 찾으세요.”
한재림의 말에 민호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축하드립니다.”
“?”
“제가 뭘 헷갈리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하신다면 축하드리죠.”
라고 말하곤 나가버렸다.
그의 마지막 말을 가만히 곱씹던 한재림의 인상이 구겨진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왠지 모르게 진 것 같다.
---*---
「채영이랑 결혼할 겁니다. 그러니까 채영이 더 헷갈리게 하지 마시고···.」
한림사료 사옥을 나오는 길, 녀석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던 민호는 한재림이 왜 계속 시비를 걸어왔는지 이해가 갔다.
“뭐야? 여자 때문이었어?”
까톡.
이민호는 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빠요? 괜찮으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
이태원의 한 카페.
민호의 문자를 받은 채영은 단숨에 달려왔다.
“제가 회사로 가도 됐는데.”
“여기 좋지 않아요? 여기 와플이 진짜 맛있어요. 뭐 시킬까요?”
“난 이미 시켰어요.”
“커피밖에 안 시켰잖아요. 와플 안 먹을래요? 많으면 하나 시켜서 나랑 나눠 먹죠.”
기분이 들떴다.
자주 보자고 하는 사람도 아닌 데, 보자고 해서.
그래서 회사로 온다는 걸 그녀가 이리로 불렀다.
“아니요. 생각 없어요.”
“먹어봐요. 진짜 맛있는데. 인수하고 싶을 정도로.”
“저기.”
그와 반대로 이민호는 차분했다.
“왜요?”
“혹시 나 좋아해요?”
질문은 듣자마자 채영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지?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라고 시치미를 떼볼까?
그것도 아니면, 모호하게 대답할까?
뭐가 좋지? 뭐가 더 매력적이지?’
짧은 순간 너무 머리를 굴렸나 보다.
오버클럭이 났다.
긴장을 잘 하지 않는 그녀였음에도 정수리에서 땀이 났다.
“혹시 나 좋아해요?”
“네?”
“네?”
“혹시 날 좋아하냐고 물었는데요.”
“저도 물었는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 민호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좋아요. 내가 먼저 말하죠. 아니요. 채영 씨한테 그런 감정 없습니다. 자, 이제 채영 씨···.”
“그럼 저도 없어요.”
‘그럼 저도 없어요?’
“없다는 말인가요?”
“네. 그쪽이 없다면.”
‘무슨 대답이 이렇지.’
“그럼 제가 있다면 있다는 말인가요?”
“있어요?”
“네? 아니요. 방금 없다고 말했는데.”
“그럼 저도 없다고 말했는데.”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려고 왔는데, 이건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 찜찜하다.
“좋습니다.”
“좋아요!”
표정이 읽히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웃고 있는 지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사실 다음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명확하게 하죠.”
“네.”
“나는 채영 씨하고 결혼할 마음 없어요.”
“그렇다면서요?”
“네?”
“전에 말했잖아요. 누구랑도 결혼할 마음 없다고.”
전에 그렇게 말한 적 있다.
“네, 맞는데···. 설사 누구랑 결혼한다고 해도, 채영 씨랑은···.”
“아, 웃겨. 누가 언제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도 없어요.”
“음···그럼 다행이고요.”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하고 말을 꺼낸 게 아닌데.
“하려던 말은 그게 다예요?”
“아···네.”
“그럼, 이제 와플 시킬까요?”
민호는 처음으로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나는 스파이시 프라이드 치킨 와플 아이스크림 먹을 건데? 쉐어할래요?”
---*---
“건방진 새끼.”
생각하면 할수록 분이 차올랐다.
설사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손 쳐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와서 추궁한단 말인가.
모니터를 보고 있던 한재림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음채영을 상대로 느꼈던 분노가 이민호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게 해줬다.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오라고.
목줄을 쥐고 있는 자가 누군지 파악하라고.
누가 윗급인지 알고 기라고.
그런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만약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경고였다.
그리고는,
「제가 뭘 헷갈리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하신다면 축하드리죠.」
“뭐야, 그건. 하신다면 축하드린다니. 병신새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띠리링-
-네, 사장님.
“최진태 이사 내 방으로 오라고 해.”
한번 더 도발을 할 생각이다. 아니, 도발이 아니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할 예정이다.
-네, 알겠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비서를 통해 최 이사를 호출한 한재림은 싱가포르에 있는 문성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재림아.
“내가 알아보라는 거 좀 알아봤어?”
-응. 알아봤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가능은 할 것 같다. 근데 진짜 하려고 물어본 거는 아니지?
이제 한재림은 트리 그룹의 코인들을 공격할 생각이다.
---*---
이민호는 한림사료 사장실을 나오기 전 한재림의 눈빛을 떠올려본다.
경고를 알아먹은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싸우자는 건데···.’
괭이밥 공장, 지하 주차장.
차에서 내리기 전, 민호는 한우협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어, 이 대표.
“회장님, 농장주님들한테 농장 입출입 제한 꼼꼼하게 단속하라고 하시고요. 특히 한림사료 측하고 연관된 사람들 출입 제한하라고 해주세요.”
-어, 알았어. 근데 무슨 일이야?
“그냥 지금은 그렇게 해주시고요. 사료는 급한 대로 이번 달 치는 명일사료에서 받은 거 저희 쪽에서 직접 배송할 겁니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미국 업체에서 직수입한 거 배송될 거고요.”
-어, 알았어.
이번에는 맞고 대응할 생각이 아니다.
“그럼 수고 좀 해주십시오.”
-어, 들어가.
딸깍.
통화를 마친 후,
「성명과 생년월일을 말씀해주십시오.」
“이민호, 86년 5월 5일.”
삐빕-
「이민호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민호는 ‘숲’에 들어갔다.
“총재님, 나오셨습니까?”
“계셨네요. 근데, 책임님은 왜 저를 총재님이라고 부르시나요?”
“한국은행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있고, 이곳 돈나무숲은행에는 이민호 총재님이 계시니까요.”
“네? 하하. 그렇게 안 보였는데,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농담이 아니었다.
우동익에게는 숲지기 일이 사명이었고, 이민호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대표님.”
“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요?”
“네. 그때 말씀해주시길, 나무는 절대 햇빛을 봐서는 안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그랬죠.”
“햇빛에 놓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다!
초반에 궁금해했던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 없었다.
워낙 할머니의 말을 어기면 안 되는 신명처럼 받아들였기에, 감히 시도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없는데요. 설마 혹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니까,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무가 어떻게 되는지를.”
민호는 오랜만에 심장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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