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지갑에 돈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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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지 기록 후, 이레 경과.
명칭: 돈나무
가지 수: 4
색깔: 흰색에 검은 무늬 (자작나무와 유사함)
높이: 27 cm (뿌리 제외)
줄기 둘레: 약 2.2 cm
가지 둘레: 약 0.2 cm
총 수확량: 24장 (1,200,000원)
새순이 나는 시각: 불규칙
잎이 나서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대략 22~23시간
떨어지고 나서 새순이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 대략 1~2시간
온도: 섭씨 17도 (평균)
습도: 측정 못 함.
조도: 측정 못 함.
술: 주지 않음.
그 외 특이사항:
-일주일 동안 줄기 둘레가 약 0.2 cm 정도 굵어짐.
-줄기 색이 좀 더 짙어진 것 같음.
-4번 가지 옆으로 다섯 번째 가지가 나오고 있음.
고민 끝에 술은 주지 않았다. 첫 잎이 나온 날, 소주를 반 병정도 부어준 것은 맞지만,
「화분의 흙이 마른듯해 보이면 술을 좀 따라 줘.」
네잎클로버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무를 담고 있는 흙이 아직 촉촉해 보여 더 주지 않았다.
나무가 여러 그루 있거나 튼튼해 보였으면 좀 더 다양하게 실험해봤겠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지 연구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아직 내가 뭘 해야 할지 정확하게 몰랐다. 단,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잘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다섯 번째 가지가 솟아나고 있다.
---*---
“죄송합니다. 고객님 신용등급이 좋지 않아서···.”
빌어먹을 신용등급.
나이를 먹으면 누군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저놈의 등수 매기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오전에 정환은행을 찾아 대출 연장을 문의했다.
같은 이유로 일언지하 거절당하고 오히려 협박까지 당했다.
다음 달까지 밀린 이자와 원금을 갚지 않으면 월급 차압에 들어가겠다고.
그래서 좀 더 대출이 용이한 제3금융권을 찾아왔는데, 결과는 비슷했다.
“혹시 자산은 없으실까요? 꼭 집이 아니라도 땅이나, 전세, 아니면 자동차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다른 곳보다 이자가 비싼 이곳에 올 이유도 없다.
“혹시 연금복권에 당첨됐으면 그걸로 대출이 가능하나요?”
“연금복권이요?”
갑자기 생각났다. <행복복권>에서 발행한 공식 연금복권은 아니지만, 그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아니, 비교하자면, 내 돈나무가 더 좋다. 돈나무는 매일 준다, 그것도 현금으로.
답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를 상담해주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앉아 있던 매니저에게 문의하자, 이번에 그가 내가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혹시 증빙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에서 분명하게 밝힐 수 없는 수입원은 담보로서 가치가 없다.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봤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첨된 거는 아니고요. 당첨된다면 대출이 가능한가 궁금해서 여쭈어봤어요.”
“아네- 당첨되시면 농업은행에서 저렴한 이율로 바로 대출이 가능하실 겁니다.”
이상하게 쳐다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매니저는 전문가다웠다.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급한 사람들이다 보니 내가 방금 한 질문은 귀여운 축에 드는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대출을 받으러 많이 다니다 보니 한가지 터득한 게 있다. 대출을 신청하러 와서는 결코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친척이나 친구한테 빌리는 거거나 악질 대부업체라면 모를까, 대출 상담사 앞에서 간절해 보이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득이하게 급전을 빌리러 왔지만 적어도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게 만들어야 대출을 승인해준다. 그들은 돈이 없는 사람의 장기를 노리고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믿고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은행이나 제2금융권들은 회사에서 정해놓은 기준이 명확해서 해당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면 빌려주지 않지만, 제3금융권은 조금 다르다. 얼마나 믿음을 주느냐가 저울의 눈금을 움직이기도 한다.
“잠시만요. 삼천만 원 대출 알아보러 오셨죠?”
“네.”
“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직장이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림사료입니다. 영업 1팀 대리.”
중소기업이지만 나름 실한 기업.
매니저는 일어서려던 나를 다시 앉혔다.
---*---
「“삼천만 원까지는 조금 힘들고 이천만 원까지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신용등급이 좀 낮으셔서, 대출금리는 연 19.7% 적용될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혹시 직장을 그만두시거나 이직하실 계획은 없으신 거죠?”
“없습니다.”
“아, 그럼, 본사에 심사 넣어보고 결과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심사는 보통 이삼일이면 되는데, 사실 저희 기준에 조금 부합하지 않는 신청이라서 일주일 정도 걸릴 수도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혹시 정환은행에 있는 제 대출을 이리로 옮기면, 대출을 좀 더 해주실 수 있나요? 정환은행에서 연 13%대에 빌린 거를 이자를 좀 더 올려서 이쪽으로 다 옮기면요.”
“아···그것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솔직히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신용 7등급에 기존 대출이 2억이나 있고 그것마저도 연체 중.
안되면 그나마 괜찮은(?) 사채업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통했다. 물론 아직 결정이 난 거는 아니지만, 매니저가 신청을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그런데 왜 해주었을까?
직장이 있으니까?
직장이 있다고 해도 인센티브 합쳐 연봉이 3,500만 원 조금 넘을 뿐이고, 기존 대출이 2억이나 있다.
수치로만 봤을 때는 불합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을 받아주었다는 건 무언가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는 뜻이다.
‘돈나무!’
누가 그랬다, 남자는 지갑에 돈이 있어야 힘이 난다고.
바뀐 거는 그것밖에 없었다. 신용등급이 올라간 것도 아니고, 담보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이 나는 나무에 대해 털어놓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집에 그게 자라고 있었을 뿐.
그게 다였다.
“대리님,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왜?”
“아니, 얼굴이 좋아 보이셔서요.”
“그래?”
“네. 지난주 전에는 되게 근심이 많아 보이셨는데, 오늘은 뭐랄까···아무튼 좋아 보이세요.”
“좋은 일 있어.”
“무슨 일이요?”
공돈이 생겼다.
그리고 앞으로 더 생길 것 같다.
“이 대리, 인사과에서 찾아. 가봐.”
“네.”
---*---
점심시간 직후, 최진태 부장의 호출을 받고 인사과 회의실로 향했다.
“이 대리, 어떻게 생각 좀 해봤어?”
의사를 묻는 것처럼 상냥했지만, 테이블 위에는 이미 보안 유지 계약서 초안이 올려져 있었고, 옆에는 증인 세울 목적으로 데리고 들어온 대리가 앉아 있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최진태 부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이 대리, 이 정도면 정말 회사에서도 많이 봐주는 거야. 괜히 소리가 나가면 곤란하니까. 정말 큰일 나고 싶어?”
그리곤 방금하고 완전히 다른 톤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퇴사할 생각이었다.
회사를 상대로 싸울 생각도 없었고 (그건 지금도 없다), 어찌 됐건 퇴직금하고 위로금이 나온다면 당장 천만 원 넘게 수중에 들어올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삼천만 원 대출 심사를 받는 중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조건 있어야 했다.
설사 심사에 통과해 대출이 나온다고 해도, 직장을 그만두면 대출원금이랑 이자를 일시에 갚아야 하는 특약 조건이 붙을 게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되는 일.
당장은 조카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알고 있으면서 생각은 왜?”
대출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도 다른 곳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회사와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해서 억울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분명 윤 과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애초에 해당 업무는 내 업무도 아니었다.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말하자, 최진태 부장은 순간 살짝 당황한 듯했다.
“내가 알아봐 준다고 했잖아.”
“알아봐 준다고만 하셨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는 않으셨잖아요.”
“응? 그건 일단 퇴사하고 나면 알아봐 줄 거야. 그렇잖아? 그래도 명색이 회사 인사과 부장인데 그만두지도 않은 직원을 다른 회사에 소개해주는 거. 설마 나 못 믿는 거는 아니지?”
“죄송하지만, 안 믿습니다.”
“뭐?”
붉어지는 부장의 얼굴.
“어떻게 믿을 수가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퇴사를 권고하는 회사 인사팀 부장님을.”
목소리가 지나치게 당당했나 보다. 옆자리 대리가 부장의 얼굴을 힐끔 본다.
“이 대리. 이민호 대리. 내가 이 대리 심정을 모르는 거는 아닌데. 말했잖아. 회사 손실이 어마어마해. 본사에서 감사팀 나온다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게 저라고요?”
“아-참. 말귀를 알아듣는 거 같더니···아니네. 그래서? 이 대리가 원하는 게 뭔데? 싸울 거야?”
아니, 싸울 마음은 여전히 없다.
미디어가 붙어줄 갑질 사건도 아니고 싸워서 득이 될 것 하나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시간을 좀 버는 것뿐.
“말씀드렸잖아요.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다른 직장을 알아볼.”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최진태 부장은 서류철을 쾅 닫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인사과 대리는 나에게 엄지를 추켜세우고는 자기 상사를 따라 나갔다.
‘뭐지, 이 기분은?’
잘은 모르겠는데 왠지 승리한 기분이 든다.
---*---
㈜ 한림사료, 부사장실.
똑똑똑.
“들어와.”
한경제 부사장의 굵직한 목소리를 들은 노충선 이사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90도로 인사를 올렸다.
“어떻게 됐어?”
“그게···.”
노충선 이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영업 1팀 이민호 대리가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음을 보고했다.
“이번 주에 받는다며?”
“그게···아무래도 갑자기 그만두는 거라 본인도 좀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인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 안 해줬어? ”
“해줬습니다. 해줬는데, 아무래도 다른 데 다닐 곳을 먼저 좀 알아보고 나서 하겠다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대리가 빚도 좀 있고. 아, 또 조카가 아프다는 것 같습니다. 이 대리가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동생하고 둘만 남았는데, 둘의 형제애가···.”
한경제가 노충선의 말을 끊는다.
“노 이사.”
“네, 부사장님.”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뭐 하는 거냐고?”
“아, 저는 그냥 상황을 설명해 드리려고···.”
“노 이사도 같이 나가고 싶어?”
“네? 그게 무슨···? 아! 아니요, 아니요.”
“그럼 다음 주까지 사인받아와. 꼬리가 길어지기 전에 내보내.”
“예! 알겠습니다.”
겁을 잔뜩 먹은 노충선이 서둘려 나가려는데,
“노 이사.”
한경제가 다시 그를 불렀다.
“네, 부사장님.”
“위로금으로 좀 더 줘.”
“얼마나?”
“원래 얼마 주려고 했지?”
“원래는 두 달 치 월급을 주려고 했습니다.”
“세 배 줘. 생각하겠다는 건 돈을 더 달라는 거야. 대리 월급 여섯 달 치라고 해봤자 얼마 안 되잖아. 그냥 줘. 줘서 내보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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