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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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어딘가 걷고 있었고,
그곳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작은 나무를 향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 앞에 서 있는데, 다리가 아프다.
이 나무가 이렇게 컸던가?
손바닥으로 가려질 것 같았던 나무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컸다.
둘 중 하나였다. 내가 먼 길을 걸어온 것이든, 내가 이곳에 오는 사이 나무가 자란 것이든.
나는 이제 안다.
이게 무슨 나무인지.
가지마다 노란색 지폣잎이 달려있다.
돈나무···.
*
“사장님, 여기가 원래 해산물 가공업체 냉동창고로 쓰이던 곳인데, 교통이 좋아서 어떤 공장을 해도 괜찮아요. 도로 다 깔아놔서 새로 깔 필요도 없어, 배선, 배수 다 잘되어 있어서 걱정할 필요 없어.”
돈나무 모체는 벌써 화분 길이를 포함해서 2m 넘어가기 시작했고, 꺾꽂이한 분체들 역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25평 단독주택 반지하에 계속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솔직히 그렇다고 나무들을 당장 어디 다른 곳에 둘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미래를 생각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냉동창고면 냉장 시설은 다 작동하나요?”
“아, 그럼요. 한동안 사용을 안 해서 그렇지 다 작동해요. 아, 냉동식품 하시려고요?”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다.
지하였으면 좋겠지만, 공장을 지하에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서울 근교에 지어진 창고들이나 물류센터들이 쓸만했다.
실내는 넓고 높았으며, 창을 내지 않아 깜깜했다.
민호는 그 넓은 공간을 보며 상상해봤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돈나무 농장’을.
흐흐흐···.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어떻게? 마음에 드시나요? 계약하실까요?”
“며칠 만 더 생각해 볼까요? 혹시 다른 매물은 없나요?”
가격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더 좋은 물건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징징- 징징-
“어, 승호야.”
-형, 지금 어디야?
---*---
성하 F&B 신사업본부.
채영의 호출에 법무팀장이 달려왔다.
“이것만 가지고 업무방해로 고소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습니다.”
채영이 사진을 내밀자, 법무팀장이 대답했다. 이수여대역 지점장을 통해 이미 본 사진이었다.
“이게 업무방해가 아니라고? 이게 업무방해가 아니면 뭐가 업무방해야?”
옆에 있던 송재성이 대신 물었다.
“대한민국 형법상,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려면, 허위 사실을 유포했거나 아니면 위계 혹은 위력으로 업무를 방해한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사인만 내건 것을 두고 위계 혹은 위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채영은 법무팀장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그럼, 대놓고 이렇게 우리 지점 음식을 자기네 가게로 배달시켜서 먹으라고 하는데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야? 손해가 확실한데도? 민사도 안 돼?”
“민법에는 업무방해라는 따로 정의되어있지 않고, 방금 말씀드린 형법상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불법행위가 있을 때, 그로 인한 손해가 있었다면 청구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아니, 뭐 법이 그따위야?”
잠깐만 생각하면 <불떡>에도 해가 될 것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게 안에서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포장해서 앞 가게에서 먹으니 매출이 줄었다고 할 수 없었다.
경쟁 관계로만 보다 보니 상대가 이득을 얻는 것이 꼴 보기 싫은 것.
“정 팀장님.”
“네, 본부장님.”
“방금 허위 사실 유포도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허위 사실 유포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됐네요.”
“네?”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하면 되겠네요.”
처음 듣는 말이다. 채영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건 법무팀장뿐만이 아니었다.
“허위 사실 유포요?”
법무팀장의 질문에 채영은 송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지점장이 말하지 않았나요? 상대방 가게에서 우리 <불떡> 원료가 백 프로 국산이 아닐 거라고 했다는 말.”
“네? 언제···아, 아, 네, 그랬죠. 그랬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능한데···, 상대방 가게에서 그랬다는 증거가 있나요?”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 법무팀장의 태도에 짜증을 냈다.
“정 팀장님.”
“네, 본부장님.”
“지금 재판하세요?”
“네?”
“지금 재판하시냐고요?”
“···아닙니다.”
“상대방 가게에서 우리 지점 영업을 방해하고 이득을 취하고 있잖아요. 그걸 해결할 방법을 알아보려고 팀장님을 불렀는데, 팀장님은 지금 증거가 중요하신 건가요? 우리 회사 지점장이 들었다고 하는데도?”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괜히 고소했다가 법적으로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팀장님!”
“네.”
“상대가 기업인가요? 아니면 대형 가맹점인가요?”
“···아니요.”
“그냥 동네 구멍가게 떡볶이집이에요. 그리고 우리 목표는 저 조악한 사인을 떼게 만드는 거고요. 고소하면 바로 꼬리 내리지 않겠어요? 팀장님이 저 가게 사장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 같은 기업이 고소하겠다는데.”
“사인부터 바로 뗄 것 같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 없이 말하지? 자기 회사가 아니라서 그런가?”
“···죄송합니다.”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 그냥 조금만 더 생각하면서 일하자고요, 팀장님.”
“예···.”
“바로 내용증명부터 날리고, 송 실장님은 모레 그 가게 찾아가서 경고하세요. 사인 당장 떼지 않으면 고소할 거라고.”
---*---
“형, 이런 게 날라왔어.”
내용증명.
아버지 빚 때문에 많이 받아봤다.
회사에서도 받아 본 경험이 있다.
법적 절차를 밟기 전 보내는 경고장.
“참나- 그것 좀 붙였다고 뭘 이런 걸 다 보내냐.”
“아까는 상하 F&B에서 사람도 다녀갔고.”
경고장치고는 모호하게 쓰여있었다.
형법 313조가 어쩌고저쩌고 민법 750조가 어쩌고저쩌고.
업무방해라는 단어만 설명해놨지, 정작 내가 한 어떤 행위가 업무방해인지 명확하게 적시되어 있지 않았고, 대신 사인을 당장 떼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말만 강조되어 있었다.
‘싸워볼까?’
살짝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다.
언급된 법 조항들을 찾아봐도 내가 저지른 불법행위는 없었다.
“됐다.”
귀찮았다.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괜히 불필요한 송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저거 떼자.”
그렇다고 그냥 꼬리 내리기는 싫다.
싸움을 걸어온 건 저쪽이다.
“승호야, 종이하고 매직 좀 가져다줄래.”
*
웅성웅성.
기존에 붙어놓았던 사인을 떼어내고 새로운 사인을 붙였더니, 가게 앞이 시끄러워진다.
찰칵찰칵.
“뭐야? 그럼 이제 포장해서 못 먹는 거야?”
“<불떡>에서 못 하게 했다잖아.”
“아쉽네. 은근 콤비 괜찮았는데.”
“사실 좀 이상하기는 했어.”
“그렇다고 이러는 거는 좀 에반데. 솔직히 내가 포장해서 내가 먹고 싶은 데서 먹겠다는데, 왜 지들이 난리야. 그게 더 이상하지.”
“하긴, 그러네.”
“이거 약간 대기업 횡포 같은데.”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새로운 사인을 붙인 거는 아니었다.
단지, 그 여자 행동이 괘씸해, 열받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찌 됐건 목적은 달성한 듯싶었다.
---*---
빠득.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그녀의 어금니 무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 가게에서 못 하게 해서 오늘부터 매장 내 <불떡> 배달이나 포장이 어렵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우리 가게 떡볶이도 <불떡>만큼 맛있어요^^. 츄라이?」 이거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이대역 지점장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는 송재성이 버럭 화를 냈다.
“송 팀장님.”
“네.”
“내용증명 보내고 여기 사장 만나보셨어요?”
“네. 근데 그때 그 사장은 바빠서 가게에 없었고, 대신 거기 동생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동생이요?”
“네. 이대점은 동생이 맡아서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형제가 쌍으로 참 가지가지 하네요. 그래서? 형사고소 할 거라는 경고했나요?”
“그럼요. 아주 확실하게 말해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왔다고요?”
“그게···저랑 이야기했을 때, 동생은 분명 겁을 먹은 것 같았는데···.”
“형이 한 행동이다? 그럼 이것도 그 사람이 쓴 걸 거겠네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채영은 민호를 떠올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다.
똑똑-
“부르셨습니까?”
새로 올라온 사인을 두고 회의를 하는 사이, 호출한 법무팀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 팀장님.”
“네.”
“이거는 명예훼손 같은 걸로 걸어볼 수 없나요?”
법무팀장은 상사가 내민 태블릿 PC 속 사진을 검토했다.
“「저쪽 가게에서 못 하게 해서 오늘부터 매장 내 <불떡> 배달이나 포장이 어렵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우리 가게 떡볶이도 <불떡>만큼 맛있어요^^. 츄라이?」 흠···.”
어렵다. 명예훼손으로 걸만한 문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뜻 말하지 못한다.
“왜? 안 될 것 같아?”
기다리다 지친 송재성이 대신 물었다.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사실이나 허위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하고, 해당 적시가 피해자의 명예나 사회적 가치를 훼손해야만 하는데···.”
법무팀장이 법률적 성립요건에 관해 설명을 하려는 순간,
“여기!”
“네? 어디···?”
“이게 거슬리지 않나요?”
채영이 그의 말을 끊고 해당 사인의 ‘<불떡>만큼’이라는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불떡>만큼’ 맛있다고 쓰여있잖아요. 두 분 눈에는 그게 거슬리지 않냐고요?”
“거슬립니다! 이거네요! 정 팀장, 이거네!”
“···아, 네.”
“나는 굉장히 불쾌한데.”
“저도 굉장히 불쾌합니다. 이게 명예훼손이네요. 감히, 어디 3,000원짜리 떡볶이가 우리 불떡하고.”
“팀장님.”
“네, 본부장님.”
“이번에는 내용증명 보내지 말고 바로 변호사 선임해서 소송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법무팀장은 조용히 대답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업무방해, 명예훼손 둘 다 법원에 가면 패소할 거라는 걸.
하지만, 그녀가 하려는 건 소송이 아니었다.
돈과 힘으로 압박해서 백기를 들게 할 생각이다.
일반적인 동네 가게였다면 십중팔구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가게 주인은 ‘살려만 주십시오’하고 두 손을 들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 가게 주인은 일반적인 동네 가게 주인이 아니었다.
*
며칠 뒤···.
“본부장님.”
“왜요?”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무슨 일이요?”
“현동이네 관련입니다.”
“그 가게 이름 좀 안 말하면 안 돼요. 되게 거슬리는데.”
“죄송합니다. 현동···아니 ‘그 가게’ 주인이 맞고소하겠답니다.”
응? 맞고소?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고요?”
“네.”
미쳤군. 설사 패소한다고 해도 변호사 비용이 엄청나게 나올 텐데. 그런 작은 가게에서 그걸 감당하겠다고?
내 차가 국산 중형이고 상대방 차가 롤스로이스면, 상대방 차의 과실이 90%라고 해도 지는 게임이 된다. 그것과 같은 논리다.
“흥. 하라고 하죠. 보기와는 다르게 되게 무모한 남자였네요. 정 팀장님한테 로펌 큰 데 쓰라고 하세요. 이름만 들어도 아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기를 확 죽여버리게.”
“근데 그게···.”
“왜요? 무슨 다른 문제가 있어요?”
“그게···현동···아니 그 가게에서···.”
“그 가게에서 뭐요?”
“김앤강을 선임했다고 합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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