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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칸더브이 님의 서재입니다.

돈나무가 생겼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서칸더브이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4
최근연재일 :
2022.07.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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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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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돈나무

DUMMY

「“23번,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뜻의 사자성어 말해봐.”

“‘설상가상(雪上加霜)이요.”

“틀렸어.”

“아닌가요?”

“설상가상은 ‘눈 위에 서리가 내렸다.’라는 뜻으로 ‘이미 눈 온 데 서리가 내려봤자 별반 차이가 없다.’라는 의미야. 그래서 진짜 ‘엎친 데 덮친 격’의 의미를 가진 사자성어는···.”」


병상첨병(病上添病).

‘이미 병에 걸려 앓는 도중에 또 다른 병이 겹쳤다.’

중학교 시절 국어는 가끔 저렇게 아무나 불러 사자성어를 물어보곤 했다.

내게 물어본 성어가 저것이었는데, 그 덕에 나는 수능에서 한 문제를 맞힐 수 있었다.


“분명 저는 윤 부장님이 시키는 대로 주문을 넣었을 뿐인데요.”


어렸을 때부터 언어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특출나게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국어, 영어 등 언어를 배우는 것이 다른 과목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당연히 다른 과목들보다 열심히 했고, 대학에 가서도 영어는 꾸준히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이름도 없는 4년제 대학을 자격증 하나 없이 겨우 졸업하면서 나름 살길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살길을 열어주었다.

비록 중소기업이었지만 나름 튼실한 ㈜한림사료에 취업할 수 있었던 건 내 토익점수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윤 부장 말은 그렇지 않던데?”


중소기업 대부분 그렇듯이 일단 채용된 신입사원은 적성이나 특징에 상관없이 빈자리에 투입된다.

나도 그랬다. 인터뷰 때는 ‘영어를 잘하냐?’, ‘해외 출장에 결격사유가 없느냐?’ 등, 마치 해외 관련 부서에 보낼 것처럼 그랬지만, 결국 입사 후 내가 발령 난 곳은 국내 영업부서였다.


그래도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영어를 조금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가끔 타부서에서 영문 이메일을 부탁할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다 들어줬다.

사회에서 공짜라는 건 없었기에, 부탁을 들어주면 언젠가는 보답이 있었다.

그래서 구매팀 윤 부장님이 해외의 셀러에게 사료용 옥수수 원료 구매의뢰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도와주었다.

그런데 단순히 호의로 했던 일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꿈에 몰랐다.


“윤 부장님하고 대질시켜주십시오. 저는 진짜 부탁받은 대로 오더를 작성했을 뿐입니다.”

“윤 부장 어제부로 퇴사했어.”

“네?”

“이 대리,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 하면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야. 위에서도 난리가 났고, 조만간 본사에서 감사팀이 나올 거야.”


혐의는 단순했다.

내가 작성한 주문서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주문 수량이 잘못 표기되었는데, 한 달 치 분량인 20,000t의 사료용 옥수수를 주문하는 대신 내가 실수로 그 백배인 2,000,000t을 주문했다는 주장이었다.

인사과 최 부장은 수량 차이가 너무나 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주문서에 이백만 톤이라고 기재한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윤호성 부장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명확하게 기억한다. 왜냐하면 주문하는 이메일을 작성하면서 나도 조금은 이상하다고 느껴 윤 부장과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가 구매팀도 아니고 윤 부장님이 시키지 않으셨으면 제가 그렇게 작성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차적인 책임은 윤 부장이 지고 퇴사한 거야. 그런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네도 그냥 넘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회사에서 소송을 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백만 톤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내게 요구한 윤호성 부장도 이해할 수 없지만, 주문서를 받은 셀러(seller)도 그렇다. 평소 주문량의 두세 배도 아닌 백배가 넘는 주문이 들어가면 바이어(buyer)와 확인해보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이런 걸로 소송이 벌어지고 직원에게 책임소재를 묻겠다고?

그것도 담당자가 아닌 그저 주문서를 대신 작성해준 직원에게?


억울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직장이 필요했다.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원하시면 진술서 쓰겠습니다. 제가 수량이 과한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윤 부장님이 ‘자기도 잘 모른다. 위에서 곡물값이 많이 오른다는 보고서를 보고 결정한 내용이다. 자기도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다.’라는 취지로 말씀하셔서 제가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이 대리도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 거네?”

“제가 구매팀 업무는 잘 모르지만, 영업일을 하니까, 대충 수량이 과하다 아니다 정도는 구분할 수 있죠. 그래서 저도 확인 한번 한 거요. 근데, 아까부터 계속 말씀드렸지만, 저는 진짜 윤 부장님이···.”

“이 대리.”


인사과 최진태 부장은 내 말을 끊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말은 본사 감사팀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

“결국 이 대리도 이상한 걸 눈치챘으면서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 것 같이 들려.”

“네, 그게 무슨 말씀···?”

“그리고 이건 내가 이 대리를 좋아해서 그냥 언질을 주는 건데···. 위선에는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는 눈치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윤 부장이 왜 그만뒀겠어?”

“네?”

“생각해 봐. 우리 회사에서 20년을 일했는데. 그 사람이 구매팀에서만 15년이야. 그런데 왜 그만뒀겠어?”


최진태 부장은 더 설명하지 않고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을 한참 쳐다보고 나서야 그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윤 부장님도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최진태 부장은 내가 뭔가 눈치챘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방금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제안과 협박을 동시에 했다.


“지금 조용히 나가면 퇴직금이랑 위로금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원하면 내가 다른 회사에 자리 있는지 알아봐 줄 수도 있고. 근데, 만약 본사 감사팀 나와서 시끄럽게 하면, 회사에서 자네한테 손해배상 청구할지도 몰라. 이 대리도 알잖아. 그런 소송에 휘말리면 개인만 골치 아픈 거. 그리고 회사는 제대로 다닐 수 있겠어?”

“······.”

“일주일 줄게. 생각해 보라고.”



---*---



병상첨병(病上添病), 아픈 데 또 다른 병이 찾아오고,

화불단행(禍不單行), 불행이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잇달아 온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한테는 이런 일만 벌어지는 걸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현동이 부모님께 어렵사리 돈을 빌려 병원비를 마련했지만, 상어 떼처럼 주변을 서성이던 아버지의 빚쟁이들을 피하려다가 그만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동생 결혼에 주려고 이것저것 밤샘 아르바이트를 뛰며 모아놓은 돈. 아파트 단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킥보드 탄 아이와 부딪히는 바람에 합의금으로 날려버렸다.


평생 이런 식이었다.

도대체가 좋은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다.


주위에서는 누구누구가 코인으로 몇억 원을 벌었네, 주식으로 몇천만 원을 하는데, 나는 늘 돈에 허덕였다.

그래도 밝게 살려고, 희망을 갖고 살려고, 얼굴에서 그림자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나만 구렁텅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나만 늘 출발선으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인사과 최진태 부장과 면담 후 자리로 돌아온 나는 퇴직금 계산을 했다.

2017년에 입사해서 5년 조금 넘게 근무했다.

얼추 계산해보니 천만 원 정도 나올 듯싶다.


「지금 조용히 나가면 퇴직금이랑 위로금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원하면 내가 다른 회사에 자리 있는지 알아봐 줄 수도 있고. 근데, 만약 본사 감사팀 나와서 시끄럽게 하면, 회사에서 자네한테 손해배상 청구할지도 몰라. 이 대리도 알잖아. 그런 소송에 휘말리면 개인만 골치 아픈 거. 그리고 회사는 제대로 다닐 수 있겠어?」


급전이 필요하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걸 나도 안다. 다른 회사에 자리를 알아봐 준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가라는데.

억울하지만 최 부장의 말이 맞았다. 나 같은 일개 사원이 무슨 힘으로 회사 상대할 수 있겠는가.

진실이라는 것도 힘이 있을 때나 밝힐 수 있는 거다.


나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사직서 양식을 출력했다.


“이 대리님, 식사 안 하세요?”

“응, 먼저 가.”

“저희 오늘은 뚝배기집에요. 바로 오실 거죠? 뭐 시켜드릴까요?”


밥맛은 없지만, 먹을 거다.

인생 거지 같지만,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제육.”



---*---



십 대, 이십 대 남자들의 모든 대화가 ‘여자’라는 주제로 귀결된다면,


“이 대리님, 코인 하세요?”


삽, 사십 대 남자들 대화의 끝은 ‘돈’이다.


“제가 아는 애 회사 과장님은 코인으로 대박 쳤는데, 회사에는 말 안 하고 그냥 다닌 데요. 한 20억 가까이 벌었다고 하던데, 왜 회사에 다닐까요? 나 같으면 그만두고 변두리 어디 작은 빌딩이나 사서 건물주 놀이하면서 살 것 같은데.”


그리고 누가 그러더라, 오십 대가 넘어가면 ‘건강’이라고.


“20억? 20억 가지고 무슨 서울의 빌딩을 사. 요새 강북 아파트 가격이 얼만데.”

“그래도 완전 변두리 같은 데는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김포 같은 데?”

“김포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거기도 이십 평대 아파트가 5억이야.”

“아, 그렇구나.”

“찾으면야, 어딘가 있기는 하겠지. 근데, 20억짜리 빌딩 사봤자, 월세 얼마나 나올 것 같아? 연수익률 5%면 잘 나오는 거야.”

“20억의 연 5%면 1년에 1억···.”

“800만 원 좀 넘게 가져가는 거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요?”

“세금 안 내? 차 안 몰아? 결혼해서 애 안 낳을 거야? 우리 애 영어유치원 비가 한 달에 80만 원이야.”

“헉.”

“싼 데라서 80만 원이야. 강남에는 월 200에 교재비, 특활비 따로 받는 데도 많아.”


조규형이 내게 물었지만, 듣고 있던 오 과장님이 대신 대답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로또가 돼도 회사 다닌다는 거야. 이제야 비로소 아파트 한 채 사고 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거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으나, 열심히 산 선배의 조언이었다.

8,000만 원짜리 전셋집에서 시작한 오중석 과장은 내가 한림사료에 입사했을 때부터 부동산 이야기를 했다. 틈만 나면 부동산 공부를 하셨고 주말에는 이, 삼천만 원으로 갭 투자할만한 오래된 빌라들을 찾아다니셨다.

그래서 지금은 멀리 한강이 보이는 마포 30평대 아파트에 사신다. 여전히 주말이면 적은 돈으로 투자할 만한 상가나 아파트를 보러 다니시고.

부모덕에 신혼집으로 몇억 원짜리 아파트부터 시작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한 얼마 정도 꾸준히 들어오면 은퇴할 수 있을까요?”

“꾸준히 얼마? 흠···한 이천···잠깐 이거 세후 기준이 아니잖아. 그러면 미니멈 3,000만 원은 들어와야 은퇴하지.”

“네에?! 삼천이요? 헐-.”


우리 회사 신입사원 평균 월급이 세전 250만 원이 안 된다. 전무님 연봉 가지고도 월 삼천은 어렵다.

결국 월급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 은퇴를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지만, 회사를 평생 다녀도 은퇴를 못 한다는 회사원 선배의 말도 아이러니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래. 괜히 헬조선이라고 하겠냐. 근데, 이 대리, 이 대리는 뭐 좀 하고 있어?”


이야기가 돌고 돌아 질문이 다시 내게로 왔다.

‘뭐 좀 하고 있어?’

나는 저 질문이 싫다.

마치 요새 청소년이 꿈이 뭐냐는 질문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처럼 나도 저 질문이 싫다.


꼭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 듯한 분위기.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느낌.

어쩌면 사실일지 모른다.

아니, 사실이다. 가만히 있으면 떨어지는 건 주식시장뿐만이 아니다.

인생도 똑같다. 뭘 하고 있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이천만 원만 있어도, 아니 수중에 자기 돈 천만 원만 있어도 빌라 같은 거는 투자할 수 있다니까.」

「주식투자가 왜 매력적이냐고 하냐면요. 이건 목돈이 없어도 돼요. 정말 한 달에 십만 원씩만 공부 하나 안 하고 코스피 우량주에만 넣어도 연 5%는 보장돼요.」

「저는 코인하고 있습니다. 큰돈은 아니고요. 1년 전에 씨드 20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2,000만 원 정도 돼요. 코인 시장 많이 죽었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우리 같이 아무것도 없는 애들이 집사고 차 사려면 코인밖에 없어요.」


정말이지, 일주일에 저런 비슷한 말을 열 번도 더 듣는 것 같다.

누가 모르나, 뭘 하고 있어야 하는걸.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과 동시에 어딘가로 다 빠져나가고 빚이 턱밑까지 차올라 겨우 바둥거리고 있는데, 저기서 먹구름이 다가오고 기분을.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거를.


간신히 떠 있기도 버거운데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자기 돈 천만 원? 이백만 원 씨드? 월 십만 원씩?

흥, 당장 사랑하는 조카 수술비조차 어디서 빌릴 데가 없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정말 장기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요.”

“하 참- 이 대리, 이 대리가 지금 몇 살이지?”

“서른일곱입니다.”

“뭐야 삼십 대 후반이네. 벌써 그렇게 됐어? 나는 아직 중반인 줄 알았네. 남자도 삼십 대 후반이면 이제 꺾인 거야. 우리 처제가 결혼정보회사 다니는데, 결혼대상자로 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자 나이대가 삼십 대 중반. 끝자리 ‘8’자로 넘어간다? 그때부터는 코 찡긋하는 거지. 망설여진다고. 옛날에 아저씨들이 그런 소리 했잖아,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와 같다고. 스물셋, 스물넷이 제일 좋고, 스물다섯만 되도 이제 끝물이라고. 이제 남자도 그런 게 있다네. 38 땡. 서른여덟부터는 땡이라는 거야. 결혼 안 할 거야? 요새 여자들 집 없고 차 없으면 쳐다도 안 봐. 근데 38이야? 그건 끝인 거야. 이 대리도 결혼해야지.”


결혼?

진작에 접었다.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만나서 아등바등하며 살기도 싫고, 가난을 대물려줘야 할 자식을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누가 그러더라, 멀쩡하게 회사 다니고 삼시 세끼 밥 먹고 다니는 게 가난이냐고. 세상에는 그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흥, 이제 ‘가난’이라는 단어도 내 맘대로 못 쓰는 건가?

그럼 난 뭐지? 가난한 게 아니면 하산층?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큰 교회 갔더니, 강대상 위에서 마이크를 든 남자가 말했다.


「가난의 고통은 물질적인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피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내가 가난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부자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물질적인 부족함에서 오는 고통 따위는 절대 여러분은 괴롭힐 수 없을 겁니다. 행복해지실 겁니다. 그럼 성도님들 저를 따라서 한번 말해보실까요?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다! 나는 진짜 부자다! 어떠세요? 벌써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더 듣지 않고 나와버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말투에서 교포들이 쓰는 억양이 나오는 그는 진짜 가난이 뭔지 모르는 자였다.

정신적인 피폐함은 물질적인 부족함에서 온다. 아프니까 우울증이 오는 것처럼. 우울증을 고친다고 아픈 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 대리, 내가 우리 처제 일 하는 데 소개해줄까? 성사율이 70%가 넘는대.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가입비는 면제해줄 수 있을 거야. 어때 관심 있어?”


더 듣기 싫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웃으면 넘어갔겠지만, 그날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 사람들하고 밥 먹을 일도 없을 테니까.


“과장님.”

“할 테야?”

“돈 좀 있으세요?”

“응?”

“삼천만 원 있으면 좀 꿔주세요. 조카 수술비가 필요해서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돈 얘기라는 것이 그렇다.

‘남이 얼마를 벌었네’, ‘요새는 무슨 투자가 좋네’ 열띠게 토론하다가도 정작 필요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불편하다.


그게 목적이었다.

불편하면 입을 다무니까.



---*---



“로또 삼천 원어치만 주세요.”


고등학교 시절, 반 친구 놈들과 내기를 하다가 걸린 적이 있다. 어쩌다 주머니에 들어온 천 원을 불려, 라면을 사 먹고 싶어서였다. 그게 담임이 눈에 띄었고, 우리는 교무실로 불려가 설교를 들어야 했다.


「니들 말이야, 도박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아? 파스칼이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도박하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건다고 그랬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에 네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버리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이야.」


담당 과목이 수학이었는데, 그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했다.

어린 시절 되게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로 도박은 손에 대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인생 자체가 도박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현재 가지고 있는 돈, 현재 가지고 있는 시간을 거는 것. 그게 인생 아닌가?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많이 갖고 태어나기에 이길 확률이 높고, 누구는 그렇지 않아 적을 뿐.


“그냥 천 원어치만 주세요.”


아까 집어 들었다 놓았던 소주가 가져온다.

실낱보다 얇은 확률 끝에 달린 공상으로 달래기엔 현실이 너무 갑갑하다.



*



까톡.


[Web발신] 정환은행 – 이민호 님 01/03 대출만기. 상환일이 지났습니다. 영업점 방문하셔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7시 05분.


그나마 축복인 거는 술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게 왜 축복이냐고?

반병만 마셔도 충분하니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늦을 듯싶다.


어쩌라고?

퇴사할 건데.


그래도 가지 않을 수는 없다.

퇴직금이면 위로금이며 적어도 마지막까지 최소한의 할 도리는 해야 챙겨 받을 수 있으니까.


민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나와 단 벌밖에 없는 양복을 입고 어젯밤 술상을 치운다.

술상이라고 해봤자, 라면이랑 김치, 소주 한 병이 전부다.

라면 국물 한 방을 남지 않은 양은 냄비와 젓가락을 싱크대 안에 넣고 냉장고에 넣으려 김치통과 소주병을 들었다.

근데,


‘어?’


빈 병이다. 분명 반 이상이 남아있어야 할 소주가 없다.


‘내가 이걸 다 마셨다고?’


그럴 리 없다. 그렇게 마셨으면 이렇게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병원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설마···.’


술이 늘었나? 아니다. 몇 달 전 회식에서 전무님이 주는 폭탄주 한잔을 마시고 뻗어버려 끌려 나간 적이 있었다.

민호는 사방을 둘러봤다.

어디 바닥에 흘렸나 살피고, 혹시라도 남은 술을 버렸을까 해서 싱크대 냄새도 맡아본다.

어디에도 소주의 흔적이 없다.


“어디다 쏟은 거야?”


황당한 나머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쓰레기통 옆에 놓아둔 ‘돈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취해서 혹시 저기 부은 거야?’


햇볕이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는 ‘사 분의 삼’ 지하방, 민호는 지하철 할머니에게서 받은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냄새를 맡아보기 위해 화분을 들어 올리는데···.


!!!


민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잎이 피었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폣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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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Make 한우 Great Again! Again? +9 22.06.26 4,743 169 11쪽
49 괭이밥 농장 +9 22.06.25 4,844 168 11쪽
48 Empire State of Mind +11 22.06.24 5,144 174 12쪽
47 콩, 움브라, 그리고 루트 +6 22.06.23 5,556 175 11쪽
46 위폐 (2) +9 22.06.22 5,700 194 11쪽
45 위폐 (1) +16 22.06.21 5,850 212 12쪽
44 참교육 (2) +7 22.06.20 5,970 225 11쪽
43 참교육 (1) +15 22.06.19 6,072 238 12쪽
42 당신의 낯짝이 그렇게 두껍다면 +10 22.06.18 6,097 221 14쪽
41 I got 99 trees and a bitch aint one +9 22.06.17 6,166 238 13쪽
40 탄광 +13 22.06.16 6,240 230 11쪽
39 연 975억 원이라는 돈을 세탁하려면 +11 22.06.15 6,398 258 12쪽
38 엔테테인먼트 회사가 생겼다 +8 22.06.14 6,448 271 12쪽
37 싸우려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닌데, 왜 자꾸... +13 22.06.13 6,553 261 12쪽
36 리크루트 +4 22.06.12 6,796 258 11쪽
35 MoneyVac v. 1.0 +14 22.06.11 6,850 270 11쪽
34 NSane Tech +9 22.06.10 6,960 271 11쪽
33 음채영 +11 22.06.09 7,227 279 11쪽
32 돈 쓸어 담는 기계 +7 22.06.08 7,304 285 11쪽
31 내몰린 죽음 +14 22.06.07 7,388 283 13쪽
30 장례식 +9 22.06.06 7,522 309 11쪽
29 윤호성 부장 +9 22.06.05 7,722 319 12쪽
28 출장 +7 22.06.04 7,978 298 11쪽
27 아흔아홉 그루, 손흥민의 월급 +9 22.06.03 8,181 315 11쪽
26 땅, 차, 그리고 새집 +14 22.06.02 8,289 323 12쪽
25 Tree Limited +16 22.06.01 8,398 339 11쪽
24 먼 미래 +17 22.05.31 8,697 332 11쪽
23 협상 +13 22.05.30 8,741 335 12쪽
22 +25 22.05.29 8,801 376 12쪽
21 배달시켜서 여기서 드세요 +17 22.05.28 8,740 364 12쪽
20 지금 나와 물량 싸움을 하겠다고 +18 22.05.27 8,801 354 12쪽
19 경쟁자 +12 22.05.26 8,941 354 11쪽
18 쇼미더머니 +18 22.05.25 9,017 319 11쪽
17 현동이네 2호점 +16 22.05.24 9,039 325 12쪽
16 첫 번째 실험 +15 22.05.23 9,232 323 12쪽
15 꺾꽂이 +13 22.05.22 9,392 335 12쪽
14 현동이네를 인수한 이유 +12 22.05.21 9,484 337 11쪽
13 분갈이 +22 22.05.20 9,548 344 11쪽
12 이사 +18 22.05.19 9,675 350 11쪽
11 점입가경 +11 22.05.18 9,900 351 12쪽
10 느껴진다, 우주의 기운이 나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 +9 22.05.17 10,119 349 11쪽
9 로또 +20 22.05.16 10,303 343 12쪽
8 퇴사 +13 22.05.15 10,276 344 12쪽
7 징조 +12 22.05.14 10,367 320 12쪽
6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으면 대운이 바뀌리라 +11 22.05.13 10,626 322 11쪽
5 남자는 지갑에 돈이 있어야 한다 +9 22.05.12 10,804 337 12쪽
4 월 600 +11 22.05.12 11,271 330 11쪽
3 진폐 +11 22.05.11 11,564 333 11쪽
» 돈나무 +17 22.05.11 12,401 401 20쪽
1 네잎클로버 할머니 +20 22.05.11 14,488 49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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