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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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관계에 있어 감정의 변화는 한순간이다.
민호가 회사에 협상하러 온 그날, 채영이 그에게 느끼고 있던 감정이 호감으로 바뀌었다.
비록 그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 제 말 들으셨어요? <현동이네 2호점> 안 빼주셔도 될 것 같다는 말.”
“네? 아, 네.”
이것저것 핑계로 연락을 하면 남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짧은 답장.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운이 좋아 이렇게 만날 수 있어도 현동이네 사장은 그녀가 하는 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채영은 큰 결심을 했다.
애초의 합의대로라면 몇 개월 뒤 <현동이네 2호점>이 있는 상가 자리를 넘겨받아야 했지만 그렇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그 자리가 탐나는 건 사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왠지 그나마 실낱같은 그와의 작은 연결고리마저 사라질 것 같은 기분.
물론 <불떡>이 잘 안 되었다면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됐다.
이대역점의 흥행으로 다른 대학가 지점들도 성공적으로 오픈했고, 다음 달이면 가맹점 계약도 시작한다.
미디어는 대형 외식 기업과 지역 상점 간의 상생 모델로 좋은 표본을 남겼다고 칭송까지 했으며. (그녀가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덕에 매체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그녀도 알았다. 일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녀가 잘해서 임이 아니라는 걸.
이 남자 때문이라는 걸.
채영은 민호를 가까이 두고 싶었다.
그런데, 고작 ‘아, 네’?
“그게 다인가요?”
“뭐 더 해야 할 말이 있나요?”
“당연히 있죠.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왜 그런 결심을 내렸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 민호.
전혀 궁금하지 않은 표정.
“궁금하네요.”
그가 궁금한 건 ‘이 여자가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였다.
“제 생각에는 불떡과 현동이네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봐요.”
“왜요?”
“아시다시피 대형 프랜차이즈와 동네 가게 상생의 좋은 사례를 남겼고, 무엇보다도 오픈한 지 6개월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면 성공적인 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전 세계 최초일 수도 있는 이 상징적인 콜라보를, 잘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잘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만두는 건 바보 같다는 의견이에요.”
“전 세계 최초이지는 않을 거 같은데···.”
“그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둘이 계속하는 게 좋다는 말이에요!”
발그스레해진 채영의 두 볼.
‘이 여자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
“저도 좋습니다. 계속해요, 우리.”
더 빨개진 볼.
“흐흠. 흠. 좋아요. 그러면 제가 생각해둔 신메뉴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전까지는 그냥 기존 메뉴들을 콤보 형태로 파는 거였잖아요. 이번에는 양쪽 가게에서 같이 출시하는 건 어떤가 해서요?”
“신메뉴요? 좋아요. 뭔데요?”
“떡라면이요.”
“어- 나 떡라면 좋아하는데. 좋네요.”
“시중에서 파는 라면에 떡을 넣어서 내는 게 아니라, 상하에서 직접 제면할 거고, 고추장 베이스로 국물을 자작하게 볶음 형태로 만들 거예요.”
“그거 근데···라볶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달라요. 저희가 직접 면을 만들 거라니까요!”
“아, 네.”
이 남자 또 이런다.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거 같다.
“어때요?”
“좋아요.”
“그냥 좋다고만 하지 말고 그쪽도 의견을 좀 내는 게 예의 아닌가요?”
“아니, 자기가 연락해서 갑자기 꺼내놓고서는 나더러 뭘···. 좋아요. 개인적으로 라볶이에는 튀김만두가···.”
“라볶이 아니라니까요!”
이 여자 또 이런다.
분명 화가 나는 일이 있다.
‘웃기는 여자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먼저 만나자고 하지를 말던가.’
“알았어요. 떡라면이요. 튀김만두가 들어가면 좋겠다고요.”
“그게 다인가요?”
“뭐 더 필요한 게 있나요?”
“흠. 좋아요. 그러면 언제 품평회를 가질까요?”
“품평회요?”
“상하에서는 신메뉴 내기 전에 임직원 품평회를 열어요. 그다음에는 직원들 시식을 통해 반응을 보고요. 괜찮은 날짜를 알려주면···.”
징징-
때마침 또 울리는 민호의 휴대폰.
도착했을 때부터 잊을만하면 징징거린다.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괜찮은 날짜를 알려주면 품평회는 그때 맞춰서···.”
징징-
빠직. 그녀의 오른쪽 눈썹 위로 주름이 잡힌다.
민호는 살며시 휴대폰을 뒤집으며 계속하셔도 된다는 눈짓을 보냈다.
근데, 눈치 없이 다시 춤을 추는 휴대폰.
“진행하.겠.다.고.요. 그냥 받으시죠.”
“죄송합니다. 전화가 아니라. 친구한테 뭐 좀 물어본 게 있는데, 답 문자를 보내는 거라서.”
“뭘 물어본 거죠?”
“네?”
“뭘 물어봤길래 저랑 미팅하는 내내 집중을 못 하시는 건지 저도 궁금해서요.”
“아···.”
“저한테 말씀해주시기 곤란하시다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거는 아니다.
그냥 그걸 궁금해하고 또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좀 당황스러웠을 뿐.
“아니요. 그런 거 아니고요.”
“그럼 말씀해주실래요? 진짜 궁금한데.”
“청소기요.”
“네? 청소기요?”
---*---
띠리링- 띠리링-
“미안. 미팅 중이었어서.”
-지금은? 통화 가능?
“가능해. 그래서 그 회사에서 뭐래?”
-가능은 할 것 같은데, 관심이 없는 눈치야.
“샘플 받아보고 괜찮으면 대량 생산 주문한다고 말했어?”
-말했지. 근데 상품성이 전혀 없을 것 같다네.
“그래?”
-응. 너한테 대량 주문을 받아도 그다음에는 팔 데가 없어서 그런 가봐.
“쩝. 그럼 할 수 없지 뭐. 알았다. 고맙다.”
-그려, 들어가.
딸깍.
‘돈 쓸어 담는 기계’를 주문 제작하려고 국내 로봇청소기 업체들을 둘러보던 중 괜찮아 보이는 업체를 발견했다.
공교롭게도 해당 업체가 경준이 회사에 바이럴 마케팅을 맡긴 적이 있길래, 녀석에게 소개를 부탁했는데,
거절당했다.
‘상품성’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시간이 좀 남아 <현동이네 1호점> 카페에서 다른 업체들을 검색했다.
마땅한 회사가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지폐만 빨아들이는 청소기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계수기능이 첨가되어 있고 가능하다면 쓸어 담은 지폐를 일정 단위로 묶어주는 자동 스테이션도 포함되면 좋겠다.
복잡한 기능이 아닌 듯싶으면서도 여러 대가 동시에 작업할 때 서로 충돌도 피하고 오류를 방지하려면 신뢰가 가는 회사가 필요했다.
‘흠, 적당한 게 없네.’
그렇게 삼십 분쯤 검색했을까, 문득 좀 전 미팅에서 음채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잘 아는 오빠가 미국에서 로보틱스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데. 원하면 소개해줄까요?」
건성으로 들었다.
뭐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미팅 내내 뾰로통해 보이는 그녀를 어떡하면 빨리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로보틱스(robotics: 로봇공학)라고 하니 괜히 거창해 보인 것도 사실.
게다가 미국 회사.
그렇게 거창하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회사라고 문의를 못 넣어볼 것도 아니잖아.’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캐나다에 회사도 생겼는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단어가 괜히 거창해서 그렇지 경준이를 통해 연락한 업체도 엄연히 로봇공학을 연구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로봇청소기 개발이 로보틱스 분야니까.
미국 회사라고 무턱대고 부담가져야 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링- 띠리링-
-웬일이에요. 먼저 다 전화를 주고.
“아까 아는 오빠가 미국에서 로보틱스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죠? 그분 소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
「“돈을 쓸어 담는 청소기를 제작하고 싶다고요? 왜요?”
“돈을 쏘는 기계도 있는데 쓸어 담는 기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머니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황당했다.
머니건이야. 래퍼들이 뮤직비디오에서나 쓰는 소품이자 파티용 장난감이지 쓸모가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는가.
「“그게 왜 필요하신데요?”
“머니건이 필요한 이유랑 똑같죠. 누군가가 쏘면 누군가는 쓸어 담아야 하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 돈 쏴보셨어요?”
“아니요.”
“청소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머니건으로 돈을 쏘고 나서 쓸어 담을 수 있는 청소기를 만드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는 쓰지 않을까요?”」
너무 황당해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채영은
「“내가 잘 아는 오빠가 미국에서 로보틱스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데. 원하면 소개해줄까요?”」
라고 말했다.
왠지 그러면 그와의 관계를 좀 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느낌은 맞았다.
띠리링- 띠리링-
“웬일이에요. 먼저 다 전화를 주고.”
-아까 아는 오빠가 미국에서 로보틱스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죠? 그분 소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가 먼저 전화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오빠한테 연락해보고 문자 할게요.”
-고맙습니다.
딸깍.
도무지 파악하기 힘든 남자.
이런 남자는 처음이다.
협상 때 보여준 모습과 현동이네 점포를 늘려가는 걸 보며 채영은 ‘이 남자 요식업에 감이 있다’라고 느꼈다.
그래서 계속 연락했는데, 뭘 하고 다니는지 공장 견학 이후로는 통 만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채영은 그가 약속을 깨고 <현동이네>를 프랜차이즈화한다면 동업을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만나서 하는 얘기가···.
“돈 쓸어 담는 기계?”
이름만 들어도 웃겼다.
“지금 그만큼 돈이 있다는 거야 뭐야?”
순간 상상됐다. 그 남자가 붉은 벨벳 가운을 걸치고 머니건을 쏘고 있는 모습.
“히힛. 귀여운데.”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닌데.
민호만 떠올리면 생각이 자꾸 이상한 쪽으로 간다.
‘아, 근데 어쩌지···.’
---*---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인세인 테크(N’sane Tech)> 사무실.
“형, 올해 말까지 추가 투자금 유치하지 못하면···더 이상 힘들 것 같아.”
심도형은 고민이 많았다.
야심 차게 시작한 회사. 첫해는 주목할만한 스타트업 리스트에도 이름이 올라갈 만큼 희망적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로봇공학 업계도 경쟁이 심해지니 투자자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게다가 수익을 내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
재무를 맡은 후배의 조언에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라고 희망차게 대답했지만, 사실 도형은 답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채영이에요.」
‘채영이? 채영이가 누구지?’
메일함을 보고 있던 도형은 음채영이 보낸 이메일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채영이에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승희랑 같이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요.
···」
“아, 음채영. 아버지가 요식업을 하신다는.”
기억났다.
옛 여자친구의 친구였던 아이.
‘근데 얘가 왜 나한테······.’
도형은 메일을 죽 읽어내려갔다.
“What the fu···? 돈 쓸어 담는 로봇청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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