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기운은 여전히 나를 축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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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그만 튕기고 오지.”
“튕기는 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어요. 솔직히 이런 말도 하기 싫은데, 오빠 성격 알아서 그러는 거니까. 더 추해지지 말고 그만 해요. 이 바닥도 좁은 거 알죠.”
“내가 장난으로 이러는 거 같아?”
“장난이든 아니든 관심 없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예요.”」
음채영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밀땅이라고 여겼다.
설사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연애와 결혼은 다른 것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왔으니까.
당장 음채영의 아버지 음용식 회장만 해도 젊었을 때 여자관계 복잡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데리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이미 세한그룹 둘째와 상하 F&B 여식의 혼담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시점.
재벌가 자식들이 모이는 자리에 다른 남자를 데리고 왔다는 건 도발이었고 무시였다.
「“채영이하고 동업하신다고요? 한재림입니다. 채영이 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민호입니다.”」
아무리 봐도 평범했다.
게다가 쉬 어울리지도 못하는 것이 이런 자리가 처음인 듯했다.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어때요? 같이 하실래요?”」
라고 물었는데,
「“제가 하는 방법을 몰라서요.”」
한 발을 뺀다.
「“어렵지 않아요. 한두 게임 하면 바로 알 거예요.”
“별로 관심 없는데.」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와서 불편해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말투에서 느껴졌다, 대충 한심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것이.
은근 거만하기까지.
‘어라, 이것 봐라?’
한재림은 남자의 그릇이 궁금했다.
「“왜요? 돈이 너무 커서 그런가요?”」
아니,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거만함을 눌러주고 싶었고.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같은 듣보잡이 그런 표정을 지어.’
「“얼마씩 걸고 하는 건데요?”」
걸려들었다.
「“노란색 칩 하나에 오만 원, 검은색 칩은 십만 원, 분홍색은 이십오만 원, 보라색은 오십만 원, 황금색은 백만 원. 게임 바이-인은 천만 원, 블라인드는 십만 원. 아, 좋은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수익금은 전부 그 사람 이름으로 기부될 거니까.”」
존경하는 작은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
남자의 배포는 그 사람과 사업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만약 그걸 빨리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도박을 해보면 안다고. 상대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고.
이때까지만 해도 한재림은 자신이 누구랑 도박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상대가 대한민국에서 현금이 가장 많은 사람인 것을.
*
“왜요? 돈이 너무 커서 그런가요?”
처음 보는 남자의 도발에 누구는 인상을 찌푸렸고, 누구는 비웃었으며, 누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렇죠. 25억 원이라는 돈이 작지는 않잖아요.”
“여기 놓인 십수 억은 작고요?”
“지금 자기 돈 잃었다고 이런 거야?”
“일준아.”
한재림이 계속 중재하는 척해보지만, 아까부터 그의 얼굴에는 묘한 비웃음이 퍼져있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좋은 목적으로 재미있게 시간 보내자는 건데, 아무래도 금액이 커지면 목적이 퇴색되니까요.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도 하고···. 아무튼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게임에 관심 없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괜히 하자고 해서. 좀 전에 말했듯이 오늘 여기서 잃은 칩은 제가 책임지···.”
한재림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민호가 지루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만 카드 한 장을 뒤집었다.
「클로버 4」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해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의 눈들이 일제히 그가 뒤집은 카드로 쏠렸다.
스포트라이트를 또 빼앗겼다.
시종일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한재림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거보다 높은 카드를 뽑으면 그분 이름으로 제가 졸겐스마 치료제 1회 투약분을 기부하죠.”
아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음채영은 신비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걱정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 이상한 빛이 보이는 느낌마저 든다.
다시 조용해진 테이블.
아무도 낮은 카드를 뽑았을 때의 조건을 묻지 않는다.
당연할 것이라서 묻지 않는 게 아니었다.
총 52장의 트럼프 카드에서 「숫자 4 클로버」보다 낮은 건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하트, 클로버 각 모양의 숫자 2와 3뿐.
즉, 8장 밖에 없다는 말.
패할 확률: 8/51 = 13.7%
“같은 숫자가 나오면, 모양도 보나?”
현재 테이블에서는 스페이드의 순위가 가장 높고, 클로버가 가장 낮은 규칙을 적용 중이었다.
“보죠, 뭐.”
당연히 모양의 순위는 따지지 말자고 할 줄 여겼는데···.
민호의 호기로움에 테이블이 앉아 있는 다섯 명은 이미 카드 뽑을 준비가 되었다.
말들은 안 했지만, ‘너 이 건방진 새끼,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라는 의지가 얼굴에 표시됐다.
“오케이, 그럼 내가 먼저 뽑을게.”
「스페이드 3」
“푸하하하-. 그 많은 카드 중에 하필이면···.”
제일 먼저 뒤집은 놈이 ‘스페이드 3’을 뽑자, 테이블에서 가장 촐싹거리던 우일준이 과장되게 웃어댔다.
그러고는 호기롭게 테이블 위 덮어진 카드 중 한 장을 집어 펼치는데,
「다이아몬드 2」
키득 키득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재미있는 쇼라도 보는 것처럼 웃기 시작했고,
카하하하하-
좀 전에 그가 비웃었던, 제일 먼저 카드를 뽑았던 남자가 가장 크게 웃어젖혔다.
시작된 게임.
이제는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도 카드를 뒤집는다. 물론 여전히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이아몬드 3」
「하트 2」
「클로버 2」
「하트 3」
연이어 펼쳐지는 낮은 카드들.
호오-
와-
하-
기이한 광경에 키득거리던 웃음들이 점차 탄성으로 바뀌었다.
이제 남아 있는 카드 중에 「클로버 4」보다 작은 카드는 단 두 장뿐.
패할 확률: 2/45 = 4.4%.
한재림은 긴장하는 자신이 짜증 났다.
돈 25억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그를 응원하는 듯했다. 아니, 응원했다.
채영이 데리고 온 남자의 바닥을 보고 싶었는데···.
이건 그가 원한 그림이 아니었다.
지기 싫다.
‘설마 95.6% 승률을 가지고 진다고? 내가? 이 한재림이?’
하지만 1%라도 확률에 걸어야 하는 이 상황이 짜증 난다.
“뭐해? 안 뽑고.”
우일준이 촐싹거렸다. 좀 전까지는 녀석의 추임새가 재미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재림은 그의 주둥이를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어쩌다 게임이 이렇게 된 건지···. 아무튼 좋은 일에 쓴다고 하니까 합니다.”
한재림이 여유로운 척 멘트를 날리고는 아까부터 나름대로 유심히 계산해본 카드 중 한 장을 뒤집었다.
와아아아—
동시에 테이블 위를 주시하고 있던 모든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
“어떻게 한 거예요?”
돌아가는 차 안, 채영이 마치 환상적인 마술쇼라도 본 사람처럼 흥분해서 물었다.
“뭘 어떻게 해요?”
“알고 한 거 아니에요?”
그녀가 그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플레이들과 카드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민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한 번도 긴장한 적이 없었다.
마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내가 사기라도 쳤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심리 마술 트릭 같은 거라도 한 거 아녜요? 그렇잖아요. 「클로버 4」라고요. 한두 명 낮은 패를 뽑은 거면 몰라도 7명이 전부 2, 3을 뽑았어요. 이게 마술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민호 씨는 하늘이 돕는 사람이네요.”
‘하늘이 돕는 사람···.’
사실 그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자신의 운을. 아직도 축복받고 있는 건지를.
“아니, 근데 어떻게 카드가 그렇게 나오지? 진짜 어떻게 그렇게 나오죠? 나도 카드 좀 쳐봤는데···.”
‘근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흥분한 거지?’
“손 좀 놔 줄래요.”
“네?”
아까 처음 질문을 던질 때, 기어봉 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던 그녀. 계속 잡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흥분해서 그만···.”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볼이 살짝 발그레해진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만, 주제를 바꿨다.
“내일은 뭐 해요?”
민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금고에 볼일이 좀 있어서.”
---*---
부와아아앙-
삐용- 삐용-
아까부터 경찰차가 뒤를 쫓고 있지만, 한재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더 힘껏 밟았다.
부와아아아앙-
「스페이드 2」
어떻게 그 카드가 나왔을까?
그가 제일 싫어하는 숫자 ‘2’.
시속 150km···
160km···
170km···
계속 올라가는 계기판의 숫자.
삐용- 삐용-
삐용- 삐용-
경찰 두 대가 그의 뒤에 붙었는데도 눈이 돌아간 한재림은 누군가에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이민호 대표라는 놈에 관해서 알아봐.”
-이민호요?
“트리 그룹 이민호.”
딸깍.
용건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한재림은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와아아아아앙-
배트모빌같이 생긴 그의 매트 검정 스포츠카가 유령처럼 튀어 나갔다.
뒤쫓는 경찰차들이 힘겨워 보인다.
---*---
드림캐피탈 본사,
지하 금고.
벌써 몇 주째 우동익은 금고에 내려와 지폐들을 감별 중이다.
아무리 봐도 진짜 같은데, 분명 그 냄새가 있다.
‘흙냄새···.’
물씬 나는 냄새가 아니라, 종이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마시면 올라온다.
너무나 미세해서 매번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느끼면 일 분 정도 기다려야 다시 감지할 수 있다.
아예 나지 않는 지폐도 있었다.
물론 냄새만 맡으려고 들어온 건 아니었다.
동익은 지폐의 기번호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주말에도 나왔다.
어차피 좁은 원룸에 있느니, 금고가 훨씬 편했다.
살기 싫었던 인생이 조금은 괜찮아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킁킁-
‘이게 더 강하게 나네.’
최근에 들어온 지폐들에서 흙냄새가 더 강하게 난다는 사실을 깨우친 순간,
철컥철컥 끼이이익-
‘어, 누구지?’
누군가가 금고의 문을 열었다.
금고가 있는 지하층은 주7일, 24시간 삼엄하게 경비 되었다.
본사 건물 입구에도 경비들이 서 있기는 했지만, 지하층은 별도의 외부 업체가 보초를 섰고 입구에 있는 경비 아저씨들과는 애초에 다른 부류 경비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하층의 입출입만을 관리할 뿐이지, 절대 금고 안으로 들어오거나 금고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게 프로토콜이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금고의 문을 열었다.
누가 올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
‘누가 회사에 있지도 않을 텐데···.’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금고의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끼이익-
우동익의 눈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가 만지고 있는 돈의 주인.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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