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움브라, 그리고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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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가상화폐.
블록체인.
유튜브에 올라온 관련 영상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
매일경제신문사의 <코린이를 위한 코인의 모든 것>부터 노구치 유키오 저 <가상 통화 혁명>, 클라우스 슈밥 저 <제4차 산업혁명>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알고리즘이 알려주는 대로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워런 버핏처럼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의 책들도,
제이미 다이먼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들의 책들도,
하다못해 머스크 형과 돈나무 언니 책들도.
흥미로운 건, 부정적이었건 아니었건,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 대부분이 가상화폐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상화폐에 부정적인 워런 버핏마저도 우회적으로는 가상화폐에 투자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가 운용하는 버크셔해서웨이의 애플 지분이 6%에 달했고, 여느 IT 회사처럼 애플은 가상화폐 산업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 결론은?
“세 가지 코인을 만들려고 합니다.”
“세 가지 코인이요?”
“하나는 순수하게 현금을 대신할 수 있는, 빠른 트랜잭션을 목표로 하는 코인, 두 번째는 <큰나무그늘 재단>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블록체인을 지원하기 위한 코인, 그리고 마지막은 앞서 말한 두 코인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장고 끝에 내린 결정.
하지만, 정수연 이사를 통해 만난 가상화폐 전문가는 내 결정에 회의적이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신 것 같으시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은 아직 태동기에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몇 년 전, 가상화폐 시장이 폭발했을 때, 너도나도 우후죽순 뛰어들었지만, 그중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했죠.”
“하루아침에 뚝딱 성공하는 것들도 있던데요.”
그의 표정에서 한숨을 쉬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내 앞이라 참는 것일 뿐.
“자, 일단 말씀하신 첫 번째 코인은 지금도 많은 엔지니어들이 기술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트랜잭션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까요. 드론의 배터리와도 같은 문제입니다. 드론을 오래 날리기 위해 배터리 용량을 크게 만들면, 결과적으로 무게가 늘어나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두 번째 코인은 목적은 좋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지는 모르겠네요. 대표님, 현재 지구상에 몇 가지 화폐가 유통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약 180개의 화폐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가상화폐는 몇 종류이신 줄 아십니까? 18,000개입니다.
세 번째 코인은···흠···외람된 말씀이지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스테이블 코인은 이미 아시고 계실 것 같지만, ‘페깅’이라고 하여 1:1 자산 매칭이 필요합니다. 이미 테더, 제미니 코인, 리브라 등 대형 코인들이 존재하기에···.”
시니컬한 톤이 마음에 드는 블록체인 엔지니어 ‘토니’ 김주혁 의장이었다.
두 시간 넘게 대화하는 동안 그는 블록체인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사업가가 아니었다. 굳이 남의 돈을 받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날 그 자리에 나온 것도 정수연 이사와의 친분 때문이었지, 본의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만들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후—.”
결국 나온 한숨.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쉽게 보고 투자했다가···.”
“그럼 만들어 주시죠.”
경고는 들을 만큼 들었다.
나는 정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요구했다.
당신의 설명은 잘 들었고, 무엇이 리스크인지 잘 알겠으니, 만들어 달라는 말.
리스크가 있든, 없든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될 수 있는 사업.
가상화폐, 블록체인, 코인, 메타버스, NTF 라는 단어만 붙으면 눈들을 부릅뜨고 본다.
주가가 널을 뛴다.
99.99% 이상이 실패해도 0.01%의 대박 찬스가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것이 가상화폐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세계 부호들도 산업에 투자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난 그들과 목적이 조금 다르다.
“만드실 수 있나요?”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잠깐, 제 말 좀 먼저 들어주시죠.”
그가 하려는 말이 뭔 줄 안다.
블록체인 기술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인물. 그러니, 재벌가 회장에서부터 정치인들까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거래소나 투자 회수에 관심이 많았지, 기술의 가치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투자액 회수 따위에 관심이 없다.
가상화폐 ‘콩’, ‘움브라’, ‘루트’는,
나무의 지폣잎을 세상에 직접적으로 유통하지 않고, 그 가치만을 자유롭게 쓰려고 만들려는 거다.
“일단 ‘루트’ 코인의 페깅(pegging) 관련해서 말씀드릴까요? 루트 코인 하나당 오만 원에 픽스하려는 계획입니다.”
“하- 그렇게 큰 단위로 페깅을 하면 거래가···.”
“거래는 저만 해도 됩니다.”
“네?”
“천억 원 정도면 될까요?”
“······.”
“스타팅 리저브를 천억 원 정도로 잡으면 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스테이블 코인 ‘루트’를 만드는 데 천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말에 김주혁의 표정은 단번에 바뀌었다.
내 계획을 진지하게 들은 준비가 된다.
“대표님, 코인의 가진 성질 중의 하나가 화폐 기능이지만, 궁극적으로 코인의 성공은 코인을 지탱하고 있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치입니다. ‘루트’ 코인이 안정성을 보장해주고, ‘움브라’ 코인이 목적을 제시한다고 해도, 결국 ‘콩’ 코인의 가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대표님이 원하시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화폐.
그 자체로는 액면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발행처인 국가가 가치를 보장해주기에 통용될 수 있는.
김 의장의 말대로 18,000개 이상의 코인 중의 살아남으려면 통용될 수 있는 가치가 필요했다.
띠리링- 띠리링-
-웬일이죠?
“좀 만나고 싶은데. 언제가 좋을까요?”
---*---
광화문 호텔, 일식당.
회사로 찾아온다는 걸 일부로 이곳에서 만났다.
가뜩이나 만나면 일 얘기밖에 안 하는 남자.
회사에서 만나면 정말 사무적일 것 같아, 일부러 이곳으로 잡았는데, 주문도 하기 전에 건네 첫마디가···.
“좋아요. 할게요, 동업.”
안 꾸민 척 꾸미고 나온 채영은 새초롬하게 민호를 바라봤다.
“주문이라도 하고 얘기하죠.”
“아. 저는 오마카세.”
그녀의 투정에 민호는 메뉴도 보지 않고 시켰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누가 봐도 대충 귀찮으니까 빨리 진행하기 위해 한 행동.
그런 행동이 채영을 더 안달이 나게 한다.
“그럼 저는 홋카이도 관자 샐러드를 먼저 주시고요, 참다랑어 뱃살 캐비어를 그 사람 다음에 주시고, 식사는 도미······.”
심술이 난 그녀는 일부러 더 시간을 끌어본다.
하지만, 정작 이민호 대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갑자기 뜬금없이 전화해서 동업이라뇨?”
“아, 잠시만요.”
자기가 꺼내놓고 막상 물으니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느라 얼굴도 보지 않는다.
이런 대접 처음이다.
“정 이사님이었어요. 오늘 오전 미팅 관련해서 물어와서···. 죄송해요.”
정 이사님? 혹시 수연 언니?
“언니는 어떤가요?”
“아, 진짜 고마워요. 정말 훌륭한 인재를 소개해줘서. 먼저 인사했어야 하는데. 오늘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흥, 오늘 식사만요?”
“아···알겠어요. 언제든 배고프시면 연락하세요. 밥 사죠.”
배고프면 연락하라고? 요식업 그룹 회장 딸한테?
채영은 한심한 듯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게 한심한 표정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관심 없는 듯했다.
“좋아요.”
“아, 동업. 저번에 <불떡>이랑 <현동이네> 관련해서 동업하자는 제안. 받아들일게요.”
“흥, 뭐죠? 그때는 그렇게 매몰차게 그럴 마음 없다고 해놓고선.”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고.”
“너무 민호 씨 편의적 아닌 가요?”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제 제안이 상하 F&B에 전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눈이 조명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늘 그랬다. 새로운 사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저렇게 반짝거렸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개소리마저도 논리정연한 비전처럼 들렸다.
“뭐라고요? 가상화폐를 만들 건데, 그 가상화폐를 상하 F&B 전 체인점에서 사용 가능하게 하는 게 조건이라고요? 미쳤어요?”
---*---
까톡.
[채영: 언니도 알아? 민호 씨가 가상화폐 만든다는 거?]
[수연: 나도 좀 전에 들었어.]
[채영: 언니, 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진짜 진지한 거야?]
[수연: 솔직히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수연: 진지한 것 같아.]
[수연: 좀 전에 토니하고 얘기했는데, 토니는 대표님한테 완전히 빠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토니가 시니컬한 거.]
[채영: 토니? 주혁 오빠?]
[수연: 응.]
토니 킴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헛소리가 아니라는 의미. 가상화폐 경제를 믿는다면 말이다.
몇십억 원을 준다고 해도 비전을 공감하지 못하면 콧방귀도 안 뀌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태껏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수연: 현동이네랑 불떡 합자회사 만들자고 했다며?]
[채영: 응.]
[채영: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 들었어?]
[수연: 대표님이 만드시는 코인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면서?]
[수연: 자세한 거는 아직 못 들었어.]
[채영: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수연: 그건 네 결정이지.]
몰라서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황당해서 수연은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을 뿐.
[수연: 어찌 됐건 나는 이제 대표님 사람이래서 자세한 거는 너랑 공유 못 해. 너무 서운하게 받아들이지 마.]
공유하지 못하는 건 전혀 상관없는데, ‘대표님 사람’이란 표현이 은근 거슬린다.
[수연: 그래도 그건 들었지? 천억 원 출자하시겠다는 말.]
들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인데, 일천억 원 출자라니···.
[채영: 알았어. 언니도 내가 무슨 결정을 해도 너무 서운해하지마.]
마지막 대답을 타입한 채영은 한숨 크게 들이마신 후, 상하 F&B의 최종결정권자를 만나러 서재로 향했다.
“아빠. 저번에 상의드린 <현동이네> 동업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거, 결렬되었다며? 아니야.”
“아니에요. 근데 조건이 조금 바뀌었어요.”
“조건이 뭔데?”
---*---
샤라라라락- 샤라라라락-
화폐 이전, 사람들은 주로 금이나 은을 거래 수단에 이용했고,
지금은 화폐조차도 은행이 보관하는 담보처럼 작동할 뿐, 모두가 신용으로 거래를 한다.
KOR▶
₩50,000: 2,000,0000
Counterfeit▶
0
Total▶
₩100,000,000,000
상하 F&B가 이제 내 신용을 보장해줄 것이다.
거래는 코인들이 대신해줄 것이고.
까톡.
[일천억 원, 현금 준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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