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쓸어 담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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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야, 오늘 집에 있어?”
-어, 형. 아- 오늘 나은이 선물 사주기로 해서 백화점 가기로 했는데···.
“아, 그래. 나은이 괜찮은 거야? 사람 많은 데 돌아다녀도 돼?”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면 돼. 의사 선생님이 이제 잠깐씩 나가보는 건 오히려 좋대.
이식 수술한 지 반년이 넘었다.
중간, 중간 사람을 놀라게 하기는 했어도 나은이는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첫 3개월에는 바깥 생활을 못 했는데, 이제는 산책이나 근처 정도는 다닐만했다.
“나도 따라가도 되냐?”
-형, 안 바빠? 우리야 좋지. 삼촌 온다고 하면 나은이가 엄청 좋아할걸.
일요일 오전, 복잡해진 머리도 식힐 겸 동생네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
---*---
“자기야, 아주버님 좀 말려.”
“형, 그래. 그 정도면 됐어.”
일 년 전만 해도 오만 원은커녕 오천 원이 아쉬웠다.
말이 직장인이었지 월세 내고 대출금 이자 갚고 나면 하루살이나 매한가지였다.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대충 오천만 원 정도의 현금이 지하 바닥에 떨어져 있다.
돈이 많아져도 사람의 생활 방식이 금세 바뀌지는 않는다.
나무 때문에 저택에 살고, 나무 때문에 차를 샀지만, 나는 여전히 라면을 먹고 SPA 브랜드 옷을 사 입는다.
검소해서라기보다는 아직 고가품에 적응하지 못해서이다.
그런 내가 정신줄을 놓을 때가 있다.
바로 나은이 선물을 살 때이다.
내가 애가 없고,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어렸을 적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나는 내 가족, 내 친구, 그 중 특히 내 조카에게만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다.
“야, 내가 뭐 이런 걸 매일 사주니? 몇 달에 한 번 사주는 건데. 그냥 좀 봐줘.”
“삼촌, 나 이거면 충분해.”
“야, 너희 때문에 나은이 눈치 보잖아. 괜찮아, 나은아, 더 사도 돼. 저 인형은 뭐냐? 진짜 예쁘게 생겼다. 저거 갖고 싶었던 거 아니야?”
결국 인형은 사지 못했다.
아직 조심해야 할 때라 먼지가 쌓이는 털 인형은 가질 수 없었다.
대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피규어 인형을 잔뜩 사준 뒤 지선이와 나은이는 카페로 향했고, 나와 승호는 가전제품 코너로 향했다.
*
“그건 왜 샀어?”
장난감 코너에서 옆에 있던 고가 액세서리점에서 하나 구입했다.
스피드건처럼 생긴 물건.
지폐를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현금이 날아가는 총.
점원이 ‘머니건’이라고 설명했다.
“크크큭. 재미있어 보여서.”
나은이 선물 사주면서 덩달아 신이 났는지 주체하지 못하고 하나 구매했다. 지하방에서 혼자 쏘고 놀면 재미있을 듯싶었다.
“그러는 넌? 가전제품은 왜? 뭐 살 것 있어?”
녀석도 나와 별반 차이 없는 놈이다.
마포 3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벤츠 SUV를 몰고 다녀도 백화점보다는 시장이나 대형마트가 편하다.
그런 녀석이 백화점 가전제품 코너에 왔다는 건 중요한 물건이 필요했단 뜻이었다.
“응. 공기청정기 하나 사려고. 쓰던 게 용량이 좀 작은 거 같아서···.”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는 감염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기에 거주 환경이 매우 중요했다.
당연하겠지만, 너무 건조해도 좋지 않고 너무 습해도 좋지 않다.
일반 사람은 가습기를 사용하겠지만,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환자는 병원에서 가습기 사용도 권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선이가 매일 젖은 수건을 건조대에 걸어놓는다.
청소기도 돌리지 않는다. 부득이하게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걸레질로 청소하며 화장실도 이틀에 한 번씩 표백제로 청소를 한다.
“안 그래도 집에 있는 거 좀 낡아 보이더라.”
“옛날 집에서 썼던 거야.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혹시 이런 데는 더 좋은 게 있나 해서···. 온 김에···.”
공기청정기에 대해서는 내가 또 일가견이 좀 있다.
공기청정기뿐만 아니라, 가습기, 제습기, 에어콘, 스피커 등등.
“혹시 나은이 소리에 민감해?”
“모르겠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소리에 민감하면 저거 사. 저게 좋아. 소음도 적고 성능도 좋고. 만약에 소리에 좀 덜 민감하면 저쪽에 진짜 좋은 거고. 미국 제품인데 HEPA 필터가 아니라 PECO 필터라고 나사에서 사용하는 거.”
“그래?”
“응.”
“형이 공기청정기에 대해 왜 그렇게 잘 알아?”
아이는 없지만, 나무가 있다.
“내가 좀 민감한 체질이잖아. 센시티브.”
웃으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안타깝게도 녀석이 이해하지 못했다.
새끼, 이제 좀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는데···.
웃는 게 익숙하지 않다 보니 늘 표정이 무뚝뚝하다.
남이 보면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겠지만.
“저거 할 거지?”
“그래. 형이 잘 아는 거 같으니까, 형이 추천하는 걸로 할게. 아, 근데 얼마야?”
“내가 사줄게.”
“됐어. 뭘 형이 사줘. 내가 사.”
“내가 산다. 가만히 있어라.”
“뭘 툭하면 산대. 돈 못 써서 죽는 병 걸렸어. 집도 주고, 차도 사주고. 오늘 나은이 선물도 저렇게나 많이 사줬으면서, 이건 내가 사.”
순간 녀석도 돈 쓰는 데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데서 써봐야 나중에도 쓸 줄 아는 법이니까.
“그래? 그래, 그럼. 네가 사.”
때마침, 점원이 다가왔다.
“결정하셨어요?”
“네. 이거랑 이거 한 대씩 주시겠어요?”
“이 제품이랑, 이 제품이요?”
“네.”
“진짜 잘 고르셨네요. 둘 다 진짜 좋은 제품입니다.”
“근데 이 제품은 가격이 안 붙어있네요.”
“아, 그거 오늘부터 세일 들어가서 인하된 가격표를 아직 못 붙어서 그래요. 원래는 2,490,000원인데, 30% 세일해서 1,750,000원이에요.”
“네에? 얼마요?”
크크큭. 놀랐을 거다. 나도 처음에 가격 듣고 깜짝 놀랐으니까.
*
가전제품 코너에서 이것저것을 구매한 우리 형제는 지선이와 나은이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샀어?”
“응. 형이 추천해 준 걸로 샀어.”
“잘했네.”
“아주버님도 뭐 사셨어요?”
“네, 청소기 하나 샀어요. 우리 나은이 안 피곤해? 이제 갈까?”
조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눈이 초롱초롱하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데를 와서 그런지 계속 있고 싶은가 봐요.”
“안돼. 그러다가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동생이 타이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는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둘을 보내고 내가 종일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고 싶지만, 동생 말이 맞았다.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
“그래, 나은아. 오늘은 들어가고. 나중에, 나중에 진짜 괜찮아지면, 삼촌이랑 놀이동산 가자. 어때?”
“좋아.”
“아우- 우리 나은이 진짜 착하다. 삼촌이 용돈 줄까?”
“됐어요! 아주버님.”
크큭, 내가 오버한 모양이다.
내가 해준다고 하면 생전 화 한번 내지 않던 제수씨가 단호하게 저지했다.
이번엔 내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엄마가 안 된대. 힝- 삼촌은 주고 싶은데.”
“돈은 더러워서 만지면 안 된대.”
설마 돈에 묻은 병균에 큰일이 생기겠냐마는 동생 내외가 얼마나 조심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그래? 그러면 우리 나은이 삼촌이 카드 줄까?”
“형!”
“농담이야, 농담. 아우- 부부가 똑같아서는. 가자, 나은아.”
그렇게 백화점 나들이가 끝나고, 나는 동생네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집에 돌아왔다.
---*---
집에 돌아온 나는 백화점에 사 온 로봇청소기를 꺼내 곧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히이이잉— 슈우욱.
오만 원권 몇 장을 바닥에 깔아놓고 청소기를 돌려봤다.
매핑(mapping)이니 뭐네 공부할 게 많았지만, 일단 흡입이 되는지 안 되는지부터 확인했다.
“된다!”
오만 원권 지폐들이 청소기 안으로 슉슉 빨려 들어갔다.
먼지 통을 열어 확인한다.
살짝 구겨지기는 했어도 찢어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양을 뿌려 놓고 돌려본다.
히이이이잉- 슉- 슈슈슉- 슉슉-
“오-.”
그게 뭐라고 감탄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예상대로 실험이 성공해서 기분이 좋았을 뿐.
“아—.”
그러나, 잠시 뒤.
감탄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안 되겠네.”
지폐가 몇 장 안 될 때는 괜찮았는데, 수십 장이 넘어가니 문제가 생겼다. 먼지 통 안에서 심하게 구겨졌다.
그러다 문득 같이 가지고 내려온 머니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빳빳한 오만 원권 한 다발을 장전하고 쏴본다.
슈르르르륵-
‘이거 재미있는데?’
슈르르르르르륵—
은근 중독성이 있다.
돈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쾌감이 든다.
내가 속물이 된 것 같은 창피함이 들면서도 짜릿한 감이 있다.
솔직히 호기심 반 장난 반에 샀다. 내가 이런 거에라도 돈을 써야 나은이가 마음 편히 장난감을 고를 것 같아서.
살 때는 도대체 이딴 물건을 왜 만드나 하는 생각을 하며 샀다.
그런데 막상 돈을 날려보니···.
‘슈발 재밌다!’
천만 원을 허공에 날리는데 10초도 안 걸렸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지폐들을 보고 있으니 공허함이 든다.
저걸 정리하려면 10분이 걸릴 텐데···.
10초 재미있자고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청소기와 머니건을 번갈아 봤다.
어려운 기술일 것 같지 않다.
두 개를 접목하면 내가 원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까짓것 세상에 없는 물건이면 내가 만들면 되지.’
돈 쓸어 담는 기계.
---*---
위층으로 올라온 민호는 국내 중소기업 업체 중에서 로봇청소기를 만드는 회사들을 검색했다.
의외로 몇 군데 있었다.
자기네 브랜드가 아닌 해외업체 외주형태로 로봇청소기를 만드는 중소기업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업체에 먼저 연락을 취해볼까 고민하던 중,
징징- 징징-
음채영으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민호는 들어오는 전화를 무시하고 검색을 계속했다.
까톡, 까톡.
[이민호 씨, <현동이네> 관련해서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금 급하니까, 문자 보는 대로 연락주면 고마울 것 같네요.]
“‘연락주세요’도 아니고, ‘연락주면 고마울 것 같네요’는 또 뭐야?”
민호는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띠리링-
계약서 체결했고, 공장 관련 자문도 다 받았고, 1년 뒤에 가게만 빼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가 언제부터인지 자꾸 연락을 해댄다.
처음 몇 번은 받아줬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전화하길래, 대충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현동이네> 관련 일이란다.
-전화가 가능하시네요?
“네.”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저는 또 전화가 안 되는 곳에 계신 줄 알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근데, <현동이네> 관련해서 상의할 거라는 뭐죠?”
-만나서 얘기하죠. 중요한 이야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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