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성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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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뜨지 않은 겨울밤,
한 남자가 옥상 난간에 섰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위에 서니 가슴이 콩닥거린다.
살고 싶은 걸까?
아니다. 이미 그 선은 넘었다.
한참 동안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이 방법이 가장 빠를 것 같아 올라오기는 했는데, 막상 시체를 확인해야 할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하다.
뚜벅뚜벅.
그렇게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간다.
내심 뜨거워진 심장이 그간 진정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소용없다.
남자는 차로 돌아가 번개탄에 불을 피웠다.
피우기 전, 누군가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싶었는데···.
---*---
“오빠, 벌써 가게요? 조금 더 있다 가지···.”
“다음에 올 때는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을게. 덕분에 정말 잘 쉬다가, 인영아. 그 사이에 살이 찐 거 같다, 야.”
“다음에는 여름에 오세요. 여름이 훨씬 더 좋아요.”
“알았어.”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간 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다.
관광이라고 한 것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정부 청사를 한 바퀴 돈 것이 고작이었다.
“서류 완성되면 보내줄게.”
“알았어.”
“로펌은 같이 갔던 거기 쓰면 되고 회계사는 좀 더 알아보자.”
사실 이 정도로 바쁠 줄은 민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틀 정도 일하면 나머지 닷새는 친구랑 밴쿠버 시내 구경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할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떠오른 사업 아이디어 때문에 빅토리아섬에 있는 건강식품 공장을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나 이거 진짜 해?”
“해.”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보부상이나 하려고 했는데 하루아침에 무역회사가 대표가 되어 있지를 않나. 그럼, <현동이네>를 여기서도 오픈하면 되는 거야?”
현동이 추천한 건강식품 브랜드는 전망성이 있어 보였다.
짧은 시간에 모든 걸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김앤강의 전문성 덕택에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투자 결정을 곧바로 내릴 수 있었다.
플러스, <현동이네>를 밴쿠버에서 오픈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저것 다른 아이템들을 많이 고민하던 그에게 민호는 떡볶이집을 추천했다.
매운 음식은 한계가 있어 한국 사람들만 찾지 않을까가 그의 걱정이었으나, 민호의 강력한 추천으로 그냥 원래 하던 것을 열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떡볶이도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어. 솔직히 그 매운 불닭볶음면이 되는데 떡볶이가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냐?”
관광할 시간이 없다 보니 주로 집에서 식사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동네 마트와 시장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민호가 놀란 건, 한국인들만 가는 곳이 아닌 대형 식료품 체인점 메인 진열대에 불닭볶음면이 종류별로 쌓여있던 것이었다.
단순히 일회성도 아니었고, 특정 지점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호는 가능성을 엿봤다.
“어느 정도 현지화를 해야겠지만, 해볼 만한 거 같아.”
“알았어. 연구해볼게.”
“말했듯이 <현동이네>는 계속 늘려나갈 거야.”
“프랜차이즈화 안 할 거라면서.”
“응. 그냥 직영점만 할 거야. 북미에도 ‘인앤아웃 버거’인가 하는 브랜드가 그렇게 운영한다며? 그래서 퀄리티 컨트롤이 되고?”
“몰라.”
“그거 보니까 꼭 비싼 식당들만 그렇게 운영하라는 법 없는 것 같더라고. 나중에 미국도 같이 한번 가자.”
지난 일주일간 정신없었던 건 민호만이 아니었다.
“그래, 가자. 난 너만 믿고 간다.”
공항 입국 게이트 앞, 현동은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
「밴쿠버 출발 인천 도착 대한민국 KE072편. 비행기가 곧 이륙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Ladies and gentlemen, the flight is about to take off···」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싫은 민호는 탑승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밤새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좌석이 편안해서 그랬을까, 민호는 꿈을 꾸었다.
똑같은 나무 꿈.
아니, 비슷한 나무 꿈.
매번 같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이번에는 나무 뒤의 풍경이 보였다.
처음 본다.
멋지다···.
“식사 안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눈을 뜨니, 마치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승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지금 얼마쯤 왔죠?”
“밴쿠버 공항 출발 후 일곱 시간 조금 넘게 비행했고요. 앞으로 두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혹시 시장하시면 식사 준비해드릴까요?”
“그럴까요?”
“저녁, 아침 메뉴에 있는 것들 다 준비 가능합니다.”
뭘 먹을까? 막 배가 고픈 거는 아닌데, 그래도 뭐가 먹고 싶다.
“원하시면 메뉴 중에 드시고 싶으신 것만 골라주셔도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녁 식사에 나온 오리고기가 이번에 상을 받은 메뉴이고요, 아침은 캐비아가 올려진 완도 자연산 전복죽입니다. 무엇으로 준비해드릴까요?”
그런 게 아니다. 편한 게 먹고 싶다.
“라면 되나요?”
“아, 네! 라면도 됩니다. 라면으로 준비해드릴까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그럼 음료는···.”
“사이다요.”
달콤하고 청량한 탄산수가 당긴다.
---*---
성북동 집.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그사이 올려놓은 온도가 집안을 따뜻하게 해준다.
저녁 아홉 시.
비행기 안에서 숙면을 취한 터라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커피 한잔을 내렸다.
씁쓸한 그 각성제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따뜻한 커피잔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
나무가 생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집은 비운 적이.
가슴 떨리는 광경이었다.
바닥에 겹겹이 쌓여있는 노란색 지폣잎들. 마치 가을날 치우지 않은 은행나무 가로숫길 같다.
지독한 냄새만 나지 않을 뿐.
“흐음- 후—”
깊게 숨을 들여 마신 후, 먼저 쓰레받기를 가져와 돈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오만 원 권으로 수북이 쌓이는 상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청소’가 끝나고 이제···.
촤라라라락- 촤라라라락-
계수기가 돌아간다.
촤라라라락- 촤라라라락-
만 장이 넘는 오만 원 권들.
계수기가 일하는 동안 나는 나무들을 살펴본다.
확실히 묘목들은 빨리 자랐다.
고작 일주일 만에 제 키만큼 자란 놈도 있었다.
촤라라라락- 틱틱.
기계 소리가 끝나고 계수기에 표시된 붉은 숫자들을 더해본다.
11,522.
오억칠천육백십만 원.
늘 하던 대로 천만 원 단위로 묶어 현금방으로 가져갔다.
11시 7분.
돈만 쓸어 담고 정리했을 뿐인데 두 시간이 넘게 지났다.
장부 기재 후, 육성일지를 들고 모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돈나무 육성 일지, 365일 차-
객체: 돈나무 모체
가지 수: 221
색깔: 흰색의 검은 무늬 (자작나무와 유사함)
높이: 166cm (뿌리 제외)
줄기 둘레: 13.7cm
가지 둘레: 0.2 ~ 3.5cm
새순이 나는 시각: 불규칙
잎이 나서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대략 18~21시간
떨어지고 나서 새순이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 대략 1~2시간
온도: 섭씨 13도 평균
습도: 49%
조도: 0㏓ (조명 OFF), 120㏓ (조명 ON)
술: 2일에 250mL
이사 후, 성장이 살짝 더딘가 했는데 고사이 새집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잘라낸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 놨고, 키도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천장이 높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자라도 괜찮을 듯싶다.
옆으로는 훨씬 더 공간이 많다.
이사하면서 화분도 더 넓고 큰 걸로 갈아주었더니 모양새가 안정적이다.
(모체뿐만 아니라 분체들 화분도 다 갈아주었고, 다른 것보다 네잎클로버 찾으러 다니느라 죽는 줄 알았다. 오죽했으면 캐롯마켓에서 추가로 구매했을까.)
꿈속에 서 본 나무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방 가득 큰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다.
두 배 이상 자랄 것 같다.
새벽 한 시.
지하실의 조도를 낮추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간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내일은 더 바쁜 날이 될 듯싶다.
---*---
“사장님, 오복떡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납품량을 더 늘리기는 힘들 것 같대요.”
“왜?”
“쌀을 못 구한대요.”
“그래? 알았어. 내가 사장님하고 통화해볼게.”
“그럼 5호점은 어떻게 하죠? 당장 내일부터 만들 떡이 없다고 하는데.”
*
“형, 공덕에 6호점 낼 자리 나왔다고 했는데, 오늘 시간 있어?”
“미안, 나 오늘 안 될 것 같은데. 변호사님도 만나봐야 해서.”
“그럼 어떡할까? 약속 다음으로 미룰까?”
“나 내일도 바쁠 거 같은데. 승호야, 그냥 네가 가서 보고 괜찮으면 계약해.”
*
“요청하신 대로 계약서랑 정관 수정했고, 캐나다 로펌에는 이미 보내놨으니까 그쪽에서 검토하는 대로 연락 올 겁니다.”
“그것만 체결하면 이제 회사들 관계는 정리되는 거죠?”
“네. 그리고 무역회사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서 관리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주시죠.”
*
“사장님, 공장 도면 나왔는데, 만나 뵙고 설명드릴 게 몇 개 있는데, 언제가 좋으실까요?”
···
아침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났더니, 어느새 달이 떠 있다.
“이모님, 저 라면 하나랑 김밥 하나만 해주실래요.”
“아이고, 저녁을 이제 먹는 거야?”
“점심도 못 먹었어요. 떡볶이는 없죠?”
“떡볶이는 진작에 떨어졌지. 아까, 준수가 5호점 가져다준다고 우리 가게에 있던 떡도 가져가서, 우리도 별로 떡이 없어.”
아, 맞다. 떡.
“아, 그거 제가 내일 알아볼게요.”
승호, 준수가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일이 산더미다.
‘사람을 더 필요하다.’
바로 그때,
“안녕하세요. 어, 대리님!”
조규형이 <현동이네 1호점>으로 들어왔다.
“조규형 씨가 여기 웬일이야?”
“저 여기 종종 와요.”
“아, 그랬어?”
“네, 떡볶이가 맛있어서.”
“떡볶이 먹으려면 뭐 굳이 여기까지 올라와. 2호점에서 먹지, 거기가 역에서 더 가까운데.”
“겸사겸사···혹시 대리님도 뵐 수 있을까 해서요.”
“나? 왜? 나 가게에 별로 없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왜? 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야?”
“네? 아니요. 그냥 떡볶이가 맛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계시면 인사나 드리려고.”
“그래?”
싱거운 놈.
눈치가 조금 없어서 그렇지 괜찮은 녀석이다.
“왜? 회사 다니기 힘들어?”
“뭐···그럭저럭 다닐 만은 한데, 요새는 내가 여기를 계속 다니는 게 맞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기 아니면 어디 갈 건데?”
“그래서 더 답답해요. 갈 데가 없어서.”
문득 조규형을 채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영업직 밥을 2년 먹었으니 뭐든 시키면 할 수 있을 거고, 한림사료에 있을 때 나를 잘 따르던 녀석이었으니 충성심은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을 거고.
그래도 번듯한 회사 잘 다니는 사람을 아직 아무것도 없는(?) 회사로 스카우트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아 망설이는 사이 조규형이 생각지도 못한 비보를 전했다.
“요새는 정말 그만두고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생각 중이에요.”
“왜? 그렇게 힘들어.”
“그냥 좀 개인적으로 우울한 일도 있고···. 아, 대리님.”
“왜?”
“윤 부장님 돌아가셨어요.”
“윤 부장님?”
“네. 예전 구매팀 윤호성 부장님이요.”
나를 사퇴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
윤호성 부장이 죽었다.
“자살이래요.”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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