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차, 그리고 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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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찾으시는 매물에 부합하는 게 나와서요.”
폐공장이나 창고들을 찾아다니던 나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하루라도 빨리 나무들을 이동하고 싶어 건물이 있는 부지들을 봤는데, 그렇게 진행할 일이 아니었다.
‘돈나무 농장’을 만들려면 좀 더 신중하게 계획을 짜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총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15만 평이요.”
“괜찮네요. 건축물 허가는 다 받은 부지인 거죠?”
“네. 원래 대기업이 공장을 지으려고 구매했던 땅인데 좀 더 싼 땅이 나와서 매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용지 변경도 다 되어있고 허가도 다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내 목적에 딱 맞은 땅이 나왔다. 게다가 공장을 지으려고 했다는 설명대로 바로 건물을 지을 수 있게 이미 부지가 잘 다져져 있었고. 포장도로까지는 아니었지만, 도로도 깔려있었다.
“제가 사겠습니다. 바로 계약하죠.”
“그러시겠어요? 그럼, 잠시만요.”
바로 결정할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중개인은 이곳저곳하고 통화하고 나서야 땅 주인하고 연결이 닿았다.
“됐습니다. 그럼 사무실로 가실까요? 아, 근데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어떤 공장을 지으시려고···?”
궁극적으로 전 과정 자동화된 돈나무 농장.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까,
“유기농 농장하고 물류센터를 지으려고요.”
“아, 네-.”
---*---
[뭐하니? 오전에 바쁘니?]
[아니, 괜찮은데. 왜?]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알았어. 근데, 어디?]
[차 사러.]
사료 회사 영업직은 전국구 영업이다. 고객들이 전부 지방에 있다 보니 하루에 몇백 킬로씩 달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대리 직함을 달고 나서는 지역이 정해져 쉬운 편이었는데.
평사원 때는 정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했다.
서울에서 전남 장흥까지, 거기서 또 강원도 횡성까지 뛴 적도 있었다.
그래서 돈이 생겼어도 차를 사지 않았다.
딱히 운전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버튼 몇 개 누르면 택시가 집안까지 오는데,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필요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찾으시는 모델이 있으신가요?”
“SUV를 사러 왔는데요.”
“저희가 SUV 모델이 몇 개 있는데, 원하시는 사이즈가 있을까요?”
“가장 큰 거요.”
공장 용지를 계약한 다음 날, 승호와 함께 강남의 벤츠 전시장을 찾았다.
“아,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받을 수 있는 차로 부탁드릴게요.”
세상에 비싸고 좋은 차가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인터넷만 봐도 누구누구가 타는 페라리니, 람보르기니니 하면 사진과 함께 뉴스들이 매일 같이 올라온다.
요새는 롤스로이스도 심심치 않게 보이니, 누구한테는 벤츠쯤이야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벤츠가 제일 좋았다.
신입사원 시절, 한 노신사가 구형 S500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앉아있는 할머니의 문을 열어주러 가는 모습을 본 뒤로부터는 그 삼각별 로고에 푹 빠져버렸다.
모르겠다. 그게 왜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평생 그런 호강 한번 받아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때 이후부터는 언젠가 차를 사게 된다면 벤츠를 사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게 내가 벤츠 매장을 찾은 이유였다.
“저 차량은 뭐죠?”
“저거는 G 클래스이고요. 보통 ‘지바겐’들이라고들 부르시는 모델입니다.”
“저거 좋아 보이네요.”
크고 튼튼해 보이고.
“아, 저희가 가지고 있는 SUV 모델 중에 가장 하이엔드 모델입니다. 마이바흐 모델도 있기는 한데, 그건 좀 스타일이 다르고, 개인적으로는 이 G63 AMG 모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좋네요.”
“네.”
“이거로 할게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네.”
“그럼 이쪽으로···. 아, 근데, 이 모델이 지금 인기가 많은 모델이라서, 오더가 많이 밀려있거든요. 오늘 계약하시면 적어도 두 달은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두 달이요?”
그렇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두 달이라니···.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오늘 밤부터 나무들을 옮기고 싶은데···.
“차가 빨리 필요하신가요?”
“네, 최대한 빨리요.”
“아, 그러시구나···. 잠시만요.”
내 대답에 직원은 잠시 어딘가를 다녀왔다. 느낌은 상사와 이야기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저기 그러시면 전시용 차량은 어떠신가요?”
“전시용 차량이요? 지금 방금 본 차량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그거 말고 주차장에 있는 차입니다. 차에는 전혀 문제없고. 원래는 다른 고객이 주문했던 차량인데, 고객하고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전시용으로 빼둔 차량이거든요. 이번 주에 방금 보신 전시용 차량하고 교체하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원하시면 당장 오늘이라도 가지고 가실 수 있습니다.”
역시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돕는다.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이쪽으로···.”
직원 말처럼 차는 새 차나 다름없었다.
피아노 검정 G63 AMG.
벤츠에서 제공하는 모든 옵션은 다 달려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가격도 2억5천이 훌쩍 넘었다.
카시트가 붉은색 가죽으로 되어있는 것만 빼고는 마음에 들었다.
붉은 시트가 어울리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잘 어울렸다.
다만, 눈에 띄어서 망설였을 뿐.
“이걸로 계약하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G63 검정 모델로 계약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승호야, 너도 한 대 골라.”
“응?”
“골라 봐. 앞으로 필요할 거야.”
“난 괜찮아. 집에 차 있는데 뭐.”
“그건 그거고. 골라. 너도 한 대 사주려고 같이 오자고 한 거야.”
“나 진짜 괜찮은데···.”
“어허, 야, 형 바빠. 빨리 골라. 아, 그러지 말고 너도 나랑 같은 거로 하자. 오늘 오더 들어가면 두 달 걸린다고 했죠?”
“네.”
“그럼 같은 모델로 오더 넣어 주세요. 오늘 둘 다 계약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사장님.”
“형-.”
---*---
그르렁 렁렁렁-
액셀러레이터를 살짝 밟았을 뿐인데, 자동차는 짐승의 소리를 냈다.
전시장 안에서는 살짝 작아 보였는데 도로에 나와보니 생각보다 크다.
붉은색 카시트도 막상 내 차가 되고 나니 마음에 든다.
가죽시트 냄새가 콧속을 자극한다.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난다.
이 맛에 사람들이 명품으로 사는 건가?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대로 부산까지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갈 곳이 있었기에.
키이익- 철컹철컹 철컹철컹-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주차장 오버헤드 철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순간 주위를 둘러본다.
기우였다.
이웃집들 역시 담이 높아 이 정도 소음으로는 관심도 끌지 않을 듯했다.
주차를 마친 뒤 다시 버튼을 누르자, 같은 소리를 내며 철문이 내려왔다.
철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트렁크를 열었다.
검정 비닐로 덮어둔 화분.
조심스럽게 비닐을 거둬내니 노란색 오만 원 권들이 달린 작은 묘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지폣잎 몇 장이 떨어진 것은 제외하고는 건강해 보인다.
상태를 확인한 뒤, 트렁크에서 하나씩 꺼내 미리 준비해둔 수레에 옮기고 그 위로 다시 검정 비닐을 씌웠다.
그리고는 그들의 새 보금자리로 이동했다.
자정 전에 시작한 이사는 아침이 다 돼서야 끝이 났다.
그래도 생각보다 큰 트렁크 용량에 일이 빨리 끝났다. 이틀 밤이 걸릴 줄 알았는데, 무사히 하룻밤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솔직히 간편하게 하려 했다면 탑차를 이용했어야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에 움직이려면 적어도 3t 트럭이 필요한데, 눈에 너무 띄었다. 트럭을 밖에 세워두고 작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용달 트럭에 검정 비닐을 씌워 운반하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리스크가 컸다. 누구 눈에 띌 수 있는 위험은 둘째치고 소중한 나무를 그렇게 움직이는 게 영 께름칙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나무들은 사고 없이 새 보금자리에 안치되었다.
“하나, 둘, 셋, 넷,···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쉰둘, 쉰셋,···일흔다섯, 일흔여섯,···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휴-.”
이제 막 꺾꽂이해서 지폣잎 다섯 장밖에 달리지 않은 어린놈부터 그렇게 가지를 쳐냈는데도 이백 장 넘게 달린 모체까지.
총 99그루의 돈나무.
빠진 거 하나 없이 모두 다 옮겨왔다.
모체를 제외하고 종대로 양 벽에 붙여 나란히 세워보니 제법 근사했다. 이것들이 1.5m 이상 자랐을 때는 정말이지 멋진 광경이 될 것 같다.
뿌듯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따로 세워둔 돈나무 모체로 향했다.
애초에 성북동 집 지하층은 터널처럼 생긴 중앙의 공간과 그 옆으로 붙어있는 별실이 내 개 있었다.
돈나무 모체는 그중 가장 안쪽에 있는 별실에 넣었다.
계약 후 지난번처럼 곧바로 몇 가지 시공을 맡겼는데, 별실들은 환경 조건들을 좀 더 컨트롤할 수 있게 유리문을 달아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돈나무 모체는 그중 가장 큰 방에 넣었다.
“높이 1m 8㎝, 줄기 둘레 13.8cm. 가지 둘레: 0.2 ~ 3.4cm. 가지 수 일백여든하나.”
이사를 위해 가지를 많이 쳐냈다.
다행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혹시라도 가지를 쳐낸 부위가 썩거나 병에 걸렸을까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휴-.”
돈나무 모체의 육성 일지 작성을 마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이 ‘나무’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솔직히 나무가 얼마나 더 클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아무리 큰 화분을 쓴다고 해도 이보다 더 높은 천장을 가진 지하공간을 확보하기란 어려웠다.
물론 앞으로 지을 공장에 옮길 수는 있겠다. 그러나,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공장에는 꺾꽂이한 묘목들을 옮겨가면 된다.
이렇게 큰 나무를 위험하게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이제 여기가 진짜 네 집이다, 트리.”
그냥 말해주고 싶었다.
녀석을 위한 말이기도 했고, 나를 위한 말이기도 했다.
오전 9시.
근 12시간 가까이 잠도 자지 못하고 움직였더니 눈이 절로 감겼다.
아직 할 일이 많았지만, 대충 정리하고 위로 올라갔다.
나무만 옮겨왔지, 가구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집안은 휑했다.
안방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벽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징징- 징징-
바닥에 놔둔 전화기가 진동했다.
「김앤강 윤새록 변호사」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냥 무시하고 자려는데,
까톡, 까톡.
문자가 들어온다.
피식-
‘그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지.’
돈이 많으면 편할 줄 알았는데,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진 기분이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문자 봤어요. 재단 설립 관련해서 사인할 서류들이 있다고요? 네, 그럼 한 시간 뒤에 사무실에서 뵐게요.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인생이 즐겁다.
붉은색 시트 위에 올라 새 차에 시동을 건다.
그르렁-
녀석이 파이팅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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