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안녕하세요, 이찬동 변호사님.”
-누구시죠?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한림사료 김성한 직원 폭행 사건 때, 증인진술서를 작성한 이민호 대리라고 합니다.”
-아, 예, 예. 기억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림사료 재직 시절, 영업팀이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은 많이 일어났어도 송사까지 갈 일은 많지 않았다.
딱 한 번 분쟁이 크게 일어난 적이 있었다.
지역 농장주 모임에서 팀 전체가 불려가 술을 대접한 적이 있었는데, 신입사원 한 놈이 성깔 고약하기로 소문난 농장주 갑질을 견디지 못해 주먹질을 해버린 사건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늘 하던 대로, 사실 여부 상관없이 해당 영업원이 농장주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고 좋게(?) 끝났겠지만, 그 사건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신입사원의 집안이 돈이 많았고 백부가 어느 대학 로스쿨의 교수였다.
사건 직후, 해당 사원은 사표를 내고 회사와 농장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농장주 역시 맞고소를 진행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통쾌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중간에서 회사는 엄청 곤란해지고 말았다. 당연히 영업 1팀 전체가 그 사건 수습하느라 몇 개월 동안 개고생을 해야 했다.
“아, 퇴사하셨구나.”
“네.”
그때 만났던 변호사가 이찬동 변호사님이었다.
당시에는 다른 로펌에 있었는데, 작년에 김앤강으로 스카우트되셨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당시 말씀하시는 모습이나 사건을 중재하는 모습이 매우 매끄럽다고 느꼈는데···.
“제가 지금 이대역 근처에 가게를 하나 하고 있는데요. 맞은편 가게에서 이런 걸 보내와서요.”
내 판단이 틀린 건 아닌 듯했다.
“이거는 법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행동인데요. 맞은편 가게 오너가···.”
“상하 F&B입니다.”
김앤강이라니.
오히려 더 잘됐다.
---*---
쾅!
<현동이네>가 김앤강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채영은 분을 이기지 못했다.
“도대체 그 작은 가게가 돈이 어디 있어서 김앤강을 선임한단 말이죠?”
그녀의 고성에 회의실에 있는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렸다.
물론 평범하지는 않다.
누가 봐도 동네 분식점인데, 아무리 단순한 분쟁이라고 하더라도 평균 수임료만 몇천만 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로펌을 변호인으로 선임한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은 아니다.
“혹시 친척이 아닐까요?”
“뭐라고요?”
송재경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개진해보았으나 본부장은 쓸데없는 말만 할 거면 그 입 다물라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어찌 됐건 상대가 김앤강이면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애초에 법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트집을 잡아 시작한 일.
채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소송 가면 질 게 뻔합니다.”
법무팀장 정호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전까지는 창업주 딸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지만, 만약 진짜 법정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면, 질 것이 뻔했고, 그러면 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그였다.
욕을 먹더라도 여기서 끊는 게 현명했다.
빠득.
다시 한번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송 실장님.”
“네, 본부장님.”
“그 남자 연락처 있죠?”
“그 남자라면···아! 현동···아니, 그 가게 사장이요? 네, 있습니다.”
“연락하세요. 만나자고.”
“아, 알겠습니다. 당장 연락해보겠습니다.”
---*---
그 여자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반지하에 있었다.
‘조금만 더 커도 이동하기가 힘들어질 것 같은데···.’
객체: 돈나무 모체
가지 수: 358
높이: 167 cm (뿌리 제외)
줄기 둘레: 13.8 cm
가지 둘레: 0.2 ~ 3.4 cm
사실 이미 혼자 움직이기에는 쉽지 않은 크기였다.
흙이 가득 담긴 화분 무게만 해도 10kg 가까이 되니 그 체로 들 수는 있다고는 해도 집 밖으로 내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지를 좀 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가지를 치면 가능했다.
특히 위에서 50cm 정도 쳐내고 긴 가지들을 잘라 꺾꽂이를 한다면 모체를 움직일 수도 있었고, 또 다른 분체들이 생기니 일석이조였다.
다만, 그 방법의 문제는 추가 분체들을 놓을 만한 공간이 더 이상 그 지하방에는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자랄 줄이야.’
이사 온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집이 좁아져 버렸다.
나무의 성장력을 본의 아니게 과소평가했다.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했다.
1층 바닥을 뚫는 방법에서부터 마당에 창고를 짓는 방법.
지하 바닥을 더 파는 방법.
일반 나무였다면 벌써 진행했겠지만, 돈나무는 햇빛을 봐서도 남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됐다.
‘새집이 필요하다!’
결국 결론은 그거였다.
그리고 다음에 가는 장소는 넓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익스펜션이 ‘무한’으로 가능한 곳이어야 하고 업그레이드도 쉬운 곳이어야 했다.
크고 있는 건 돈나무 모체 한그루만이 아니었기에.
첫 꺾꽂이를 통해 만든 객체들의 키가 (뿌리 제외) 이미 50cm를 넘어섰고, 두 번째 배치(batch: 동시에 생산된 객체들)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징징- 징징-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성하 F&B에 송재경 실장입니다. 전에 한번 찾아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네, 그럼요.”
-혹시 시간이 되시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저희 본부장님이 사장님께 할 말씀이 있으셔서요.
흥.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가 좋으실까요? 저는 오늘도 괜찮은데.”
이제 이 의미 없는 분쟁을 끝낼 때다.
---*---
송재성의 전화를 받고 한 시간쯤 뒤 상하 F&B 사옥을 찾았다.
멋진 건물이었다.
지상 15층의 상대적으로 아담한 건물이었지만, 임대 사무실로 지어진 것이 아닌 상하 F&B가 전체를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입구부터 세련된 느낌이 전해졌다.
“우리 회사에 와 본 적이 있나요?”
처음 와본 것은 아니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 수입육 납품 영업 목적으로 건물 5층에 있는 구매팀을 찾았던 적이 있다. (한림사료의 주 사업은 수입 사료 판매이지만 부 사업으로 수입육 무역, 가공, 도매도 한다.)
<불떡>을 런칭한 신사업본부는 11층에 위치했다.
“아니요.”
송재성 실장의 거들먹거리는 말투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부른 이유는 뻔했고, 미주알고주알 내 과거를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은 성하 F&B 본사 건물이고, 이외도 경기도 이천과 파주에 공장도 있고요.”
그것도 안다.
모든 걸 잘하고 싶은 의지로 불타던 신입 시절, 상사를 따라 그냥 찾아온 것일 뿐이었는데, 당시 나름대로 성하 F&B에 대해 조사를 상세히 했었다.
그래서 본부장이 자신을 ‘음’채영이라고 소개했을 때, 단번에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상하 F&B 창업주의 여식이라는 것을. 대한민국에 음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러세요?”
송재성이 왜 이렇게 거만하게 구는지도 안다.
지금 나를 압박하려는 거다.
‘네가 지금 싸우려는 상대가 지금 서울 바닥에 이만한 건물을 소유한 재벌이야. 잘 생각해.’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너무나 뻔했다.
자기가 불러놓고 정작 본부장이라는 여자는 십분 째 나타나지 않는 것만 봐도 의도가 빤히 보였다.
“김앤강 이찬동 변호사하고는 어떻게 알아요? 혹시 친척 관계?”
‘하하하, 그렇게 추측했구나?’ 하긴 영세한 동네 떡볶이집 주인이 김앤강을 선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아니요. 전에 뵌 적이 있어서요.”
“전에?”
말이 짧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부류들을 가끔 만날 기회가 있다. 존댓말을 하는 척하면서 툭툭 던지는 반말.
의도는 하나다. 자기가 사회적으로 윗사람이라는 걸 은연중에 인지시키려는 거다.
지적하면 오히려 ‘미안하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 하면서 오히려 지적한 사람을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부류를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응, 전에.”
같이 반말을 하는 거다.
“!”
그래야 말이 없어진다.
“아···, 그러시군요.”
“네.”
아마도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면서 사람 간을 보고 압박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을 거고,
실패했으니, 이제 곧 본부장이라는 여자를 데리러 갈 것이다.
“왜 이렇게 안 오시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어색하게 나가고 일 분 뒤, 송재성 실장은 음채영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됐네요.”
“그러네요.”
“사실 저희가 이곳에 오시라고 한 이유는···.”
“잠시만요.”
들어보나 마나 뻔했다.
자기가 시작한 분쟁이었음에도 그 책임을 전적으로 내게 지우려고 할 것이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말을 돌려 서로 좋게 합의하자고 나올 것이다.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은 건, 법적으로 자신들의 근거가 약하다는 걸 방증해주는 것이었고, 합의 제안은 아마도 나는 가게에 붙인 사인을 떼고 저쪽은 소송을 그만두는 내용일 것이다.
상생이니 뭐니 하는 단어를 사용할 거고, 내가 화를 풀지 않으면, 식사 쿠폰 같은 걸 줄지도.
그런 이야기나 듣자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나무’를 두고 지금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제가 먼저 말하죠. 합의할 생각 있습니다.”
내 입에서 합의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자, 둘 다 얼굴색이 달라진다.
그러나, 다음 말에 밝아졌던 얼굴색은 곧바로 그전보다 더 어둡게 변한다.
“그쪽에서 시작한 싸움이라 솔직히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우리나라 법률 시스템이 안 좋은 게 비싼 돈을 들여 소송에 이겨도 상대방한테 비용 청구를 다 못한다고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이 무모한 싸움을 계속하시겠다면 저도 계속할 의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오늘 저를 이곳에 급하게 부르신 걸 보면, 합의하고 싶어서 그러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도 고려할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합의 조건이 무엇이죠?”
내 분위기에서 의도를 눈치챈 음채영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인은 뗄게요. 단, 손님들이 그쪽 가게 음식을 배달이나 포장해서 우리 가게에서 먹는 것에 대해 일절 시비 걸지 말아요.”
그녀의 왼쪽 턱이 불끈거리는 게 보였다.
화가 나겠지. 그걸 막으려고 이 사달을 벌였는데, 사인 떼는 거 외에는 얻은 게 없으니.
안타깝게도 내 제안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건 합의라고 하기보다는 사업 제안이에요. 지금 현동이네 2호점 자리 원하죠?”
“···원한다면요?”
“줄게요.”
“?”
“1년 뒤에.”
“···왜죠?”
“대신 이천에 있는 상하 F&B 공장 기술 이전을 부탁드려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 제안에 음채영의 얼굴에는 이제 커다란 물음표가 떠 있다.
“기술 이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상하 F&B 이천 공장은 단순히 제조공장 기능뿐만이 아니라 물류센터 기능도 가지고 있어서 지하공간도 활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상하 F&B 제조 기술을 이전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장 설립에 관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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