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으면 대운이 바뀌리라
“야, 니네집 떡볶이 더 맛있어진 것 같은데?”
“그렇지?”
“응. 뭐지? 뭐 때문에 더 맛있는 거지?”
“떡.”
퇴근 후 현동이네를 찾았다.
보통은 퇴근 후 가면 대부분 음식이 떨어져 라면이나 남은 재료로 만든 김밥이 고작이었는데, 그날은 떡볶이가 조금 남아있었다.
“떡?”
“응. 떡집을 바꿨어.”
“떡만 바꿔도 이렇게 맛이 다르구나.”
“당연하지.”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맛이 확 달라진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다고 뭘 또 맛이 확 달라지기까지 해. 오바는.”
“아닌데. 진짜 확 더 맛있는 거 같은데.”
“브랜드가 아닌 이상 우리 같은 동네 분식점은 양념 가지고 승부하기가 쉽지 않아. 나도 좋다는 거 다 갈아 넣고 곰탕 육수, 닭 육수, 해산물 육수 다 써봤는데, 내가 맛봐도 브랜드 떡볶이 소스들 따라가기 힘들어. 어떻게 따라가? 일단 가격 차이가 두 배가 넘는데. 김밥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그래서 떡 하나만 좋은 걸 써도 맛이 확 좋아지기는 한다고.”
9년 전, 친구 놈이 떡볶이 장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말렸다. 요리를 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가게를 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젠 제법 음식점 사장답네.”
“9년쯤 하니까 이제 좀 뭐가 보여.”
“아쉽겠네.”
“아쉽긴. 어차피 밴쿠버 가서도 이거 할 텐데, 뭐. 그냥 9년 있던 동네 떠나려니까 서운해서 그렇지. 근데,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니네 회사 칼퇴근 안 시켜주잖아?”
사실 돈 이야기를 하러 찾아왔다.
대출 신청은 해놓은 상태지만 혹시라도 반려될 경우를 대비해 현동이에게 돈을 좀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
“나 회사 그만둘 것 같아.”
“왜?”
“그렇게 됐어?”
“어디가 다른 데 가?”
“아니.”
“그럼?”
“알아봐야지.”
“뭐야? 잘린 거야?”
“뭐,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런데 막상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를 보고 있으니, 돈 이야기를 꺼내기 미안해진다.
사실 현동이에게 돈을 빌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준 친구였다.
어쩌면 그래서 찾아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준 친구였기에, 나도 모르게 편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왜? 무슨 실수라도 했어?”
“아니.”
“그런 게 있다. 야, 그러지 말고 나 이 떡볶이 좀 더 주라.”
“뭐야 싱겁게. 야, 없어. 다 준 거야.”
오늘은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녀석에게는 돈을 빌리지 않을 거다.
내가 줬으면 줬지.
“그럼 그 파랑 국물이라도 좀 더 줘. 밥 없냐?”
---*---
“상하이 치킨버거 세트 하나랑···규형 씨, 뭐 먹을 거야?”
“저는···아···뭐 먹지? 뭐 먹지···.”
내가 그만둔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진 모양이었다.
딱히 그래서 조규형이랑 단둘이 먹게 된 건 아니었다.
다 같이 먹으면서 괜히 서로 모르는 척 가식 떨고 싶지 않아 따로 먹겠다고 했는데, 신입이 따라왔다. 전에 샌드위치를 사다 준 것도 있고 해서 내가 산다고 했다.
“잘 먹겠습니다.”
다행히 누가 신입에게 소문을 얘기해주지는 않은 듯했다.
“대리님.”
“?”
“대리님, 혹시 사주 같은 거 봐 보셨어요?”
본 적 있다. 하지만 신입은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다.
“주말에 여자친구랑 건대 놀러 갔다가 사주카페에 가서 봤는데, 좀 신기하더라고요. 저더러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사주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좀 맞는 거 같아요. 제가 학교 때 친구 따라가는 경향이 좀 심했거든요.”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건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아, 그런가? 근데 사주보는 할아버지가 좀 잘 맞히시는 분 같았어요. 여자친구도 잘 맞는 거 같다고, 내년에 또 오자고.”
“궁합 보러 간 거 아니었어?”
“네. 궁합도 보고 나서 오천 원만 더 내면 사주도 봐주신다고 해서 그냥 봤어요. 근데, 저는 사주 보는 거 처음이었거든요. 재미있더라고요. 저더러 목(木)의 기운이 강하대요. 그래서 봄이 좋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리고···.”
한때는 나도 사주나 점 같은 걸 자주 보러 다닌 적이 있다.
삶이 힘들어 도대체 왜 내 인생만 이러는 걸까 해서 유명한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아다녔었다.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다들 하나는 비슷하게들 이야기했다.
「말년 운이 좋아. 젊어서는 고생하는데 말년에는 대성할 거야.」
참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말년 운이 좋으니까 참고 살라는 응원인지, 아니면 지금은 네가 뭘 해도 고생할 거니까 기대하지 말라는 저주인 건지.
게다가 그 말년이 언제라고 물어보면, 누구는 60이라고 그러고, 누구는 70, 누구는 50이라고도 했다. 또 누구는 말년은 사람의 생이 다하기 전 십 년에서 이십 년이라 사이를 말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도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저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내 운명 따위에 관심을 끊었다.
“아, 맞다. 그래서 찾아보니까, 사주 앱도 있더라고요. 대리님, 이거 해보셨어요?”
혼자 신나서 떠들던 신입은 자신의 핸드폰에 다운받은 앱을 보여주고는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저는 어제 해봤는데 건대 ‘동방동자’ 할아버님이 해주신 말씀하고 비슷하더라고요. 확실히 신기가 있으신 거 같았어요. 대리님도 해보지 않으실래요? 무료인데”
일단 사주, 궁합은 신기(神氣)로 보는 게 아니다.
그건 뭐 잘 몰랐으니까 그렇다 쳐도, 커플이 합쳐서 오만 원이 주고 본 사주, 궁합이 무료 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라는데 분노를 하지 않고 안도를 한다고?
성격이 참 좋은 놈이다.
그런데,
“대리님 생신이 1986년 5월 5일이시니까···.”
‘생신? 어, 근데, 얘가 내 생일은 어떻게 알지?’
관심 없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민호 님의 사주는 거대한 사막과도 같은 광활한 대지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해도 꿋꿋이 버티고 물 한 방울 없이도 살아갑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척박한 땅. 하지만, 그 마른 땅 어딘 가에는 세상의 낙원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신입이 무료 앱에 나온 내 사주풀이를 읽어내려갔다.
표현만 시적일 뿐 예전에 들었던 풀이와 비슷한 말이다.
‘사주에 땅의 기운이 많다.’
‘물이 가까이 있으면 좋다.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해라’
‘목이 가까이 있으면 좋다. 산 근처에 집을 사라.’
‘이런 사주가 젊어서는 고생하지만, 인내하고 노력하면 크게 될 수가 있다.’
‘지금 힘드시죠? 그래도 말년에는 좋네요.’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
“비상 연락망에 있던데요. 이름,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 전부다.”
그걸 기억한다고?
“대리님 사주 되게 특이하시네요. 뭔가 되게 특별해 보이는데 그렇다고 좋은 것 같지는 않고. 더 읽어드릴까요?”
너 나 지금 멕이냐?
“됐어.”
“그럼 마지막만 읽어드릴게요. ‘그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으면 대운이 바뀌리라.’”
응? 나무?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런 게 쓰여있다고?”
“네, 여기.”
조규형이 내민 사주 앱 풀이 화면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있었다.
「그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으면 대운이 바뀌리라.」
“그런데요, 대리님. 대운이 뭐예요?”
---*---
“이 대리, 최 부장님이 찾으셨어.”
인사과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나를 불렀다.
“어때? 생각은 좀 해봤어?”
“시간을 주셔야 생각을 하죠.”
인간관계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몇 주 전만 해도 칼자루를 최진태 이사가 잡고 있었는데···.
내 잘못도 아닌 이유로 나를 자르겠다고 하는데도 그때는 제발 아프지 않게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제발 빨리 나가달라고 사정을 내게 하고 있는 꼴이다.
이미 퇴사할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상황이 재밌다.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이러다 본사 감사팀 나와서 불려 다니면 그때는 위로금이고 뭐고 없어.”
“위로금이라고 해봤잖아. 두 달 치 월급인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제 미래가 달린 일인데.”
“퇴사하면 일자리는 내가 알아봐 준다고 했잖아. 알아봐 줄게. 추천서도 써주고.”
거짓말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너무 기대할 말도 아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결정을 미루고 있는 건 아니지만.
사흘 남았다, 대출 심사 결과 나오기까지.
“알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그리고 원래 퇴사하더라도 통보한 시점에서 한 달은 더 다닐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게 규정인 것 같은데. 너무 재촉하지 말아 주세요.”
“재촉하는 이유를 말해줬잖아. 본사에서 감사팀이 나온다고. 빨리 마무리를 해야 조사가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그건 회사 사정이죠.”
똥 씹은 얼굴이 되는 최진태.
내가 언제 상사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사진을 찍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보고 싶은 심정이다.
“알았어. 이 대리 의도가 뭔지 알았어. 사실 그래서 내가 이사님이랑 좀 더 이야기를 했어. 위로금을 더 주는 게 맞지 않냐고. 솔직히 이 대리도 그래서 이렇게 끄는 거 아니야. 위로금이 작아서.”
응?
“위에서는 괜히 선례를 만든다고 반대했는데, 내가 이 대리 억울한 사정도 알고, 힘든 사정도 알고, 그래서 푸시해서 받아냈어.”
뭘?
“당장 퇴사하면, 퇴직금 외에 위로금으로 12,000,000원을 주기로 승인 났어. 이거 어마어마한 거야. 이 대리 6개월 치 월봉이야. 이런 적이 없어. 그러니까···.”
순간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12,000,000원이면, 퇴직금하고 해서 이천만 원이 넘는다.
돈나무에서 한 달에 적어도 6백만 원 정도 떨어지니까, 대출 승인이 나지 않더라도 석 달 뒤 나은이 수술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정말이지 대운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고, 이 상황 자체가 수상한 거는 수상한 거였다.
일단 최진태 부장의 말을 신뢰하기 어렵다.
미팅에 들어오기 전 이미 승인이 난 거면 서두에 말했어야 했다.
내가 뜨뜻미지근하게 나오니까, 그제야 위로금 인상을 꺼낸 것을 보면 간을 본 거였다.
자기가 푸시해서 받아냈다고?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뭐 그거야 직장에서 흔히 있는 생색내기라고 쳐도,
‘이게 뭐지?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나오는 거지?
뭐가 이렇게 급한 거지?
조금 뜸 들였다고 일주일도 채 안 돼서 위로금을 세 배나 올려준다고?’
물론 처음부터 6개월 치를 주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반응을 보고 협상하려고 아주 낮은 금액 먼저 제시한 건지도.
‘그럴까? 고작 대리랑 하나 내보내면서 그런 잔머리를 쓴다고?’
설득력이 없다.
‘그럼 뭐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이 협상의 칼자루는 이제부터 내가 쥐고 있다.
“됐습니다. 요새 구직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6개월 치 월급 가지고는 어림도 없죠. 좀 더 시간을 갖고 알아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최진태 부장의 얼굴이 다시 남기고 싶은 표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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