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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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밤새 나무에 돈이 열리는 진기한 광경을 관찰하느라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지만, 신경만큼은 그 어는 때보다 날카로웠다.
코인을 하는 영업 2팀 고 대리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자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고. 새벽 2시에도 뜨이고 3시에도 뜨이고 4시에도 저절로 뜨인다고. 너무 피곤한데 코인 시세를 보고 나면 몽롱하면서도 정신이 바짝 드는 듯한 묘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고.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 몽롱하면서도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상태. 몸은 회사에 있으나 온 신경은 집에 가 있었다.
“응? 응.”
네잎클로버 할머니를 찾으려 온종일 지하철역들을 쏘다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돈나무에서는 또 한 장의 오만 원권이 자라고 있었다.
그 오만 원 지폣잎은 새벽 다섯 시쯤 다 자라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러는 와중 다른 나뭇가지에서는 또 다른 지폣입 새싹이 자라나고 시작했다.
나무에서 진짜 지폐가 자라는 걸 확인한 순간이자 한 번에 한 장만 자라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돌렸던 행복회로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조카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응?”
반문과 동시에 조규형의 질문 의도를 알아챘으나, 그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중석 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대리, 잠깐 나 좀 보지.”
한림사료는 군대식 문화가 남아있는 회사였다.
그렇다고 얼차려를 시키거나 조인트를 까는 짓까지는 하지 않지만, 상사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 숙이고 경청해야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설사 그게 돌아가신 부모 욕이라 할지라도.
“어제 왜 늦었어?”
“집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일?”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 좀 생겨서요.”
“돈? 왜? 조카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그랬다고 하면 쉽게 넘어갔겠지만, 나은이의 상태를 두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럼 왜?”
사실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집안일이라고 하면 대충 잔소리 몇 마디하고 넘어간다.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어제 내가 사무실에서 온 전화를 씹은 게 꽤 괘씸했나 보다. 아니면 인사과 최 부장에게 시달렸든지.
“개인적인 일이라 더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순간 무슨 깡이 생겨 오 과장에게 그런 식으로 대답한 것일까?
어쩌면 곧 사표 쓸 운명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오늘 새벽 목격한 ‘진기한 광경’에 취해 아직 몽롱해서였는지도···.
“뭐?”
오중석 과장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이민호 대리.”
“네, 과장님.”
“무단으로 결근했으면 상사한테 그 이유 정도는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단결근 아닌데요. 어제 조규형 사원에게 문자 보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 월차 쓰겠다고.”
“그게 매뉴얼대로 한 거야?”
매뉴얼? 우리 회사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사내 규칙을 말하는 거라면, 출근 시각 전까지 사무실에 통보하게 되어 있고 긴급한 경우 사내 비상 연락망의 다음 직원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되어있었다.
영업 1팀 비상 연락망 순서상, 나 다음은 조규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름의 가나다라순으로 연락망 순서가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규상 비상 연락망 다음 직원에게 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뭐? 이 자식이 근데 아침부터···쯧. 야, 나는 우리 아버지 임종도 못 지키고 출장 다녀왔어. 조카 좀 아프다고 네 맘대로 출근을 안 하는 거는 아니지. 월차 그거 회사에서 인정해줘야 쓰는 거야. 직원 맘대로 막 쓰는 거 아니라고.”
“근로기준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요.”
“뭐라고?!”
싸우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잠을 못 잔 것도 이유겠고, 사직을 권고받은 상황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뭣도 모르면서 남의 조카를 걸고 넘어간 것이 제일 짜증이 났다.
강아지처럼 고분고분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조카를 언급하면 노동청에 신고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오 과장.”
“네, 부장님.”
“그만해.”
“네? 아니, 이제 막···.”
“그 정도면 됐어.”
내 표정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걸 눈치채셨는지, 부장님이 개입하셔서 그 장면까지는 연출되지 않았다.
---*---
점심 시각.
“대리님, 식사 안 하세요?”
오전 내내 어제 처리했어야 할 일들을 하고 인사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믹스 커피의 효력도 끝이 나고, 잠이 몰려왔다. 밥보다는 수면이 필요했다.
“응. 따로 할게.”
직원들이 나가고 조용한 사무실, 의자에 기대 단잠을 청했다.
*
나는 지금 어딘가를 걷고 있다.
여기는 어디지?
한 번쯤 와본 곳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멀리 보이는 작은 나무.
가까이 가보고 싶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 분? 십 분? ···다섯 시간? 시간관념이 없다.
어찌 됐건 걷다 보니 나는 이미 나무 앞에 서 있다.
이 나무가 이렇게 컸던가?
손바닥으로 가려질 것 같았던 나무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컸다.
이건 무슨 나무일까?
소나무? 은행나무? 수양버들?
가지만 앙상하니 있으니 전혀 모르겠다.
잎이 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바람으로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를 건드렸다.
그랬더니······.」
*
“대리님.”
이놈 목소리를 일 초 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몇 시야?”
“열두 시 삼십 분이요.”
그게 벌써 삼십 분 전이었다.
“무슨 좋은 꿈 꾸고 계셨어요?”
“응?”
“아니, 주무실 때 입꼬리가 씰룩거리셨던 거 같아서요.”
“내가?”
“네.”
좋은 꿈이었다. 아니, 환상적인 꿈이었다.
“아, 제가 괜히 깨운 건 아닌가요? 저는 이거 드시라고···.”
조규형은 공손히 써브웨이 샌드위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말이 많고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착한 애였다.
사실 눈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신입 때는 누구나 그러니까.
나도 그랬다.
특히나 이 회사는 누가 뭘 가르쳐주지 않아 더 하다. 가장 친절한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고마워. 얼마야?”
“아니에요.”
“여기 우리 회사 식권도 안 받잖아.”
“제 마음입니다. 헤헤.”
이제 막 깊은 낮잠에서 깨어난 거라, 순간 짙은 쌍꺼풀 사이로 주름이 잡혔다. 그 모습에 내가 기분이 나빴다고 생각했는지, 지레 놀란 신입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저는 그냥 고마워서요. 대리님만 제가 물어봐도 뭐든 잘 설명해주시고 그래서······.”
“누가 뭐래?”
“아니, 갑자기 인상을 쓰시니까···.”
“잘 먹을게.”
안 그래도 배가 고팠다.
나는 신입이 사다 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다만, 조용히 먹을 수 있게 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침에는 과장님이 너무 하셨던 것 같아요.”
거기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픈 조카님 얘기를 꺼내시냐.”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오중석 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세대는 그 세대만의 문화가 있고 경험이 있다. 회사 일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한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 그에게는 그게 한이었다.
그걸 무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똑같은 희생을 강요한다면 다른 이야기다.
피식-
“왜요? 왜 웃으세요, 대리님?”
아까 일을 떠올리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사실 회사를 그만둘 게 아니었다면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했을 것이다.
사표의 힘이라는 이런 것인가?
아니면 나무?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좋다.
“아니야, 아무것도.”
---*---
여섯 시 정각,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등 뒤로 선후배들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오 과장이 날 부르지 않는 걸 보니 부장이 귀띔해준 것 같았다.
제대 앞둔 병장 같은 느낌이 든다.
탁탁탁!
지하철까지 한숨에 달렸다.
혹시라도 어제 만나지 못한 할머니가 있을까 해서 최대한 빨리 석계역으로 이동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도 네잎클로버 할머니는 역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그럴 것도 같았다.
할머니는 내게 돈이 열리는 나무를 주셨다.
그런 게 진짜 존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존재한다면 남에게 줄 이유가 하등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 나무를 내게 주셨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둘 중 하나였다. 할머니가 신 같은 존재이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떠나시기 전 100% 이타적인 마음에 내게 주신 것이든가.
뭐든 상관없다.
지금 내가 가진 질문에 즉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게 그 나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철컥.
캄캄한 ‘3/4’ 지하방을 열고 들어가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이 담긴 봉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파밧- 팟!
형광등을 켰다.
출근 전, 나는 나무를 쓰레기통 옆자리에 그대로 두고 나갔다.
당연히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세팅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일단은 그대로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이라 하듯이 돈나무에는 또 다른 오만 원 권이 자라나고 있었다.
내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종일 먹은 거라고는 써브웨이 샌드위치 하나가 전부인데, 배가 부른 느낌이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것인가?
오 분 정도 그대로 서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서둘러 씻고 돌아와 나무 앞에 앉았다.
‘하나, 둘, 셋, 넷.’
나무에는 이쑤시개같이 가냘픈 가지가 총 네 개 달려있었다.
자라나는 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총 네 개의 가지에서 모두 오만 원 지폐가 자랐고, 맨 처음 오만 원권을 떨어뜨렸던 가지에서는 이제 두 번째 지폣잎이 달려있었다.
‘오만 원이 하루에 네 장···일 20만 원···.’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대충 하루에 한 장 정도 생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한 달이면···.’
600만 원!
지금 받는 월급에 두 배가 넘는 돈.
게다가 세금 낼 필요도 없었다.
당장 필요한 돈이 삼천이고, 2억 빚은 아직 한 푼도 갚지 못한 상황에, 직장까지 잘릴 판국이었지만, 웃음이 났다.
연금복권에 당첨됐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걸 겨우 진정시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달력을 열고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어제 오전에 처음 지폣잎을 발견한 시각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을 기록했다.
날씨와 습도를 찾았고, 조도까지 알아봤다.
기껏해야 기상청 사이트에서 어제 날씨와 습도를 찾아 기록한 것이고 30w 형광등의 평균 조도를 검색해 기록한 것이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꿈에서 봤던 커다란 나무가 떠오른다.
난 이걸 그만큼 크게 키울 생각이다.
그렇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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