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걱정꾸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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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걱정꾸러기
‘여기가 몇 층이냐고요? 몰라요, 알 수 없어요.’
달력은 오늘이 2011년 4월 16일 토요일이라는 걸 표시하고 있지만, 금금별이는 오늘이 며칠인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창밖만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 층 한 층 세어보기 전에는 도무지 모를 높다란 병원 입원실에서, 어디 걱정거리가 없나 하고 걱정거리를 찾아가며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걱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갑자기 무서운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요. 그래서 자꾸자꾸만 걱정을 하고 있답니다.
‘무슨 꽃이 된담? 도대체 어떤 색깔을 칠해야지?’
금별이는 침대머리를 딛고 올랐다가 아예 창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간호사 언니가 보았다간 “야! 누구 신세 망치려고?” 하면서 생난리를 칠 게 안 봐도 비디오지만, 하지만 그 점은 뭐,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간호사 언니가 왔다 간지 30분도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사선생님도 다녀가셨고, 병문안 왔던 3학년 7반 담임선생님과 친구들,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은별이까지도 조금 전에는 모두 돌아갔습니다. 엄마야 뭐 병원 건물 어디에 계시겠지만 말이에요.
‘아이고 정신없어라. 시간 계산은 언제나 골치 아파.’
철쭉꽃 봄빛을 눈에 함빡 들이고 나서 금별이는 눈을 꼭 감습니다.
아가얼굴빛깔과 엄마입술빛깔들이 한데 엎치며 설키더니 함박눈빛깔이 됩니다. 그런저런 여러 가지 빛깔들이 금별이의 눈을 가득 채우더니 넘쳐흐르기도 하고요. 둥둥 떠다니다가 머릿속 여기저기에 내려앉기도 하고, 어지럼증이 온몸을 들쑤시며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빈혈증이라니 참내···’
금별이는 이제 무슨 꽃이 될까 하던 생각이 시들해졌습니다.
사람을 보기로 했습니다. 하늘빛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느릿느릿 분수대 주위를 걸어가고, 어떤 아저씨는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를 뒤로 젖힌 채 하늘만 바라보며 살살 굴러갑니다.
‘별똥별이라도 보시나?’
하지만 별똥별 같은 건 안보입니다. 밤하늘도 아닌데 보일 리가 없지요. 아니, 밤하늘도 밤하늘 나름이지요. 씻은 듯이 맑은 하늘, 구름 한 조각 없는 하늘에만 별이 보인다던가요?
‘흰곰?’
하늘에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떠 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본 그 동물가족 같습니다. 얼음산 위에 모인 흰곰무리 말입니다. 흰곰가족이 얼음산 위에서 눈사람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차츰차츰 친척들이 모여들어 함께 뒹굽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보니 모두들 떠나가는 중입니다. 휠체어아저씨도 이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쯤일까?’
금별이는 휠체어아저씨가 바라보던 하늘을 어림잡아 올려다봅니다.
‘느림보 구름장일까? 아니면 저 해를 바라보는 걸까?’
저 해는 서쪽 산으로 빛살마차를 후후 불어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나, 저 언니 좀 봐. 손을 놓으면 어떡해?’
아니죠. 손을 놓은 건 아닌가 봐요. 휠체어 밀던 손을 재빨리 떼어 아저씨 머리를 받친 거예요. 손은 아저씨 머리를 받치고, 대신에 자기 배만 내밀어 휠체어를 밀고 있는지도 모르죠.
‘괜히 놀랐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요. 너무 놀라운 일을 겪고 나서 병원신세까지 지게 된 금별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깜짝깜짝 놀래는가 하면, 휠체어를 잘 미느니 못 미느니 하는, 도대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아요.
금별이는 옆에 누가 있는 것 마냥 대들 듯이 말합니다.
“걱정도 팔자라고요? 그럼요. 팔자지요. 우리 엄만 툭하면 나한테 그랬거든요. 아이고 욘석! 걱정도 팔자야, 하고요. 근데, 이제 보니 걱정도 병이지 뭐야?”
걱정이 병이란 걸 알았다는 그게 또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걱정도 병이 된단다.”
하지만 금별이는 걱정을 멈출 수가 없어 또 걱정을 합니다.
‘저 오줌싸개나 될까? 아이 싫어. 천 날 만 날 오줌만 싼다니까? 창피스럽게··· 철쭉꽃, 그래, 철쭉꽃이나 될래. 그 편이 훨씬 좋아.’
저 아래서 철쭉꽃들이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네요.
아주 멀리 떨어져서 보니 움직이는 사람들이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실 안으로 눈을 돌리자, 병문안 왔던 친구들이 가져다 놓은 작은 어항 속에서 금붕어가 입을 뻐끔뻐끔합니다. 유리벽, 유리벽에 비친 자기모습에게 뽀뽀를 하는가 봐요. 금별은 금붕어 편에 서서 사람을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 있을 때에는 사람 허리만 보이고, 사람이 어항 속 붕어를 가까이 들여다 볼 때에는 눈만 보이고, 잘 보면 코하고 입까지는 보입니다만, 어떤 땐 입술만 커다랗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붕어 몸통보다 더 큰 사람 입속으로 붕어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아찔합니다. 사람이 외계인 같습니다. 하느님일지도 모릅니다.
“맞아!”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몸이 갑자기 금붕어로 변한 것 같습니다.
“무서워, 사람은 싫어. 너무 커서 싫어!”
그 상상, 철쭉꽃, 사람, 붕어가 뒤범벅된 그림에서 겨우겨우 벗어납니다.
보도블록과 잔디밭 사이 저쪽에도 걸상바위들이 있고, 걸상바위 뒤편엔 낮은 철쭉꽃 대신에 키가 훌쩍 큰 목련나무가 있습니다. 목련꽃들이 아이스크림처럼 나무마다 오뚝오뚝 앉아있습니다. 금별이는 또 걱정을 시작합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과 걱정도 병이 된다는 말 중에, 어느 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걱정에 걱정을 하기 시작한 거죠.
“아이스크림 나무? 아이고 안 돼. 녹아버리면 큰일인 걸?”
녹아내린 목련꽃잎 때문에 나뭇가지가 하얗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봄눈이 내렸다고 치지 뭐.”
그런데, 금별이는 갑자기 햇살에 구름 걷히듯 걱정들이 사라집니다.
“야, 엄마다.”
‘엄마’라는 이름은 암만 불러도 싫증나지 않습니다. 엄마 금보라 씨가 저기 둘이 앉을만한 걸상바위에 막 앉으려고 합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아무리 사람이 싫다고 했지만, 엄마까지 안 볼 생각은 아닌 모양이네요. 그러고 보면 금별이의 병이 심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금보라 씨는 혼자가 아니네요? 금보라 씨 옆에 누가 있네요. 누굴까요? 사실 금별이는 엄마가 둘이 앉는 바위에 걸터앉을 때부터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그래요. 금별이의 담임선생님 진정제 씨네요. 아까 병실에 들렀을 때의 옷차림 그대로여서 알아보기 쉬워요. 연한 비둘기색 스웨터에 드리워진 바다빛깔 넥타이.
“그래 바로 저 색깔이었어.”
선생님은 그래요. 옷을 참 별나게 입으셔요. 그런데, 그 별난 옷이 참 멋있어 보이지 뭐겠어요.
“휴!”
금별이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요, 자꾸자꾸 쓸어내려도 콩닥콩닥 소리는 연달아 들립니다. 어머머, 저거 보세요. 철쭉꽃들이 금보라 씨와 진정제 씨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느라고 저마다 아우성치는 것 같네요. 하하하 웃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진짜로 그래요. 철쭉꽃뿐만 아니라, 바위 옆에서나 바위 뒤에서나, 꽃다지랑 민들레랑 제비꽃들도 납작납작한 웃음파티를 열며 모두들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나, 엄마랑 선생님이 만나시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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